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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를 죽인 범인은 박정희인거 같습니다.fish96 2005.10.0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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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s://freevod.nate.com/news/asf/2005/02/11/200502111550008554_s.wmv
육여사 살해 사건을 논하기 앞서
당시 시대 배경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 장충단공원 집회였습니다. 허나 실패했죠.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어렵게 승리를 거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3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날치기 통과하여 현대판 집정관 독재체제가 탄생하게 됩니다.(제4공화국)
이어서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시작되는데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김대중은 당연히 그 탄압의 최종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3년 말 국외에 체류 중 이던 김대중은 유신정권측에서 일본에 급파한 정보부요원에 의해 일본 동경의 한 호텔에서 납치당했습니다. 그들은 김대중을 바다에 수장하려 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경고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하고 국내로 들어와 풀려나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고(김대중 납치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대미 대일 수출이 먹고 살길의 전부이던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과의 외교가 심각하게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1974년 육여사 살해 사건이 난 해..
국내에선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국내 여론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반정부운동이 고개를 들자, 박정희는 74년 초에는 긴급조치 1호, 2호를 내걸며 여론막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또한 4월에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면서 민청학련사건 등 학생운동 주모자 또는 가담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을 하며 불안한 시국에 일침을 가했지요.
이러한 억압정책에도 그 수위가 잦아들지 않게 되자 박 대통령이 고육책으로 선택한 카드가 `육여사 희생론` 아닐까 하는 의혹의 소리도 나왔습니다.
문세광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권총을 들고도 아무런 검문없이 통과했다는 점, 평소 박정희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점도 근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최근에 밝혀진 추측에 의하면 경호원의 총에 의해 '실수로' 육영수여사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권총으로 쏜 총알이 실수로 머리를 관통할 가능성은 '카스'게임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것도 문세광이 총을 쏜 그 타이밍에 정확히 맞춘 실수에 의한 총알?? 이거야 말로 어불성설이지요. (0.1초도 안되는 간격이 있었지요, 그래서 문세광의 총소리에 묻혀진 총알소리가 이번에 발견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한-일 관계, 남북관계 긴장이 높아진 시점이었고..
미국에서도 한국정부의 인권탄압 실태를 비난하던 시기여서 박정희 정권이 상당한 압력을 받던 때에 바로 저격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여사 살해 사건은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하는 제 생각일 뿐이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사람은 박정희입니다.
미국 일본에 대해서(특히 일본) 여러가지로 수세에 몰리던 입장에서 오히려 큰소리 칠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었죠.
문세광은 국적이 일본이었고, 문세광의 공범도 일본인이었다는 점, 위조여권을 가지고도 일본에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일본이 박정희 정권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일본내의 조총련을 해체해 달라, 조총련 수사에 협조해 달라는 등 일본 정부에 큰소리 칠 꺼리가 생긴 것입니다.
이에 일본측이 응하지 않자 박정희는 일본과의 단교도 생각했었다지만 그거야 말로 쇼입니다. 우리나라는 절대로 미국이나 일본과는 단교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대미, 대일 수출의존도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또한 박정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데 성공했으며, 국내에서의 인권탄압에 대해 미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영부인이 살해당하는 나라니깐 이런 심각한 안보 상황의 타파를 위해서는 인권을 좀 탄압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역설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국내에서도 육여사 살해사건을 계기로 야당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빨갱이는 국모를 죽인 나쁜놈들이기 때문에 빨갱이로 몰아세우기만 하면 누구든지 제거할 수 있는 관습도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죠.
여담으로..
육영수 여사에 관해서는 자세한 서적이 없지만..
여느 대통령이 다 그렇듯이 부부관계가 좋다고 하고 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 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허나 실은 박정희가 육영수 여사를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불렀다고 하구요, 어디까지나 야설이지만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에게 재떨이로 맞은 적도 있다고 하는군요.
과거사를 자꾸 다시 들춰서 뭐하나? 경제도 어려운데 뭐하는 짓거리냐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많은데.. 그런 말이 어디있습니까?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요.
그런분들은 도대체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 역사 왜곡하는 데는 왜 발끈하십니까?
그거 바로잡는다고 경제에 도움안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