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7
3월15일[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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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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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5QhjgDxFz4
[수원교구 박우성 암브로시오(안성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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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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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jDZfPwj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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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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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 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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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7,1-2.10.25-30: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셨다.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나자렛 사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 그러시면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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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와 증오와 분노는 모두 그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 때문에 유다 지역으로 가시지 못하고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는 정황을 드러내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되자 그분께서는 더 이상 갈릴래아에 머물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드러내 놓고” 가르치십니다. 본문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신” 것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유다인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며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신 것이 알려져 있으니 분명 메시아이실 리가 없고, 그럼에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까 보아 안절부절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고 인정하시면서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곧 당신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것은 맞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권력과 권한이 막강할수록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처리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의 지혜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실지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눈먼 비극’으로 선언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확신이야말로 눈먼 판단이며, 위험한 폭력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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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25-30)
5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은 아마도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최고의회 의원들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는, “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저렇게 공공연하게 활동하는데도 왜 내버려 두는가?”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는 말은, “우리는 저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는데, 혹시 최고의회 의원들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라는 말은, “저 사람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메시아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신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이 말은, “메시아는 하늘에서 직접 오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라는 말은, “저 사람이 나자렛이라는 보잘것없는 시골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요한복음 7장 24절에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나자렛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던 자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자들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인간적인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의 겉모습만 보다가, 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일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려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나자렛 출신 목수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나는 하늘에서 왔다.”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앞의 6장에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38)>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이고,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또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씀인데, 당신의 겉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고향이나 집안이나 직업 등이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그런 걸림돌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 다른 교우들의 모습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또는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고,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실까?”, 또는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실까?” 라는 의심과 불안감일 것입니다. 그런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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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대 유다교 전통에 따라 ‘초막절’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9월에 지냅니다.(탈출 23,16; 레위 23,33-44; 신명 16,13-17 참조) 이때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한 해의 수확에 대하여 감사드릴 뿐만 아니라,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한편 구약 후기 문헌에 따르면, 초막절 축제는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하느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예언적 특징도 담고 있었습니다.(즈카 14,16-19 참조)
오늘 복음은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읽을 때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구약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유다교 지도자였던 최고 의회 의원들이 그분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서 알아뵙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일상에서 때때로 경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복음 정신과 신앙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속에 매몰되어 현세적 가치를 좇을 것인가? 이 갈림길에서 종종 갈팡질팡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참된 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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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점점 커져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소문을 들어 알고 계셨지만 아직 그분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특히 요한 복음은 이런 과정 곧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을 길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요한 복음을 읽다 보면 마치 독자에게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 대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기원을 나타냅니다. 요한 복음에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은 ‘위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안다거나 모른다는 표현은 장소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원과 기원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시 위로, 하늘로, 하느님께 돌아가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독자를 향한 호소이자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지 말입니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조금 더 예수님을 알아 갑니다.
비록 때로는 그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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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냥꾼이 숲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여우를 보았습니다.
여우는 네 다리가 모두 성치 못해 아예 움직일 수 없는 불구였습니다. 그러나 야윈 모습은 커녕 털에 윤기가 흘러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토록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진 사냥꾼은 멀찍이 떨어져서 여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여우의 머리맡에 사냥한 토끼를 던져두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냥꾼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구나!’ 그날부터 사냥꾼은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여우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거늘 자기 역시 그와 같은 보살핌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사냥꾼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빠진 사냥꾼은 자리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너무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숲속의 여우는 돌보시면서 당신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저 같은 자녀는 돌보아주시지 않는다니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숲속에서 여우와 호랑이를 보게 한 것은 나의 섭리를 깨닫고 그 호랑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너는 어째서 여우가 되려 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하는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열심 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규정된 내용들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계명 중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다는 규정에 따라 율법 해석가들은 이것을 39가지 조목으로 세분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규율을 자세히 보면 안식일에는 경작이나 추수, 물건을 나르는 일, 1,250m 이상을 걷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나무를 하고, 불을 피우는 일, 환자를 돌보거나 덫에 걸린 다친 동물들을 꺼내어 치료하는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 기간 중 먹을 음식을 미리 만들어야 했습니다. 장사를 해서도 안 되고 육체 노동도 금지했으며 심지어 불을 지피는 일이나 음식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하느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편협한 생각만을 내세워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껏 지켜온 틀을 모두 부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이전의 그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그분과 가까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젊은 청년이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선포하는 사실은 결국 지금까지 그들이 누려운 안정된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선포를 하시며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도와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고 깨달아 호랑이와 같은 모습으로 지친 여우들을 보살피라는 것인데 그저 자신들은 여우와 같은 입장으로 주저앉아있으니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지혜서의 악인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악인들은 의인을 바라보며 수군댑니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지혜서는 이에 대해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안다고,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틀에 갇혀서 사냥꾼의 모습처럼 내가 필요한 만큼만 그분을 알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불순하고 모자란 우리들의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성당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마음으로 만나려 노력하고, 희생과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받기만 하는 여우가 되길 원하지 않으시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호랑이와 같은 모습이길 바라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분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안에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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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7, 28)
여러분은 어떤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살다 보니 제가 뭘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참으로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더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껏 아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왔다면 앞으로 삶은 모르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난 온 제 삶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에 제 전 존재와 제 삶을 봉헌하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마저도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느껴집니다. 한 번도 갈멜의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면서도 마치 정상에 도달한 사람처럼 저 자신과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살아왔다고 느껴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살고 있는 수도 생활 그리고 수도 생활을 살아오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 온 영성 생활도, 앎과 모름의 양적 차이를 비교하자면 모름에 비해서 저의 앎은 너무도 미미하고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7,28) 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렇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7,28~29) 고 말씀하시니 더욱더 저의 앎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너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이젠 주님 저는 참으로 당신 아버지이며 저의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고 밖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저 자신임을 인정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살아왔으며 또한 무엇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참으로 앎과 모름이 제 머리와 마음에 뒤섞이면서 혼란스러운 오늘 아침입니다. 지금 순간까지,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왔는데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다 보니 정말이지 하느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말하면 말할수록,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모름이 명확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네. 저는 아버지 하느님을 잘 모릅니다’, 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쩜 제가 지금껏 하느님을 안다고 말해왔던 것은 기실 신학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 사랑의 앎 수준에 도달하고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10,14~15) 는 언급에서 드러나듯이 참으로 안다는 것은 사랑할 때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참된 앎은 곧 사랑의 앎이며, 사랑의 앎이란 결국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노인이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열세 살 때 나는 거장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 평생이 걸렸다.” 믿음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 것이 무미건조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소위 철이 들었기에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온 삶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궁구하기를 체념한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무덤덤한가요. 마음 깊이 쌓아 놓은 실망들, 내려놓지 못하고 간직한 실망들이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과 사랑의 앎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피카소가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 평생이 걸렸다고 이야기한 것은 유치한 상태로 퇴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롭게 성숙한 두 번째 천진난만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는 곧 유치한 상태로 퇴보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숙한 상태로 전환된다는 뜻이겠죠. 이는 살면서 온갖 부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해 묻고 구하고 기도하려 하고, 사랑하려고 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겠죠.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의 열린 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배움을 쌓아도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처럼 저 역시도 젊은 날의 불타오른 믿음과 정열적인 사랑만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저는 예전처럼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도 의지적 사랑으로 더욱더 집요하고 끈질기게, 제가 제일 잘해왔고 가장 큰 장점인 충실하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고 싶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다니면서 우등상은 타보지 못했지만, 개근상은 탔었습니다.) 젊은 날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경력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예전 피정 지도하러 갔을 때 청주 경로 수녀회(=지금은 수원)의 벽에 걸린 글귀처럼, ‘나이 들면 세상적인 눈을 침침해지지만, 영적인 눈을 밝아질 것’을 믿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그곳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성경 한 권뿐이었고 그는 수형 생활 동안 여러 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준 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이 현존 체험 이후 무신론자였던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바뀝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은 변화된 그의 문학 세계의 특별한 표출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킨 힘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고통과 사랑의 체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 힘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알고, 사랑으로 하느님을 살아가는 삶에서 솟아 나온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우린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체험하면서 차츰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아빠 하느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날 뵈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요14, 8)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14, 9.11)라고 확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거울이며 판박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빠 하느님을 만나고 아빠 하느님과 사랑의 앎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몰라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앎이 미미할지라도 그것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아시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느님을 알면 좋겠지만 다 알 수 없을뿐더러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이기에 우리의 앎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으로 부족하지 않으리라 보고, 이를 깨우쳐 주시고 저희를 매일 아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과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도록 합시다. 모르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축복임을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저희 또한 당신이 어디서, 누구한테서 오셨는지 알고 있으며, 매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온전히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해서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저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손길과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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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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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제대로 떳떳하게>
요한 7,1-2.10.25-30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떳떳하게>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요한 7,26)
굳건하게
믿는 겁니다
박해의 칼날이
감히 자를 수 없도록
끝까지
희망하는 겁니다
패배의 유혹이
감히 덮을 수 없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겁니다
탐욕의 손길이
감히 닿을 수 없도록
힘차게
나아가는 겁니다
무기력의 벽이
감히 막을 수 없도록
오롯이
함께하는 겁니다
홀로의 단맛이
감히 스밀 수 없도록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침묵의 살길이
감히 노릴 수 없도록
깨끗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감히 더럽힐 수 없도록
아름답게
죽어가는 겁니다
삶의 비루함이
감히 넘볼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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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해박한 지식도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자칫 교만에 빠지고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가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출신성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가야 할 길입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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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자기 인식>
-하느님 탐구, 참나의 탐구-
하루하루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3월 성요셉성월에 3월31일 부활대축일을 앞둔 지금의 사순시기는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참으로 하루하루 선물에 감사하며 힘껏 살아야 할 참 소중한 때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고 성인이 있는 곳 어디나 성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꽃자리 성지입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감동했고 다시 배웠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성서 40주간에 참여하십니다. 연세가 89세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묵주기도와 작은 성무일도를 바치시고, 평화방송에서 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아버지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형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일상의 성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제대가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전사이자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이자 죽을때까지 공부해야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89세 고령에도 성서공부에 열중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평생학인입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노령의 아버지를 둔 형제님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무지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참나로 살기위한 영적전쟁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참나를 알기위한 공부입니다.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전투요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공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자 이런 이들이 의인이요 현인입니다.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악인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제 신원을 새로이 확인할 때 마다 읽어보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중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삼중신원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참 자기인식도 참나의 삼중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의인이요, 주님도 참나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악인입니다. 의인을 시험하는 무지한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는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서서히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의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지혜서의 반복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영원히 지속될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참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인이자 현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의 신원을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 또한 우리의 평생과정입니다.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날마다의 미사전례보다 평생교육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더불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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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짐이 되는가? 힘이 되는가?>
사순시기가 점차 끝을 향해 가기에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왜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우리(악인들이)가 죽이려고 들 때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살리실 거라는 논리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문제는 그 악이 어떤 악인가 그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인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악인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병이나 실패 같은 것들로 우리를 오히려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선 그런 악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어 우리를 진짜 악에서 보호하십니다.
진짜 악.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보호받아야 할 것은 진짜 악들로부터입니다.
진짜 악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시련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주는 시련과 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지혜서를 묵상하면서 제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To us he is the censure of our thoughts; merely to see him is a hardship for us.”)
하느님의 아들이 악인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고 하는데 내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힘이 되는가? 짐이 되는가? 이 점을 묵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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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요한7,30)
<십자가 사랑!>
오늘 복음(요한7,12.10.25-30)은 '예수님의 때(kairos)'에 대한 말씀, 곧 '십자가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을 피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이유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이 기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인 때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공관복음이 전하는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이고, 요한복음 17장이 전하고 있는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세상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림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고 기도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이 나와 너를 살리는 길, 함께 부활하게 하는 길입니다.
사순시기가 참으로 은혜로운 이유는, 구원과 부활의 대전제인 이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이 사랑 안에 깊이 머무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돌아오라고!'
'회개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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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OVS6qOXA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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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
사순시기는
빨리 빨리라는
우리 마음의
성급함을 내려놓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늘 서두르다
주님의 뜻을
놓치게됩니다.
선한 뜻도
때가 필요합니다.
때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삶의 기쁨과 깊이는
기다림과 인내를
동반합니다.
그분의 때안에는
아픔과 희망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기다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때는
인내를 토대로
합니다.
이 사순시기가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림이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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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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