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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A. 예루살렘의 역사적 중요성
성경 지명 중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은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이 언급된 구약 경우만도 750여 회이다. 시가서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동의어로 언급된 시온 역시 180여 차례나 나온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이 등장한다. 다윗성, 모리아산, 유다의 도성, 성전산, 성산, 거룩한 도시, 살렘, 여부스, 아리엘 등이다. 그런 내용을 모두 합치면,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무려 2,000여 회나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의 신앙의 핵심이자 성경을 이끌어 가는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히브리대학교의 탈몬(Shemaryahu Talmon) 교수는 예루살렘의 신학적 의미를 시내산과 결부시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시내산이 이스라엘 구속의 시작이라면 시온산은 그 구속의 정착으로 이해하면서 예루살렘의 역사적 의미와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예루살렘은 주변의 산과 골짜기로 인하여 자연방어가 용이한 도시였다. 그러한 지형적 여건은 안보 면에서는 유리하였지만, 외부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점에서는 단점이기도하였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요도시들-벧엘, 기브온, 세겜, 헤브론, 브엘세바 등-처럼 종교적 혹은 정치적 중심지는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역사무대로의 등장은 비교적 늦은 시기였다. 다윗에 의하여 점령당하기까지 이곳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에 크게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다. 오경에서도 멜기세덱 관련 사건을 제외하면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도 이곳은 다윗성이라 불리면서 다윗의 개인 왕실도시로 얼마동안 유지되었다. 다윗은 이곳에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신하들과 용병들을 주둔시켰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뒤늦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 끼친 영향은 너무도 크고 지속적이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심지라는 세속적 차원을 넘어 서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불멸의 도시가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물론이고 나라를 잃어버린 채 전 세계로 흩어져 지낼 때에도 여전하게 지속되었다.
한 도시가 그렇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특별한 경우였다. 한때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였었던 실로가 그에 대한 좋은 예이다. 실로에서 중요했던 것은 여호와의 임재를 의미하는 언약궤였지 그 지역 자체가 아니었다.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에벤에셀 전투에서의 패배로 실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후 실로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더 이상 주목받질 못했다. 그에 비하여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로마에 의하여 두 차례나 파괴되는 민족적 비극을 겪었다. 도시와 성전이 불에 타 소실되었고, 대다수의 상류층은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을 지켜주는 중심지로 3000여년 이상을 이어왔다.
그런 예루살렘의 독특성은 다윗의 역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켰을 뿐 아니라 그곳을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를 빼놓고는 예루살렘의 역사와 의미를 논의할 수 없다. 특히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삼하 5장)과 기럇여아림에 보관되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일(삼하 6장), 그리고 그의 성전건축 제안이 거절되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다윗언약(삼하 7장) 등은 예루살렘신학을 형성하는 원동력이었다.
B.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다윗에 의해서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된 동기는 이스라엘 자파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헤브론에서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 되었을 때, 그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남북으로 크게 나누어진 지파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다윗은 어느 지파에게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이면서도 남북 간의 지리적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이다.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에 관한 성경기록들은 단편적인 측면들만을 보여주는 자료에 불과하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적어도 초기 청동기시대부터 예루살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1년 발간된 파거(Montague Brownslow Parker)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자기들을 비롯하여 사이프러스로부터 수입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주발들이 발굴되었다. 1961-1967년 사이에 예루살렘을 발굴했던 캐년(Kathleen Mary Kenyon)은 2.5m 두께의 성벽과 돌로 건축된 성채 요새를 찾아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 시에도 기혼샘으로부터의 물 공급을 가능케 했던 거대한 지하수로도 발굴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채 요새는 다윗이 빼앗은 시온산성이며(삼하 5:7), 지하수로 역시 다윗의 예루살렘 기습공격 시 활용하였던 '물 긷는 곳'임이 분명하다(삼하 5:8). 주전 2000년대 초기에 건축된 예루살렘의 성채 요새 시온은 그 이후 다윗시대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 역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자료는 '아마르나 서신'이다. 이 서신들은 애급이 가나안 지역을 통치하였던 주전 14세기 가나안의 군주들이 애급 왕 아멘호텝 3세와 4세에게 보낸 외교문서들이다. '아마르나 서신'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은 그 당시 애급 왕이 '아마르나'에서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서신들은 대부분 당시대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아카디아어로 기록되었다.
아마르나 서신 가운데 예루살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 왕이었던 아브두-헤바(Abdu-Heba)가 보낸 여섯 통의 서신이다. 그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가나안 지역에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당시는 가사와 욥바를 중심으로 가나안 지역을 통치하던 애급이 약화되었던 때였고, 그러한 힘의 공백을 틈타 하비루들이 가나안의 군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하비루에게 항복하는 다른 군주들을 불평하면서 애급의 군사적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아브두-헤바는 그가 통치하는 지역을 '예루살렘의 땅'(the land of city Jerusalem)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 가나안 남부 산간지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왕은 주변의 기브온, 게셀 그리고 베들레헴 등지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 있었다. 헤브론 지역 군주였던 슈바르다타(Shuwardata)가 보낸 다른 서신에서는 예루살렘 왕 아브두-헤바가 자신의 통치지역 내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음을 불평하였데, 그러한 사실들은 예루살렘의 힘과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예루살렘의 주도권 아래 있었던 이러한 당시의 상황들은 가나안 정복 과정을 보여주는 여호수아 10장의 이해에도 중요하다. 당시 예루살렘 왕이었던 아도니세덱은 기브온이 여호수아의 군대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근지역의 아모리 네 왕들과 군사동맹체를 구성하였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들과 맞서 싸워 예루살렘 왕 주도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정복당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후대에 유다지파에 의해서였다(삿 1:8). 그러나 유다지파 역시 예루살렘 원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다(삿 1:21). 그런 상황은 다윗 시대에까지 이어졌었다.
예루살렘 주민에 대하여 성경은 아모리와 여부스를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다. 여호수아 10장도 예루살렘과 그 주변 주민들을 아모리족이라고 통칭한다. 그러나 사사기와 그 이후 역사서에서는 그들을 여부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용어상의 혼용은 아모리를 광의적으로 혹은 협의적으로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광의적으로 가나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 모두를 아모리라고 통칭하였지만(창 15:16; 수 24:15; 삿 1:34-35), 협의적으로는 가나안의 산간지역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을 그렇게 지칭하기도 했다(민 13:29; 신 1:7). 예루살렘 주민들을 아모리라고 부른 것은 광의적 의미이고, 여부스라고 지칭한 것은 협의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
분열왕국 시대 (주전 931-586년)
솔로몬왕이 죽자 이스라엘 땅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 (주전 931) 되어 북 왕국은 여로보암이 세겜을 수도로
하였고 남 왕국은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분단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남 유다 왕국은 히스기아왕(B,C717-698)은 앗수르의
산혜립으로부터 침범을 막기 위하여 성벽을 확장 보수하였다 (대하 32:1-23) 그 규모는 솔로몬 시대 보다 거의 3배가 될 정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또한 성 밖에 있는 기혼샘에서부터 성내의 실로암 못까지 땅 밑 암반을 터널로 뚫어 길이 533m의 수로를 만들어 성안에 물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전 586년에 남 유다 왕국ㄱ이 멸망하게 될 때에 도시와 솔로몬 성전이 파괴 되었고 제
1성전시대가 끝났다. (왕하 25:9)
느헤미아 시대 (B,C 537-445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지 50년이 지나자 B,C 538년
페르시야왕 고레스에 의해 칙령이 내려졌다. 그 다음 해에 예루살렘으로 귀환 (B,C537년)할 때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니솔하고 돌아와
주전 515년에 성전을 재건 하였다. 이때를 제2의 성전시대의 시작이라 한다. B,C445년에 느헤미야는 유다총독에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곽 중수에 전력하여 52일 만에 완성하였다.(느 6:15-16) 성벽은 솔로몬 성벽과 흡사하나 그 규모는 훨씬 작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잠시 평온을 찾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하스모니 왕국 시대 (B,C166-63년
B,C 332년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후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어 프토레미 (B,C 323-198)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B,C 168년에 악명 높은 안티오쿠스 4세 (B,C 175-164)에
의해 예루살렘의 전 시가지는 파괴되고 성전은 짓밟혔다. 이에 반항하여 하스모니아 출신 마카비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서 예루살렘성을
다시 회복(B,C 165)하여 서쪽의 시온산과 남쪽의 다윗성 방향으로 성벽을 화장하였다. 하지만 하스모니아 왕가의 내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다시 혼란이 빚어지게 됨에 따라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점령되어 로마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헤롯왕 시대 (B,C 37 - 4년)
에돔 출신 헤롯 (B,C 37-4)이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대인 왕으로
등극하였다. 헤롯대왕 때에 예루살렘 성벽을 북쪽으로 좀 더 확장하였고 기존 성벽 안에 성전을 보수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전역에 많은 요새와
도시를 만들어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헤로디움 요새, 마사다요새, 가이사랴, 사마리아, 여리고 등에 그 유적들이 남아있다. 이때의 성이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성이다.
지도삽입
십자군시대 (A,D 1099-1291)
A,D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은 여러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A,D 1099년 6.15.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또한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던 교회가 파괴되었으므로 그 터 위에
다시금 웅장한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건물의 특징은 규모가 크고 높은 편이나 사용한 돌은 섬세하지 못하였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스테반문 안에
있는 성안네 교회이다.
그러나 A,D 1187년 회교국의 살라딘 장군에게 패배하게 되어 주후 1291년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악고가
무너짐으로써 십자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당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고 성벽 안에
위치한 시온산과 다윗 성터가 다시금 성벽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현대 이스라엘 시대 (A,D 1948~ )
현 예루살렘성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수축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7이며 총연장 길이는 약 4km로서 성벽 상부에 34개의 망대탑과 곳곳에는 현대전에 필요한 총안구와
같은 형태로 방어에 유리하도록 축성되어 있다.
성벽 내부의 면적은 1km로서 구 시가지는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기독교,
모슬렘, 아르메니아, 유대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1. 예루살렘의 위치
예루살렘은 해발790m 분수령에 있으며, 지중해로는 45km이고, 사해로부터는 25km에 있다.
유대파와 베냐민파의 두 경계사이에 있다.
기후는 지중해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춥고, 봄가을에는 더위를 겪는다.
2. 예루살렘을 성경에 불러진 이름을 살펴보면
'시온 성'(삼하5:7), '다윗 성'(삼하5:9, 눅2:11), '하나님의
성'(시8:2), '하나님의 성전'(느11:1, 마4:5), '자유성'(갈4:26)라고 했으며, 계 3:12 예루살렘은 새 이름으로 계 21:2
',신랑 신부를 위하여 단장 한 것 같다'라고 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 번에 걸쳐 세워졌다. 솔로몬 시대(BC, 959m 왕상
6:1-38), 스룹바벨 이 성전 재건시 (BC,516 스6:15-18), 신약에서는 헤롯시대 (BC,20-AD,63)이다. 이스라엘은 성전과
함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
3. 예루살렘의 역사
BC 1000 다윗이 여부스 족속 정벌과 예루살렘 수도로
정함
959 솔로몬 성전 (제 1차 성전)완공
722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함락함
701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남왕국 예루살렘을 포위함
605 느브갓네살 원년, 남왕국 유대가 바벨론에 제 1차 포로 잡혀감,
다니엘과 세 친구 등이 이때 잡혀감.
597 느부갓네살 7년 바벨론에 제2차포로 잡혀감 에스겔과 유대 중산층, 지도자, 군
인, 기능공 등이 잡혀감.
586 느부갓네살 18년 바벨론에 제3차포로로 잡혀감. 남왕국 유다가 완전히 함락됨. 예루살렘성과
솔로몬 성전이 파괴됨.
유대의 비천한 국민만 남겨놓고 모두 끌고
감.
581 느부갓네살 23년. 유대의 남은자들이 바벨론에 제4차포로로 잡혀감(렘52:30)
539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점령함.
538 제1차포로 귀환. 유대 총독 스룹바벨이 인도함.
536 성전 건축 시작과 대적의 방해로 중단됨.
516 스룹바벨 성전 (제2차 성전)완공, 학개와 스가랴가 도움.
167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스룹바벨 성전을
약탈하고 모독함. 헬라 와 정책으로 유대교를 금지함.
BC 164 마카비 통치. 독립국 유대가 되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정화함.
BC 63 로마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 점령
AD 70 로마가 예루살렘 함락 성전이 완전히 파괴됨.
135 하드리안 로마
황제가 유대인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예루살렘을 정비하고 이름을 알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으로 부름.
638
초기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과 전기 움마야드 왕조가 예루살렘을 점령함.
691 움마야드 왕조의 압둘 말리크가 성전산 안의 솔로몬 성전
자리에 바위 돔을 건축함.
1099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
1187 이집트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보아 예루살렘을
함락.
1267 이스람교인 이집트의 암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점령함.
1516 이스람교인 오스만 터키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함.
1538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 11세가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
1917 영국이 예루살렘 점령 하고 신탁통치
1948 현재 이스라엘이 독립함.
예루살렘의 시초, 모리아산 _ 이스라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여러모로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3대 종교 중 두 종교의 성지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기독교와 이슬람교).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국가의 옛 수도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유대인의 종교인 유대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인 예수가 활동했던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제1성지로 생각하고 (지금은 그 지위를 메카가 가져갔지만) 이곳을 향해 경배했었으며, 지금도 이슬람 3대 성지로 추앙하는 곳입니다(현재는 메카-메디나 다음인 제3성지로 이해합니다).
애증의 예루살렘. 시간은 지났지만 그곳은 여러모로 여전하다.
1. 그 분의 시선이 머무는 땅 _ 모리아산
무구한 역사 가운데 예루살렘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성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 두 종교의 공통 경전인 구약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_ 창세기 22:1-18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알 법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이야기입니다. 번제는 외형적으로 불에 태우는 제사이며, 신학적으로 속죄를 의미합니다(더 많은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함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워버리면 인생은 그대로 끝이다보니(?) 제물이 등장하게 되며, 제물은 '그 사람의 죄가 전가된' 동물이 됩니다(번제의 법례는 레위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는 일반적으로 동물이 되었던 제물 대신에 사람을, 그것도 제사 지낼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요구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의 이런 무리한(?) 요구에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순종하고, 제사지로 지목된 모리아 산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1-5)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으나 기독교적 해석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 첫번째이며, 당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알려진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후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어린양 - 예수 - 을 예표했다고 말합니다. 22장 후반부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볼 때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으로 번제했다고 나오는데, 이 숫양이 예수를 상징한다고 하죠.
구약성경에는 이 모리아산 Mt. Moriah이 두번 더 언급됩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지금도 꿈꾸는 최고의 왕 다윗의 시대입니다. 다윗 치세 말년에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에 역병이 도는데 이 역병을 멈추기 위해 다윗이 제단을 세운 곳이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사무엘하 24:18-25, 역대상 21:15-22:1)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이 땅을 살 것을, 그리고 여기에 제단을 세울 것을 요구하십니다. 땅의 주인이었던 아라우나(오르난)는 땅을 다윗에게 그냥 양도하려 하지만 다윗은 값을 치르고 땅을 샀으며, 그 땅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질 것을 이야기합니다(역대상 22:1). 그리고 결국 그 땅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세웁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_ 역대하 3:1
구약성경에 의하면 솔로몬 대에 세워진 첫번째 성전 - 곧 제1성전(솔로몬성전) - 은(B.C. 10세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숫양을 잡았던 곳, 다윗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역병을 그친 곳인 셈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바로 이 '성전'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성전이 유대인의 정신 한 가운데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때부터 모리아산은 성전산 Mt. Temple이라 불리게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근간이 되는 아브라함-요셉-출애굽-가나안정복기-사사시대-왕정시대 동안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최전성기였던 다윗-솔로몬을 지나 약 400년간 북이스라엘-남유다의 남북조시대로 돌입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B.C. 724년 북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앗수르)에게, B.C. 586년 남조 유다가 신바벨로니아(바벨론)에 패망하면서 성전 또한 같이 무너졌습니다. 신바벨로니아의 네부카르네자드 2세(Nebuchadnezzar Ⅱ - 느부갓네살)가 남유다를 공격해서 남유다의 멸망으로 열왕기하, 역대하의 내용이 마무리 되고 있죠.
70년에 걸친 포로기를 거쳐 귀향을 허락받은 유대인들은 귀향 1세대가 가나안땅으로 돌아온 B.C.516년, 같은 자리에 제2성전(스룹바벨성전)으로 불리는 성전을 건축합니다. 제1성전의 영광을 알았던 귀향 1세대의 노인들은 제2성전을 보고 그 비참함에 울었다고도 하는데... 성전의 건축과 유대공동체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책이 '느헤미야'와 '에스라'서입니다.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지식하고 율법에 쩔은 유대인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자신들의 패망을 하나님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이 율법과 계율에 철저한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을 이룰 메시아(구원자)를 기다립니다.
현재 기독교계에 알려진 골고다언덕과 예수의 무덤은 '성묘교회'라는 곳에 있습니다. 이 성묘교회의 위치를 지정한 사람은 동-서로마가 분열되기 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입니다(헬레나는 성묘교회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여러 성지를 많이 지정해놓았습니다). 성묘교회가 있기에 그 곳이 예수가 십자가형 당한 골고다언덕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위에서 언급한 모리아산의 특별함(아브라함 사건이라든지, 오르난의 타작마당 등)이라면 아마도 골고다언덕과 모리아산은 같은 곳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전설과 전승을 따라 사건의 위치들이 다르게 이야기되며, 증거 또한 없기 때문에 속단할 수 없습니다.
2. 로마 시대의 예루살렘
제2성전은 카이사르(Caesar - 영어식으로 시저라고 발음되는)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했던 무렵인 B.C.1세기에 이 지역의 분봉왕 헤롯에 의해 새단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롯과 정치적으로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 종교-정치지도자들 덕택에 약 100여년간 평화를 누립니다. 하지만 다신교 국가인 로마의 문화를 강요하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로마-독립정서가 고조되었고 결국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이 약탈, 파괴되었으며, A.D.73년 마사다에서 항전하던 유대인들이 몰살되면서 세계각처로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유대인들이 소개되면서, 비어버린 땅은 그 외의 소수민족 - 블레셋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에게 넘어갑니다. 물론 일부 유대인들이 살아남았지만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시간동안 로마와 후속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합니다.
3. 이슬람의 예루살렘과 모리아산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초기 이슬람교는 이슬람이 차용한 종교세력 - 유대교와 기독교 - 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경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지정합니다. 초창기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은 제1성지의 지위에 있었죠. 하지만 기존 유대교단과의 입장차, '성천'과 꾸라이쉬 부족과의 전쟁 승리를 통해 아라비아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후부터 완전히 새로운 종교로서 이슬람교 공동체 - 움마 - 를 형성하고, 경배의 방향도 메카로 바꾸게 됩니다(A.D.624년). 하지만 갑작스럽게 경배의 방향을 바꾸거나, 그 중요성을 경감시킬 수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무함마드의 승천' - 미라지 Miraj- 은 A.D.62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미라지의 내용이 담긴 꾸란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lted is He who took His Servant by night from al-Masjid al-Haram to al-Masjid al-Aqsa, whose surroundings We have blessed, to show him of Our signs. Indeed, He is the Hearing, the Seeing."
"하나님의 종을 밤중에 하람사원에서 아크사 사원으로 밤하늘 여행을 시킨 그분께 영광이 있으소서. 그곳은 하나님이 축복을 내린 이웃으로 하나님의 일부 표적들을 보여주고자 함이라. 실로 하나님은 들으시며 지켜보고 계시니라." _ 꾸란 17장(이스라) 1절
아랍어 원문의미대로 해석하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고 합니다.
"알라는 그의 종을 데리고 밤에 성스러운 예배당으로부터 우리들이 정결하게 한 멀리 떨어진 예배당에까지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조짐을 눈으로 경배하도록 하여 주셨도다"
영어 꾸란에 씌여있는 al-Haram은 메카의 하람사원(금지된, 성스러운)을, al-Aqsa는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하며, 구체적인 장소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의미합니다. 전승이 덧붙여지면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예루살렘까지 밤하늘을 날아가 7단계의 천국을 보고 왔다고 말합니다.'멀리 떨어진 마스지드 al-Masjid al-Aqsa'는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638년 이후 사원으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위 돔 옆에 위치한 알 아크사(혹은 알 악사) 사원입니다. 모두 우마위야 왕조 시기에 세워졌으며 바위 돔은 A.D. 691년에, 알 아크사 사원은 A.D. 705년에 세워집니다. 바위 돔이 감싸고 있는 '바위'는 유대교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바위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도약해서 하늘로 올라간 바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십자군전쟁 당시를 제외하고 예루살렘은 계속 이슬람 세계의 지배하에 놓여 지금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약 1400년의 세월 동안 알 아크사 사원의 경우는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거나 파괴되어서 개보수를 거듭했지만, 바위 돔은 큰 손상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물로 남아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영국의 승인하에 예루살렘을 포함한 고토를 회복하면서 항상 분쟁의 시발점이 되어왔지만, 현재까지 약 70년간 모리아산-성전산 만큼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산 주변은 언제나 시끄럽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죽거나 고통스러워합니다. 언제쯤 전쟁과 고통이 그치고 서로가 서로를 웃으며 대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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