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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두 삶의 방식과 두 상반된 결과: 십자가와 부활, 부활과 십자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다음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줄거리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즈버그에 톰 소여라는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톰은 일찍 부모를 잃고 고모인 폴리 아줌마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과 모험을 좋아해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토요일, 폴리 아줌마는 말썽을 피운 톰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마당 울타리를 페인트칠하라고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칠하던 톰이었지만, 곧 묘안을 떠올려 친구들에게 울타리 칠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속여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사과, 구슬 등의 물건까지 받으며 일을 시키고 자기는 편히 쉬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톰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가볍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톰에게 변화의 시작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톰은 마을에서 방랑아 취급받던 친구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허클베리 핀은 늘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 톰이 매우 부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두 소년은 공동묘지에서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치료하려는 미신적인 의식을 하려고 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을의 의사 로빈슨이 인디언 조라는 악명 높은 사람과 머프 포터와 다투는 모습을 숨죽이며 보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가 의사 로빈슨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죄를 머프 포터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년은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 사로잡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지만, 톰은 이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톰은 그 죄책감을 잊으려 다시 모험과 놀이에 몰두합니다. 친구 조 하퍼와 허클베리 핀과 함께 해적으로 가장하여 섬으로 도망쳐 며칠을 보내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폴리 아줌마와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톰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프 포터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톰은 자신이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형당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톰은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인디언 조가 진짜 살인자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법정에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톰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디언 조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톰과 허클베리는 보물을 찾는 또 다른 모험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낡은 폐가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인디언 조와 그의 공범이 숨겨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톰은 허클베리와 함께 이 보물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오히려 인디언 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위험에 처할 뻔합니다. 이 과정에서 톰은 점점 자신의 용기와 책임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제 톰에게 있어 모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동굴로 소풍을 떠난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 베키와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톰은 베키를 위로하고 책임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은 우연히 인디언 조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톰은 가까스로 동굴에서 탈출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인디언 조는 동굴 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톰과 허클베리는 동굴에서 인디언 조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어 큰돈을 얻게 됩니다. 뜻밖의 부자가 된 톰과 허클베리는 이 보물을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하지만 톰은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부유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허클베리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규칙적인 삶이 부담스러워 다시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톰은 그런 허클베리를 이해하며, 함께 자유롭게 살기를 제안합니다.
톰 소여의 진짜 모험은 재미를 찾는 데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뀝니다. 위 이야기에서 톰 소여는 마냥 놀기 좋아하는 무책임한 소년에서 벗어나 점점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던 부자 같은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는 라자로의 모습을 거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를 깨닫고 천국 같은 내면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자와 라자로를 연결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단어의 뜻을 살펴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ἀναπαύεται”(anapaúetai)입니다. 뜻은 “쉬다, 위로를 받다”란 뜻입니다. 라자로가 죽음 뒤에 받는 것이고, 부자는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샤밧’, 곧 ‘안식’, ‘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마태 1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안식은 십자가에서 오고, 안식을 찾는 이들에겐 십자가를 준다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쉼과 안식을 찾았고, 라자로는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은 부자는 영원한 십자가가 준비되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산 라자로에게는 영원한 쉼과 안식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버리고 안식을 누리려다 결국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은 십자가 뒤에 옵니다. 그러나 사막 여유와의 관계를 통해 안식을 포기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를 위해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부자에서 라자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사랑을 알게 된 그는 장미꽃에게로 돌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그런 죽음은 부활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누리며 위로를 받으려 하면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안식을 포기하면 다른 이를 편안하게 하고 위로를 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인지, 벌써 위로와 안식을 살아서 십자가만 남게 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관한 결과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5-26절) 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을 파고 만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5년마다 발표되기에 올해 2024년 생활시간조사가 발표될 것입니다)를 보면 수면과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1인 가구 청년(19~34세)의 경우 하루에 3.9시간을 혼자 있지만, 노년(65세 이상)이 되면 7.6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경제적 빈곤 못지 않게 관계 빈곤이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수도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이 말이 와닿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김희경, ‘에이징솔로’ 중에서)
‘홀로’와 ‘함께’. 모두 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홀로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또 함께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쁘다고 ‘홀로’ 그 자체에 머물면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함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인생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가 악인 같습니까? 죄와 엄청나게 친한 사람이었고, 착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생전에 잔치를 많이 벌인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거지인 라자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외되는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함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는 데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함께’를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함께’가 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호프 자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예레 17,5)
우리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게 되면
세상은 온통 고통뿐이라네.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날 때,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고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게 되며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은
광야의 메마른 곳이며
인적 없는 소금 땅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부유한 게 죄는 아닙니다.
부유하면 좋죠...
내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고...
부자가 잘못한 건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이득만 챙길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는 게 왜 죄가 될까요?
얼핏 생각하면 내가 누구한테 폐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점은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에 대한
공동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점을 간과한 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자로는 끊임없이 회개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축복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에게 천국으로 넘어가는 사다리임에 분명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