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는 요소 중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랑은 신구약 성경에 518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분류를 하면 구약에 234번 신약에 284번 그리고 신약 중에서도 사복음서에 71번 나옵니다. 따라서 이런 분류작업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랑이라는 주제는 성경 66권에 어느 한군데 치우침이 없이 고루고루 분포되어 있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반 사회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어지는 단어이고, 미국의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하루에 세 번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할 정도로 진번하게 사용되어지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에 이런 사랑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제가 설교를 준비해 놓고 읽어보니까 참 좋은 말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은 들어도 마음에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민에 고민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해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사랑은 아무리 적은 행동이라도 실천되어질 때 감동을 준다“
따라서 오늘 제가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의 자세는 듣는 자세보다는 어떻게 나도 저 사랑을 실천해 보지 하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1970년에 두 유명한 대중가요 가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당시 한창 인기 있게 불렀던 김홍철씨의 요들송의 맴바였던 최성욱 씨이고 한 사람은 산까치야를 불러 잠시 인기 가수가 된 최안순씨입니다. 이 둘은 지금 온누리교회의 담임목사로 계시는 하용조 목사님이 개척한 연예인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눈이 맞아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자 남편인 최성욱씨는 목사가 되어야 겠다고 하면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가장이 신학교에 입학을 하자 부인인 최안순씨는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자기 할 수 있는 일이 가수 일이라 밤무대에 가서 노래를 부릅니다. 남편은 낮에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아내를 데리고 이 술질 저 술집 다니면서 아내의 뒷바라지를 합니다. 이런 일은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각자 고민을 하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이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밤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앞날에 대한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기를 몇 달 담임 전도자님이었던 하용조 목사님이 한번은 미국에 갔다 오면서 악보하나를 저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한번 불러 보라고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복음송이었는데 교회에서 부르니까 호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간증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복음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기독교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판을 만들든지 아니면 와서 녹음을 하던지 청취자들이 사랑이라는 곡을 들려달라고 야단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기타하나를 들고 기독교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그런 어설픈 곡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MBC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그 사랑이라는 곡이 인기가요의 순위에서 급상승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6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판매한 판수는 조용필의 1위곡이 만장 정도였는데 그 사랑이라는 곡이 6위이면서 10만장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 최성욱씨는 지금 목사님으로 활동하시는데 치유사역에 대단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곡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을 가사로 한 사랑인데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곡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의 설교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왜 기독교의 그 사랑이라는 주제의 곡이 세상 곡 중에서 6위까지 되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사랑도 우리가 흔히 아는 남녀 간의 이성간에 하는 에로스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톨로게의 사랑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인데 이 아가페의 사랑은 기독교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막연하게나마 이 아가페의 사랑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시간 천국에서 빛나는 요소 중에서 하나인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에리히 프롬이라는 미국의 신 프로이드학파의 정신분석학자이다 사회심리학자는 다음과 같은 그 특성을 다섯 가지로 정의를 내립니다. 첫째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는 책임을 느끼는 것 셋째는 존중히 여기는 것 넷째는 이해하는 것 다섯째는 줌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위에서 사랑의 반대가 되는 미움은 질병을 생산하는 감정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 몸속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고 여기서 생성된 독성이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육 간에 건강에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에 대해 성경에서는 그 정의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의를 우리 예수님께서 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0-31절의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논할 때 가장 기본이 되어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랑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에녹은 365년의 생을 살면서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노아는 100년간 방주를 짓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아브라함은 100 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의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저들의 그 사랑은 죽음을 보지 않고‘ 구원의 방주를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최고의 최선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
2.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한 응답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힘입니다. 인간의 가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나할 것 없이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무참하게 유린하는 생명 경시 풍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인간 존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요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거칠고 어그러진 세태를 바로 잡는 길은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확증하고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로 연결될 때 그것이 가장 건전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바로 이런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한다면 바로 그런 사람의 모습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승화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24절에서 이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면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1)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이웃의 잘못에 대해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이 됩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성경말씀대로 자기 눈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티끌은 잘 보는 그런 잘못된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발견하고 인정하는데 부터 이웃 사랑이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웃에게 인정하는 것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그 다음은 이웃에 대해 용서해야만이 진정한 사랑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비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다음에 우리는 고통당하는 소외자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함께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는 삶입니다. 이것은 힘에 못 이긴 굴종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소욕을 채우기 위한 위선의 몸짓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던 한 사람, 한 사람이기에 기꺼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차에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1) 예뻐진다 2) 즐거움과 행복이 찾아온다. 3) 융통성과 관용이 생긴다 4) 헤아리는 능력이 생긴다. 5) 성숙해 진다. 6) 창의성과 능력이 생긴다. 7) 상호 의존과 합일에로의 욕구가 생긴다. 8)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이 뜨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피듯이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현대 문명이 불행과 위기에 부닥쳐 있다. 현대인은 세계적인 전쟁과 갖가지 혼란의 불안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고대 헬라인들은 자연의 조화 속에서 살았고, 중세 유럽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신적인 질서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살았으며, 근대 유럽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서 생존의 근거와 의의를 찾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안주할 고향을 잃어버리고 자연도, 신앙도, 정신적 가치관도 잃어버린 채 불안과 허무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기 존재를 상실하여 불행하게도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으며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고 있다. 복잡한 기계화와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개성 즉 자기를 잃어버리고 꼭두각시 처럼 살아가는 정신적 위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인생의 참된 기쁨과 보람없이 기계처럼 살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김미옥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김 권사님은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등 예배에는 꼭 참석을 하지만 전도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도 전도 좀 하게 하옵소서. 그래도 명색이 권사인데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직장 동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교회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냐고 ? 일곱 살 난 손자의 병을 고쳐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의 손자는 ‘재생불능빈혈’이라는 병에 걸려서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만약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고 완치될 가능성도 없는데 치료비는 1억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손에 맡기니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후로는 교회에 나가는 날 이외의 요일 월, 화, 목, 토요일 저녁에는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하고 말씀을 읽은 뒤 아이들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 주셔서 이 가족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1주, 2주, 3주, 4주 그리고 1달, 2달, 3달이 지났습니다. 낫는지 안 낫는지 모르겠으나 아이의 얼굴색이 달라진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으려면 확실히 나아야 이 가족이 다 구원받지 않겠습니까 ? 하나님 낫게 하실 겁니까 안 낫게 하실 것입니까 ?’ 그러던 중 금요일 철야 시간에 권사님은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뭔가 시커면 물체가 덮혀 있다가 권사님이 기도를 하니까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이엇습니다. ‘하나님 병이 나은 것을 믿습니다. 병마는 물러갔습니다. !’ 그 다음날 그 직장 동료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았는데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물론이고 그 표적을 통하여 주변의 친구, 친척, 형제들 수십 명을 전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인내를 통해서, 불쌍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람의 최종 종착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