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이론 물리학에서는 인류는 공통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초이전에 존재한 그 무엇이 불가의 공이며 이것이 모든 것을 가능케한 인류의 원천적인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부피제로 질량제로 무게 제로 입니다. 따라서 여기로부터 분화된 모든 것들, 예컨데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과 심지어는 무생물까지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사람들 각자가 이것을 인식하고 체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절했다가 깨어날 때 의식의 첫번째 작용은 "나" 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로 향한 모든 방어기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세월 인류가 발전하면서 외부로 부터 가해지는 위험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감각은 피부로 몰려있습니다. 즉 외부로 향해 있습니다. 소위 '촉각을 곤두세우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나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나마 부모 형제 자매에게는 덜합니다만 근래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고립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결국은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은 타인을 침해하는 일들이 차츰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립시키는 그 고립을 풀기위한 노력을 해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알기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내주므로 자신을 보호할 필요자체가 없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도의 몇몇 성자들 뿐입니다.
다만 지혜의 길을 걸어갔던 수행자들은 그 숫자가 적지는 않습니다. 지혜의 길을 걸은 분들은 주로 묵조선이나 화두선을 하였던 분들입니다.
고립을 풀고 하나된 의식으로 변화하는 것, 체험하는 과정을 경험에 비추어서 적어 봅니다.
우선 좌선의 자세에서 호흡을 통하여 들어오는 호흡의 길을 관합니다. 그러면 의식의 작용이 차츰 멈추게 됩니다. 의식은 인간의 내면으로 차츰 들어와서 충실하게 내면화가 형성됩니다.
한참 그러고 있으면 어느순간에 극심한 죽음의 공포를 맞보게 됩니다. 이것은 외부로 향하는 약간의 의식마저 전부다 내면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외부의 침입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한줌의 의식까지 내면으로 끌어 들어들인 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때 보여지는 환영은 차디찬 동굴에 벌거벗고 앉아있는데 주변에 사자와 같은 맹수와 뱀등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죽어도 좋다" 하고 마지막 의식을 내면화 하면 한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우선 공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라는 의식도 없습니다. 그리고 의식은 작은 촛불처럼 오롯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고립이 없다는 것은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현되면 더 이상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대의 의식은 인류 공통의 의식 즉 불가의 공입니다.
모든 해탈자의 의식은 하나 입니다. 그 의식은 온 우주에 두루편재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자아로 부터 벗어나면 예수그리스도의 의식과 석가모니 붓다의 의식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들이 바로 당신이고 당신이 바로 그들이 되는것입니다.
억겁의 세월도 촌음보다 짧은 것이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은 있은 적도 없으니 그대의 의식은 원래 그들의 의식과 둘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