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쓰는 편지(3)
무관심은 희망의 무덤입니다
안녕들 하시지요.
저도 신도님들의 염려 덕분에 공부 잘 하고 있습니다. 옛 조사 스님들 말씀대로, 주리면 마시고 졸리면 잡니다.
그런데 이 쉬운 일이 왜 이리 힘든지요. 진정 '잘 사는 길'은 이렇듯 명백한데,
이 시대의 우리는 더 먹기 위해서 제때 먹지 못하고, 비싼 집에서 자기 위해 편안히 잠들지 못합니다.
스님네들의 삶이야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스님네들도 '시대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삶의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삶을 둘러싼 조건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삶의 조건은 무수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보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앞장서서 찾아나가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중노릇이겠지요.
만약 그것을 외면하고 음풍농월이나 하며 도인 행세를 한다면, 흔히 하는 말로 그것이 바로 '산중 기생'노릇일 것입니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고 서원을 한 사람들이 중생의 고통을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제불조사를 배반하고
시은을 내팽개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이 길을 걷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늘 우리 화계사 신도님들께서 염려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니 참으로 분에 넘치는 복입니다.
오늘은 2월 29일, 길을 나선 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오늘은 학교 안 가는 날 아이들처럼 잠 좀 실컷 자 볼 생각입니다.
가끔씩은 몸뚱이한테도 아부를 해야 하겠고요. 아직 노인네 행세할 나이는 아니지만, 몇 년간 마음대로
부린 몸뚱이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견뎌 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며칠 전부터는 순례단의 진행자들이 저와 저의 도반 스님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은근히 속도 조절을 하더군요.
배려가 고맙기 하지만, 서글퍼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때로는 몸이 시키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다만 시키는 걸 다 들어 주면 이놈이 주인 상투를 잡으려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거문고 줄 다루듯이, 느슨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적당히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승속을 막론하고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기도와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하지요.
요즘 강변의 풍경이 그렇습니다.
버들강아지가 햇빛에 볼을 부비고, 철새들이 얼음 풀린 강물 위를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이 평화로운 생명의 물길을 콘크리트로 감옥에 가둔다는 말입니까? 생각도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어제는 충주를 지났습니다. 한낮에는 제법 봄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그런데도 충주 시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탄금대 부근은 아직 얼음이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봄을 코앞에 둔 지금도 이런데, 한겨울에는 어떻겠습니까. 이런 강에 배를 띄우겠다고요?
이보다 더 교만하기도, 이보다 더 어리석기도 힘들 것입니다.
갈수록 길동무들이 늘어납니다.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는 선생님들, 수녀님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도 즐거이 강을 따라 걷습니다.
희망의 끈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대운하의 문제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무관심은 희망의 무덤입니다. 공동체의 미래를 방치하는 일입니다.
우리 화계사 신도님들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낮은 목소리로, 이웃들과 생명의 감성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불조사의 가피입니다.
그럼 조만간 꽃 소식을 전할 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봄 감기 조심하십시오.
2008년 2월 29일 저녁.
만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수경 합장
첫댓글 동행을 못해 부끄럽습니다만 많은 길동무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어리석기만한 자들의 횡포가 점점 도를 넘고 있으니...
맞습니다~! 관심은 곧 사랑입니다!! 엊그제 새만금에서의 일이 떠오르네여~~~! 누군가가 앞장 서야함이 마땅하고 우리는 비록 함께 못하지만 기도로 함께 합니다~!-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