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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귀는 있지만 마음이 없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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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귀는 있지만 마음이 없는
듣기 싫은 말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립니다.
귀로 들은 말이 마음에까지 가야 듣는 것인데
마음에까지 가지 않도록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까지 오면 마음이 괴로우니까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은 존재건 말이건 일이건 그것들을 마음에까지 끌어당기고,
무관심은 그런 것들을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관심에 두 가지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은 유익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이익의 관심이라고.
우리는 일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고,
존재의 유익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까 일은 사랑하면서 존재는 사랑하지 않거나
일에 관한 관심은 있지만 사람에 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여자와 비교해 남자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환심을 사기 위해 너를 위한 일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실제로는
사업 욕심 때문에 사랑한다는 가족을 놓치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와 자녀의 생일을 놓치고,
아내나 자녀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하게 듣고 마음에 남겨두지 않으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편리하게 잊어버립니다.
아무튼 욕심은 사랑의 관심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꺼버립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일에 사랑하지 않는 핑계를 대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일에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오래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던 일이나 추억도 잊지 않습니다.
아무튼 말이건 존재건 그것을 마음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사랑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욕심부리는 것만 소유하고 소유한 뒤에는 그만이며,
말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림으로써 말이 마음에 와닿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새겨들으라 하시는데 어디다 새기라는 말씀입니까?
명심(銘心) 곧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귀는 있지만 새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찌 새기고 어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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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외국 아이가 생양파를 먹는 영상을 봤습니다. 생양파가 과연 맛있을까요? 아이가 먹기에는 너무 맵지 않을까요? 사실 이 아이는 엄마가 양파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어디 한번 먹어보라고 하자, 정말로 맛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생양파를 먹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너무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생양파가 사과처럼 맛있겠습니까? 아이는 처절하게 생양파를 사과처럼 먹었습니다. 터져 나오는 콧물, 그렁그렁 맺힌 눈물, 새빨개진 얼굴. 그러나 자기가 사과라고 했던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최대한 아삭아삭 맛나게 생양파를 씹어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이 엄마도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아이가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보라 하고 또 여유 있게 영상까지 찍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부모는 이 순간 무조건 말리지 않을까요? 직접 체험하고 한 입 정도는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의 경우처럼 끝까지 기다리는 부모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더는 양파를 사과라고 우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결정했고, 자기가 선택했으며, 자기가 행동하고, 그래서 자기가 책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겠지요. ‘양파는 사과가 아니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더라도 간섭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면서 당신께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주님께 책임을 떠맡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며칠 전에 나왔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보통 농부가 길가에 그냥 씨를 뿌리고 할 일 다했다고 할까요? 또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농부도 없습니다. 농부는 보통 좋은 땅을 만들고 그곳에 씨를 뿌리는 것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땅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길가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이 오래가지 못하는 돌밭의 마음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시덤불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도 당신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십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그래서 좋은 땅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나쁜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그래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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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받으려면 아무것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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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밭’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사 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말씀)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앗을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덤불밭이 됩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면 쓰레기 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입니다. 그러니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밭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을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 밭인가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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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는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같이 보인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는 것을 보고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 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 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 지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함을 말합니다. 이사 날짜를 잡으러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 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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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 ‘아이언 돔(Iron Dome)'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국을 향해서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아이언 돔을 개발하였습니다. 실전에 배치된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을 향해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요격하는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2023년 10월에 하마스는 수천발의 로켓포를 이스라엘 영공을 향해 발사했고, 아이언 돔은 모두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언 돔을 개발하는 것보다, 가자지구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아이언 돔에서 발사되는 미사일 하나의 가격은 일억 원이 넘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2, 4)” 우리는 남과 북에서도 슬픈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남한의 탈북단체들은 북한이 싫어하는 전단을 만들어 풍선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오물을 담은 풍선을 남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에 웃지 못 할 슬픈 자화상입니다. 전단과 오물을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기술을 북으로 보내고, 북한의 인력을 남으로 보내면 좋겠습니다. 개성 공단을 재개하고, 금강산 관광도 다시 열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개통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전단과 오물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암입니다. 암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아이언 돔처럼 우리의 몸에 들어온 암세포를 막아내는 방어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것은 면역체계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몸에 들어온 독성 물질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CT와 MRI로 찾아낼 수 있는 암세포의 크기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암세포는 그런 검사로 찾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찾아서 막아낸다면 우리는 암세포가 있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면역체계는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선천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좋은 면역체계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선천적인 면역체계는 부족할지라도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건강한 몸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이웃에 대한 헌신은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도파민은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는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한국인에게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암 중에 ‘대장암’이 있다고 합니다. 육류위주의 식사 대신에 우리의 전통적인 식사를 하기만 해도 대장암 발병률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콩을 사용한 단백질 섭취와 나물과 해초를 곁들인 식단이 좋다고 합니다.
세례는 악의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신앙의 면역체계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척적인 면역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100% 악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후천적인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증진시키는 커다란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높이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실천’은 어떠한 악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는 ‘Faith Dome'입니다. 이런 신앙의 면역체계를 가진 사람은 유혹에 약한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초 한 자루가 캄캄한 밤을 밝힐 수 있듯이, 신앙의 면역체계가 강한 사람은 공동체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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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이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 씨앗은 길,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열매는커녕 뿌리도 내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 저는 맛있는 찌개를 먹고 싶습니다. 그래서 재료를 준비합니다.
숭덩숭덩 썰어 놓은 국물 뺀 김치와 돼지고기, 파와 다진 마늘, 새우젓 조금과 고춧가루….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씩 입에 넣어보겠습니다. 그러면 배속에서 재료들이 합쳐져 맛있는 찌개가 될 것입니다.
맞나요? 맞는 걸까요? 아닙니다. 준비된 재료를 끓여야 합니다. 재료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맛을 낼 때까지 끓여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재료들은 하나의 이름 즉 찌개가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많은 재료를 하나로 끓여내는 것입니다. 나의 고통과 고난과 경험과 시간 안에서 끓여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었지만, 끓이는 과정이 없다면 그 말씀은 나와 상관없는 말이 되어 다시 빠져나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었다면 내 안에서 끓여내세요. 그 말씀은 더욱 깊은 맛으로 우리 삶을 하느님께서 향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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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숫대야 냉면
지금은 그 유명세가 덜하지만
학생 때만 해도 여름이면 맹위를 떨치는 냉면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 세수대야냉면
가격도 저렴했고 양도 많았습니다.
여름에 그 대야에 고개를 들이밀고 친구들과 여름을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물가가 너무 올라 냉면 한 그릇도 쉽게 먹지 못하는 시대지만 그 시대는 달랐습니다.
친구들은 서로 푸짐한 냉면을 바라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이 여름 더위를 날려버릴 세숫대야 냉면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
푸짐한 냉면 한 그릇이 생각나는 날들입니다.
우리 삶에는 참으로 다양한 온도가 있습니다.
뜨거움도 따듯함도 그리고 시원합니다. 오늘은 인생 안에 시원함을 채워보세요.
시원한 냉면도, 화채도, 커피도 좋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하게 지내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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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생활화
“누구나 좋은 땅의 마음 밭이 될 수 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8,15)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두분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가 되는 분입니다. 두분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일체 없고, 위경인 <야고보 원복음서>가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분들에 대한 기념은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생겼고 많은 교부들이 즐겨 <야고보 원복음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어제 자료에서 읽은 전설같은 일화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요아킴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부유한 인물이었고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이었으며 둘의 걱정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요아킴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자 광야로 갔고, 안나는 집에 홀로 남아 역시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응답을 받는다.
한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을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예고하자 안나는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했고,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비슷한 환시를 보고 기뻐한다. 때가 되어 안나는 딸을 낳았고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세 살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아이가 바로 마리아 성모님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화는 주변에서도 간혹 듣기도 합니다. 아마도 요아킴과 안나는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 네 번째 부류의 ‘좋은 땅’의 부부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기념일 전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이분들을 기념하는 전례는 그 아득한 옛날인 6세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8세기 이후 서방교회에 도입됩니다. 안나는 13세기 이후 7월26일로 축일을 지냈고,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15세기후이후 발전하여 1913년에 9월16일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이분들의 축일은 함께 7월26일 오늘로 확정되어 지내게 됩니다. 성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안나보다 못하지만, 두분에 대한 신심은 가정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됨으로, 요아킴과 안나 부부는 교회의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도 이런 신심깊은 부모를 보고 배웠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이런 외조부모의 삶을 통해 보고 배웠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도 해봅니다. 오늘날은 거의 드물지만 제 어릴적 대가족제도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역시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은 지금도 많고 생생합니다. 할머님계신 큰집에 가서 할머니와 잔적도 많았고, 겨울철 할머니는 벽장에서 홍시 감을 꺼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겨울철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예전 할머니들의 권위는 대단했고 손주들에 대한 애정은 참 각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비유에 대한 해설을 초대교회의 산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각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씨가 아니라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토양의 밭에 있습니다. 씨가 아무리 좋아도 땅이 척박하면 제대로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된 농부는 기름진 밭을 만들기 위해 온갖 거름을 주며 최선을 다해 땅을 돌봅니다. 과연 내 마음 밭은 어디에 해당되는지요?
첫째, 길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하늘 나라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했을 때 악한 자가 즉시 회수해 가는 것을 지칭합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 부재가 문제입니다.
둘째,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사람 안에는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니,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걸려 넘어집니다.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셋째,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문제입니다.
세 경우 모두가 시공을 초월한 인간 현실입니다. 이런 마음 밭은 고정불변의 현실일까요?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자 말씀이 희망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라.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 도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오늘 목자들중의 목자이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며 참 좋은 수행 덕목을 선택, 훈련, 습관화 하도록 해줍니다. 고정불변처럼 생각되는 앞서의 세 유형의 부정적 마음 밭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입니다. 진짜 영적 농부는 마음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온갖 유익한 수행의 훈련에 전념합니다. 옛 어른이 말씀도 생각납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바로 후회다.”<다산>
저는 후회를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습니다. 한두번도 아닌 끊임없는 회심이 좋은 마음밭으로 변모시킴은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성인과 광인의 구별은 오직 뉘위침에 있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역시 뉘우침은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진인사대천명의 간절한 삶이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킵니다. 마침내 모두가 선망하고 희망하는 네 번째 유형의 인간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낼 정도로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그대로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한결같이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고, 실행하고”의 렉시오디비나의 수행에, 영적훈련에 매진할 때,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제 아무리 박토같은 마음 밭도 옥토의 마음밭으로 변모됩니다.
새삼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삶이 좋은 땅의 마음 밭에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회심의 생활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조화된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영적훈련이, 무엇보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영적훈련이 얼마나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키는지 역시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역시 타고난 것들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바로 타고난 것들에, 나쁜 환경에 절망하는 것, 이것이 악마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항구한 노력이 사주팔자 운명론을, 나쁜 환경을 돌파해 버립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을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변모시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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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금 더>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말씀이 몸소
내게 오십니다
몸소 오시는 말씀을
귀로 듣습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머리에 담습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손발로 나눕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삶으로 이룹니다
내가 몸소
말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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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세 가지 결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맺는데” 나쁜 땅에 세 가지(길. 돌밭. 가시덤불 속)가 있듯이, 좋은 땅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땅들은 각기 열매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냅니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본디의 바탕 때문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나 믿는 이들이나, 씨앗을 받는 것은 그들의 마음입니다. 마태오는 첫 번째 사람의 경우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는 ‘말씀을 듣기는 하는’ 이로 묘사합니다. 좋은 땅에 대한 설명에서는, ‘씨’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먼저 듣고 그다음에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나면, 좋은 가르침의 열매를 맺어,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를 내야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고루고루 가까이 계십니다. 집회서에서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위에 그물을 던지신다(참조: 호세 7,12; 애제 12, 13). 모든 사람이 피조물로 가득한 이 그물 속으로 들어가서,하느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기만 한다면,그들은 범사에 하느님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가장 진실하게 아는 사람은 만물 속에서 똑같이 하느님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괴로운 삶올 견뎌 내는 것은 더 나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사람이 고난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기도하다가 하느님을 알아차랄 수도 있고, 예배당 안에 있다가 하느님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하느님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결점 때문이지 하느님 탓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만물과 모든 장소에 똑같이 계시고,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똑같이 내주실 의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어디에서나 똑같이 알아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20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영적 삶의 원칙들
온전히 있음
요셉 아빠스께서 롯(Lot) 아빠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히 불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수도자가 될 수 없다.”
매일 새롭게 시작함
모세 아빠스가 실바노(Silvanos) 아빠스께 물으셨다.
“사람이 매일 새로운 시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바노 아빠스께서 대답하셨다.
“만약 그가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매시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포이멘(Poimen) 아빠스께서 피오르(Pior) 아빠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매일 새로운 시작을 했다.”
이웃
‘초석’으로서의 이웃
포이멘 아빠스께서 말씀하셨다.
“너 혼자서만 지내면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라.”
안토니오 아빠스께서 말씀하셨다.
“이웃으로부터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온다. 말하자면 형제를 얻게 되면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얻게 된다. 형제에게 화를 내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요한 콜로보(Johannes Kolobos)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집을 지붕부터 짓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집은 초석을 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여쭈였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이 대답하셨다. “초석은 네가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다. 주님의 다른 모든 지침들은 이것에 달려 있다.”(마태 22,39 이하 참조).(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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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3,23참조)
예전 청주 척산리 수련소에서 생활할 때, 밭일을 좋아하는 수련자 덕분에 밭농사 짓는 것을 유심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그때 알게 된 것은 새로운 밭을 일구는 것보다 묵정밭을 일구는 게 힘이 더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지난 수요일 복음에 대한 해설판인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13,19)으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해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릅니다. 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어쩌면 새 밭처럼 작은 사랑과 은총으로도 쉽게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깨닫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은 묵정밭과 같이 말씀을 빨리 듣기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뎌지고 굳어져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여 지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의 밭이 묵정밭과 같은 상태가 아닌지 깊이 숙고해 볼 일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한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에 뿌려졌지만, 그 무수한 씨앗들이 죽어버린 것이 우리 마음의 경직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의 잡식성이나 편식성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반성해 봐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영적 생활하면서 느끼지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점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信望愛적인 응답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인간은 '주님, 당신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십시오.'라고 듣습니다. 그분이 문을 두드리시면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문을 엽니다. 그분이 씨를 뿌리시면 '겸손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사막과 같이 척박해진 인간 마음의 정원을 에덴과 같은 동산으로 복원하시려는 게 하느님의 구원 의도이며 섭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한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응답은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서 말씀을 듣고, 문을 열며, 씨를 받아들이는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겸손이 인간 응답의 최상의 몫입니다.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서진 영혼들이며 그러기에 오롯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 맡긴 존재들입니다.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도 겸손이며, 받아들인 말씀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실 맺게 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비유에 언급이 없지마는 씨와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의 밭, 그리고 씨가 발아를 위해 필요한 수분과 같은 성령의 작용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바로 겸손입니다. 씨인 말씀과 수분인 성령은 시초부터 떨어질 수 없는 한 짝으로 함께 일해 왔으며 특히 인간의 영혼 안에서 말씀의 씨가 발아하고 성장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서로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마음의 밭에서 씨가 발아하기 위해 성령께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는 바로 낮춤과 부서짐으로 비운 겸손보다 더 나은 상태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밭에 좋은 씨가 뿌려질 경우, 성령의 도움인 수분을 공급받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과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씨 뿌리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의 씨를 뿌리고 수분인 성령을 통해 좋은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이며 계획하신 뜻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8,1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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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오직 말씀 받아드릴 그 마음만이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40725. 21:21 ㅣNo.174497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것마저 그냥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이를 두고 한 거다. 그래서 환난이나 박해에 그는 곧 걸려 넘어져 버린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세상 걱정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열매를 못 맺는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잘 깨닫는다. 그런 사람들은 백 배, 예순 배, 어떤 이는 서른 배의 열매를 낸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이다.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가에 따라 그 결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나. 그러므로 씨를 ‘언제, 어디에, 어떻게 뿌리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 역시 많은 씨앗을 뿌린다. 주님을 위해 나름으로 많은 활동을 한다는 증거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결과에 실망과 함께 상처마저 입는다. 그 이유가? 시기나 방법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닐까?
일예를 들어 같은 말과 같은 행동에도, 받아들이는 상대에 따라 그 결과가 쾌나 다르리라. 그러기에 받아들이는 이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고, 그에 합당하게 해야 할게다. 이런 노력에 따라 소출의 결과는 열 배, 백배의 결실을 얻게 되리라. 하느님은 언제나 씨를 뿌리시기에, 그 주어진 은총은 태초부터 지금껏 그침이 없었다. 좋은 땅 나쁜 것 가리지 않는다. 날씨와도 무관하다. 문제는 땅이다. 좋은 곳에는 많은 열매를, 나쁜 곳은 적게, 어떤 곳은 아예 맺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좋은 땅과 그렇지 않는 곳의 차이는? 정말 어떤 게 좋은 땅일까? 습기 찬 곳, 가시덤불이 없는 땅이어야 할까? 예수님도 세례 후 광야에서 유혹에는 자유롭지 못했다. 여타 성인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걸림돌을 만났기에 더욱 기도했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예 좋은 땅에 태어난 이는 하나도 없었다. 어쩜 좋은 땅은 만들어진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이 에게 엇비슷한 땅을 주셨을 게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가 쾌나 중요하다. 문제는 각자 가꾸기 나름이다. 버려두면 황폐해진다.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무엇보다 땅이 비옥해야만 할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나? 그저 주어지는 대로 막연하게 따라만 가야 하나? 분명히 새로운 삶으로 가야하리라. 기도하면서 그분과의 만남을 유지해가야 할 게다. 그런 삶을 살면 또 다른 감동에 잠긴다. 그게 은총의 체험일 게고 ‘믿음’이리라.
그런데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이들 중 조그만 어려운 일에도 금세 버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에. 또 어떤 이는 들은 뒤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빠져 실천하지 않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들은 뿌려진 씨앗이 가시덤불 속에 가두어져 숨이 막혀 죽어 버리기에. 이런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에 해당하는 이들은 결코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게다. 그들에게서는 어떤 열매도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하느님은 이렇게 끝없는 은총을 부어주신다. 우리 삶이 그분만 향한다면 기쁨은 배가된다. 좋은 땅의 결실이다. 말씀대로 이웃을 도우며 살려 하니 손해 보아야 하고, 말씀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니 휴식을 양보하거나 일을 포기해야 한다. 이기심과 명예욕, 분노와 원한에 열심히 물을 준다면, 그것들이 말씀의 씨앗을 말라 죽게 하여 끝내 없어지게 되리라. 내 밭에 무엇을 기르는지, 내 마음에 자리한 게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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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때때로 많은 신자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말씀이 삶에서 무엇을 포기하거나 바꾸도록 요구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만일 의사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살려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여야 하고,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말입니다.
그때 의사의 말을 듣고 그저 가만히만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곰곰이 되뇌며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꾸도록 애쓰겠지요. 왜일까요? 바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를 준비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힘을 일으키나요?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비유된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은 들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 가지지 못한 아주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깨달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열매를 맺습니다.
과연 무엇에 대한 깨달음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깨달음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고, ‘살고자’, ‘생명을 얻고자’ 아무리 어렵고 힘든 말씀도 기어코 열매로 맺어 냅니다.
마치 환자가 ‘생명을 얻고자’ 의사의 아무리 어려운 지시 사항도 모두 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악마는 어떻게든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악마에게 하느님 말씀을 빼앗긴 이들은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믿음은 오로지 현세적인 것만을 얻으려는 도구로 쓸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신앙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구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여 보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외면하며 살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서 싹 사라져 버린 삶이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삶인지 성체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음’을 일으켜 말씀이 열매를 맺는 은총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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