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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노동관
서 론
개혁신학이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잇는 개혁주의 신학을 말한다. 개혁주의에서 이해한 신학의 주제는 인간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자아실현의 모든 윤리를 반대하며, 내재와 초월을 겸유(兼有)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참조 -개혁주의 신학입문, 송수덕, 기독교영성신학연구원, 2003. P1-2)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신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성경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신을 명상하는 관조적(觀照的)인 삶을 탈피하여, 성경적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성직자(聖職者)와 성직 중심의 삶에서, 모든 신도와 그들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청지기적 삶이라는 것을 설파했다. 성직자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오도(誤導)되었던 비성경적 풍조가 일소(一掃)되고, 신자 스스로가 삶의 현장에서 모든 직업에 대한 천직(天職)의 깊은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벧 2:9), 그것이 개혁신학의 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본 리포트는 개혁신학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루터의 칼빈의 노동관 그리고 칼빈주의적인 노동관이 어떤 것인가를 개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자의 실제의 삶 속에서 노동 혹은 직업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이해했는가를 살펴보고,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를 결론짓기로 한다.
본 론
1. 성경에서 말하는 노동이란?
성경은 노동이란 신성한 하나님의 창조 법칙이요 명령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소위 “문화명령(Culturl Mandate)"을 주셨다. 이것은 아담은 범죄 이전에도 노동의 사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1:28)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 등은 아담이 실제로 일을 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이었으므로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면서 동역하는 것이었다.
(참조 -기독교적 세계관, 양승훈, 도서출판 CUP, 2003. P 194-195)
이러한 증거를 살펴볼 때, 창조의 질서 속에는 노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창조의 계약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안식과 결혼과 노동의 세 가지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노동 규례와 창조 질서의 결속은 안식 원리와 직접 관련하여 나타난다. 의미 있는 안식의 개념은 노동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7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은 분명히 6일간의 노동을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독특한 창조 양식(樣式)에 의해, 그리고 이 양식에서의 창조 축복에 의해 인간의 노동 질서가 확립된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은 안식 규례에서의 노동의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은 노동의 창조규례를 더 강조하고 있다.(창 2:15)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배경으로 그의 삶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갖는 창조의 즐거움이 확인되는 주요 수단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옳은 자세는 노동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일에 달려 있다고 명백히 말하였다.(살후 3:10-12) 그러므로 이제 노동은 옛 계약의 법적인 면이라기보다는, 새 계약의 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필수적인 역할이다.
(참조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85-87)
2. 종교개혁(개혁신학) 이전의 노동관
(참조ㅡ-기독교적 세계관, 양승훈, 도서출판 CUP, 2003. P 192-194)
-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견해를 중심으로 -
1)어거스틴
그는 하늘의 도성(都城)과 지상의 도성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동을 비롯한 주변 세계의 여러 가지 일들, 그 중 노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암울한 로마 제국의 미래를 보면서 세상의 일들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농부, 장인(匠人), 상인 등의 일들을 찬양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노동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의 일시적인 삶의 고행(苦行)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을 단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학교”에 불과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삶을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으로 구분하면서 두 종류의 삶 모두가 선하지만 그래도 관조적인 삶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두고 “한편은 사랑의 대상이며, 다른 한편은 인내의 대상이다”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노동을 짐이라고 보면서 “만일 우리에게 이 짐을 부과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사색하고 깨닫기 위해 여가(餘暇)에 열중해야 한다”고 했다.
2)아퀴나스
아퀴나스 역시 어거스틴처럼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을 구분하면서 전자(前者)는 현재의 육체적 삶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반면 후자(後者)는 영원을 향한 것이라고 보았다. 두 종류의 삶이 각각 고유한 가치를 갖지만 활동적인 삶은 필요에 예속(隸屬)되어 있는 반면 관조적 삶만이 참으로 자유로웠다.
이러한 생각들은 중세 기독교 사상의 골격을 형성했으며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고상한 소명(召命)은 사제(司祭)나 수도사 등 성직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상이 나왔다. 소명이나 천직이라는 개념도 이 직무를 가리키는 것으로만 이해되었다. 이에 대해서 바르트(K. Bart)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중세의 절정기에 보편화되었던 견해에 따르면, 세속적인 일은 단지 모든 개인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소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노동이란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속적 의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관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뒤집어졌다. 기독교 세계관적인 노동관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밝히 드러난 것이다. 성경에서 노동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은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업적이었다.
3. 루터의 노동관
(참조ㅡ-노동과 직업의 윤리성에 관한 연구, 추정완, 2002.)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노동을 “직업”개념의 새로운 풀이를 통해서 신의 “소명(Beruf)”으로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모든 일은 저마다의 일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각자가 맡은 소임이요, 그것이 곧 신의 소명이기 때문에 모든 일, 모든 노동에 귀하고 천한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루터(M. Luter)는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에 의한 봉사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즉 노동은 이웃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웃들을 섬김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명을 이룬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 안에서 특정한 요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으며, 그것을 곧 그리스도의 사역, 자유, 죄 등의 맥락에서 소명론(召命論)을 설명하고 있다. 루터는 놀고먹는 수도원 생활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노동은 이웃 사랑의 표현임을 지적하였다. 루터의 소명관에 대해서 베버는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한 수도원 생활이란 참으로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 이는 이기심의 냉혹한 산물이며 세속적인 의무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거꾸로 세속적인 직업 노동이야말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루터의 소명의 직업관은 구교(舊敎)의 권위와 부패에 대응하는 그의 종교적인 개혁정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 양승훈, 도서출판 CUP, 2003. P 201-202
그 이후 소명의 개념은 독일어의 베루펜자인(Berufensein), 즉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지속적 활동을 지칭한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자들은 소명의 개념을 단지 성직자에게만 국한시킨 데 반해 루터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신분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성직과 결혼 그리고 세속적 귄위”를 포함한다.
루터의 소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직업을 하나의 소명으로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입장이며, 비록 부여된 직업이 악한 것일지라도 그 사회에 서 인정한 이상 그 직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소명론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심을 받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각각 농부나 장인 등 각종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이런 각 사람에 대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그대로 지내라”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루터에게 있어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 즉 성직자는 성직자로, 장인은 장인으로,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서 각각의 직업적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보며, 이러한 선택의 권한은 하나님의 고유영역이라 한다. 또한 직업은 이웃을 위한 봉사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구체적 실현으로 인식한다.
직업윤리에 있어 루터의 큰 공헌이라면,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표명이다. 그의 직업에 대한 소명론에 의해 성(聖)스러움과 세속의 구분이 없어지고, 또한 각 직업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천시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재확인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루터의 소명론의 계급사회, 즉 태어날 때부터 신분과 직업이 정해진 사회에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볼 수 있다.
4. 칼빈의 노동관
(참조 -노동과 직업의 윤리성에 관한 연구, 추정완, 2002.)
루터의 소명론에서 직업과 관련한 노동의 의미가 이웃에 대한 봉사의 측면을 강조하여 세속적인 도덕과 질서의 개념으로 형식화되었다면, 칼빈(J. Calvin)의 사상은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은 신의 손에 있음을 강조한 예정론에 기초한 금욕주의와 소명주의가 결합하여 자본주의적 청교도(淸敎徒) 노동윤리로 발전하였다.
칼빈 이전의 사고(思考)에 있어서 인간의 노동은 저주나 회피의 대상이요, 또한 수도원 생활과 비교 안 되는 저급한 일로 여겼던 것과 달리 칼빈은 인간의 모든 세속적인 직업 활동이 소명에 의한 것이고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웃에 대한 봉사를 줄 수 있다는 신의 경배에 보다 깊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삶의 방식은 다양하게 신이 지정해주고 일상생활에서 궁핍의 감내(堪耐)와 절제 및 검소함 등의 금욕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노동을 신과 인간 모두에게 열광을 돌릴 수 있는 자연의 윤리와 사회질서의 핵심으로 보았으며, 이는 노동과 직업이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특히 인간 욕망의 한계를 시험하는 절제와 금욕적 직업정신(vocatio ethos)을 고취함으로써 노동을 남용하거나 착취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인간은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고, 일의 게으름이나 기피는 실업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보고 사회악으로 규정하였다.
칼빈은 축재(蓄財)와 사치로 타락한 가톨릭 수도사들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을 보고 “잘 장식된 돼지우리에 들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돈으로 자신을 돼지처럼 살찌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뒤엎어 버리는 자들이다”라고 공격하였다.
칼빈 또한 루터와 같이 노동을 이웃 사랑의 표현으로 보았다. “나는 이웃을 위해서 이 재산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은 제네바 시민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려준 칼빈의 모토(motto)였다. 이러한 칼빈의 금욕적 직업윤리의 중요 특성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직업에의 몰아적(沒我的) 헌신을 위하여 절제와 금욕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직업에의 헌신은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각 개인의 위치에서 주어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진실한 정신적 자세와 태도이다. 그리고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좋은 약이다.
5. 칼빈주의적 노동관
(참조 -김지호,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칼빈신학교,)
인본주의적 노동관은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을 위한 출세주의가 노동의 목적이다. 반면에 칼빈주의적 노동관은 어떤 영역에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만큼 하나님의 면전(面前)에서 사는 것이 노동의 윤리이다. 죤 밀턴(J. Milton)은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한 고용주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노동은 사람의 기쁨과 환희가 되었고 사람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열심히 노동하고 난 다음에 주는 안식의 복을 주기 위함이었다. 즉, 안식은 곧 노동을 전제(前提)한 것이며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로서 영광을 돌리지만 노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좀 지나치기는 하지만 “노동을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노동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바빙크(J. H. Bavinck)는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소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얀 메이스터(Jan Meester)목사는 “노동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봉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은 거룩하지만 노동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론적인 생각이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망동(妄動)이었다. 이때부터 인간의 노동의 의미는 변해 버렸다. 하나님 없는 노동은 비록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무관(無關)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적 명령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노동의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이다. 땀을 흘려 노동을 하지만 그 열매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게 되고 그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타락한 탕자(蕩子) 문화를 만들어 낼뿐이다. 노동에는 육체적 노동도 있고 정신적 노동도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간에 불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창 3:17-19).
인간의 범죄로 종신토록 수고해서 그 소산을 먹을 것이고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사회가 인간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사회를 병들게 했고 환경의 오염이 있기 전에 인간의 오염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하면 죄가 노동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았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노동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는 노동이 하나님 없이 내 욕심을 위해서 또는 죽지 못해서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동은 자연히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기쁨으로 일하는 것이 되었다. 같은 일인데도 죄 가운데 살 때의 노동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후의 노동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의 모든 분야에 미치듯이 노동의 의미도 달라진 것이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명이다.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노동관이다. 칼빈은 노동을 기독교적인 삶과 엄격히 관련시켰다. 그는 복음이 노동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앙생활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결 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노동관 혹은 노동의 윤리>
한국 교회에는 신앙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성경도 많이 알고 헌신도 하고 열정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신앙이 좋다는 말이 사회생활은 못한다는 말로 들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신앙 단체에서는 그 단체에 충성하기 위해서 학교 공부를 낙제하는 것이 영웅시 되는 풍조가 있다. 이는 학생이 자신의 직업으로서 노동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교회학교에서 자주 보게 된다.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이 교회에서 철야하고 봉사 열심히 하면서 신앙이 좋다는 칭찬을 받는 모습이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는데 그만두고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고 한다. 그 말에 순종하면 그를 믿음의 영웅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평신도로서 해야 할 귀한 임무가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자신이 속한 신앙단체와 직장 가운데서 충성의 우선순위를 놓고 늘 고민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외국에 나가는 사람에게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여서 보내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그들이 직장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있다. 직장에서는 “봉급은 우리에게서 받고 충성은 자기 교회에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만다.
(참조 -바람직한 교회형태, 옥한흠 편집, 엠마오, 1995. P 123-124)
이런 경향은 바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노동(직업)이라는 개념을 분리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 이전의 성(聖)과 속(俗)을 분리했던 사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신앙생활은 타협하지 말고 타락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순수한 것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생활을 잘 해야 한다. 즉 성경적인 노동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Coram Deo) 사는 것이 노동윤리의 표준이다. 노동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살후 3:10). 노동을 하고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살전 2:12, 엡 4:28). 노동을 통해서 선한 일 곧 다른 사람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노동과 직업에는 귀천이 따로 없다. 그러나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직업이 정당화 될 수 는 없다. 그리고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들은 수평적인 관계로 있으면서 수직적으로는 위에 모두 다 하나님을 두어야 한다. (엡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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