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문학>(1958) -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정적, 고백적, 의지적, 낭만적
◆ 표현
* 시각적 심상
* 줄글로 이루어진 산문시
* 반어적 표현과 자연 현상에 빗댄 표현이 돋보임.
* '그대, 사랑, 기다림'의 시어의 반복과 '-을 믿는다'의 완결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운율이 형성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즐거운 편지 → 누군가를 애처롭게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괴로워 보여도 나에게는 행복이고 즐거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 사소한 일 → 자신의 사랑을 자연현상에 빗대어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 속에 담긴 뜻은 매우 소중하고 간절한 것임을 나타내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숨쉬는 일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그 사소한 일은 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는 것에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 언젠가 그대가 ∼ 불러 보리라. → 화자의 사랑이 너무도 사소한 일로 여겨져서
'그대'는 비록 의식하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그대가 외롭고 괴로움 속에
처한다면, 그때까지 간직해 오던 그 사소한 사랑으로 그대를 불러 보겠다는 표현이다.
* 진실로 진실로 → 반복을 통해 강조함으로써,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매우
절실함을 나타냄.
*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 응답도 없는 짝사랑에 불과한 자신의 감정이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지금은 비록 이루어질 수 없더라도 한없이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화자의 사랑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화자는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다릴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하여 갖는 수많은 기다림까지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 밤, 골짜기 →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
* 눈 → 그대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
*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행에서 보면 '자연의 순환'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큰 영속성 안에서의 작은 변화를 일컫는다.
*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나의 사랑이 끝난다고 해도
그대를 사랑했던 그 기다림의 자세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기억하겠고, 또한 계속
기다리며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사랑에도 순환이 있어, 언젠가는 사랑이 나에게도
오리라는 것을 의미함. 화자는 그의 사랑이 골짜기에 퍼붓는 눈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그칠' 것이지만, 실은 그 눈이 그치고 다시 꽃이 피고 그 꽃이 진 뒤에
다시 낙엽이 지고 ... 수없는 순환 뒤에야 그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퍼붓고 있을 뿐이다. 화자의 기다림의 마음은 계절의 변화처럼 다소 변할
수는 있으나, 계절이 반복되듯이 결국에는 영원할 것이라는 의미임.
* 눈, 꽃, 낙엽 → 자연의 순환을 나타내는 것들로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불변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소재들임.
◆ 화자 : 이 시의 화자는, '나'의 사랑을 상대가 받아주지 않아서 그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방적으로 지극한 사랑을 하고 있으며,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에 잠겨 있는
사람이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늘 마음 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간직하고 있으나 내색하지 못하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제재 : 사랑과 기다림
◆ 주제 : 간절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고백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사랑의 사소함에 대한 고백(간절함의 반어적 표현)
◆ 2연 : 사랑의 순간성에 대한 고백(불변성, 영원성의 반어적 표현)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황동규 시인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에 수록되어 있다. 황동규의 초기 작품인 이 시는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 때 연상의 여성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연애시로 지금도 널리 애송된다.
전 2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사랑과 기다림을 주된 제재로 삼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늘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다림을 통해 극복해 나가겠다는 사랑의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인한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때묻지 않은 시각과 감성이 풍부한 서정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낭만적 · 우수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작가 개인의 서정적 관심을 바탕으로 객관성보다는 주관적인 의표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이미지즘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반어적 표현법을 사용해 그대를 생각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과 시적 표현에서 유사성을 지닌 작품으로 김소월(金素月)의 시 <먼 후일>이 있다.
제2연에서 시인은 본질적인 사랑의 영속성을 믿기보다는 사랑이란 내리는 눈과 같아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그치는 때가 있는 것이므로,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실존주의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섬세한 파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시인은 그러한 조건을 모두 인정하면서 기다림이라는 변함없는 정서를 바탕으로 그대를 사랑한다고 노래한다.
이 시는 황동규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실린 대부분의 연가와 마찬가지로 서구적 인식의 로맨티시즘에 바탕을 둔 투명한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작가의 초기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연애시이다. 특히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등의 연시에서 보이는 임을 향한 일편단심의 전통적 정서를 뛰어넘어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함으로써 전형화되어 온 전통적 연애시의 계보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사랑을 주제로 한 한국 영화 《편지》(1997)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은 이 시에서 주된 모티프를 얻어 제작되었다.
◆ '즐거운 편지'의 반어적 표현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소하다고 말하고, 그 사랑이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화자가 자신의 사랑이 소중하고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한 반어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사소함'이나 '사랑의 그침'이라는 시어가 자연 순환의 불변의 진리와 연결되어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시를 직설적인 표현으로 바꾸었을 때 해석이 원래의 의미와 같지 않음을 통해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이 시의 중심적 표현 기법인 반어법은, 화자 자신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선언할 수 없는, 그러나 그 영원성을 스스로는 믿으며 또한 '그대'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 시적 화자의 사랑에 대한 인식
이 시에서 화자는 '그대'에 대한 사랑의 불변성을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사랑의 속성이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한편, 사치스러우며 일시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부딪치게 될 사랑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기다림의 감정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기다림은 시 속에서 화자가 지니는 사랑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좀더 성숙하고 깊이 있는 사랑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기다림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우리들에게 정숙한 사랑과 영속적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작가소개]
황동규 : 시인, 명예교수
출생 : 1938. 평안남도 숙천
소속 : 서울대학교(명예교수)
가족 : 딸 황시내, 아버지 황순원
학력 : 에든버러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
데뷔 :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수상 : 2016년 제26회 호암상 예술상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작품 : 도서 54건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동규 [黃東奎]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
첫댓글 기다림을 사랑하는 까닭은
눈이 오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더위 잘 피서 하시고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