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쟉은 1841년 11월에
첼로협주곡 작곡을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 하였다.
1896년 런던 퀸즈홀에서
레오스턴을 독주자로 세우고
자신이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초연 하였습니다.
뉴욕 국립음악원 교수이며
첼리스트 겸 작곡자인 빅터
하버트의 연주를 듣고 영감을 받아
작곡한 첼로협주곡은 그의
절친 첼리스트인 비한에게
헌정되어 1896년 베를린의
짐로스크에서 간행 되었다.
2년반의 짧은 체류기간이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많은 걸작
생산의 배경이 되었는데
첼로협주곡 또한 체코 슬라브적
체험과 아메리칸 문화의
경험이 결합된 걸작으로
첼로곡의 대표곡 입니다.
드보르쟉의 멘토 역할을
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이 친구 악상의 자투리라도
떠오르면 좋은 주제로 삼을텐데"
하며 칭찬을 하던 브람스는
이 곡의 초연을 듣고
몹시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 아! 도대체 나는 첼로협주
곡을 이와 같이 쓸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알았더라면 오래전에 한곡을
썼을 텐데" 라고 하면서...
드보르쟉의 협주곡이 그가
돌아 가기를 소원한 사랑하는
보헤미아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지만
첼로협주곡을 작곡해야겠다고
마음 먹게된 데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 오타카르의 증언에
따르면 드보르쟉은 첼로 소리가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 같아서 싫어했고 독주
악기 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실내악에서 가장 잘
들린다고 생각 했다고 합니다.
"첼로가 아름다운 악기이기는
하지만 그가 있을 자리는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입니다.
독주 악기로서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첼로 협주곡을 쓴
일이 있는데 미안 합니다.
그렇게 되어서 나는 또
다른 곡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고 했답니다.고 했답니다.
첫댓글 첼로 협주곡 즐감합니다
마크 운영자 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