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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1) 요동 이동설
요나라 때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갈석산은 요동의 시작점이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필연적으로 요동의 이동을 수반한다. 제1회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요나라(916년 ~ 1125년)시대에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그러므로 요나라 이전의 역사서와 요나라 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요나라 이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이며, 요나라 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요령성 지역이다.
요동의 지명이동은 한민족의 상고사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요나라 시대에 지명 이동된 요령성 요동을 고구려 시대의 요동으로 오해하였다. 그리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심하게 왜곡축소 되었다.
두 개의 요동을 대표하는 지도가 있다. 아래의 『기주협우갈석도』와 『대청광여도』이다.『기주협우갈석도』는 남송(1127년 ~ 1279년)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이다.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동의 연나라 5군(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한민족 상고사로 향하는 현존하는 유일한 보물섬 지도이다. 고구려 역사속으로 항해하는 내내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대청광여도』는 청나라(1616 ~ 1912) 사람인 채방병蔡方炳이 각刻한 원도에 일본 지도 작성의 선구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가 1785년 교정을 한 중국전도이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요동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요령성 요동으로 완벽하게 옮겨놓은 최초의 지도이다. 반면교사로 활용할 예정이다. (본 글의 각종 지도는 다음 블로그/향고도/고지도 http://blog.daum.net/sabul358에서 인용한다.)
① 『기주협우갈석도』의 하북성 요동
『기주협우갈석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기주협우갈석도』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기주冀州지역에 위치했던 갈석산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이다. 『상서』 ‘우공편’편의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는 구절의 협우갈석夾右碣石으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기주협우갈석도』을 현대지도에 옮긴 것이 위의 지도이다. 참고로 『기주협우갈석도』는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같아진다.
다. 『기주협우갈석도』의 발해 가운데 아래와 같이 갈석산을 자세히 설명한 구절이 있다.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갈석산이 역수易水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분명하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라.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아래와 같이 어양군 옹노현雍奴縣에서 시작하는 늪지대를 설명한 구절이 있다. 구십구 물웅덩이(九十九澱)로 표현한 것은 물웅덩이가 수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늪지대가 고당전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이 일대는 황하에 의해 떠내려 온 황토들이 수 백리 늪지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문안와文安窪의 너른 늪지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요택에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기주협우갈석도』의 호타하滹沱河는 오늘날의 대청하大淸河를 나타낸다.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이곳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범람하지 않을 때는 물웅덩이들이 나누어진다. 물이 불어 범람하면 하나가 되므로, 물이 이곳에 이르면 어느 강물인지 알 수 없다. 통합하여 구십구 물웅덩이라 한다.(冀北諸水聚此入海 水若不漲時每澱猶有分域 至水盛時成漲爲一故 水經至此不能分別其爲何水총曰九十九澱)”
마.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갈석산의 지명을 나타내는 부분이 묘하게도 중간의 자른선 부분에 위치하여 글씨를 판독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앞의 ‘다’ 항에서 살펴보았듯이 갈석산이 역수易水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역하逆河 옆에 그려진 산이 갈석산이 분명하다.
바.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요동군의 지명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 요동군 지역은 중국의 영역이 아니므로 표시를 생략한 듯하다. 필자는 요동군의 군치인 양평을 오늘날의 하북성 계현薊縣으로 비정하므로 현대지도에는 임의로 그려 넣었다. 아울러 연장성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계현薊縣까지로 비정하여 그려 넣었다.
사.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大遼水가 난하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고지도(청조일통지도 등)에 현재의 강물 흐름과 달리 난하의 하류가 조백신하와 연결되는 것도 보인다. 이 경우 소요수는 조백신하이고, 대요수는 난하가 된다.
② 『대청광여도』의 요령성 요동
『대청광여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갈석산이 난하 하류로 지명이동 되어 있다.
나. 갈석산은 반드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대청광여도』는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공 역하구하가 지금 바다가 되었다(禹公逆河九河今爲海)’는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에 의하면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은 근거가 없다. 단지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을 진짜 갈석산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허황된 설에 불과하다.
다. 요동군의 치소를 오늘날의 요령성 요양遼陽으로 표시하였다.
라. 발해 안에 아래와 같이 요동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동서가 천여 리, 남북이 일천 육백리로 오늘날의 요령성에 해당한다. 하북성 진황도시의 산해관에서 요동 땅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주협우갈석도』의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완벽하게 지명 이동된 모습이다.
“요동은 옛날 청주‧기주지역이다. 순임금이 기주 북쪽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는데, 즉 오늘날의 광령 서쪽 땅이다. 청주 동북쪽은 영주로 삼았는데, 즉 광령 동쪽 땅이다. 동서가 천여 리 이고 남북이 일천 육백 리 이다. 삼면은 물가에 사는 오랑캐와 접하고, 일면은 험한 바다이다. 산해관에 의지하여 좁은 길로 안으로 통한다. 옛날에 군현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한 후 오대양초五代梁初로부터 송나라까지 400여년을 전하였다. 후에 요․금․원나라에 빼앗겼다. 명나라가 하늘의 명을 받아 다시 설치했다. 위衛를 2곳에 설치했는데 오늘날의 성경盛京은 대청나라의 용흥 땅이다(遼東古靑冀域,舜分冀北,爲幽州,卽今廣寧以西地,靑東北爲營州,卽廣寧以東地,東西千餘里,南北一千六百里,三面瀕夷,一面阻海,持山海關,線路可以內通,古有郡縣,唐太宗征遼,自五代梁初,歷宋四百餘年,後沒于遼金元,明朝受命,盡改置,衛設二處,今爲盛京,卽大靑龍興之地)”
③ 하북성 요동과 요령성 요동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요나라(916년 ~ 1125년) 시기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더불어 한민족 상고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여러 지명들도 동시에 지명이동 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명들을 아래 지도에 표시하였다. 앞으로 글을 연재하면서 이에 대한 고증도 병행하려고 한다. 참고로 요나라 이전의 하북성 요동의 각종 역사지명들은 필자가 고증한 것이며, 요나라 이후의 요령성 요동의 각종 역사지명들은 현 주류사학계의 학설대로 표시하였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역사속으로 본격 항해를 시작하기전 꼭 필요한 준비물을 점검하였다. 드디어 출항준비가 완료되었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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