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 임솔아

바캉스 / 임솔아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눈동자가 눈빛을 놓아주었으면 해서 여름 내내 나는 물속에서 지냈다 물에게 말을 했고 목소리는 공기방울이 되었다 더 가면 안 된다는 목소리와 관두자는 목소리가 똑같이 동그랗고 똑같이 투명했다 물은 차차 깊어졌다 목소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다 정적으로 태어나버린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음속이 침묵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을 상상하면서 별 하나가 성단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추처럼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온 힘을 다해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남은 목소리가 몸을 빠져나가버릴 때까지 그래서 목소리가 멀리 가버릴 때까지 하얀 모래 위에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동그란 물방울들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물방울에게 체온을 나눠 주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하얀 타월로 그 사람을 덮어주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나는 똑똑히 듣고 있다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바라볼 때까지 눈동자가 눈꺼풀을 깨울 때까지 챗GPT해설 임솔아의 시 **「바캉스」**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휴가의 개념과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캉스는 보통 일상의 탈출, 휴식, 해방을 의미하는데, 이 시에서는 물속에서의 고립, 침묵, 그리고 내면의 깊은 고요함이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바캉스'일까요? 1. 휴식과 정반대의 상태로서의 바캉스 바캉스는 보통 떠들썩하고 활기찬 이미지인데, 이 시는 오히려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시적 화자는 물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목소리가 공기방울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즉, 자신의 목소리조차 흐려지고 사라지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휴식과는 다르게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는 과정, 즉 자아를 지우는 바캉스로 볼 수도 있습니다. 2. 일상의 이탈과 물속이라는 공간 일반적인 바캉스는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여름 내내 물속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암시합니다. 물속은 소리도 줄어들고, 중력이 약해지는 공간입니다. 즉, 완전한 단절과 비일상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물속의 상태는 일종의 **비일상적인 휴가(바캉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3. 침묵과 정지된 시간 속의 바캉스 "음속이 침묵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을 상상하면서"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의 중심에는 '침묵'과 '정지된 시간'이 있습니다. 물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몸을 동그랗게 말고 가만히 있는 상태는 휴식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때의 바캉스는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4. 물방울과 타월: 존재의 회복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는 하얀 타월로 누군가를 덮어 줍니다. 이는 물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바캉스가 끝난 후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처럼, 물속에서의 침묵과 정적인 상태를 지나, 다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물방울이 붙어 있는 사람(죽은 듯한 존재)을 감싸며 새로운 존재로 회귀하는 의식처럼 보입니다. 5. '바캉스'가 의미하는 역설 바캉스는 원래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위한 시간이지만, 이 시에서는 정반대로 고립과 침묵을 강조합니다. 즉, 일상의 떠들썩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침묵과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시에서의 '바캉스'입니다. 어쩌면 이 시의 화자는 진짜 바캉스란 외부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결론 이 시에서의 바캉스는 단순한 여행이나 휴식이 아니라, 존재의 정지, 침묵 속으로의 침잠, 그리고 자아의 흐려짐을 경험하는 시간을 뜻합니다. 시적 화자는 물속에서 점점 깊이 가라앉으며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겪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타월을 덮어 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존재를 감싸는 행위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바캉스'란 세속적인 의미의 휴식이 아니라, '존재를 지우는 과정과 다시 존재를 감싸는 과정'을 포함하는 깊은 내면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