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으로 널리 확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대외적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19세기 말 이래 다양하게 논의되어 온 입헌주의 사상을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집결한 독립 운동가들은 10개조로 구성된 임시헌법인<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공식 헌법에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사용한 것은 임시헌장이 최초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이후 임시정부 헌법은 194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개정됐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헌법은 근대적인 헌법의 형식을 갖추어갔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의정원, 임시정부와 같은 통치기구, 회계 등 근대 헌법의 핵심 조항들이전부 포함됐고, 헌법의 내용도 더욱 구체화됐다.
이 헌법 체계는 1948년 제헌헌법에 대부분 그대로 이어져 대한민국 헌법의 기반이 됐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우리나라는 잔혹한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36년을 기다리던 자주독립국가의 꿈,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그 날이 온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념을 달리하는 여러 정치세력은 저마다 지향하는 국가체제를 수립하고자 각축을 벌였다.
이들은 국가 수립 구상을 저마다의 헌법안에 담았다
헌법을 제정하고자 제일 먼저 행동을 개시한 사람은 임시정부 출신의 신익희였다.
해방 후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한 신익희는 신생 독립국가의 기초가 될 행정조직 및 법제를 기초할 전문가들을 모았다.
그리고 1945년 12월 17일,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헌법분과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건설을 준비했다.
이들은 1946년 1월 중순부터 여섯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헌법기초요강을 작성했고 1946년 3월 초 ‘한국헌법’을 발표했다.
더불어 좌우익을 막론하고 여러 정치단체에서 연이어 헌법을 제정·발표했다.
우익을 대표하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좌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을 발표했다.
그리고 중도파를 대변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는 1947년 8월 6월에 ‘조선임시약헌’을 최종 의결했다.
한편,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됐다.
같은 해 11월에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의가 채택됐다.
그러나 소련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북한의 거부로 총선거는 남한에서만 실시됐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로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국회를 구성할 대표를 선출한 선거였다.
이들은 앞으로 탄생할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게 될 제헌국회의원들이었다.
미국 국가건설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헌법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한 다음,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국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로서는 헌법을 제정할 국회를 곧바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10 선거는 정부 수립 방법의 차이, 이념 대립 등으로 갈등은 격화됐지만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국회의원 200명 선출에 948명이 입후보하여 약 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총유권자의 92.1%가 선거권을 행사하여 5.10 선거는 전 국민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8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를 개원했다.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임무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국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할 헌법기초위원 30명을 선정했고,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아울러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실무 작업을 도와줄 전문위원 10명을 위촉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 기초는 6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국회에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헌법안, 대한민국 임시헌법, 조선임시약헌은 물론 세계 각국의 헌법 등 여러 헌법안들이 자료로 제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