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날씨는 평년보다 무덥고 비도 많이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어제는 도량에 소나무를 칭칭 감아 못살게 구는 칡넝쿨을 제거하느라 숨이 헐떡거렸습니다. 요즈음 세상에 위안과 감동을 주어야할 승가가 오히려 세상에 걱정을 끼치고 있어 가뭄과 때이른 더위만큼 근심과 짜증을 주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이듯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는 새로운 향상의 전기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치는 단박에 깨치나 망상이 여전이 일어나는구나. 부처님과 나의 성품이 동일한 진성인줄 분명히 알았으나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하나 작은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경허선사가 화엄사에서 진진응 강백의 물음에 역행을 통해서 답한 진솔한 가르침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오지에서 살다가 서울이 좋다고 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지만 다시 기가 질리는 것은 어디가 어딘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자세히 묻고 묵은 습기를 녹이며 낱낱의 인연을 밝여야 합니다.
이치로는 내가 본래 부처라는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지만 현실에서 원만한 지혜와 자비가 나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살행을 한다고 하지만 다시 업력에 물드는 것은 이치를 확철히 깨치지 못하면 수행의 방향이 없어 참다운 보살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으로 수행을 하고 보살행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견이 확실하게 서면 홀연이 처음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면 생각 이전의 천진한 성품에 계합하여 대상에 끌려가거나 물들지 않습니다. 이처럼 먼저 이입(理入)으로 깨닫고 나서는 이치에 집착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하지 말고 끝없이 사행(四行)인 보살행을 통해서 낱낱의 인연을 밝히지 않는다면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홀연히 한 생각이나 대상을 만나면 따라가지 말고 순간포착을 하여 때려치면 한 조각의 삼매를 이룹니다. 하지만 쉽지 않는 것은 무시이래로 익힌 습기가 참으로 징그럽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철선사는 오매일여를 통과하여 제8식인 미세유주를 제거한 대무심지가 되어야 견성이라는 수행의 비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습기는 아직 남아있으니 철저한 계행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홀연히 일어나는 한 생각이나 대상을 바로 알아차리면 더 이상 따라가거나 물들지 않으니 이것이 진정한 참회입니다.
왜냐하면 심지계인 불계로써 현전삼매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적 그대로 성성이며 성성그대로 적적이어서 익힌 습기를 말려서 대기대용을 이룹니다. 오늘의 혼란은 위와 같이 역행과 순행으로 수행의 방향을 제시해준 선지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과보임에 틀림없습니다.
참으로 중생 습기는 무섭지만 칼날 위를 걷듯이 조금도 틈을 주지 않으면 본래 물들지 않는 성품이 염염히 드러나게 되어 일체 경계를 자유롭게 수용하는 해탈을 이룹니다. 비록 이치는 이렇게 알았지만 몸이 아직 남아있어 습기에 끄달려 가니 부처님의 유훈인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는 말씀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역대조사들은 가뭄이 들거나 세상에 큰 일이 일어나면 수행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아직 수행이 부족하여 업력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여름 하안거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소식을 사무치게 깨달아 모두가 청량세계에 노닐기를 발원해 봅니다. 한 줄기 해풍이 연밭을 스치고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