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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집중토론 원고 (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오후 5시 30분)
1. 시소 / 이미란
놀이터에서 손자 녀석과 시소를 탄다. 시소 놀이에 정신이 팔린 녀석은 볼이 발갛게 얼어있다. 늦가을 찬바람에 잘 익은 사과 빛깔같이 곱다. 녀석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며 마냥 재미있어한다. 몸무게에 맞추어 오르내리는 시소가 마냥 신나기만 하다.
모르는 남녀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결혼 생활도 균형을 맞추어서 조심스럽게 타야 하는 시소 놀이다. 우리 결혼 생활은 강산이 바뀐다는 십 년의 다발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 긴 세월 동안 평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남편과 나는 너무나 다른 성격으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장점은 살리고 부족한 점은 서로 메우고 보태면 멋진 삶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자신감 하나로 멋진 그림을 그리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용감하다기보다는 무지했다고 할까.
우리는 잠버릇부터 아주 다르다. 나는 저녁 9시 뉴스를 못 보고 잔다. 반면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자동으로 일어난다. 한 시간가량 아침 준비한 후 5시쯤부터 아침 운동을 간다. 7시쯤 귀가해서 아침 식사 후 뒷정리를 마치고 9시에 출근한다. 다른 사람들 온종일 할 일을 나는 새벽에 모두 마친다. 전형적인 아침 형이다.
반면 남편은 늦게 귀가해서 어정거리다 늦게 취침한다. 아침에는 온 식구들이 깨우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께서 등장하셔야 겨우 일어나는 전형적인 올빼미 형이다. 이순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침마다 기상전쟁을 치른다. 출근도 당연히 늦다. 기업체 사장이란 핑계를 대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회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지휘 감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시간에 딱딱 맞춰 생활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이의 여유로워 보이는 성격이 거슬린다.
매끼 먹어야 하는 식습관조차도 서로 다르다. 나는 아직 그 흔한 감자탕이니, 돼지국밥, 순대, 보신탕 등을 입에 대보지도 못했다. 육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남편은 고기란 고기는 무엇이든지 좋아한다. 식사 때마다 고기와 생선이 없으면 젓가락이 길을 잃고 공중에서 헤맨다. 심지어 뱀탕조차도 찾는 전형적인 육식가다.
원칙주의자인 내가 남편에게는 아마도 숨이 막히게 답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늦장 부리고 축 늘어진 남편이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많았다. 그러니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보다 어려운 곡절이 훨씬 많았다.
시소 꼭대기에서 떨어질 뻔한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용케도 별일 없이 그냥저냥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긴 여정을 맞추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양보한 덕에 지금까지는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다. 균형을 유지하며 적당한 무게를 싣고 오르내리는 힘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소를 잘 탔다.
사업이 힘들 때는 내가 그를 높이 올려줘 용기를 잃지 않게 했고, 내가 힘들고 우울해하면 슬그머니 그가 밑으로 내려와 나를 올려주는 나름대로 배려의 시소를 탔다.
생소한 남남이 한데 어울려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하진 않을 것이다. 서로 힘을 합쳐 엉킨 실타래를 풀어갈 때 더 행복함을 느꼈다. 어려운 숙제를 풀어 선생님께 칭찬받을 때를 생각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서로 자신에게만 충실해지려고만 한다. 집집이 하나 아니면 둘로 적게 나아서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고 키웠으니 당연한 결과다. 자기 본위의 재미만 추구하는 시소 놀이를 해서, 상대가 올라가든 떨어지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대가 바닥에 떨어지면 반드시 자기도 떨어지기 마련인 것이 시소 타기이다.
막둥이가 장가를 가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성당에서 실시하는 가나강좌를 1박 2일에 걸쳐 듣고 둘이 행복해했다. 며느릿감도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하니 기특하다. 가나강좌란 가톨릭 신자들이 결혼하기 전에 예비부부가 함께 결혼에 임하는 태도를 신앙적으로 지도하는 교육프로그램이다.
신자들은 결혼식을 성당이 아닌 곳에서 올리더라도 신부님 앞에서 혼배미사를 올려야 한다. 한쪽이 비신자일 경우 관면혼배를 올리게 되어 있다. 며느리 될 아이가 신자가 아니어서 관면혼배도 준비했다.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도 맞추었다.
저들 시소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 장래를 생각해보면 괜스레 걱정이 앞선다. 예비 며느리가 무남독녀 외딸이면서 개성이 강한 아이고 아들은 막내로 자라 아집이 세고 융통성이 부족하다. 저 아이들은 적어도 반세기 이상을 시소를 탈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면서 무게중심을 가운데 두고 오르내리는 시소 놀이를 해야 한다.
상대편이 힘들어 축 처져 있을 땐 같이 있는 자기도 힘이 들겠지만 이해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힘껏 올려줄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 한다. 멋모르고 들떠 있을 땐 시소를 적당히 끌어당길 수도 있으면 좋겠다. 30여 년이나 따로 너와 내가 ‘우리’란 시소를 행복하게 탔으면 하고 맘속으로 기도해본다.
2. 공명조 共命鳥
공명조는 한 몸에 생각이 다른 두 머리를 가진 새다. 한쪽 머리는 가루다이고 다른 쪽의 머리는 우파가루다. 가루다는 육식을 좋아하며 성질이 급하다. 우파가루다는 초식을 좋아하고 소심하였다. 당연히 한 몸으로 살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두 개의 다른 머리가 사이가 좋을 때는 장점이 많다. 머리가 하나인 새보다 아이디어도 많을 수 있다. 특히 교대로 망을 볼 수 있으니 한쪽은 안심하고 잠을 푹 잘 수 있다. 그리하여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다고 생생조(生生鳥)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의 생각과 취미대로 해버리면 공멸조(共滅鳥)가 되어버린다.
초식을 좋아하는 우파가루다가 맛있는 음식을 보고 곤히 자는 가루다를 깨우려다가 ‘어차피 배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하며 혼자 맛있는 음식을 몽땅 먹어버렸다. 가루다가 깨어나 보니 좋은 향기가 남아있고 배도 불렸다. 우파가루다가 혼자 몽땅 먹은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냈다. 그 앙심으로 우파가루다가 자고 있을 때 가루다는 독초를 먹어버려 둘 다 죽어갔다.
“미안하다 나누어 먹을걸.”
“미안해, 화가 너무 나서 독초를 먹어버렸어.”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모든 일은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버렸다. 서로 배려하지 못하여 초래한 결과였다. 공명조가 공멸조가 되었다.
우리 부부도 가정이란 한 몸을 이루었지만 서로 다른 점이 많은 머리가 두 개인 공명조였다. 처음 결혼할 때는 다른 점이 좋아 보였다. 내게 없는 점이 가슴을 신선하게 노크하였다. 서로 부족한 점을 보충하면서 살아가면 우리 집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하여 이리저리 부딪히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극복하여야 할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사복입고 외출 물론, 도둑 영화도 한번 못 본 꽁생원이었다. 남편은 몇 번이나 시어머니를 학교에 불러 담임 선생님께 고개를 숙이게 만든 학생이었다. 매사의 원칙주의인 나와 그럭저럭 넘어가려는 동반자와 여행은 서로가 힘든 점이 많았다.
남편은 비릿한 생선이나 기름기 많은 고기를 좋아하고, 국물이 있는 국이나 찌개가 밥상 위에 주 선수로 등장해야 한다. 나는 푸른 풀밭에서 젓가락 하나로 식사를 완주할 정도로 채식 위주로 더구나 숟가락으로 떠먹는 국물을 싫어했다
남편은 세상에 바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느리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식탁까지의 코스를 완주할 동안 내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 날이 부지기수다. 보통 삼사십 분 이상이 걸리는 힘든 이동이다. 모든 음식은 식어버리고 국은 다시 덥혀야 한다.
매사 빠르미즘인 나는 십분 미만에 식사를 끝낸다. 미리미리 완벽하게 빨리해놓아야 마음의 평화가 온다. ‘빨리 일어나세요’ ‘빨리 잡수세요’ 내 입에는 빨리가 항상 달려 있다. 남편은 ‘빨리’라는 소리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서로의 입장을 주장하면 길은 공멸로 끝이 난다.
가슴은 순간순간 숨이 막힐 때가 많지만 머리로 남편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강산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월의 몇 묶음이 쌓여 가니 성격의 각진 모서리는 서로 조금씩 무디어졌다. 또한, 서로 간에 물들고, 양보하고, 이해하여, 남편을 가장의 머리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가슴 깊은 곳에는 불만의 덩어리가 자리 잡아 수시로 쑥쑥 고개를 치켜세우지만, 서로가 많은 노력을 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내가 상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상대의 처지에서 보려는 노력이 우리한테는 필요했다. 육식을 좋아하는 사자와 풀을 좋아하는 소가 서로 상대를 위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극진히 대접했다. 좋은 맘으로 서로 권한 것이 상대에게는 고통이었다. 서로 최선을 다해도 상대의 편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황에서 서로가 최선을 다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세워 주장했다. 상대를 위한 ‘최선’도 중요하지만 ‘공감’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에 된서리가 내린 후에야 알게 되었다.
가정에는 부부의 머리만 있을까 자식들의 머리도 여러 개 달려있다. 아들 두 명이 꼭 우리처럼 서로 다른 공명조다. 큰아이는 식성은 남편을, 성격은 나를 복제해놓은 상태다. 둘째는 식성은 나를, 성격은 자기 아버지 쪽을 닮았다. 서로 다른 두 아이를 다른 잣대로 키워야 하는 어려움 또한,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가 가져다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세대 차가 여러 가지로 충돌을 가져오려고 했다.
굽이굽이를 슬기롭게 잘 넘겼다. 아이들도 동생은 손재주가 뛰어나 형의 기술 숙제를 열심히 도왔다. 반면 형은 공부를 잘해 방위산업체를 지원하여 병역의무를 수행하며 동생 대입준비를 도왔다. 이렇게 서로 부족한 것을 형제간에도 서로 도우며 잘 자라 지금은 각자 가정을 꾸며 자식도 두고 예쁘게들 살고 있다.
한 몸에 주렁주렁 달린 머리들이 각자 자기들의 생각대로만 행동한다면 공명共命은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한 몸 같은 부부, 한 몸 같은 가족은 나아가 한 몸 같은 나라다.
우리나라는 이쪽저쪽으로 갈라져 심하게 다투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두 개의 머리로 갈라져 이렇게 심하게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텔레비전이 보기 싫을 정도로 정치인들은 끝 간 데 없이 다투고 있다. 다른 쪽을 죽이려고 독을 먹으면 상대만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도 공멸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생생조, 공명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공명조가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파’ ‘가파’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3. 빗속의 다듬잇돌 / 이미란
장맛비에 흠뻑 젖은 다듬잇돌이 눈에 들어온다. 시집올 때 친정에서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이다. 몇 번 이사 다니다 보니 밀리고 밀려 매화나무 밑에서 물 조루 받침이 되었다. 항상 붙어 있던 다듬잇방망이는 거실 항아리에 할 일 없이 멍하게 꽂혀 있다. 짝지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장대비를 맞고 있는 저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옛날에는 다듬잇돌 윗면에 상처가 날까 봐 방석을 깔아놓고 보호했다. 다듬잇돌을 베고 자면 입이 삐뚤어지느니, 뛰어넘으면 소박을 맞느니, 혼사가 깨어지느니 한 것은 다듬잇돌이 귀했기 때문이다. 반들반들한 면을 유지하기 위해 다듬질 외엔 아무것도 못 하게 하며 안방 윗목에 다듬잇방망이와 귀하게 모셔 두었다. 그러던 것이 시대에 밀려 날 비를 맞으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신세가 되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찌 신세가 저렇게 되었을까. 어느 사이 무대의 뒷좌석이 편해지는 내 위치와 동류의식(同類意識)을 느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에서 비 맞는 신세로까지는 가지 않도록 해야 될 텐데......
옛사람들은 다듬이 소리를 글 읽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와 더불어 삼희성(三喜聲)이라 하였다. 아무리 늦은 밤에 시끄러운 소리로 두드려도 거슬린다고 시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집안에 이 소리가 그치면 망하는 집안이라고까지 했다.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는 요즘과는 너무나 다른 시절이었다.
깊은 밤에 다듬이 소리 아련히 들리는 풍치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시(詩)에도 등장했다. 당시(唐詩)에도 ‘바람결에 곳곳에서 다듬이 소리가 들리고’ 라고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다듬이질이 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밤의 다듬이 소리는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고샅길을 걸어가며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와 발소리들과 어울려 환상적인 겨울의 협주곡이 되었다.
혼사가 있어 빨랫감이 많을 땐 널따란 대청마루에 품앗이로 이웃의 아낙들까지 모여서 짝을 지어 장단을 맞췄던 소리는 청아(淸雅)하여 듣기가 좋았다. 그날 밤의 여인네들은 공인받은 밤 외출로, 두루 모여서 동네 종합뉴스가 발표되는 날이다. 또한, 쌓인 화를 풀어내는 신나는 난타 공연장이 되었다. 다듬이 소리는 딱딱 따아 딱……. 고저장단에 여인네들의 힘든 시집살이의 고통과 시름을 풀어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주름진 마음을 푸새해서 두들기는 옷감에 묻혀 함께 두드려 폈다.
이렇게 다듬이질은 우리나라 생활 풍습상 운치 있는 멋의 하나이었다. 우리 옛 여인네들의 갖가지 정한(情恨)을 담장 너머로 풀어버리던 가장 한국적인 풍정(風情)과 소리인 다듬이질이 이제 다 사라지고 있다.
어두운 고샅길로 접어들 때 들려오는 엄마의 다듬이 소리는 나에게 빨리 달려오라는 행진곡처럼 기분 좋게 들렸었다. 뛰어 들어가면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오목한 옥식기 밥그릇의 밥으로 밥상을 차려주어 다듬이하는 옆에서 맛있게 먹곤 했다. 식후에도 계속되는 다듬이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르르 잠들곤 했다. 그 다듬이 소리가 시끄러운 소리가 아닌 사랑이 흠뻑 담긴 자장가이었다.
어린 시절에 추운 겨울밤에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호롱불 아래서 다듬이질하는 엄마 모습을 보곤 했다. 다듬이 소리는 하나의 한(恨)의 표현 같았고 엄마의 외침이었다. 많은 사람의 다듬이 소리는 모두 다르다고 했다. 엄마의 소린 항상 힘 있는 고음으로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두드렸다. 그 누구를 패듯이……. 고된 시집살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엄마의 다듬잇돌 위에 있었을까?
뽀숑뽀숑하게 다듬질한 명주 홑청으로 꾸며진 이불을 덮고 따뜻한 온돌방에 누워 있으면 그렇게 개운하고 포근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또한, 무더운 여름밤에는 빠닥하게 풀한 삼베 깔개에 인조 혼 이불을 덮고 있으면 그 청량감은 어떤 에어컨도 만들 수 없는 상쾌한 시원함을 선사해준다.
한동안 아파트에 거주할 때는 다듬이질을 할 수 없어 다듬잇돌을 누름돌로 사용하였다. 봄에는 북풍 혹한에서 포근하게 추위를 지켜주던 명주 이불 홑청을 푸새한 후 사용하여 정리했다. 가을에는 시원한 여름밤을 선사해준 인조 이불 홑청과 삼베 혼 이불 정리에 이용했다. 세탁물들을 푸새한 다음 다듬잇돌로 눌러 놓고 한밤을 자고 나면 매끈하게 눌러져 있었다. 요즘은 남편이 꼭꼭 밟아주어 다듬잇돌 누름을 대신하고 있다. 다듬잇돌로 누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겉모양은 비슷하여 아쉬운 대로 이용하고 있다.
쓸모가 없어져 시대에 밀리고 공간에 밀린 다듬잇돌이 문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 수많은 매질의 고통을 묵묵히 참아 주었건만 저렇게 쫓겨나 온통 날 비를 맞고 있다.
주인한테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아양을 떤 덕분에 대청마루 밑에 벌벌 떨던 강아지 새낀 안방에서 호강하며, 미장원에 가서 모양을 내고 있다. 바깥마당에서 홀로 비에 흠뻑 젖어 있는 저 다듬잇돌은 얼마나 억울할까? 이 세태의 여러 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무겁다.
4. 부넘기 / 이미란
오랫동안 묵혀놓은 아궁이에 매운 연기로 눈물이 범벅되어 불을 지피고 있다. 엄마가 뜨뜻한 아랫목에서 등허리를 자글자글 지지고 싶어 한다. 힘든 시절 온돌방의 따뜻한 아랫목 추억이 그리운 모양이다.
장작을 차곡차곡 쟁이고 부채질을 열심히 해보지만, 바닥에 차 있는 습기 때문에 불길은 일지 않고 매운 연기만 토해낸다. 엄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마중 불을 피워보라고 한다. 굴뚝 주변에 불을 피워 굴뚝을 데웠더니 신기하게도 불이 타올라 부넘기 위로 쑥쑥 빨려 들어간다.
부넘기는 불길 넘기라고도 한다. 이것은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방고래로 골고루 넘어가고, 찌꺼기 들어오는 것을 막게 만든 언덕 모양의 문턱이다.
재래식 아궁이는 재나 찌꺼기가 들어가 고래를 막히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넘기와 구들 개자리와 굴뚝개자리를 만들어 그을음과 찌꺼기를 걸러내어도 3~4년에 한 번은 구들을 뚫어야 했다. 아무것이나 고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화려한 불꽃만이 드나들어 불길이 방고래를 넘어가 방구들을 데워지도록 하는 부넘기가 꼭 필요했다.
부넘기가 높을수록 좁아지는 문턱을 넘어갈 때 불길이 세어져 불꽃은 화려하게 타오르며 강하게 고래를 통과하면서 구들을 잘 덮여준다. 또한, 한번 넘어간 불길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거나 내뱉지 않게 하고, 밖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어 방의 온기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하지만 불길이 부넘기를 넘지 못하면 매운 연기로 거꾸로 나와 눈물 밭을 만들곤 한다.
우리 가정을 덥히는 아버지 불길은 화력은 세지만 찌꺼기와 연기가 많이 나는 푸른 청솔가지 불길이었다. 아버지의 찌꺼기 많은 불길에서 구들 막히는 것을 막아주고 우리를 따뜻한 구들방에서 지내게 한 우뚝한 부넘기는 바로 엄마였다. 밖에서 몰고 오는 아버지의 불길은 거칠고 어려움이 많았다. 어떤 불길이라도 엄마가 온몸으로 찌꺼기를 막고, 불길을 다독여 순한 불길로 만들어 우리 가정의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였다.
아버지도 한평생을 참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셨다. 아버지에게 결혼과 가정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고 종손이란 멍에가 아버지의 미래와 함께 묶어버린 후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신의 의무감으로 해야 할 일은 그냥저냥 하셨지만 산 너머로 눈길이 자주 갔다.
어린 철부지일 때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도 많이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아버지의 바깥 지향적인 생활을 이해하게 되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웅크린 어깨가 가슴을 아리게 한 일이 많았다.
아버지의 불길이 구들을 데우지 못하고 밖으로 많이 흘러나갔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풍 防風은 오롯이 엄마가 감당하였다. 아버지의 불길이 방구들 덥힐 때는 엄마가 잘 조절하여 어떻게 하든지 자식들만큼은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고 온몸을 던져 노력하였다.
자연 가정의 힘든 일은 엄마 몫이 대부분이었다. 직장생활을 위해 객지로 떠난 조부모님 대신한 증조부모로부터 시작된 시집살이가 조부모까지 네 분의 삼년상이 끝나서야 마무리하는 것인가 하였다. 편안함도 순간이고 아버지의 뇌졸중 발병이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 긴 세월을 아버지 병간호를 하루도 자식에게 부탁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였다.
병들어 점점 사그라져 가는 아버지 불길로는 방을 데울 수 없음을 깨닫고 약한 불길로 데워진 구들장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자식들 만류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손바닥만 한 땅도 놀리지 않고 푸성귀라도 심으며, 본인은 절대적인 내핍 생활을 하며 가정의 온기를 유지하려고 온몸으로 막았다.
우뚝 버티고 오로지 우리 가정의 기둥 역할을 든든히 하던 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뇌졸중과 뒤이은 합병증으로 붉게 빛나든 숯불이 사그라지듯 쇠약해지고 있다. 오랜 세월 우리 집안의 파수꾼 역할을 하다 보니 겉은 멀쩡한 듯 보여도 엄마의 속은 사그랑 주머니처럼 알게 모르게 삭아져 갔다.
찬란한 햇빛의 아름다운 무희를 보지 못하고, 어스레한 방에서 바깥출입도 하지 못하고 생활한 지도 거의 일 년을 넘기고 있다. 화장실 출입도 못 하면서도 자식 걱정에 하루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다. 아직도 자기가 우리 가정의 부넘기인 줄 아는 모양이다. 무거운 짐은 훌렁 벗어 놓으면 좋으련만.
엄마가 방바닥이 따뜻해서 좋다고 한다. 그만 일어나야 되겠다. 아궁이 입구를 지나 후렁이와 부넘기 앞에 재가 소복이 쌓이고 있다. 희끗희끗하게 사그라지는 숯불 위로 엄마의 쇠약해진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들고 고된 한평생을 보낸 엄마가 진심으로 고맙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게 아프다.
부넘기에서 걸러진 불길은 방고래를 지나 따뜻하게 구들장을 데운 후 이 세상의 미련을 굴뚝개자리에 다 떨어버리고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며 하늘로 너울너울 올라간다
5. 사그랑 주머니
시골집 안방 문을 여니 향냄새가 코를 확 덮쳐온다. 엄마가 엉덩이 걸음으로 방 가운데까지 옮겨와 해쓱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간병인 도움으로 머리를 감고, 채 마르지 않는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시골 아저씨 포마드 바른 것처럼 딱 붙여 놓았다. 흐트러진 자신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일까 오매불망 걱정이다.
“저기 호박 가져가거라. 분이 많은 것이 참 좋다.”
해마다 농사지은 호박 중 가장 태가 나는 것을 내 몫으로 남긴다. 엄마가 주는 호박, 알밤, 모과, 대봉감, 탱자 등을 우리 집 응접실 귀퉁이에 장식해놓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가을의 풍요로움을 즐긴다.
이듬해 봄에 대청소하면서 지난가을의 잔재를 정리하다 보면 호박에는 번번이 속는다. 윗부분은 멀쩡한데 밑은 감쪽같이 살살 상해 들어와 못쓰게 되어 있다. 호박은 골병이 들면 쉽게 상한다. 추수할 때나 옮겨올 때 크고 무거우니까 알게 모르게 부딪쳐 골병이 드는 모양이다. 보이지도 않는 껍질 안의 사정을 어찌 알리오.
‘조금만 더 있다가’ 미련을 부리다가 당하는 연례행사다. 속은 다 상하고 겉모양만 남아 있는 물건을 사그랑주머니라고 한다는데 상한 늙은 호박은 영락없는 사그랑 주머니다. 상한 호박을 보면 엄마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삭정이처럼 사그라진 모습이라도 겉은 아쉬운 대로 봐줄 만하니 속이 저렇게 상했을 줄은 몰랐다. 내장기관이 모두 유효기간을 넘긴 상태다.
엄마는 치료를 받아도 아무 소용없이 차츰차츰 악화하던 다리가 완전히 못 쓰게 되어 방안에서 용변까지 처리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방안에서 용변을 처리하다 보니 고약한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유별스럽게 냄새에 민감한 딸을 위해 향을 피워 냄새를 쫓으려고 용을 쓴다. 몸은 사그라질 대로 사그라진 상태인데도 식구들을 생각하는 맘은 여전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엄마의 가족사랑 때문이다. 젊음과 건강을 오롯이 가족에게 쏟아부었다. 농사일을 많이 하여 약간씩 문제를 일으키던 다리가 아버지 49재 때 절을 심하게 한 후부터 심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생시킨 분의 극락왕생이 본인의 다리보다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가슴 깊이 박혀 있는 한을 이해하셨나. 부디 하늘나라에 가서는 원하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평생 엄마의 어깨에 걸머진 무거운 짐으로 사셨다. 고향에 묶어두려고 강제로 시킨 결혼이니 집안일에 애착이 갈 까닭이 없었다. 시작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아버지 눈은 항상 담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사랑받으며 자란 막내딸이었다. 가문끼리 맺어진 인연 따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려운 종부가 되었다. 힘들게 사는 막내딸은 외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걱정하시는 친정엄마가 죄송스러워 힘든 일이 있어도 하소연 한마디 못하였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힘든 현실을 혼자 꾸역꾸역 삼키고 살았다. 기구한 세월의 애환이 하나하나 퇴적하여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속병을 키웠다.
북데기 머리를 하고 눈만 뜨면 밭과 들에 엎드려 일하는 엄마가 싫었다.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한 것이 엄마 탓인 것만 같았다. 세분의 작은 아버지와 고모에 연이은 우리 사 남매의 뒷바라지와 종갓집 대소사를 치르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마의 손가락 하나가 우리 손가락의 두 개 굵기가 되었다. 여자의 손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머슴 손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한평생 용감하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가 노후에 뇌졸중으로 16년을 앓으셨다. 까다롭고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엄마를 제외한 어떤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당신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몇 차례 재발하여 장기 입원을 하는 동안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엄마 손에만 의지하였다.
예전에는 엄마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엄마가 어떻게 살고 어떤 대접을 받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꼈다. 엄마는 여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과 누리고 싶은 것들을 가슴 깊숙이 묻어 두고 살아왔다. 그런 엄마의 세월이 안타깝고 애달프고 짠하다.
더욱 속이 아리는 아픔은 팽개쳐진 튼튼하던 몸이 반란을 시작한 것이다. 배에는 대변 주머니를 달고 있다. 뇌졸중을 비롯한 전국구로 일어나는 복병을 다스리기 위해 한 줌씩이나 되는 약을 매번 먹고 있다. 늙은 호박이나 엄마나 그렇게 골병이 들었으니 속이 모두 상해버린 사그랑 주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데기 머리든, 봉두난발 머리든 상관없다. 두 다리로 걸어가서 두 팔 걷어붙이고 억척스럽게 일하는 엄마 모습이 오히려 보고 싶다. 외모가 그런대로 멀쩡하였으니 저렇게 속으로 곪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가족의 평화와 안위라는 화음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사그랑주머니 같은 엄마의 삶을 보면 가슴에 새하얀 바람이 인다.
* 사그랑 주머니 : 죄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남은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6. 김치 칸타타 / 이미란
소금에 푹 절어 시든 배추가 욕조에 가득하다. 김치는 사 먹을 수도 있고, 절인 배추를 주문해서 쉽게 담글 수도 있건만 친정엄마가 직접 기른 ‘엄마표’ 배추가 해마다 나를 힘들게 한다. 배추를 절이고, 씻는 이틀 동안의 심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절인 배추가 피로에 전 내 모습과 비슷하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 연례행사가 앞으로 몇 번이나 계속이 될까? 엄마의 배추가 공급되는 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나 또한 엄마를 닮아 가고 있으니 김장 고생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올해는 대용량 김치 냉장고까지 또 하나 장만했다.
서울 사돈은 짭짤한 경상도식 김치에 매료되시어 대구 김치를 찾으시고 대구 사돈은 달콤한 갈치 김치 맛에 우리 집 김치를 좋아하시니 해마다 포기 수는 늘어나고 있다. 두 아들 집, 두 사돈집 우리까지 다섯 집 김장만 해도 양이 적지 않다. 게다가 도와주는 시누이네 김장까지 해주다 보니 한 집이 또 추가됐다.
친정집 텃밭에서 한 차 가득 뽑아온 배추가 김치 통에 안착하려면 내 허리는 파스 포장을 해야 한다. ‘참 맛있다.’ 한 마디가 나를 이렇게 바보로 만든다. 나의 이런 행위는 우리 엄마 딸임을 확실히 증명한다.
김치 칸타타는 오뉴월 보리 익을 무렵에 멸치젓을 담는 것을 시작된다. 김치 칸타타의 클라이맥스는 일 주일짜리 빈틈없는 알찬 여행 부분이다. 월요일부터 찹쌀풀을 쑤어서, 미리 받쳐 놓은 멸치 액젓과 함께 김치 양념 장만, 자청 파, 갓, 미나리, 기타해산물 등의 김칫소 장만, 가장 힘든 난(難) 코스인 배추 절이기와 절인 배추 씻기며, 양념 버무리기이다. 남편이 특히 좋아하는 갈치 김치, 아들이 좋아하는 대하김치, 굴김치, 김장 후 금방 먹기 위한 생(生)김치, 편찮으신 시어머니를 위한 백김치, 종류도 많고 양도 많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다.
이리하여 파란 배추가 먹음직한 김치로 변신하여 김치 통속으로 골인하면 일주일에 걸친 김장 여행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특히 마지막 날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양념 버무리기를 하는데 ‘하하 호호’ 여러 사람이 어울려내는 신명 나는 김치 칸타타의 하이라이트다.
김치 양념 버무리는 날에는 서울서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 녀석까지 와서 흥을 북돋운다. 여섯 살짜리 손자 녀석이 할머니 김치가 최고라며 붉은 배추김치를 장원급제한 듯 으스대면서 먹는다. 눈물을 글썽이며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예쁠 수가 없다. 장난기가 발동한 시누이가 고춧가루를 흠뻑 묻혀서 먹이려 하면 손사래를 치고 쏜살같이 도망간다. 모두에게 웃음을 한 보따리 선물로 안겨주는 손자 녀석의 하는 짓이 즐거운 장난감이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에 시어머니가 궁금하셔서 나오시지만 도움도 되지 못하고 일하는 데 방해만 되는 자신이 자존심 상하셨던지 ‘나 삐쳤다.’하고 들어가시는 바람에 또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룬다. 이래저래 모두가 즐겁고 신나는 김장 칸타타가 울려 퍼진다. 이런 것이 삶의 즐거움인가?
김장 날 점심엔 삼겹살, 사태 수육을 갓 버무린 김치에 싸 먹으며 잔치를 벌인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들까지 합세한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동네 할머니들 손에 달랑거리는 김치 봉지가 참 보기 좋다. 이런 행복한 웃음소리에 마음이 부자가 되었고 허리 통증이 어느새 도망가 버린다.
친정엄마가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굳이 힘든 농사를 지어 차에 실려 보내고 싶어 하는 맘도 지금 내 마음과 같으리라.
우리나라 김장 문화가 유네스코 문화유산등재에 출원된 모양이다. 밥상에 오르는 반찬 한 가지를 위해 온 나라가 같은 시기에 들썩들썩하며 집집이 야단들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는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행사가 참 많다. 구정, 추석, 벌초, 묘사, 김장 등등 교통대란까지 일으키며 대형 행사를 치른다. 이런 나라가 지구촌에 얼마나 될까?
이런 옛 생활 습관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힘든 김장은 쉬운 주문 김치로 바뀌고 있다. 더군다나 점차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가정, 외국으로 떠나는 젊은 층들, 이들 생활습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퓨전 문화를 만들고 있다. 김치가 밥상에 차지할 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아이들의 입맛을 피자나 파스타, 햄버거가 사로잡고 김치는 뒷순위로 밀려난 실정이다. 쌀로 이루어지는 밥 문화가 빵으로 식사하는 빵 문화로 바뀌고 있으니 김치가 밀릴 수밖에 없다.
굳이 우리 것만을 고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들의 사고만은 국제 떠돌이가 아닌 뿌리 깊은 한국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김치냉장고가 있어 김장한 김치를 일 년 내내 보관하여 맛있게 김치를 먹을 수 있다. 또한, 심하게 추운 날씨가 아니어도 되고, 실내에서 모두 행할 수 있으니 옛날에 비해 수월해졌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추운 겨울에 해야만 겨울 한 철 보관이 가능했다. 그러니 김장이 더욱 힘들었다. 더구나 상수도 시설이 없던 우리 동네에서는 절인 배추를 소달구지에 싣고 개울까지 옮겨가서 얼음 깨트리고 씻어 왔다. 요즘 지천으로 있는 고무장갑도 없던 그 시절에는 얼음물에 절인 배추를 씻으면 손이 꽁꽁 얼어 빨간 고무장갑 낀 손처럼 새빨갛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정말 힘든 김장을 했지만 흥겨운 동네잔치였다.
몇 날 며칠 동안 서로서로 도와가는 품앗이의 김장은 온 동네가 축제였다.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김장 날만은 푸짐하게 밥을 해서 둥그렇게 둘러앉은 아주머니들이 배부르게 먹었다, 김장 날은 며느리 생일날이라고들 했다.
별 찬거리가 없던 옛날에는 집집이 온 정성을 기울인 특색 있는 김치 맛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김치는 겨울철 별미며 주요 반찬이었다. 더구나 동치미는 주요 간식 역할까지 했다. 얼음을 동동 띄운 아삭한 동치미 무 맛은 어떤 과일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 당시 김치 보관법은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보관했다. 눈이라도 오면 볏짚 목도리를 하고 소복이 쌓인 눈 모자 쓰고 어깨동무한 채 줄지어 앉아 있는 김치 항아리들의 풍경이 일품이었다.
겨울방학을 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친구들이 늦은 밤까지 자주 모여 놀았다. 집성촌인 우리 고향은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뉘 집 김치 맛이 좋은지 소문나 있다. 긴 겨울밤 놀다가 시장기를 느끼면 소문난 집의 땅속에 묻어둔 김치를 살짝 꺼내왔다. 싸늘히 식은 찬 보리밥 덩이에 그 김치를 쭉쭉 찢어서 밥숟가락 위에 걸쳐 먹던 그 맛은 지금 어느 성찬보다도 맛있었다.
누구네 제사라도 있던 날은 친구가 가져온 비곗덩어리 몇 점을 넣은 김치찌개는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는 별미였다. 메워서 ‘호호호’, 뜨거워서 ‘후후후’, 즐거워서 ‘하하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걱정도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흥겨움을 깰 수가 없었다. 시골 고샅길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우리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아직 내 귓 잔등에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이 모든 즐거움은 김치와 함께 이룰 수 한 폭의 그림 같은 추억의 잔상들이다.
김장이란 긴 여행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울리는 흥겹고 즐겁고 신나게 이루어지는 김치 칸타타다. 계속 울려 멀리멀리 퍼져, 맛있는 김치 맛이 오래오래 전해지면 참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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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발 단상 / 이 미란
현관 앞에 신발이 가득하다. 늘 꺼먼 운동화 두 켤레가 어둠 속에 댕그라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현관 소리도 요란하고 많은 사람이 들락거린다.
현관 가운데 한자리 차지하고 앉은 조막손만 한 손녀 빨간 운동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 운동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명절 때마다 등장하던 시어머니의 코고무신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명절 나들이에는 번거로운 것도 고사하고 한복 차려입기를 좋아하셨다. 같이 따라오는 하얀 코고무신이 항상 다소곳이 현관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해 움직이기 힘들 때도 고무신은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어머님의 혼자만의 여행에 동무가 되어 어디론가 같이 떠난 신발은 어디쯤 있을까, 짠한 가슴의 파문이 마음 밑바닥을 흔들며 일어난다. 먼 후일 내 신발의 위치를 미루어 그려본다.
현관의 신발들을 보고 있으면 신발 주인의 삶을 읽을 수가 있다. 늘어날 대로 늘어나 편안한 한복 바지 같은 운동화가 남편의 신발이다. 몸무게도 많이 나고 발이 크고 살이 워낙 많아 주인의 얼굴만큼이나 주름이 많고 늘어져 있는 모양이 완연 주인의 품새다. 무거운 몸을 담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고생한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손녀의 작은 운동화 옆에는 며느리의 목 긴 부츠가 허리 꺾고 끓어 앉아있다. 젊은이의 향수 냄새와 희망의 멋스러움이 풍긴다. 내 신발은 언제부터인가 굽 높은 뾰족구두는 신발장에서 대기 선수로 전락하고 편안한 운동화가 주 선수로 뛰고 있다. 비교적 가벼운 몸을 싣고 다니니 수명도 길어 오래 자리를 지킨다. 모양새도 흐트러짐이 없이 내 꼬락서니와 많이 닮았다. 융통성 없이 볼끈 묶은 끈과 흐트러짐 없이 차렷하고 있는 모양이 숨이 딱 막혀온다.
저 운동화가 자리 잡기 전 추억에 절인 나의 신발 풍경들이 흑백 활동사진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신발들은 현관이 아닌 뜨락에서 그림을 그렸다. 댓돌 위엔 단정한 아버지 하얀 고무신, 그 밑엔 흙 묻고 낡은 신발들이 이리저리 편안한 폼을 잡고 있었다. 검정 고무신에서 하얀 고무신으로 바뀔 때의 환희를 잊을 수가 없다. 얼룩 한 점 없이 씻고 또 씻어 항상 하얀 신으로 만들어 신고 다녔다.
더구나 서울서 학교 다니시던 삼촌이 방학 때 고향 오면서 만화책 속에서나 봤던 에나멜 분홍 구두를 사 왔다. 아무도 가져갈 사람도 없겠지만, 머리맡에 두고 애지중지했다. 검정 고무신 신은 신고 있던 시골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으스대던 일이 엊그저께 갔다. 학교 가는 것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설렌 적이 없었다. 꿈이 부푼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폴짝폴짝 뛰면서 즐겁게 학교 가곤 했다. 풍부한 물질 속에서 아쉬운 것 없이 지내는 요즘 아이들이 봤더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중 고등학교 때 하복 입으면 신던 하얀 운동화. 성가시고 제일 정성을 많이 기울인 신발이다. 깨끗이 씻은 운동화가 복잡한 버스에 시달리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운동화 밟히는 것이 싫어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 다니기까지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그 운동화는 그림에서 지워지고, 처음 뾰족구두로 바꿔 신을 때의 설렘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골 가서 양식과 부식이라도 가져올 때는 버스에서 내려 자취방까지 오르막길을 올라가려면 아득했다. 운동화 신고 바지 입어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굳이 짧은 치마에 불편한 높은 구두로 멋을 부리고 싶었을까 그때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인 양 기를 쓰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신었던 것이 향수로 다가온다.
어느 날 커다란 통 배 같은 구두와 나의 뾰족구두가 짝을 이루어 현관을 지켰다. 이어 현관에 작은 운동화 두 켤레가 보태어 지면서 4켤레 가족으로 한동안 오순도순 열심히 살았다.
그 작은 운동화들이 차츰차츰 커지면서 여러 모양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항공모함 같은 커다란 구두로 바뀌었다. 그 구두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며느리들의 참한 신발이 자리를 잡았다. 그 옆에는 어느 사이 손자 손녀의 조막손만 한 운동화들이 자리 잡고 방글거리고 있다.
저 작은 신발들도 모양을 바꾸어 커다란 구두와 뾰족구두로 바뀌겠지. 저 작은 신발 주인들의 행로가 어렵고 험난한 길이 아닌 편안하고 아름다운 꽃길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8. 낡은 상보
낡은 상보의 변신이 놀랍다. 싱크대 서랍을 열다가 낡은 상보를 발견했다. 구석에 몇 년을 처박혀 있어 누렇게 변한 모시 조각상보가 있었다. 새하얗게 세탁하여 빳빳이 푸새한 상보는 안방마님 모시 적삼처럼 품새가 그럴듯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젖 떨어진 아이처럼 마음이 쓰여 이사할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가져왔었다. 가지고 와서는 예쁘고 편리한 상보에 밀려 눈길을 주지 않고 찬밥신세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었다.
이 낡은 상보에는 여러 가지 추억이 깃들어 있다. 다니던 직장을 사표 내고 집에 있으려니 여유 시간도 많고 심심했었다. 엄마가 혼수로 해준 재봉틀로 커튼이랑 아이들 파자마 등 쉬운 것들 몇 가지를 심심풀이로 만들었다. 이것을 보신 시어머니가 삯바느질하는 친구한테서 아기 손바닥만 한 모시 쪼가리를 얻어 와서 상보를 만들어보라고 던져주었다.
왜 이것으로 상보를 만들라고 하셨을까? 재봉틀 바느질을 옳게 하는지를 시험하시는지, 하찮은 것이지만 버리지 않고 조각조각을 이어 상보를 만드는 알뜰함을 가르치려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소쿠리도 삼베조각을 대어 기워 쓰시는 시어머니가 주신 것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바느질하려니 영 자신이 없었다. 사각형의 작은 조각도 아니고 저고리의 둥근 소매 부분 같은 곳을 재단한 후 생긴 삼각형의 작은 조각들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물어보고 힘들어 못 하겠다고 떼라도 써보겠지만 갓 시집온 새색시 입장에서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나의 재봉 솜씨는 천 조각을 겨우 연결하는 초보 수준이었다. 저 작은 조각들을 어떻게 할지 특히 삼베나 모시 같은 천은 쌈솔로 하지 않으면 천이 다 풀어진다. 앞이 캄캄했다.
몇 날 며칠을 끙끙 씨름하여 겨우 만든 것이 저 상보다. 작은 조각을 붙이는데도 쪽 바른 직선으로 박을 땐 한결 쉽다. 쉬운 부분을 지나면 어려운 삼각형의 꼭지 부분이 버티고 있었다. 삼각형 꼭지에 돌려 박기를 쌈솔로 하는 것은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잘못 박아 몇 번 뜯었다 붙이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천은 다 해어져 못쓰게 되는 경우가 제자리에 얌전히 붙여지는 횟수보다 많았다. 작은 조각이라 만만히 보고 함부로 했다간 결국 천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것도 자꾸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 삼각형 두 개를 먼저 부쳐 사각형을 만든 후 사각형끼리 박음질을 하니 삼각형 꼭지 부분을 피해갈 수 있어 훨씬 쉽게 진도가 나갔다. 사람 살아가는 일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어려움에 부딪혀도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 요령을 찾아야 한다.
가까이서 보면 바느질 솜씨는 엉망이지만 겨우 사각형의 밥상보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엉거주춤 내미는 밥상보를 보신 어머니께선 아무 말씀도 없이 빙긋이 웃으시곤 되돌려주셨다. 아직도 그때 어머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상보를 만들 때 겪은 일들이 살아오면서 내 삶의 지혜가 되었고,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쉽고 즐거운 쪽 바른길만 있는 것도 아니요, 삼각형의 꼭지를 돌리는 것같이 힘든 일만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알려주었다.
울퉁불퉁한 서툰 박음질 솜씨지만 푸새를 하고 손질만 잘하면 번듯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이 조각보의 바느질같이 사건들이 발생하여 힘든 순간들과 해결하는 기쁨의 순간과 시행착오의 순간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의 인생 보자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잘못된 과거에 뒷다리 잡혀 허덕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면 또 다른 길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우리 공장도 같이 일하던 공장장이 직원들과 기술을 빼내어 창업하였다. 우리 기계와 똑같은 기계를 싼값으로 만들어 내어 덤핑으로 시장을 어지럽혀 공장의 존폐를 흔들었다. 99% 승소를 장담하던 재판에서 둥근 나사를 네모 나사로만 바꾸어도 특허에 걸리지 않는다는 법 때문에 패소해 가슴을 쳤다. 그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 힘든 순간이었다. 세월이 지나자 그 공장은 직원들 간의 내분으로 스스로 자멸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제품은 인정을 받으며 잘 팔리고 있다.
가파르고 험난한 길을 힘들게 지나고 나면, 완만한 길을 만나 숨 고르기를 하는 우리 인생 여정같이 공장도 그냥저냥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평화 앞에 언젠가 또 삼각형의 꼭지 박음질 같은 어려움이 버티고 있을지라도, 에둘러 가다 보면 똑바른 쉬운 박음질같이 평화스러운 편안한 길이 기다리고 있음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한 귀퉁이 한 귀퉁이 살아가다 보면 우리 삶이 차곡차곡 쌓여 뭉긋하게 살맛나는 한 덩어리의 인생 조각보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상보가 되어 가듯 익어간다.
9. 굴렁쇠 / 이미란
잘 익은 감홍시처럼 노을에 물든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있다. 지는 해가 가장 붉다고 하더니 잘 익은 홍시처럼 달콤한 물이 금방 뚝뚝 흐를 것만 같다. 한낮에 장렬하게 빛을 발하던 기운이 소진한 채 이제는 마지막 인사를 고하려는 듯 애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저 쓸쓸한 미소가 희망의 함박웃음으로 바뀌는 순간이 또다시 다가온다
황혼과 달리 여명은 힘찬 희망을 가지고 태어난 갓난아이와 같다. 해마다 많은 사람은 새해 해맞이를 하기 위해 교통 체증을 일으키며 동해안으로 모여든다. 바다에서 붉은 기운을 일으키며 힘차게 불끈 솟아나는 새해 아침의 태양을 향해 각자의 소원과 한해의 무사 안일을 빈다.
해는 여명에 붉게 물들었을 때와 저녁노을에 젖어있는 것과 모양과 색이 거의 비슷하건만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와 느낌은 다르다. 어째서일까? 태양은 한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뿌리 내리고 있건만 우리 가슴에 와 닿는 기분은 확연히 다르다. 일출이 주는 마음의 울림은 대동하고 오는 눈부시게 밝은 광명과 한낮의 뜨거운 햇살의 웅장함이 주는 힘의 용솟음이다.
일몰은 어둠 속에 혼자 떨어질 것 같은 쓸쓸함과 뒤따라오는 어둠에 둘러싸인 고독이 사람들에게 명치끝을 아리게 하는 외로움이다. 이 막막한 어두운 밤이 가고 나면 희망찬 다음 날의 여명을 불러와 장엄한 일출을 모셔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녁노을은 가슴 깊이 아려오는 쓸쓸함을 준다. 하늘의 해는 하루하루를 일몰과 일출이란 연속으로 반복되는 굴렁쇠를 돌리고 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삶의 기차여행을 마칠 때쯤에 또 다른 고리를 만들어 놓고 하차를 한다. 죽었다고 슬퍼하는 순간에 또 다른 후손이 태어나 뒤를 잊고 있다. 우리도 하늘의 태양과 비슷한 우주의 거대한 굴렁쇠를 돌리고 있다.
얼마 전 엄마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치료한 일이 있었다. 입원한 그 병실에는 회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말기 암 환자들이었다. 기대할 수 없는 완쾌에 대한 절망으로 무거운 침묵과 병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고, 웃음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간병인들의 어두운 얼굴과 지친 모습은 병실을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맞은편 병동은 산부인과 병동으로 신생아실이 붙어 있었다.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하여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축하 꽃이 넘쳐났다. 귀한 아들, 예쁜 공주가 태어났다고 축배의 분위기였다. 힘든 일을 하고 누운 산모는 모두의 축복 속에 승전의 영광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희망과 기대에 들떠있는 존재들이었다. 같은 환자이고 보호를 받는 환자이지만 이쪽 병실 분위기와는 완연히 달랐다.
자연에는 죽음이 있으면 새로운 탄생이 있다. 신생아실에서 저렇게 축복과 환호를 받으며 희망차게 태어난 신생아들도 일 년 이년의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장년기를 보낸다. 그들 다시 점차 노인으로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엄마가 있는 병실의 분위기를 거쳐 일몰과 같은 어두운 세계로 갈 것이다.
신생아실에서는 축복 속에 갓난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져 미래에 대한 분홍색의 밝은 희망을 주고 있다. 맞은편 이쪽 병실에서는 인생의 종점에서 하차를 기다리고 있는 노쇠한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환자들의 한숨 소리 가득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을 글로 옮기자면 책이 몇 권이 될 사연을 겪으며 살아온 긴 세월이다. 그 긴 시간이 겨우 몇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이 두 병실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한순간인 것 같아 가슴 밑바닥이 싸늘해진다.
엄마는 삼남 이녀의 막내딸로 축복받으며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 결혼도 고르고 골라 종갓집 종부로 시집와서 손끝에 물 마르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가정을 다둑이며 많은 일을 하였다. 긴 세월의 굴렁쇠를 돌리고 왔다
긴 세월을 종부로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집안의 주춧돌 역할을 하던 엄마다. 오랜 세월 종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베풀던 역할에서 이제는 물러나 오히려 보호받는 상태로 병실에 누워있다. 긴 세월 열심히 살아온 주름진 얼굴에는 황혼의 숭고함과 가능하면 자식의 짐이 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묻어 있다.
황혼에 물들어가는 엄마 뒤를 이어 굴렁쇠를 돌릴 선수들인 사랑스러운 아들, 딸. 손자, 손녀, 증손녀, 증손자들에 대한 만족스러움이 얼굴에 편안하게 베여 나온다. 세상의 굴렁쇠는 끓어지지 않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이어지며 이렇게 굴러가고 있다.
나는 어디까지 굴러 왔을까? 기나긴 삶의 여정의 고비 고비에서 역할을 마치고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돋보기를 끼지 않고는 식당 메뉴판도 못 읽고 스마트폰 문자도 못 읽는다. 금세들은 이야기도 몇 분 안 되어 금방 까먹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이름도 금방 생각나지 않는다. 삶의 역할에서 자꾸 뒷전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어 깊은 곳에서 쓸쓸함과 절망감이 문득문득 솟아난다. 그래도 남아 있는 고비 고비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내 역할을 보기 좋게 마치고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나의 마지막 삶의 굴렁쇠를 넘어지지 않게 부지런히 돌려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