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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묵상글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고배를 마셔야 축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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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배를 마셔야 축배도
제자들 가운데 저만 그리된 것이 아니겠지만 주님,
제가 당신의 첫 제자가 된 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당신 선택이고 당신에게 홀려 당신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진짜 당신에게 홀렸습니다.
이것저것 재어 보고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깨비에게 홀리듯 홀려서 당신을 따라갔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그래서 벌어먹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저에게 와서
느닷없이 “나를 따르라!”라고만 했는데 그냥 따라갔으니 홀린 것이지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제 동생도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그랬으니
저의 문제만이 아니고 당신에게 끄는 힘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따라다닐 때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당신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으며 그것은 영적인 권위였기에
악령들도 그 말씀에 꼼짝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호수도 잠잠해졌기에
당신을 따라나선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와 아우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를 특별히 사랑해주셨지요.
죽은 소녀를 살리는 대단한 기적과 타볼산의 변모를 저희에게만 보여주셨잖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저희는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화낼 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당신께 청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되면 그 왼편과 오른편에 저와 아우가 않게 해달라고.
그때 당신은 저희에게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고 물으셨고,
저희는 호기롭게 그 잔을 마시겠다고 하였고 주님도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당신이 겟세마니에 저희 넷만 또 따로 데리고 가셨을 때
그 뜻이 무엇인지 그때라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셨는데
저희는 그 잔을 같이 마시지 않고 쿨쿨 잠만 자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저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었습니다.
당신마저 마시고 싶지 않았던 그 쓰디쓴 고배를
당신의 대관식 때 마실 축배의 샴페인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축배의 샴페인은 고배를 마신 다음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목마르다!” 하시며 돌아가셨고
축배를 마시려던 우리는 그래서 더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같이 마시자던 잔이 수난의 잔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 잔을 같이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지상 왕국의 첫 자리를 주십사 한 저는 너무 죄송한 나머지
순교의 첫 자리를 주십사 청하였고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고배를 마셔야지만 진정 축배도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야고보가 되어 짧게 써본 회상기인데
이런 회상기를 쓰게 된 것은 어제 경험 때문입니다.
너무 덥기에 일찍 행진을 출발한 저희는 한낮에 진부령을 넘고 있었습니다.
평지를 걸어도 지치고 입이 탈 지경인데 막바지에 고개를 넘으니 그야말로
입이 바짝바짝 타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때 마침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가지고 오신 겁니다.
그때 제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지옥이 있었기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고배를 마셔야지 축배도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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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심리학자 에론슨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유쾌한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퀴즈왕을 뽑는 대회인 척 퀴즈쇼 장면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쇼 장면의 음성 파일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누구를 퀴즈왕으로 선발할지 투표하게 했습니다. 음성 파일에는 네 명의 참가자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참가자는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두 번째 참가자는 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참가자는 첫 번째 참가자처럼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네 번째 참가자는 두 번째 참가자와 같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두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가 똑같은 것 같지만, 여기서 다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에게는 퀴즈 도중 옷에 커피가 쏟아지는 돌발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에론슨은 대학생들에게 네 사람 중에서 가장 호감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예외 없이 모두 세 번째 참가자를 지목했습니다. 즉, 정답을 모두 맞혔지만, 커피를 옷에 쏟은 참가자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실수 효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빈틈없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게 빈틈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빈틈없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나의 모습은 완벽한 자기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힘을 쏟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겸손하라고 강조하신 것은 쓸데없는 힘이 아닌, 중요한 곳에 힘을 쏟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에 온 힘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양옆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올립니다.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도망치고 맙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이런 청을 올렸다고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삶에 있어서 흑역사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복음에 등장시켜서 부끄럽고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세세 대대 알립니다.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만 남겨도 될 것을, 왜 이런 모습을 남겼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빈틈 많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느냐입니다. 과거의 부족한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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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가 사는 환경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바뀔 때 인생도 바뀐다(앤드류 매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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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과 투신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강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선뜻 나섭니다. 그들의 어머니 역시, 대단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망은 다른 이들에게 눈총이 될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망과 투신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화를 내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놓고서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이 된다.’는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섬기지 않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먼저”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끝내는 당신께서 섬기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들을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을 받기보다,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누군가를 희생으로 도와주고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기만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상대방을 받아들여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부러진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곧 섬기면서 섬기는 그분이 되어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섬기게 되면,
곧 나를 섬기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을 섬기는 것이다.”(요한 13,20)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내 곁에 있는 내 형제를 섬김으로써, “주님 섬기기”를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요,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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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신 가난과 평화,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로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 서약을 받으셨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순명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고개 숙여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셨고, 방탄차를 타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자 애쓰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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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걷는 걸 좋아합니다. 어린이 날 선물을 받겠다고, 한강 다리를 건너서 남산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2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매일 걷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길’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는 목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원하는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알려줍니다. 방향이 틀렸으면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목적지를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이제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나온 날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입니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였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데 그 위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 발음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헤롯 아그리파 왕에 의해 44년에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해 스페인으로 향했지만 풍랑 때문에 배가 난파돼 유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814년 펠라지우스 수도자가 갈라시아 지방의 벌판에서 한밤중에 별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그 장소를 콤포스텔라(Compostela)라고 불렀습니다. ‘별이 비추는 들판’이란 뜻 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야고보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하고 있습니다. 길게는 800킬로가 넘은 길을 걷기도 합니다. 짧게는 100킬로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 먼 곳까지 가서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불편한 잠자리를 기꺼이 감수하고, 벌레에게 물리면서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도시에서는 채울 수 없는 위로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으로는 채울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자본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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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구기종목을 특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잘하려면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고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배운 사람과 스스로 터득한 사람은 그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또 하나 배운 것은 선생님에 따라 그 숙련도와 기술의 발전 속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선생님, 더 많은 수상 경력과 경험이 있는 선생님을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을 스승님 혹은 선생님으로 따랐습니다. 어쩌면 저와 같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주님을 스승님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싶어서, 주님과 같은 말씀을 힘을 얻고 싶어서, 주님과 같은 칭송을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누가 더 위에 있는지 혹은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민감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선생님이 아니심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이 가신 길을 그분의 가르침 대로 걸어가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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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이냐, 창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원인을 나에게서 먼저 찾는다고 합니다.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원인을 내가 아닌 밖에서 찾는다고 합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먼저, 내가 조금 더, 내가 더 열심히…. 했다면…. 이라 말하고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은
너 때문이야, 네가 잘못한 거야, 너만 잘했어도…. 라고 합니다.
거울 앞은 발전을, 창문 앞은 정체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저도 잠시 제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거울 앞에 서는지, 혹은 창문 앞에 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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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 좋은 삶의 이정표
“성 야고보 사도”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우리의 순례 여정의 복된 결과를 보여주는 시편 화답송 후렴이 위로와 힘을 줍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하면 떠오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요 이에 대해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산티아고Santiago’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2014년 꼭 다녀온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산티아고 길에 있는 듯 하며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 프랑스 땅인 ‘생잔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최종 목적지인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기까지 800km 2000리에 이르는 길이었고 미사도구와 아이패드가 든 14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33일 동안 매일 평균 20-32km를 걸었고 우직할 정도로 새벽마다 매일 강론을 쓴후 아이패드를 통해 홈페이지에 올리고 도반과 함께 걸었던 순례길이었습니다.
콤포스텔라라는 뜻은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이란 뜻으로 별의 인도로 사도의 유해를 발견했기 때문이란 전설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날마다 새롭게 전개되는 풍경에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처럼 생각되었고, 순례중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때는 미사후 간단한 아침식사후 이마에 헤드랜턴을 하고 새벽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떠남의 기쁨을 능가할 것은 없고 그래서 자주 ‘떠남의 여정’이란 제목의 강론도 나눴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하루요 곧 실증이 나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도착하던 우선 살핀 곳이 미사드릴 장소였습니다.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을 때 감동적인 ‘산티아고 입성’이란 제하의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2014년 9월27일 오전 10:30분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말씀 그대로, 기쁨에 나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단숨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 대 성전, 주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산티아고 입성!’, 마치 승전보를 알리듯 한국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고, 진정성 가득 담긴 축하인사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사도인 베드로, 요한과 달리 왜 최측근 사도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순교후, 왜 그 멀리 땅끝같은 스페인 산티아고 대 성전에 유해가 모셔졌고, 이베리아 반도의 수호성인이 됐는지 궁금할 것이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설같은 일화에 의하면 사도는 생전에 스페인지역에서 선교를 했고 순교후 그쪽 제자들이 사도의 유해를 모셔갔다는 것이며 그 유해를 발견한 자리가 현재의 산티아고 라는 것입니다.
산티아고에 대한 풍부한 자료는 인클레멘스 신부의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라는 책에 있습니다. 산티아고에 관한 기존의 책중 가장 풍부하고 중요한 자료가 포함된 책일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분으로부터 작은 이정표 표지석과 더불어 여러 “Camino de Santiago(성 야고보의 길)”이란 글자와 더불어 무수한 화살표가 표시된 양말을 선물받고 이 또한 섭리로 깨달아 어제부터 오늘 지금까지 신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정표 표지석과 무수한 화살표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참 좋은 삶의 이정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 어찌 성 야고보 사도뿐이겠습니까? 모든 성인들이 삶의 이정표가 되고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삶의 이정표들입니다. 잠시 삶의 여정중 옛 어른이 주신 귀한 가르침도 나눕니다.
“내 앞에 스승이 있었듯이 나 또한 누구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어른은 발자국을 함부로 내지 않는다.”<다산>
“아이들 앞에서는 속이지 않으며, 바른 방향을 향해 서며,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는다.”<예기>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뒤 따라오는 후배들을 배려하여 제대로의 이정표 따라, 반듯하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더불어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 참 좋은 삶의 이정표 따라 제 방향으로 제대로 좋은 도반과 함께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정표를 잃으면 길을 잃습니다. 산티아고 길은 평생 순례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산티아고는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우리 삶의 순례 여정은 죽어야 끝나니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는 도상途上의, 즉 길위의 존재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하의 제 좌우명 시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의 자세로 궁극의 목적지인 아버지의 집을 향해가는 ‘귀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고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일 뿐입니다.
단번에 이뤄지는 섬김이 아니라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할 섬김이기에 섬김을 배워가는 섬김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모든 수행이 주님을 섬기는 방편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랑과 마음으로 날마다 목숨을 걸고 쓰는 제 강론이요 살아 있는 마지막 날까지 그리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강론 후반부 말씀은, 아직은 철부지같은 사도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유언같은 말씀이고, 제 사제서품 상본 성구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마르코 복음 10장 45절’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여기에 근거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을 ‘종들의 종’이라 명명했고 저는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 강조하곤 합니다. 주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두신 보물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 섬김의 사랑이라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에바그리우스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이자 수도영성의 대가인 가브리엘 붕괴가 쓴 개인기도의 수행에 관한 “질그릇” 책을 금요강론 때 나눈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질그릇 같이 허약한 우리 안에 부어지는 주님의 섬김의 열정이, 섬김의 사랑이, 섬김의 힘이 우리를 지칠줄 모르는 용기백배, 종신불퇴, 백절불굴, 불사조不死鳥의 정신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선사되는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사랑이, 섬김의 열정이 우리 모두 순교적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여정되시기 바랍니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이다.”(시편12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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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슬퍼하는 벗들의
슬픔에 함께하는
기쁨을 이룰
슬픔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작은 벗들의
작음에 함께하는
존엄을 이룰
작음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짓밟힌 벗들의
짓밟힘에 함께하는
받듦을 이룰
짓밟힘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쫓겨나는 벗들의
쫓겨남에 함께하는
품음을 이룰
쫓겨남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죽어가는 벗들의
죽어감에 함께하는
살림을 이룰
죽음의 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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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X X X X X X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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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저희는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20,22)
오늘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새삼 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다닌 학교에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치맛바람과는 거리가 아주 먼 분이셨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많았기에 그러셨겠지만, 아버지가 사친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셨기에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저의 고교 졸업식에 저희 수도회 3분의 외국 신부님들이 참석하신 바람에 제 어머니도 졸업식엔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셨죠. 그런데 제가 수도회에 입회하고 난 뒤 저의 수도원은 자주 찾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신부님들께 저를 받아주시고 도와주신 것에 늘 감사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잘 모릅니다. 제 어머니도 마음속으로 기도하시면서, 오늘 복음의 제베대오의 어머니처럼, 예수님께 제가 하느님의 오른쪽과 왼쪽은 아니더라도 수도회에서 아주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이해됩니다. 단지 야고보의 어머니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든 어머니의 바람일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길은 수도자나 사제로 부르심 받아 살아가고 있는 수도원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과 직책에 충실히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고 봅니다. 부모님들의 바람 이전에 우리 자신이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훨씬 중요하고 그런 삶이 다시없는 부모님들께 대한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야고보 사도 어머니의 처신을 보면서 야고보와 요한 사도 형제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익히 알았기에,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순교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바로 당신 자신이 주님께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20,22)하고 다짐한 바를 실제로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의 생애와 순교의 삶을, 사도 바오로께서 언급하신 질그릇 같은 우리 영혼 속에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생각해 봅니다. (2코4,7) 그 보물이란 곧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속에 내주하심으로써 쉽게 깨어질 것 같은 나약함과 섬세하지 않고 투박한 우리 인간성에서도 엄청난 힘이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릇의 일반적인 용도는 어떤 것을 담는 것입니다. 담기 위해선 늘 비워져 있을 때 그 용도에 맞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2 디모테오 2, 20에서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그릇을 쓰실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늘 자기가 원하는 곳에 쓰일 것만을 생각한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 아니 계실 것이고 그땐 우리에게서 어떤 능력도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릇의 용도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가는 나의 선택이나 결정이 아니라 나를 도구로 쓰실 하느님의 계획이자 섭리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그 쓰임에 맞는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야고보는 주님께서 자신을 가장 적절한 곳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있었기에 하늘나라 복음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순교자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그릇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모 있는 그릇처럼 주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님을 또한 깨닫습니다. 시간의 길이나 무게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만큼 주님께서 쓰실 그릇으로 선택할 수 있는, 종이 되고 섬기며 많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깨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섬기시고 종이 되시어 많은 이들을 위해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신” (20,28참조) 주님을 닮지 못한 제 모습을 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한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온전히 주님의 종이 되지 못한 제 모습이, 온전히 주님처럼 섬기지 못하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제 모습이, 온전히 주님처럼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기보다 아직도 제 목숨을 챙기려 하는 제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사도 야고보는 다른 형제들에게 질책당하고 미움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예수님께 “제가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20,22)하고 다짐한 것처럼 순교로써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은 다 야고보 사도의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 앞으로 주어질 시간에 감사하면서 우리 모두 옹기장이이신 주님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고 당신께서 쓰실 요긴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영성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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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순교의 길 걸은 야고보 사도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4 ㅣNo.174473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 사도는, 성급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인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가졌다지만, 베드로 형제와 함께 늘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 가운데 분명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 장모의 급작스러운 치유에도,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의 소생 때에도, 그리고 예수님의 그 거룩한 변모 장면에도 함께했으며,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오랜 시간 그 긴 밤을 새우도록,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늘 초대를 받았다.
그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다. 시몬과 같이 어부출신인 그는 예수님의 사랑받든 제자라고 불린 동생 요한과 같이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사도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더불어 예수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오늘 축일인 그는 열두 제자의 한분이신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 야고보’라 불린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언제나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심하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되어야만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 기꺼이 바치러 왔다.”’
사실 교황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한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며, 종의 모습을 몸소 보이셨다. 가지신 지위를 남을 위해서 쓰라는 본보기이다. 부모로,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각자의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곰곰이 살펴야하겠다. 머릿속에 든 사랑의 지식은 섬김의 삶으로 가슴에 와 닿아야만, 비로소 따뜻한 사랑이 될 수가 있을 게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취할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이런 섬김의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는 무려 칠십 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들려주신 인생 덕목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겸손한 이는 언제 어디서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리라. 그렇다. 내가 섬길 때에 누군가의 섬김을 받으리라. 추기경님께서 교회뿐만 아니라 큰 어른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하신 그 큰일보다 더 큰 ‘겸손함’을 지니셨기에.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꺼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바쳤다. 아그리파 1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10여 년 뒤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에 처했다(사도 12,1-2 참조). 이렇게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음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는, 그가 마실 잔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야고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함께 지고 가셨다. 그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지니지 않고서는 부활을 선포할 수 없었기에.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다. 은연중에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에서 십자가와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순교의 길을 걸은 야고보 사도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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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이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목받고 싶은 마음, 높아지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등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부르심이나 직분을 받게 되면 쉽게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쫓아가다 보면, 우리 안에 하느님을 따르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립니다.
‘하느님 일의 주인’이 되어 버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는 메말라 가고 복음적 판단도 흐려지게 됩니다.
시기, 질투, 상처, 미움, 증오, 분노, 교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야 할 부르심 또한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려는 도구나 권력으로 써 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도직’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질그릇’에 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바오로 사도 자신을 뜻합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보물을 담을 만한 그릇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도직이 바오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볼품없는 그를 통하여 당신 힘을 드러내시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자리는 ‘구유’였고, 마지막 자리는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볼품없고 낮은 모습으로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부르심과 직분이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려면 우리 스스로가 질그릇이 되고, 주님의 거처인 구유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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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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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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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 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 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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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셨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다. 자랑거리를 쫓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가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처음에는 주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셨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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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장하려면 제대로 분노하라!
오늘은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있지만, 오늘의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들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시게 될 잔이 온유함과 겸손의 잔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멸망시켜버리려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취는 바로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항심과 복수심, 곧 분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서진규 씨는 정말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로부터 당연히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심은 결국 자기를 향해야 했습니다.
참다운 복수는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살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에게 - 아마 부모 중 적어도 한 명 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랑받았습니다.
사랑 안에는 ‘기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의 회충이나 모기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태아를 사랑합니다.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나 세상만 탓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타인의 탓을 하며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분노는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데 나는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조차 내고 있지 못하다면 분노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박차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 용기가 바로 분노에서 나옵니다.
분노는 나를 사랑해 준 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솟아나는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입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니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분노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야고보는 이러한 분노로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사도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없을까요? 저는 특별히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제 자신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나의 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께 계속 아픔만 드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저를 발전시켰고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은 『하.사.시.』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 안에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나를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닮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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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0-23)”
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두 사도의 어머니를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는데,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어머니가 등장한 일 자체에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앞의 19장 28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사도들이 열두 옥좌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옥좌를 약속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요청한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입니다.
<기왕이면 높은 자리를 달라는 뜻으로 요청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요청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낮은 자리를 주시라는 요청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그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 즉 화를 낸 것은(24절) 당연한 반응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두 사도가 높은 자리를 욕심낸 것을 꾸짖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일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메시아 왕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도
당신의 왕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옥좌에 앉으려면, 예수님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묵시록을 보면, 열두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열두 주춧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묵시 21,14).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도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한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특별함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것은 그날이 되어봐야 알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섬기는 자리’입니다.>
3)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라고 해서, 또는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무슨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무조건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옥좌에 앉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든지 고위 성직자든지 누구든지 간에
심판과 자격 심사는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자격 심사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았느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말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부터 하여라.”,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4) 25절-28절의 말씀은 ‘낮춤’과 ‘섬김’에 관한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안 된다.”, 또는 “너희는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입니다.
신앙인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표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을 섬기는 사람만 있는 나라,
그래서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형제가 되어서 모두가 모두를 섬기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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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여인이 자기 아들들을 위해 예수님께 일종의 ‘청탁’을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살로메’로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그분 일행을 물적으로 지원하고 복음선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었던 인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을 정도로 그분께 대한 신심이 깊었던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랬기에 자기 아들들이 그분께서 이룩하실 새로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영광을 누리기를 바랬을 겁니다. 그런 순수한 원의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그녀가 기대했던 영광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모습이었다는게 아쉬운 부분이지요. 그런데 살로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제자들도 그런 영광을 누리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통해 그런 청탁을 넣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공생활을 거의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죽음을 맞으셔야 하는 엄숙하고도 진지한 순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핵심 제자라는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더 큰 권력을 누리겠다고 다투기나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하고 마음 아팠을지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실망을 뒤로 하시고 그들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고만고만한 이들이 높고 낮음을 따져가며 ‘도토리 키재기’를 하여 영광을 쟁취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참된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분께서 누리시는 영광과 행복을 함께 누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영광은 그저 누리고 싶다고 욕망한다고 해서 얻어지는게 아니라, 그 영광에 이르기 위한 과정인 고통과 시련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야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성인도 그 때까지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냉큼 ‘할 수 있다’고 대답했지요.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의 손에 붙들려 사도 중에는 처음으로 순교하시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드신 ‘고통의 잔’이 얼마나 쓰고 괴로우며 아픈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저 그분의 능력과 힘을 등에 업고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분과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로써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과 시련 심지어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야고보 성인의 깨달음과 순명이 순교라는 ‘싹’을 틔웠고 그것이 열매를 맺어 오늘날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써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지요. 또한 야고보 성인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선교하기 위해 걸으셨던 길은 수많은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되었습니다. 그런 야고보 성인을 기념하는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드신 고통의 잔을 마실 용기와 의지가 나에게 있는지, 두렵고 떨리지만 용기를 내어 기꺼이 그 잔을 손에 든다면 주님께서 그 잔을 마실 힘을 나에게 주실 겁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잔을 마신 이들에게 주시기로 정하신 영광과 기쁨이 나에게 선물로 주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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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섬기러 왔고”
비올레타의 집에서 향연을 벌이며 알프레도가 부르는 ‘축배의 노래 (Brindisi :
Libiamo ne’lieti calici)가 생각납니다.
이 오페라의 서막에서 남녀의 사랑은 향연의 축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추억이 된 유익종의 ‘축배의 잔을 들자’라는 결혼 축하 노래말이 있습니다.
“한쌍의 원앙이 되어 영원을 맹세하네.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할 두 사람.
아름다운 날들 위해~ 축배의 잔을 들~자.”
여기서 ‘축배의 잔’이라면 서로 기쁨과 상대의 삶, 그리고 사랑을 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하시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잔이라도 ‘수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 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서 못 박게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마태 20,18-19)
제베대오의 어머니도 또 두 아들도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는 더더군나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한 자리에 오르실 것 같아 두 아들을 부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을 맞으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주님의
오른 쪽, 왼쪽의 높은 자리를 청하니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끊기 어려운 것이 재물욕과 성욕이라고 합니다.
많은 현자들이 이 둘의 욕심은 다스릴 수 있으나 자신들도 끊기 어려운 것이 명예욕이라고
했습니다.
명예욕은 출세, 권력, 이름을 드러내는 것 등의 여러 얼굴로 나타나는데,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어렵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 욕심은
자신의 깊숙한 자리에 있어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명예욕은 사람을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끝까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지요.
함께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분들 중에 명예욕으로 자유롭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분들은 어떤 일에서든지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지 못한 분들은 하는 일이나 그 위치를 자로 재듯 따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드러나거나 빛나지 않으면 기피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뿐 아니라 봉사하는 우리에게도 생명과 같은 교훈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고국의 고속 도로 휴게소 입구에 이런 문구가 걸려 있는 글을 볼 때가 봅니다.
‘저희는 손님을 섬깁니다.’
이 말이 복음서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뒷맛은 씁쓰레하기도 합니다.
실상 휴게소에 들어가면 그 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말만 ‘봉사, 봉사’하기는 얼마나 쉽고 또 멋 있습니까? 교회의 봉사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봉사’라는 말이 ‘사랑’만큼이나 흔해빠진 것은 아닐까 반성도 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심스럽지만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절망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7-9)
질그릇 같은 우리는 현실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원하면서도 때로 갈팡질팡 거리를 두고
살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며 사는데 사도 바오로는 다시 이렇게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기며 참다운 봉사자,
겸손한 봉사자의 삶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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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죽기까지 섬김을 실행한 사랑의 사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되풀이해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부활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첫 예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16,21). 두 번째 예고 때는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습니다(17,22-23; 18,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종말에 다시 오시어 다스리실 좌우에 앉혀달라고 청합니다(마르 10,35). 그들은 예수님의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 거룩한 변모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번민의 증인이었고, 그분의 사랑 받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권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으며, 종말에 자리를 배치하는 일은 성부의 전권에 속한다고 대답하십니다(마태 20,22-23). 그분께서는 압제와 폭정을 일삼던 당대의 비정한 정치 현실을 꿰뚫어보시고, 그와는 달리 제자단과 교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낮추어 섬겨야 함을 가르치십니다(20,27).
“모든 제자들을 앞서 보려던 마음이 있었던 요한은 그 후 설교할 때나 기적을 행할 때나 항상 베드로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야고보는 이 일이 있은 후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열성으로 불타올라 세속의 온갖 관심사를 버리고 덕행의 정상에 도달하여 즉시 치명당할 수 있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우리 또한 나약함 가운데서도 사도들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목숨 바쳐 인간을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앞장 서 서로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의 삶에 헌신해야겠습니다(20,28).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 봉사라 해도 그것을 위해 주어진 권한이나 책임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과 무관한 것이 되고 증오나 폭력의 수단으로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내놓고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누면 서로를 살리고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찌기 장 쟈크 루소가 말했듯이 권력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 번 맛을 들이면 중독되어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2코린 4,7).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힘을 서로를 섬기고, 살리고, 일으키는 데 사용해야겠지요.
우리도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고,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기도 합니다(2코린 4,11-12). 그러나 우리 모두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으로 저 낮은 곳에서 주님의 힘을 전달하고 나누는 진정한 섬김을 실행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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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삶
<2024.7.25>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7:11~21절)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삶❞
❚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붙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 타협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진실은 결코 가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11~15절).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자 예레미야는 그의 고향 베냐민 땅으로 가서 분깃을 얻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11~12절).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을 통과할 때 문지기의 우두머리인 이리야에 의해 붙잡히게 되고 예레미야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갈대안에게 항복하려고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13~14절). 예레미야는 평소에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던 바 예루살렘을 떠나려는 그의 행동은 그를 바벨론의 첩자로 오인하게 할 만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으로 사용하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습니다(15절).
일상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진실이 인정되지 못할 때나 왜곡될 때도 있습니다. 또한 무고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죄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결코 가둘 수 없습니다. 어떠한 압력과 핍박으로도 진실은 결코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대하게 세상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힘은 진실을 묻고, 가두려고 하지만 모든 거짓이 드러나고 심판 받게 될 하나님의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가득 채워 보다 담대하게 그 말씀 안에 있는 진실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진실은 결코 가둘 수 없기에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진리는 결코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6~17절).
예레미야는 ‘뚜껑 씌운 웅덩이’ 즉, 지하 감옥에 끌려가 여러 날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16절).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죽음에 가까운 고생을 하며 지냈을 것으로 보입니다(20절). 어느 날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은밀히 불러내어 ‘여호와께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17절)라고 분명하고 당당하게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을 전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절대 권력을 가진 왕 앞에서도 담대했고, 목숨을 내걸고 강력하게 시드기야 왕의 파멸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입은 그 어떤 것이라도 결코 닫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누구 앞에서라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아합 왕 앞에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헤롯 왕의 부정한 행실을 꾸짖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모든 악에 꺾이지 않고 우리 자신이 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죽음의 위협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진리 앞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신앙의 선배들처럼 우리 역시도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여 세상 앞에 담대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는 결코 막을 수 없기에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을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18~21절).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정당하게 변론하면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선처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구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힐 만한 잘못을 행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왕의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의 진정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18~19절). 이는 곧 예레미야 자신의 예언이 참된 것이고 자신을 고소한 자들이 실제로는 거짓된 것을 믿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신이 참된 선지자이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항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다시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감옥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그곳에 다시 가면 자신이 죽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예레미야가 그곳에서 겪었던 고생이 죽음과 같은 지독한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매일 떡 한 개씩을 주어 그를 생존케 하였습니다(21절). 비록 악한 왕의 도움을 받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예레미야를 돕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믿고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온갖 핍박과 회유와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세상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히 11:38)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도록 용기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행하는 자를 당할 자가 누구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입을 닫을 자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연약하고 지식이 없으며 입술이 둔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의 입을 지으신 자시요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결코 멈추게 할 수 없기에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능력을 주시며 만유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복음을 끝까지 붙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7:11~2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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