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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리더십 (목사 장로의 권위주의 외 각종 폐해)☜
작성자 장경원 2002~2007
기복주의와 무당식 기적 신비주의와 만사형통주의 의 폐해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기복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
이 땅에 엉뚱하게 창궐한 기복주의와 목사 장로의 권위주의만 몰아내어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순수히 부흥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기복주의 기적주의 신비주의를 펼침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닳아봅시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이 구원받는 신령한 영적인 복보다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든지, 병이 낫고 건강해지며 만수무강 한다든지, 자녀들이 잘되고,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구원과 무관한 비본질로 현실적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곳에는 세상 모든 잡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것은 동일한 현상인데, 그 모든 종교들도 기독교 못지않게 육적인 선과 육의 만사형통의 복을 하나같이 추구합니다.
어쩌면 여타의 타 종교들이 기독교보다도 더욱더 기적과 이변이 많고 착함과 선함을 추구하고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죄성의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가 기복심리인데 누구에게나 이 땅에서 만사형통을 꿈꾸며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는 것은 죄로 가득한 인간의 종교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심리이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러한 육적인 축복을 사모하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이교도들의 교리이지 우리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에도 수도 없이 기복주의를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주면 간음이라고 명시하며 잘 못된 신앙임을 명명합니다. 우리 믿는자를 신랑되신 예수의 신부라고 하는데, 예수님 말고 육의 세상 그 무엇에라도 마음을 조금치라도 두면 간음 행음 한 것이라는 성경말씀, 이제 이해가 가지요. 우리는 영의 축복, 오직 육을 죽이고 영의 것만을 사모해야하는 그리스도를 믿는자입니다. 믿는자이면 누구나 알지 않습니까? 아모스8:11 신명기 8:3 = 굶주림 가난 궁핍 핍절 기근 양식 등이 다 영적인 뜻입니다. 육의 배는 열심히 살아 일반은총으로 전 인류에게 주어진 육의 복은 성실 검소하여 열심히 사세요. 그리고 주님께는 영의 복 영의 축복만을 구하고 구하세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영의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 하며‥‥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망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디모데후서 3:1∼4, 4:3~4)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은 마귀이며, 악한 자가 세상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다스리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다 받은 자들이며 그날들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 갈 것이다. (시편 17:14-물질의 만사형통이 아닌 주님의 얼굴로 만족해야하는 믿음, 욥기 21:13-물질 축복을 쫏으며 주님 앞에 나오는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가축을 기르는 지저분한 외양간에서 출생하고 가난한 목수의 집에 나셔서 세상의 부귀영화는 조금치도 누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것이라고는 십자가 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주님께서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 땅에서 무슨 욕심과 미련이 그렇게도 많은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완전하고 영원한 것, 거룩하고 신령한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을 위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하늘에 간직해 두셨다(베드로전서 1:24).
주님께서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요한복음 3:3), 영적으로 (걷으로는 모르고 믿는자 스스로만 아는) 거듭난 분명한 경험을 확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슨 육신의 복을 그렇게도 사모하는지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저자신도 답답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축복은 전혀 주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온전히 연합되어 구원을 받으면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많고 적음을 떠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주시는 것입니다(마태 6:31~34=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 염려 않해도 꼭 쓸만큼만은 주신다).
그저 우리 믿는자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물질의 욕심 없이 주시는 만큼 안에서 자족 할 수 있는자가 참 그리스도인 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자는 이미 홍해를 건너와 버렸습니다. 이미 들어서버린 그 광야의 고난생활을 벋어 날수 없습니다. 기복을 쫏으며 애굽을 지향하여도 이미 홍해는 닫혀버렸으니 백날 기복 신비 미신을 쫏아도 애굽으로 돌아갈수도 없습니다. 난 아니야 나는 절대 애굽을 지향하지 않아 해놓고는 애굽인들이 하는 기복 미신주의를 적극 지향하는 우리스스로를 보면 답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하고 참된 것입니다.
<고후4:18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이란 다 육의 것, 육을 위한 것입니다. <골3:1-2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 세상에서의 불과 몇십년 간의 인생(삶)이란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 세상의 즐거움과 만족이란 영원한 천국과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에선 우리 믿는자 더러 이를 인정하고 이 땅에서 육의 자아 나를 포기하라고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한가! 그러나 비록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사람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더욱 귀하게 여김으로 하나님의 영적 축복을 멸시하며 즉 하나님을 멸시하며 육의 자신이 잘 되는 것에만 열정을 다하여 그 육적인 기복의 만사형통을 얻어내기 위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고후11:4, 갈1:6~10 본문 말씀에는 육의 만사형통은 다른 복음 즉 예수와 무관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의 상태가 2,000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유대인들과 바리세인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닳은 점이 많은가를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학대하며 매일 같이 욕을 하는 바리세인과 유대인을 우리끼리 지어낸 율법을 쫏습니다. 그들보다도 못한 신앙관으로 예수를 믿고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면 거기에 서있는 우리는 기복주의와 무당주의와 신비주의에 쩔어서 신앙생활을 해가는 우리에겐 정작 예수 십자가 복음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고후2:17 기복 신비로 하나님 말씀을 팔아먹으면 아니됩니다. 기복주의 기적주의자들도 예수이름을 우렁차게 외치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기십자가란 없습니다. 부자로 잘 되게 해준다고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기복 기적으로 꼬셔서 헌금 물질로 교인 숫자만 늘리는 부흥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부흥인지에 대하여는 단 한번도 생각을 않해 보는 것인지? 그러한 비 본질적 부흥은 타락만 양산합니다. 길 거리에 나가 시내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빌딩들의 주인인 그 때부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복 기적 치유로 헌금 하시면 헌금하고 지옥갑니다. 구약의 십일조 헌금 백날해 보십시오, 당신의 교회안에 얍삭한 인격으로 더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된 성도는 몇 있을지 모르지만, 일평생 기복 때문에 헌금하고 부자된 성도가 있는지 한번 사실 조사를 조용히 생각하며 해 보세요. 그냥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땅에 아니 이 우주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그냥 받은 은혜에 감사 함으로 헌금 좀 많이 하세요. 이런식으로 사탄마귀 기복주의에 놀아나 육신적인 축복만을 갈망하는 나머지 영혼을 구원해 주시는 주님은 마음에 영접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요. 생명과 대신에 먹으면 죽는 육적인 선악과가 더욱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이므로, 그것을 먹음으로 죽게 하는 기복기적주의 사단의 궤휼에 속고 있는 것이 21세기 한국 개신교임을 깨닳아야 살것입니다.
(막7:1-23) ~~너희의 전한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끼리 지어낸 인본적 전통이란 말로는 그럴사하게 예수님으로 포장하지만 거기에 참 예수가 없음을 우리는 뻔히 잘 압니다. 예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라든지 우리의 여건, 우리의 경험, 체험, 노력 같은 외부의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것들이 너희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의 내용을 자기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 등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그러한 육적인 신비주의적 체험사실을 마치 구원의 조건 또는 믿음의 척도로 알고 잘못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육적으로 신기한 큰 경험을 했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로 신앙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적적인 체험을 하고 당면했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우리가 드렸던 기도가 응답이 되고 하는 것은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병고침이나 신비스런 기적 체험이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하며 그런 체험을 했던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존경스럽게 장성한 사람을 못보았으며 오히려 미신에 빠뜨리고 정작 예수 십자가 복음에 관련한 절대 믿음의 조건은 등한시하는 우리들의 히한한 믿음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함에 있어 기복신비은사주의가 아주 약간의 양념 정도는 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미신식으로 악용하여 이상한 무당 종교 행위에만 열중하는 것에는 예수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말하면서 사이사이에 예수님을 끼워넣지만 진실로 거기에 목적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며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영혼을 잡신으로 죽이는 쓰레기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미신 무당들이 하는 짓들이 본질의 내용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로만 따지게 됩니다. 십자가복음 십자가 구원과는 무관하게 미신짓거리를 하나님인양 엉뚱한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겨우 무좀 나은 것 가지고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셨다”라든지, 겨우 동네 양아치 노릇 좀 한 것 가지고 “자기가 과거에 조폭 두목이었었다.” 라든지 그런 것을 설교자들이 허풍을 떨어 하나님이 타 종교들에서도 무수히 일어나며 지향하는 것들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들을 하게 됩니다. 왜 이리도 허풍떠는 거짓말 설교를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무시로 해대시는지... 꼭 그렇게 까지 허풍을 떨어야 십자가를 전할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기복적인 성과나 무당같은 신비한 체험이나 병고침이나 육적인 잘 됨들이 십자가 보혈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성경과 조합 조작하여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성도들을 끌고가는 것은 육이 잘되려고 환장해 있는 인간의 종교심리를 이용하여 잡귀를 이용하여 현혹시켜 십자가 복음은 간대 없고 무당 짓을 해서라도 성도 숫자만 늘리면 된다는 식의 회사 사업체로서 교회 부흥을 일구어 보려는 의도와 목사가 육적인 성공을 하려는 심리에서 나오는 나뿐 짓에 기복 기적 신비주의 등을 활발히 사기처서 이용해 먹는 것입니다. 대체 이러한 잡신적인 것이 우리 믿는자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그러한 밖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2:9-16)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 예수님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기복주의 신비주의적인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열심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성령께서 은혜로 선물로 믿는자에게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왜 사람들이 신비스러운 듯한 방언을 하고 싶어 합니까? 그냥 교리 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인본적인 모습의 내가 목사가 장로가 더 커보이고 더 잘나보이고의 심리임이 여실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방언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비교심리에 의하여 거처 없이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삼각산 기도원 같은 곳에서는 방언을 연습하고 가르치는 방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저 아래쪽에 있는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구역 예배 때 방언을 못하는 사람을 따로 갈라서 “할렐루야”를 가지고 천번씩 빠르게 외처 방언을 연습시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과 무관 하게 인본적 경쟁심리로 엉뚱한 신비주의로 뭔가 신앙적인 우월감을 방언으로 뽐내고 싶어 합니다. 이게 무슨 기독교입니까?
칼빈이 방언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루터가 방언을 했나요? 어거스틴이 방언을 했습니까?
방언을 안 해도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는 건 분명한데. 지금 방언이 있다 없다 에 대해서는 제가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제가 저의 주관으로 우길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종교에도 우리와 유사한 다 방언이 있고 종교적인 특별히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극단 적인 세대주의 자들처럼 “마귀가 주는 것이라는 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에게 방언은 매력 없는 꾕가리 소리 같은 울림에 불과합니다. 방언과 믿음의 장성함과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이런류의 신비주의는 우리를 그 비 본질로 인하여 지옥으로 끌고 감을 알아야합니다.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들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아닙니까. 과연 신비주의로 널려있는 방언자들이 교회에 덕을 조금치라도 세우고 있나요. 고전14:12-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 은사로 우 열반으로 갈라 마치 그러한 방언과 같은 여타의 은사가 믿음의 척도 인양 사랑은 도무지 없으면서 엉뚱하게 변질 되어 버렸습니다. 은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와 조금 부실한 은사를 가진 자 특별한 은사와 부실한 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것은 조금 세 보이고 자기의로 째내고 자랑삼기에 좋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은사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모두 헛것이다.“ 라는 것이죠.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그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그 것으로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사가 아니겠지요? (고전14:1~9, 14~15 19절=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낱다) (고전14:27-30) (사28:1-3,11-12)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를 증명하는데 쓰는 시드기야 같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권세와 힘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쓰는 바보 같은 사람이 참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신비적인 체험이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교회와 세상에 자랑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앞장서 이러한 것을 권장하고 이런 더러운 것을 능력이라고 과시하고 다니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가지고 나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험을 통해서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엉뚱한 기독교 미신식의 신비주의 은사주의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비 본질 때문에 본질 즉 십자가 복음, 십자가 은혜를 진실로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 본질에 휩싸여 말로만 예수십자가를 말 할 뿐 신앙의 본질인 예수를 엉뚱하게 이용하고 종당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마12: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신랑 예수를 몰라라하는 세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기적주의를 쫏는 그들이 바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밖에 그 외의 표적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복이 뭡니까?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나요? 그 병고침 같은 것을 받으면 예수를 하나님을 밝히 소상히 알아저 십자가 복음의 믿음이 커지던가요? 오히려 예수를 미신으로만 더 크게보는 것이 우리들의 사실 아닙니까! 정신이상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온전한 순수 믿음 없이도 영원히 삽니까? 오히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결국 육신은 썩어질 유한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하는 곳은 저 하늘나라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배웠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으로 우리가 마땅히 영적으로 얻어 누려야 할 기쁨을 육 적 기쁨으로 바꾸어 버리고 목사 자신의 무당적 능력이라고 유명해지면 그 무당 목사가 귀신들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 적 기쁨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을 방해하며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그런 것보다도 훨신더 기가막힌 기적 어마어마하게 많이 일어납니다. 기적 같은 것 좇지 마세요. 뭘 또 보고 싶으세요? 롬8:24~25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우리는 참음으로 기다려야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보지 않아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기적주의 기복주의 아니면 예수 않 믿을 것입니까? 예수님이 뭔 무당입니까? 믿음을 왜? 믿음이라고 합니까 않보이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입니까? 이미 눈에 실물로 보여버리면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기복 기적에 환장을 해야합니까?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그 광야 40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날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시험을 받습니다. 유독 나만 다를 사람보다 늘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삶 동안에 아주 빈번히 있습니다. 진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떠세요?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거기에 만족하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완전하게 항복하고 그 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 자, 즉 영적인 복을 회복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러한 불행한 시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자의 일평생인 것이지요. 그것에 순응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독교 예수님의 방식이란 총칼로 재물로 명예로운 직업으로 우리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게 하시는 하나님? 그게 진짜 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시면서 오늘도 나의 추잡한 인격의 한부분이 죽고, 나의 고약한 습관이 죽고, 나의 악한 생각들이 죽고, 십자가 앞에 내가 부인되고,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절히 자백하는 것으로 기뻐하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자고 해놓고는 우리는 기적주의 신비주의에 쩔어서 예수와 무관하게 종교쟁이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좀 먹고 있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서 벗어나야만 그때서야 참 신앙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무속사상은 우리 민족의 종교 사상의 원형이지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이야기할 때 이 불교 유교적인 무속사상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그 유전됨을 벋어나기가 어쩌면 불가능하기 까지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가 정립할 내용 중에서 기독교내에 깊이 침투해 있는 우리 민족 무속사상의 극복은 대대적으로 매우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기독교국가 중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 개신교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형태인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산상기도회, 기도원 집회, 각종 은사 집회, 자녀 입시를 위한 특별 기도회, 특별 작정 40일 또는 100일 기도회 등은 한국 기복주의 전통사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 치성이면 감천식 기독교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엄연한 사실이나, 치성이면감천이라는 식의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왜 ? 우리는 무속신앙관에 놀아나야합니까. 10년간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했더니, 10년간 십일조를 한결같이 했더니 때복을 받고 때부자가 되었다 이런 기복주의 기독교가 기독굡니까? 대체 하나님을 뭘로 보는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 믿는자를 부자 만사형통 만들어 주는 맘몬 금송아지입니까?
한국의 기독교는 신약성경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나 ‘주는’ 종교에서 ‘받는’ 종교로 변해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보다 한국에서 더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습관들이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 동남아, 중국 등의 국가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은 헌술 더 떠 한심한 현상임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점점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는 물질적 축복을 얻기 위한 초자연적인 복을 얻기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역사학자인 매리 코너는 ‘복’에 집중하는 한국 교회의 물질적 집착을 샤머니즘 종교의 영향으로 파악한다. 그녀에 따르면, 기독교를 포함해 한국의 모든 종교는 ‘현세의 소원’을 비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부흥회적 영성은 기복주의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당시 각종 부흥회 혹은 부흥사경회가 기독교인들의 열심에 불을 붙인 것은 사실이나, 부흥회에서 말하는 복은 육적인 물질적인 것이었고, 부흥사들은 복을 얻는 첩경으로 신앙적 헌금과 헌신을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조합 조작하여 꼬셔서 따르게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즉 천만원 헌금하면 십억을 버는 복을 주겠다고 기복심리를 이용하여 사기를 치는 예수님을 잡귀로 팔아먹는 짓거리를 서슴없이 해대는 목사들이 즐비하여 그 사기를 잘 침으로 부흥을 이룬 교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은 거의 많은 부흥회의 공통된 주제였었었음을 우리는 다 잘 알며 요즘도 예수그리스도를 적절히 잘 짬뽕시켜 기복주의 신비주의 만사형통주의를 통하여 사기치고 돌아다니는 유명한 부흥강사들이 아직도 더러있습니다.
또 우리들의 기독교가 육적인 잘됨에 있어서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간주하는 경향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하는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개신교 내의 기복주의는 목사들의 권위권력계급주의와 한국의 전통사상인 샤머니즘적인 요소와 미국 교회에서 들어온 소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교회 성장주의와 번영 복음이 짝을 이루어 강단의 주요 주제가 되어 왔고, 이러한 사상은 급격하게 성장한 대형교회 위주로 그 영향을 퍼뜨려 나가면서 목사들의 타락은 물론이요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한국의 목사들이 앞장을 슨듯한 과정이 없지않아 분명히 있는데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 인하여 기복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무섭게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동승하여 물질숭배(맘몬이즘)의 모습으로 교회 곳곳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심지어 상당수 교회들에게 현재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의 메가처치들의 여러 방법론도 이런 자본주의적 경영철학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여러면에서 교회를 회사로 꾸려가는 작태도 보이고 있으니,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 점검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전통적 샤머니즘 사상과 결합되어 새로운 이단이 아닌듯하지만 실제는 얍삭한 이단으로 진화해 나갈 위험성도 매우 큽니다. 아무리 숫자적 부흥 도 중요 하지만 본질적 순수의 규정선 없이 끝도없이 기복주의 신비주의를 포장시켜 엉뚱한 기독교회로 변질시키는 것은 진정한 부흥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힘듬의 일생임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명확히 해야지 이 땅에서 만사형통 이루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야합니다. 이런 말은 듣기 싫은 가슴을 후벼파는 말입니다. 만사형통 때부자 복이 기독교가 아니며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 더 이상 기대는 것은 죄란 것을 명확히 선언해야 합니다. 교회가 숫자적 의미로 부흥이 되지 않터라도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더라도 말이지요.
제대로 참 진리를 알 필요 없이, 때 복을 줄태니 그냥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믿는자 스스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궁굼해 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의 ‘교조주의, 맹목적 반지성주의’ 자기 희생과 사랑의 실천 없이 건강과 물질적 축복만을 바라는 ‘샤머니즘적 기복주의’화 되어가는 경향을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지금 여기 이 세상 속에서 희생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내가 죽어지는 것이 축복이다 라고 말해 주어야합니다. 새벽기도 같은 열심과 열정은 한국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것이 기복 만사형통을 위해서라면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현세의 요행을 바라는 도교적인 ‘새벽치성’ 처럼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죄를 자복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게 돼요. 그런데 보통은 예수 믿으면서 아이들 학교 잘 들어가고, 장사도 잘 되고, 내가 편안하고, 운전해도 사고 안 나기를 바라죠. 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긴 하지만 내 마음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는 영적인 것이 진짜 복입니다”
마이클 호튼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유혹이라는 것은, 흔히 그리스도를 나의 축복으로 믿기 보다는 오히려 만사형통 물질 축복을 얻으려고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도 이런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 했다고합니다. 새들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난 하여도 꼭 필요한 만큼만은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데도 채워주시지 않는 이유는 근본적인 유익 즉 자기 째내려고 하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한국, 미국 등지에서 유행하는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청부론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복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꾀한다지요. 그들은 교회 일에 충성만 하면 무조건 만사형통한다고 말하지는 않고, 바른 생활과 바른 신앙을 강조한답니다. 옳게 믿고 옳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답니다.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반듯하게 떼라고 요구한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청부론이 기복주의와 다르다고 강조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된다는 마지막 말은 또 다른 기복주의 말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또 다른 기복주의 일 뿐입니다. 육으로 착한일 많이하고 살아 육의 복을 받자 이는 세상 모든 이방 종교에서도 하는 일들이며 무종교자들 중에도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즐비합니다. 어쩌면 육적인 착함이나 선함은 기독교인들이 더 얍삭하고 이기적이며 더러운자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5장의 8복은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영적인 하늘의 복을 일컬음임을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로 해석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의 복으로 해석하는 복과는 정 반대이며, 참된 기독교형 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물질과 저절로 부해지고 강해지고 높아지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고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한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그렇게 살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그들은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절대 놀아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28:1~7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실물 축복의 시대인 구약의 말씀이 지금 신약의 영적 은혜의 시대를 두고 한 말씀이 아닐지라도 그저 읽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읽을 때 비참하게 하나같이 궁핍하게 살다가 천국에 간 믿음의 선진들은 전혀 생각이 않나나요.
딱 맡는 예는 아니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제 개인적인 돈을 5천억원을 내가 손수 시여서 어느 먼 나라의 개인 금고에 잘 보관해 놓고, 그 금고 열쇠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제 손으로 넣어 노았고 내 손에 금고 열쇠가 있으니 금고가 있는 그곧의 풍요를 확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너무 멀고 멀어서 상황이 맞지 않을 경우 그곧에 수시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제 있는 곧에서 형편이 않풀려 몹시 궁핍합니다. 그러나 5천억원이 들어있는 금고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틀림 없이 거기에 갈 수 밖에 없고 가야만 하는 그 금고가 있는 곧을 소망하며, 조금 힘은 들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니 형편따라 현제의 궁핍과 고난을 잘 이겨내며, 나의 금고가 있는 그 곧에 갈 날을 기다리며 마음만은 기뿜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죠? 이것이 예수 믿는자의 육적인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돈이 5천억이나 나만이 열 수 있는 내 금고에 있으니, 현제의 궁핍과 고난을 이겨 낼 힘이 내게 있는 것 아닙니까? 딱 맡는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현제 궁핍과 고난이 있다하여 그것을 왼갖 인본주의 육욕으로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꼭 복! 복! 복! 복! ~~ 해야 하겠습니까?
허나 육의 만사형통 때부자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 육적인 것에는 아무 관심 없이 오직 영의 신령한 복에 전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을 “예수 잘 믿는다”로 깊이 이해하고 이 땅에서 육으로는 주님 주시는대로 자족하며 피땀흘려 성실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다간 현제 영의 은혜의 시대인 신약의 선진들은 기복으로의 때부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진짜 우리가 존경하는 신약적인 믿음의 선배들은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육으로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육을 위해서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살아 이미 하나님이 땀흘려야 겨우 먹고산다는 저주적 축복을 인류에게 주셨으니, 그냥 뼈빠지게 열심히 살며 하나님 주시는대로 자족하며 살면 그만입니다. 우리안에 진리만 가득 하다면 그까짓 물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여기는 자유를 행복을 느낄줄 알아야 그게 예수 믿는 믿음 아닙니까?
기복주의 꼬심에 동하여 헌금 해봤쟈 아무 소득 없습니다. 차라리 이 땅에서 그리도 육의 성공을 바라신다면 정말 한번 실태 조사를 해보세요. 제가 이런저런 집들에 놀러 가보면 불상을 집에 갔다놓은 불교인들 때부자가 부자중에 태반이며 길거리의 수많은 빌딩들의 주인도 거의 다가 불교인이라이까요? 그 부의 정도가 기독교인 부자들과는 비교가 않될 정도입니다. 이방 종교인들의 때부자는 부지기수로 많고 많습니다. 언젠가 길가다가 길가에 떨어저 있는 불교 간증집을 있어, 탐독해 보았는데 불교에는 우리보다도 더 한층 풍성한 때부자 복 기적 병고침... 놀랠로자로 많터라고요, 정말이예요, 불교 서점에 한번 가보세요,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라면 천국이고 지옥이고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십자가 속량도 속죄함도 관심 없고 그저 육으로 만사형통 무병자수가 목적 이시라면 정말로 불교나 다른 종교에 가바야겠더라고요. 정말 우리는 이렇게 잡종교로 예수를 믿으면 않됩니다.
그렇다고 육적으로 선하고 착하게 살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자가 육으로도 선하게 살지 않는다면 때복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믿는 내가 더럽게 살면 예수님이 나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시니 반드시 기복과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함과 의로움과 착함이란 세상 그 무엇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을 붙드는 것,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을(롬3:22~26) 하나님은 착하다 의롭다 선하다 하신 뜻이지, 이 땅에서 선하고 착한일 많이 한다고 이방종교의 교리처럼 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6~17) 하심처럼 선함 착함 의로움 들은 모두 믿으로 해결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말대로만 하는 것을 착한 아들이라하고, 아버지 시킨 일을 잘하면 선한 삶인 것이지, 인간세상에서 사람마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선 착함 의의 윤리 도덕적 인간 기준으로의 선함 착함 의로움이 절대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육으로도 착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착함이란 육으로의 착함이 아닌 믿음으로의 영으로의 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살아가듯 육으로 제 아무리 착하게 살아보십시오. 만사형통의 복을 받나, 우리보다도 육적으로 착하게 사는 이방인들이 부지기 수 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이란 어쩌면 예수만으로 행복해야하고, 다른 모든 것은 고달풀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교회가 탄생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은혜가 충만해지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고 성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서 존경도 받고 어디를 가든지 대우를 받으려는 기대 자체는 나쁜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치 우리의 이러한 부푼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들을 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 석상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고별설교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잘 믿으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들을 신약에 여러번 주셨지요. 예수님의 고별 또는 유언 설교라고 하는 요15:16~27 ~ 요16:4 ‘미워한다’는 말이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번 정도 짚고 넘어가려는 의도에서 언급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신약성경에는 예수를 제대로 잘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이 수 없이 많이 나와 있음을 우리는 잘압니다. 그중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표현들을 살펴보면, ‘미워한다’는 말에서부터 시작해서 ‘출회한다’, ‘환난을 당한다’, ‘죽인다’는 말씀까지 점점 더 그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칭찬받고 대접받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도리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믿는자가 세상 이방인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어쩌면 교회안에서 행위 믿음의 태도로서 성도끼리 서로 키제기하고 하는 병폐가 인간의 잘난체 심리가 생성되어 성도끼리도 친숙이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믿는자의 세상적 윤리 도덕으로의 착하고 선한 삶은 예수를 믿으니 당연한 것이지 그런걸 잘지킨다고 해서 인과응보식 착한일 많이하면 복을 준다는 타종교식의 육의 복을 하나님은 절대로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착한 일은 타종교인들도 더 잘합니다. 복음이란 믿음이란 성경의 진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맘다하여 믿음의 100% 모두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연합 시키면 그것으로 육이 아닌 영적인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지만, 그리고 우리는 때론 그것들을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만, 할수도 있지만 그 육의 것 구함이 주가 되어서는 절대 않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착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과응보 잡신적 복이라면 예수님에게는 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육적인 때 복은 다른 종교로 가보면 그들은 그것만 중점적으로 팝고 또 팝니다. 그러니 그쪽이 훨씬 우리보다 몇 곱절 더 육적인 물질 축복 성과가 좋을 것입니다. 만사형통으로 행복하게 육이 오래 사는 것이 복이라면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는 참 복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참 풍요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인간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것으로 그 실물 물질의 풍요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가축이 많고 자식이 많으며 재물이 많고 땅이 많고 건강한 것으로 구약의 축복 받은 인물들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제 신약 현 시대엔 예수님이 오셨고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것들로 하늘의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그 구약의 육적인 보이는 것에 축복의 개념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그 구약의 복으로 오늘날의 복을 설명합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고 등등.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고린도후서 3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약속하고 소망하게 만듭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여 가리키고 있는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말저말 섞어서 육으로의 기복주의를 집어넣어 이 땅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의 것을 축복으로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 기복 미신 신비주의 목사님들은 듣기에 껄끄러운 십자가 복음 예수를 이야기 하지 않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어찌어찌하면 상급을 받고 물질축복을 받고로 꼬시며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육의 물질의 축복을 논하며 크고 넓은 문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좁은 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참 선지자들은 신구약 모두다 늘 외로웠습니다. 육의 기복을 팔아먹는 거짓 선지자들은 맡겨진 양을 잘 양육하고 받들어 모시여 섬기고 도움이 역할을 해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들의 고기와 털이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에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자기의 재산입니다. 교인 숫자 늘리는 부흥의 목적이 목회자의 성공을 위함이 눈에 보일 때가 몹시 많이도 주변에 목격됩니다. 그런거에 속아서는 이제는 아니됩니다. 예수는 육적 세상의 복이 아니라 영의 세계에서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도 이런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했지요. 교회 안에는 분명 두 부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복도 받고 소원 성취도 해서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요한처럼 예수를 위하여 자기가 쇠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자기의 발등을 찍은 것이지만 기복주의 설교를 하면 교회를 신앙을 버리는 부류들도 앞으로는 점점더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까지 우리가 잘못 달려 왔음을 안다면 서서히 점진적으로 기복주의를 씻어내야만 할 것입니다. 본질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많이 변질되어 단번에 실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은 여지껏 잘못 믿어왔다손 치더라도 기복주의 설교가 아니면 먹을줄을 몰라서 떠나버릴 성도의 영혼도 아까우니까, 급속히 기복주의 예수 미신주의를 없에는 것은 위험하니, 점진적으로 참으로 조속히 서서히 오직 십자가복음주의 설교로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육의 복을 추구하는 만사형통 때부자 육의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한국 교회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날마다 깨달아 가는 것을 신앙생활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붙듦으로 내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복을 누리자 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복이라는 말씀을 모조리 다 영의 복으로만 받아먹을 수 있는 믿음, 성경에 나와있는 “죄”란 모조리 “영적인 죄” 즉 하나님 말고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말라 하심에 대한 죄를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이지, 세상 것에 마음을 두어 세상 것을 사랑한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이지, 인간끼리의 인간사회적 죄 윤리 도덕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죄도 저지르면 않되 겠지만 그것 때문에 지옥가는 것은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합니다.
세상적 죄야 남들에게 비웃음 받지 않으려면 경찰에게 잡혀가 감옥에 가기 싫으면 믿는자든 않 믿는자이든 인간이기 때문에 지키는 세상적인 죄 윤리 도덕 않믿는 사람도 다 지키는 것을 크리스챤이 조금 더 잘 지킨다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 천국에 가게 해준다~ 뭐 이런 것이 기독교가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복주의가 아니어도 만사형통의 복을 받지 않터라도 크리스챤이 복과 무관하게 착하게 살아야지요. 그러나 그 짐승적 기복심리학을 물리치고 올곧은 천국을 소망하는 참 믿음으로 키워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개신기독교에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힘들고 힘들어야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허다한 잡신과 기타 수 많은 종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닳아야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분이 아닙니다. 정말로 세상에 즐비한 수 많은 기복종교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저 허다한 종교쟁이임에 틀림 없습니다.
교회 집회를 빼 먹으면 벌이라도 받을까봐 교회에 출석하고, 천국만을 소망한다고 입으로는 말해 놓고는 정작 진심은 육의 풍요를 소망하고, 헌신 봉사 희생의 일을 하면서 육의 복을 하나님이 주시려나하며 그것도 자기의로 열심하고, 뼈빠지게 육의 삶을 위해서도 노력해야하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인 것을 망각하고 예수 믿으면 아무 노력도 않하고 믿음으로 믿음로 라고 하며 노력 없이 요행이나 바라고, 자신의 기복적 광신 맹신이 마치 믿음이 좋은 우월감에 절어 타인의 믿음을 무시하고, 여타의 종교나 무당들도 흔히 경험하는 신앙으로 경험된 황홀경에 쩔어 살아 역동 하시는 하나님이 운영 하시는 현실과 적응하지 못하는, 비 본질인 기적이나 병고침이나 신비로운 현상이나 쫏아다니는 광신자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고 그러나 광신자 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헌금 않하면 하나님이 돈을 최고로 좋아 하시니까 내가 저주 받을 거라 생각하고 두려움으로 헌금을 하고, 진짜 영적 분별력에 대하여 궁굼함이 없이 메스컴상 소문상 인기있는 기복주의 목사를 맹목적으로 쫏아다니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 즉 종교쟁이로 살아가는 개신교 성도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님들이 이 수 많은 종쟁이들을 만든 것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시고 본질로 되돌려 놓아야합니다. 목사님들 조차도 참 복이 무엇인지 모르신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육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미3:5~6, 11>
그러나 이 참 복을 소유하고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때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가진 것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뒤로 돌아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생의 축복, 하늘의 축복,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좁은 길도, 험한 길도, 십자가의 환난과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가난 궁핍한 일평생 중에라도 기뻐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좇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비 기적으로 믿음으로 외형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입니까? 그냥 보이는 것이며 직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기적 신비를 보면 십자가가 보이나요, 구원의 확신이 더 서나요? 허다한 잡 종교에서도 하는 기복주의, 만사형통주의, 무당식 신비 기적주의 병고침 등등 육적인 나타남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탄마귀의 장난질입니다. 이런건 예수 믿는 것과 구원 받는 조건들이 절대 아니며, 이러한 것들은 타 잡종교들에서 얼마든지 더욱 융성하게 일어나니, 그러한 것에는 관심 조차도 갖어서는 아니되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러한 허접한 하나님이 아니심을 깊이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고후11:13~15 사탄도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거짓 선지자들도 의의 선지자로 둔갑해서 기복 미신 신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무엇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대로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성경대로 성도들을 영의 양식으로만 양육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십시오. 교회가 얼마나 큰지, 목사가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인지, 교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떤지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그 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고 천국만을 소망하며 고달픈 십자가 복음만을 예수만을 가르치는 바른 교리 위에 서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목사가 타협하지 않고 바른 말씀, 바른 복음만을 전할 수 있도록 서서히 유도하여 기복 미신 신비주의를 몰아 내도록 늘 기도해줍시다. 기복주의, 미신주의, 신비주의, 병고침 은사주의 등등의 잡종교적인 것들을... 한번 벋어 던저 버리고 참 십자가 복음 진짜 예수를 만나 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짜 믿음 롬3:21~31
참고도서 :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국제제자훈련원
조정민, <사람이 선물이다>, 두란노. 마이클 호튼, <복음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교회 안의 권위 권력 계급주의의 폐해++++
순종 : 진심으로 우러난 태도로 다정스럽고 친절하게 따른다.
복종 : 명령 한대로 자기 의지가 없이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따른다.
지도자 : 조직의 목적을 향해 그 구성원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자.
지배자 : 권세와 힘으로 군림하여 지배하는 폭군 또는 압 제 자.
섬기다 : 상대를 모시어 받들다. 남을 힘써 거들어 주다.
권위 :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을 키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
권위자 : 그 방면의 탁월한 전문가.
권위주의 :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
권력 : 남을 지배하고 복종 시키는 힘.
권력의지 : 남을 정복 동화 하여 더 한층 강대하게 되려는 의욕 (인간의 보편적 폐악적 심리)
독단주의 : 잘못을 검토하지 않고 일방적 주관적 편견으로 판단 추진을 함.
교조주의 : 무 비판적 무조건적으로 추종 함.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진정한 영적권위는 없이 육적특별 권위 권력 남용은 수 십년간 참으로 한심하고 위태롭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신약성경상 진짜 권위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스스로가 여러 행태로 무너뜨려 놓고, 엉뚱하게도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에 의해 권위를 무너트려젔다고 성도들 남의 탓을 일삼으며 목회자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하며, 고유권한이라고 하며 성도와 의논하여 진심으로 존중하며 함께 합력 동역하지 않음을 당연시하여 믿고 따라 주지 않으니 권위가 무너저 리더 하기가 어렵다고 누어서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벧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막10:45) 밑 바닦형 섬김으로 (엡6:6-눈가리고 아웅치 말고 하나님을 섬기듯 성도를 섬기라~ 마20:11) 인한 존경 받음의 영적권위는 있을지언정 인본 세상적 목사님의 군림하는 제왕적 특정권위주의는 예수께서 구약을 완료하여 묻어버린 구시대적 폐물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받들어 모셔 무엇이든 거들어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님들이 타인을 섬기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나 섬김을 대접을 받는 것은 보았어도, 진짜로 실제로 성도들을 존중하며 성도들 밑구녁에 들어가 받들어 모셔 도와주는 것을 목격 한 바 없습니다. 목사님들 스스로가 섬김의 방법으로 리더하며 본이 되는 삶을 삶으로써 존경으로 비롯 된 리더쉽이 발휘되는 그러한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오직 예수를 향한 정절에 본이 됨으로 제도적 권력이 아니어도 그 누구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업신여기지 못할 만큼 거룩성으로 인한 존경 받음으로 인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우리는 “새 언약”의 “신약”의 시대라고 알고 그리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이 공산당식 절대 권력계급주의가 현대교회를 폐망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직함 직분이란 하나님 앞에 더 희생 헌신으로 더 낮아지는 직분 일 뿐이다 라고 우리는 말은 잘도 합니다. 허나 목사님 먼저 목사라는 그 직함에 외곡된 인본적 권위를 세워야 한다하며 계급을 형성합니다. 높임을 받으려거든 낮아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100여년 전 개신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교회에 목사에 대하여 어찌 가르치고 인식을 시켰는지, 처음부터 그러했는지? 신약성경에 수도 없이 낮아지라고 말씀을 주셨건만 목사 장로가 사람들 앞에 무슨 육적인 벼슬이라고 그 인본적 벼슬을 악용하여 마땅히 해야할 고난은 당하지 않고 육적인 벼라별 짓을 다 해버리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주식의 이 계급주의 때문에 독단 독제 권위주의로 흘러 우리들의 교회가 한심해저 21세기 현제 2005년에 이르렀습니다. 성직도 아니지만 통상 언어로 성직매매!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간 것인데, 돈내고 장로가 되니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려드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겠지요. 만인이 제사장인 개신교회의 기치는 어대두고 16세기 보다도 더 변질 타락된 이 서열 계급주의 예수님☞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등 등식의 아니틱히 펼처저있는 이 더러운 계급주의 말입니다.
평신도들도 목사 장로 목에 힘주는 것을 본받아 덩달아서 자기들 끼리도 서로가 잘났다고 좀더 권위를 갖으려고 이러한 자존감 자기만족형 자기과시 우쭐댐 때문에 십자가 없이도 순교하고도 남음이 있는 남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잘났다는 인간심리가 녹아있는 교회안의 권력만족형 인간심리 자기만족식의 권위적 신앙생활은 우리들의 신앙의 본질(예수)마저도 의심스럽게합니다? 자기편의적 전통이 아닌 진짜 “영적권위”는 무엇일까요??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신약의 예수님은 목사님을 세워 영적권위를 주셨다고 칩시다. 그 영적권위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나 사람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과 사단을 향한 것입니다.
중세의 퇴폐한 성직자들의 교회안에서의 영적권위란 즉 그 성직자로서 육적 권력이 인본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들 앞에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육적 권력을 세우려함은 그 속이야 뻔한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직 사단을 향해 그 진짜 영적권위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의 삶 자기부인은 없이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다” “나는 기름부음을 한트럭 받은 특별한 사람이고 너히들은 한컵 받은자들 이다 식으로”~~~ 하며 어영구영 사람 앞에 자신을 드높이 세우려 별짓을 다하는데, 어쩌다 이지경에 이르렇는지 모르겠으나 사람 앞에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데 집착하면 집착 할수록, 날이 갈수록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한심해집니다. 목사가 아니더라도 본질상 인간은 권위권력의지를 펴도록 되어있습니다.
수 많은 상대들을 존중하여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신앙을 바로 세워 주는데 섬김의 방법으로 도우미의 방법으로 천국에 입성 할 수 있도록 그 성도님의 밑 구녂에 업퍼저서 그들을 누추하게 섬겨 주는대에 “목사라는 영적권위”를 사용하시기를 진짜로 원합니다. “마23:1~13 ~~~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권력적이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화있을 진저 ~ 너희는 (인본적 목에 힘줌 영적권위를 빙자한 인간적 권력으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목사님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신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옛 (1970~80) 날에는 통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가지는 권위는 설교, 당회 인도 등 공적인 영역에서 아~주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도록 시급히 신약성경만을 바탕으로 육적 권력이 없는 제도를 마련해야합니다. 이는 비단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집단에서 위계질서 즉 권위주의를 타고 끝도 없이 기동하므로, 권위 및 권력이 지켜야 할 금도와 절도가필요합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나라 민족성 중에 맹목적 복종심이 유달리 강하여 이를 악용 이용하는 권위주의, 공적인 권력을 사유화해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채우는 일이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권위가 공적인 영역을 이탈하여 모종의 강제력 내지는 사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나뿐 권위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지요. 특히 한국은 일제시대의 잔재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군부정권의 국가 병영화 전략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군사문화적 권위주의가 깊게 스며있지요.
교수가 학생에게 자신의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 술자리에서 직장상사가 술을 강권하는 것 등도 공적 영역에 국한되어야 할 권위를 사적 영역에 침투시켜 부당하게 이용하는 권위주의의 사례입니다. 이렇듯 권위주의에 기반한 노동(심부름)과 정서적 쾌감(음주)에의 착취는 성적인 착취(성추행, 성폭행)로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도 짓밟는 것이 권위주의의 인간 심리적 폐악이지요. 결국 "세속"과 "교회" 간의 무차별성이 권위주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의 악습과 짬뽐됨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일에만 주어지는 그 권위권력이 사적인 일에도 동원되어 폐역을 저지르고 있지요. 되나케나 아무거나 마치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인양 사사로운 일에도 응큼하게 권력을 동원하는 개같은 권위주의가 발생되는 한국사회의 더러움이 교회의 목사 장로에게서도 수도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잘알고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한국 문화의 죄성인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극복할 생각조차도 없이 그것을 더욱더 악용한 것입니다. 악한 권위주의 문화에 포획되어 조종당하는 것이 한국 교회 목회자 장로 문화의 현주소임을 자각해야 우리는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수의 한국교회는 한국역사를 선도해나갈 신약성경적 혁신 에너지를 상실한지 오래이어서 성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모두가 주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온누리 만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받고 자신의 주체성과 의견을 발화, 만개해나가는 샬롬의 교회, 샬롬의 세상을 만드는 방향성과 동력 모두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1980년 즈음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말이 등장했지요. "권위주의"라는 말은 진정한 진짜의미의 존경어린 권위가 상실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그 존경받음으로의 참다운 권위를 잃어버리면 본질적 권위가 아닌 인간의 사적인 권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멍멍이 같은 권위주의가 나오는 것이지요. 권위주의는 청산해야 하지만 올바른 진짜 영적인 아름다운 권위는 세워져야 하겠지요. 권위주의 청산을 앞세워 아름다운 참된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를 비판 분석하는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이 비교가 됩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권위를 상실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서기관" 이란 율법 해석자,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이들은 남을 가르치는 자들이기 때문에 말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기는 잘 하는데 자신들은 율법을 좇아 살지 아니했습니다. 가르침과 행실이 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된 권위는 없고 권력 권위주의만 남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 이 시대에 참 권위가 점점 소멸되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은 말로만 설교로만 읍조리고 삶으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장로가 육적 권력만 탐하여 만끽했지 신약성경대로 앞장서 바르게 살지 못해서입니다. 왜 교회가 영적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여기저기 개척교회가 많아서 입니까? 교회당 건물이 초라해서 입니까? 목사 장로와 성도들이 생활로 보여주지 못해서입니다. 목사님들이 말은 잘 하는데 말 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까?
첫째. 말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지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듣는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22절의 "놀라니" 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동안 놀라움에 싸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때당시의 세속적 육적 외관적 권력자 대통령 왕이 아님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영적권위”가 (인본적 권력이 아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무엇보다 신약성경사 진짜 말의 영적권위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말의 권위를 어떻게 회복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의 권위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비교해 볼 때 에수님의 삶 자체가 달랐습니다. 당시 청중들은 여기서 예수님의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유식하게 잘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웅변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적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여기에서 힘이 생성되고 세상과 사탄을 향한 영적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이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과연 요즘 목사님들에게서 이러한 영적 능력이 있는지 검증해봅시다. 서기관들이 가르칠 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귀신이 두려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어 나가라고 명할 때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씨잘때기 없이 수 많은 폐악적인 장로들 처럼 개인적으로는 찌질이 인생을 살면서 교회만 나오면 왼갖 대장 노릇을 즐겨하며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이나 파먹지 말고 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귀신을 쫓아내기만 하면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참된 영적 권위란 무엇입니까? 말의 영적 능력입니다. 목사라는 직함을 제도적으로 쌩 순종을 요구하는 힘 그런 것이 아니라, 귀신도 순종하는 말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영적인 권세입니다.
어찌하여 왜? 영적권위를 핑계삼아 전혀 무관해야 할 권력과 연관지어 목사 장로가 육욕적 권력자가 되어 더러워질까요? 육으로 더 똑똑한 척 우두머리인 척 육적 목사로서의 성공을 위해 제정신이 아니게 뛰어다니는 이 땅의 장로와 목사님들에게는 그 권위권력계급주의가 꼭 필요하겠지요. 우월감을 뽐내며 잘난체하며 대장 노릇 하고십어 환장하는 인간의 사탄마귀적 근본 심리에 놀아나 말로는 영~적~ 영~적 하지만 육으로의 대장노릇 ! 하면 짜릿하거든요. 성경 어디에 “가능한 한 곧에만 많이 모여라” “교회 건물을 최대한 크게 지어라” 그런 말씀 없습니다. 그리 하려 애쓰며 말씀 조작하는 것은 육적인 목사 성공을 위함이겠지요. 그렇게 부흥을 이루어 육적이 벼라별 폐악 짓을 수도 없이 응큼하게 평생하다가 죽는 더러운 목사들이 생기는 것은 그 일당독제 권력의 힘으로 발생이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적 권위를 회복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을 위해 40일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역 중에도 끊임없이 기도 하십니다.
목사의 끊임없는 기도 생활 회복 없이 영적인 권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놈에 설교 준비 공부 한다고 핑계대고 처박혀 어영구영 시간 때우고 제발 게을러 터저 복음에 관력하여 알찬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쓸대 없는 일에 시간 다보내는 그런것좀 그만좀 하시고 제발 기도좀 하세요. 안쓰러운 성도들 받들어 모시며 심방 전도좀 하세요. 예수님이 하루종일 설교준비를 했나요, 사도바울이 설교준비에 모든 시간을 다 썻나요. 그렇게 목회해가지고 십자가에 깔려 죽어지겠습니까? 그렇게 가슴에 성경책 끼고 근엄한척 팔자걸음 걷고다니면 어찌 자기십자가에 깔려 죽겠습니까? 예수님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사랑 실천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교회는 참된 귄위가 회복 될 때 좋은 소문이 퍼져나갑니다. 권력 권위는 목에 힘주는 더러움은 없고 따스한 사랑의 섬김이 가득하다는 좋은 소문이 퍼져야 사람들이 오고 싶은 교회가 되는겁니다.
남이 인정해주는 참된 권위가 우리나라 모든 교회에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요즘 시대는 명분뿐인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를 경멸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어느 연구 보고서를 보면 60년대 청소년들은 부모의 강압적인 권위에 반발한 반면, 80년대의 청소년들은 부모의 권위가 결여된 데 반발했다고 합니다. 이 연구 보고서가 맞다면 문제는 권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악용한 권력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권위의 문제는 이 시대의 대한민국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가장 으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특히 목사 장로에게는 교인들을 구속할 만한 신약성경상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육적인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육을 위한 사회적인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들을 권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권징하면 다른 곳으로 가니까 심히 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그렇게 온 사람들을 다른 교회는 더 환대해 주니까 말입니다. 하나의 단체로서 교회가 자리를 잡고 성장을 하려면 지도자의 권위가 필요하고 이 권위에 절대성을 부여할수록 교회는 단합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그럴사하게 이기적으로 생각해서일까요, 아니면 성경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해하여 외곡시켜 적용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구약을 구속사적인 시각으로 볼 때, 만민이 동등한 신약에 목사가 축복권을 가졌다는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신약성경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칭 소위 하나님의 종 혹은 사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권이란 결국 다름 아닌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 사자로서의 근거를 볼 수 없는 말도 않되게 구약을 악용한 여기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벼라별 육적 횡포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미신식으로 그들을 대적하거나 반대하면 사업이 망하든지 아니면 자식이 잘못되고, 그에게 순종하면 하는 일마다 잘된다는 둥. 사업을 시작해도 목사가 기도해 주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이 찜찜하고, 그렇게 기도해 준 목사에게 교통비라도 드리지 않으면 망할 것 같다 라고 성도들이 이상한 교주성 잡신 미신성에 사로잡히게끔 쇠뇌를 한 것입니다. 이게 영권? 이처럼 육적권위주의와 육을 위한 기복주의 신비주의를 잘 조작하여 섞어서 펼치면 육적인 교회 부흥을 위하여 사기 치기가 아주 수월 하지요.
예전부터 해왔던 관행 습관 전통이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는데 우리들 편의대로 몇 번 그렇게하면 아무렇지 않게 교회 안의 그 처신은 법이 성경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군대 같은 수직적 강압형 리더법은 어느 한계적 인본적 성과는 볼 수 있을진 모르지만 진정심을 끌어내기는 어렵고 사도행전 2:44절~ 말씀과 같은 수평적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에 도달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천국에 가봤더니 목사 장로가 거의 못왔더라... “감히 건방지게 담임 목사니~임에게” 하며 교주의 힘으로 독단과 권위주의로 권력만 파먹다가 천국에 오지 못한 것일 겁니다. 목사 장로가 왜 꼭 양복을 깔끔히 입어야합니까? 눅11:38~40 -속은 더러운 자들이 양복 깔끔히 입으면 거룩해 보일거라 생각하고 거룩한 척하는 목사님 장로님들 정신 좀 차립시다. 옷 차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속에 하나님이 있는 척 하며 때깔 좋게 째는 냈지만 도저히 존경스럽지 않은 권위주의를 즐기는 당신에게 주님이 눅11:38~54에 “밖을 만드신이가 속도 만들었다”는 말씀 주시지 않습니까? 걷으로 목사 장로 표시 않나도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시대엔 독단과 권위주의는 교회 부흥을 일구어 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우러나는 자연 발생 존경심과 신앙의 숭고함에서 우러나는 존경심 없이 저만 잘났다고 목에 힘주는 제도적 리더자가 리더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아니꼽고 더러워서 라는 말이 있지요. 딤후4:1~5-죽도록 고생함이 당연하고, 힘들게 목회 하라는 말씀 이지요. 엉뚱한 목회로 더럽다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육적 권위로 서로가 위대하며 내가 더 잘났다하니 아니꼬아서 교회 안나오면 그만이라는, 목사 장로의 그 권위주의 꼴 보기 싫어 나는 교회 않나간다는 심리가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권위권력을 동원한 직함으로의 제도적 쌩 리더 법 말고도 인간에겐 훌륭한 리더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위고 아래고 신약 성경 어디에 사람끼리 그러한 위계 계급주의로 리더를 펴라는 말씀이 나와 있나요.? (엡6:6 - 섬김) 신약의 율법은 “십자가 자기부인 희생 헌신 섬김 사랑”입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네 제사장이네 기름 부었네 이거 다 구약의 규칙이 아닌가요? 왜 구약의 그것만 골라서 따르려 애쓰는지요. 여타의 수 많은 구약은 외면 하면서... 대한민국 특유의 유아기적 대장 노릇 하고 십어하는 열등심리에서 비롯된 계급 권위를 버리고 현실적 실감나는 천한 누추한 일을 하면 목사 장로님이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 할까요? (막12:38~40, 눅11:37~52, 눅20:45~47-높임 받는 목적으로 목사 장로 하지마라)
세상에서는 찌질이로 살면서 교회만 나오면 교회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계급적 대장 노릇을 하며 우두머리 역할의 자기만족감식 리더를 하면 존경심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런 장로는 제신임 제도를 마련하여 과감히 교회 안에서 처내야만합니다. 권위주의나 만끽하고 주일 예배 끝나고 현관에서 악수나 해주면, 에~헴~ 이나하면 장로로서 일을 다한 것입니까. 상당 수의 목사 장로님들은 청소년기에 찌질이적 주변으로부터 대접 받지 못하는 일상을 살다가 목사가 되어 교주식으로 떠 받들어주는 것에 기가막힌 쾌감을 맏보고 권위를 동반 시켜 악용하여 인본적 변질 권력을 발현 시켜 받들어 모셔주는 것에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일반적인 인간심리라고 그 권위 권력을 만끽하며 달콤하게 살아가는 자기도취적 삶에 파묻혀 마취되어 기뿜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에서는 찿아보기 힘든 영적권위가 아닌 목에 힘주는 인본적 권위감 이거 그쪽 나라에서는 그런 생각 자체도 미친놈 소리 들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로 보는데 유독 우리나라와 아시아권에서만 교주 미신이 접목된 인본적 권위 권력이 당연한 듯이 만연하니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목에 힘주는 권한 권위 권력 문제를 21세기 현제 우리나라 사회심리적으로 어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나소의 권위감은 사회적으로 조금은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그 권위를 본질과 다르게 변질 시켜 교회 안에 육적으로 독단적 절대 권력을 가지려 끝도 없이 집착하며, 쥐뿔도 모르면서 목에 힘줄줄만 알아가지고 장로가 단합하여 목사나 내어 쫏고, 전도사를 향하여 쫄병 다루듯 개인적 노예이다 시피 막 대하며 권력을 행사하며 자기만족을 즐기며 못된 부정 부폐를 양산시키는대 쓰고 있는 것이 상당 수 장로 목사들의 개같은 짓거리들이 아닌가요?
그 돈과 권위권력의 맛을 알기에 육적인 성공한 목회라는 것을 하고자 대형교회를 꿈꾸는 것이지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부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짓거리를 서슴없이 해대며 성도들이 잘못을 지적하면 주의 종놈에게 대적하면 벌을 받는다는 무당 같은 소리를 하거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는식으로 자기들의 더러운 부폐를 억눌러 덮어버리는 것이 이 땅에 비일비재합니다. 목사 자기는 마치 사람이 아닌양, 육을 입은 신인양 교주식으로 벼라별 짓을 다 해버립니다. 물론 그분들은 저주를 받겠지요, 성경에 그런 말 전혀 없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짓거리들을 보고 얼마나 심한 욕을 하는지 진정 모르시는지? 그래놓고는 이 나라의 교회가 부흥 할까요? 왜 사탄을 말세 지말을 탓하고 정작 더러운 독제 권위주의로 리더하는 자신들 때문에 부흥이 않되는 것은 모른척 할까요? 21세기 현대인 이방인들이 믿는 자들이 그 꼴을 봐줄까요?
그분들은 어영구영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과연 그러한지 신약성경을 탐독해 보십시오. 그 어느 구절에 독단 독제주의 공산주의를 교주를 인정하는지 말이지요. 왜 그리도 교회 안에 민주주의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데,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성도를 무시하고 독단주의 독제주의 권력주의가 21세기 현대인에게 용인 되리라고 보시는지, 진정 성도들의 의견은 무시당해 마땅 할 만큼 무식한 것인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하면 과연 그리하면 우리가 땅끝까지 부흥을 꿈꿀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지? 그렇게 현실 개관성 없는 주관 개인적인 판단을 의논 없이 목사 장로 혼자서 결정하여 진행을 하면 현실 적용력이 뛰어나다고 장담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현실의 세상 전쟁터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 많은 적용력 뛰어나 영적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않 하십니까?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어쩌면 매주 그러한데 “자화자찬” 자기자랑 그 자화자찬을 스스로의 입으로 성도들 보다 틀림없이 더 잘났다고 자화자찬하면 쑥스럽지도 않는 것인지, 계속하니까 만성이 된 것인지, 그리하면 권위를 더 높이 굳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존중감이 더 생길거라고 믿는 것인지, 자기 입으로 스스로 능력있다고 자화자찬하면 잘나보여 권위가 더 설거라 여기는지, 아무리 권위도 좋지만 실천으로 묻어나는 존경스런 향기는 없이 그렇게 매일 목에 힘만 잔뜩주며 자화자찬으로 살아가면 정말 성도들을 쇠뇌시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권위(영적 파워 - 살아있는 말씀, 병 고침, 귀신 내쫏음...)와 인본적 권력주의를 구분 할 줄 모르는 것인지? 이제는 그러한 말장난에 속아주는 시대가 아님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영적파워 문제도 그러합니다.= 아이큐가 좋아 말씀을 잘 풀어 설교를 기똥차게 잘해주면 영적 파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골수를 쪼게어 심어지는 살아 역사하는 생동력있음을 말함이지 두시간 세시간씩의 언변이 좋은 바리세인식의 설교와는 무관합니다. 일사천리로 성경구절 잘 섞어 오랜 시간 회중 기도를 잘 한다고 믿음이 좋다, 영적 수치가 높다 볼수 없으며, 오히려 진정성이 없다면 그런 기도는 분명코 “바리세인”입니다.
글 쓰는 저는 어쩌면 죽는 날까지 유창한 기도를 할 줄 모를 것입니다. 사실은 기복주의 미신식 바리세인식 달변의 기도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아이들 기도 하듯 짧든 길든 진정성있는 하나님 얼굴을 앞에 모시고 더듬거리며 기도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단 삼분을 설교해도 살아 생동하는 영적파워, 사단을 대적하여 이기는 귀신을 내어 쫏는 영적파워가 진짜 성경상 영적권위라는 것입니다. 어찌 영적권위가 인간적 권위로 변질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성경 말씀을 앞에 펴고도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도 최대한 관범위한 토론회가 있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28절 -->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너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지배자.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지도자.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도 그리 리더를 한 것을 목사님도 예외 이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결국은 목사가 아닌 직분을 가진 교회 안의 평신도 스스로가 기독교의 과거 역사를 공부하고 신약성경 말씀을 찾고 찾아 신약성경 본래 목사님들의 리더쉽 방향성을 정하여 요구해야하는 상황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초기 교회시대의 중동지역교회는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모습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사람이었으며, 교회의 직분은 오직, 장로 또는 감독 그리고 집사, 이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시대 이후, 2세기부터 서서히 장로와 감독이 구별되면서 장로들 중에서 한 사람을 우선하여 감독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A.D.150년 이후에는 감독제도가 전 기독교계를 휩쓸면서, 감독이 교회를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는 인간권력적 성직자제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2세기말에는 이러한 성직자인 감독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교회의 모든 예식을 집전했는데, 이 성직자들을 사제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제가 나타나기 전, 초기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누구나 동일한 신분으로 영적인 제사 즉 예배 성찬(벧전2:5)과 찬미의 제사(히13:15) 등을 드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개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딤전2:1)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종’이며, 또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종, 곧 주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써 로마서 6장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목사나 성직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물론 신약성경 어디에도 특별히 목사님을 지목하여 이 비슷한 말씀을 주신적도 없지요. 또한 고린도전서 7장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니(고전7:22).” 여기서도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목사와 똑 같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라고 씌어 있는 것에서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분명코 분명코 소위, 목사나 신부나 주교와 같은 성직자들이 주장하듯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종 또는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이며, 평신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그야말로 ‘말장난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강압적 제도로서 군림의 방법으로 리더를 하면 별달리 본을 보이지 않아도 되며 쉽고 편리하게 제도적으로 대장이 되어 리더 할 수 있으니까 그러한 말도 않되는 자기들 끼리 지어내어 제도를 발달시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하니 우리는 목사님들을 무시하고 힘들게 하자는 것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라 우리들의 잘못된 마귀적 전통을 버리고 신약성경상 진짜 목사 장로가 되어 가도록 차근차근 개혁해 나가야합니다. 목에 힘주라고 목사 장로를 새웠다니 신약성경상 이거 말이 됩니까?
현대 개신교의 목회자는 구약의 제사장처럼 일반 교인과 구별되는 특수 계층이 아닙니다. ‘평신도신학’의 원조라고 할수있는 Hendrik Craemer는 ‘기본적으로 평신도와 목회자간에 구별은 없다’라고 천명하였습니다. 목회자는 구약의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적 역할을 명시 하는 것도 없으며, 제사를 통한 사죄권이 있지도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피차 간에 죄를 용서 할 수 있는 ‘사죄 은사’가 있다.(마18:18-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골3:13-주께서 너히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용서... 등) 제사장만이 아니라, 그리고 성경적으로 진짜 집사라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명이 집사님들에게도 주어저 있음을 우리는 다압니다.
그들은 지역교회에서 만찬예배를 드릴 때에는 모든 신자가 예배를 드리는 동일한 제사장으로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질서있게 누구나 찬송을 택해 부르고, 누구나 떡과 잔에 대해 감사기도를 하였고, 또한 기도집회시에도 누구나 동일한 제사장으로서 기도할 수 있었답니다. 단지 말씀집회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직분을 가진 장로나 집사나 (빌립집사 등 등) 20여 가지 은사 중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교사들 중에서 둘이나 혹은 세 사람이 설교 말씀을 (두세 사람의 목사가)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14:29~33-모든 사람에게 배우게...).
그리고 신자들은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제사장 직무와는 별개이며 은사나 직분을 가진 자가 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지역교회에는 두사람 이상의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에 나오는 대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최하로 집사?). 베드로전서 5장 1~4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너희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만 놓고 보아도 현제 대한민국엔 이를 지키는 목사님이 몇 아니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와 반대 이지요.
아무튼 이와 같이 복수장로체제에서의 (독단 독제가 아닌 의논 소통의 제도?) 교회 장로들은 목자로서 양무리를 치며(벧전5:1), 영적인 인도자들로서(히13:7) 지역교회를 다스린다고 되어있습니다(딤전3:5) 여기서 다스린다는 뜻은 전적으로 영적인 문제이지 인간적인 대장 노릇을 말하는 것은 분명코 아닙니다. 여기서 장로의 여러 역할 가운데 ‘목자로서의 양무리를 치는 것’도 오늘날과 같은 담임목사의 역할이 아닌 성경적인 ‘장로의 역할’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서에서 목회자가 곧 구약의 제사장 직에 해당된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바울의 목회서신에서도 그런 개념은 찾아볼 수 없지요. 더 나아가 개신교 신학에서는 이런 주장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세기 우리들이 사는 신약시대에 왼 “제사장”?? 따라서 오늘날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목자(목사로 오역)의 은사는 장로의 여러 역할 가운데 일부분에 해당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과거 16세기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만인제사장’의 위대하고 확고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루터나 칼빈 등의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인 사제직의 개념을 거부했으며, 또 ‘사제’라는 호칭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사제, 즉 신부를 대신하여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를 주관할 새로운 직책자로서 ‘목사’라는 용어를 도입하게 된 것 이지요. 그리하여 나중에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설교자 양성과 신학 연구를 위한 신학교가 생겨나면서, 거기서 학위를 취득하고 안수 받은 자 들에게만 목사자격증을 수여하면서 목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들은 이렇게 생겨난 ‘목사의 직책’이 신적 능력과 권위를 가진 성직자로 외곡 변질 오인시켜 현제 까지 끝도 없이 근거 없이 말 조작으로 변질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목사제도가 생겨났으나, 그 이후 교회에서의 성찬식과 세례 등, 교회 전반에 걸쳐 개혁자들 간에 견해가 서로 달라저 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노선이 크게 둘로 나누어져 한 부류는 루터를 쫒아 루터교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한 부류는 칼빈, 쯔빙글리, 존 낙스를 쫒아 개혁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지요. 그 후 영국에서는 루터교회와 유사한 영국국교회가 생겨났고, 나중에는 영국국교회에서 쫓겨나온 청교도들에 의해 회중교회가 형성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8세기에는 존 웨슬리에 의해 감리교가 그리고 연이어 침례교, 오순절 교회, 구세군, 성결교 등의 교파가 생겨나 오늘날까지 뒤죽 박죽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요 개신교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교파마다 나름대로의 목사제도가 그들 끼리만 인정하는 헌법에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각 교파의 목사제도는 성경과는 거리가 먼, 비성경적인 제도로서 자기들 끼리 말 장난으로 엮어 만들어 이기적이며 편협적으로 인본적으로 쉽게 리더하고자하는 노력으로 전통을 생산하여 수 많은 폐단과 모순이 낮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최대의 폐단은,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파의 목사들은 목사라는 직책을 구약적의미로의 ‘성직’이라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유구한 교회역사를 가진 서구나 북미의 경우에는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행으로 인해, 그 나라들의 목사들은 성직에 대한 개념이 아주 희박하여 목사님들의 권력 군림형 리더를 조금도 용납 적용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사생활을 유지하고 특별대우 그런거 아예 생각 자체를 않합니다. 기독교 역사가 짧은 한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전통적인 무속적 기복신앙과 결부되고 조선말기 일제강점기 등의 전근대적인 역사흐름이 반영된 토속신앙적 한국식 기독교라서, ‘목사는 곧 성직자다’
즉 듣기에 거스르기는 하지만 교주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개념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강하다 보니 성도들도 그것이 셩경위의 성경으로 율법으로 오인하고 목사님들을 교주식으로 대접해주므로 변질되어 인간의 본성이 들어나 더러움이 가속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최근에는 일부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인해, 예전보다는 성직에 대한 개념이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개신교인들은 교회 부흥에 악영향을 주는 방법을 피하여 기도와 간구로 신약성경공부로 끊임없이 파해처 목사님들의 올바른 리더법을 발굴하여 이 땅의 목사님들이 진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깔려 죽어주는 먹사가 아닌, 진짜 목사 아름다운 순교자로 만들어 드려야합니다.
목사직을 성직으로 착각하는 (실제는 성스러운 거룩한 임무를 감당치 아니하고 더러운 권위주의를 만끽) 목사님들이 한국의 기독교를 부패시키고, 자기 교인들마저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잘못 인도 리더해 왔던 것이 작금에 논의되는 사실입니다. 집사가 되가지고 말 투가 좀 지나치지요,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글재주가 부실하니 좀 노골적일 뿐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못들은 척 않들은 척 해버리니까 진솔하게 글을 썻을 뿐 사실은 목사님들 장로님들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답니다. 아무튼 비성경적인 목사님들이, 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강조하는 말이, 목사는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 또는 주의 종 주의 사자라’ 고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말인 듯이 쇠뇌로 수도 없이 들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종, 곧 믿는 자이면 누구나 주의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만이 하나님의 종이니, 주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군림하여 권력적으로 대장 노릇으로 리더해 보려는 인본적 어영구영임을 우리는 조속히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개신교 목사들은 ‘모든 신자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교인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만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신자들을 속여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까요.
첫째, 그분들은 자신들을 일인독재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술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구나 북미의 목사들은 한국목사들처럼 일인독재를 하지 않는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설교에만 치중하고 일반적인 시간에는 생업에 종사하며 사생활적 돈을 벌고, 나머지 교회재정이나 심방 등은 목사가 아닌, 장로나 집사들이 전담하며 목사의 간섭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목사들은 교회내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며, 또 이것을 헌법에 실어놓고 마치 그것이 성경말씀에 나와 있다는 듯이 강변을 하며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그 권한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교인들에게 목사로서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쇠뇌 주입시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시켜 왔습니다.
예컨대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관이니 주의 종을 존귀히 여겨라, 하나님은 반드시 주의 종을 통해 역사하시며, 주의 종에게는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 등이다. 그리하여 신약의 목사를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또는 신약의 사도들에 해당한다고 터무니 없는 거짓 주장을 하며 자신이 성직자임을 강조하며 교인들을 세뇌시켜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사실입니다.
둘째는 목사님 자신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감추기 위한 수법도 대단합니다. 국내의 수많은 목사들이 돈과 권력과 불륜에 연루되어 드러난 죄악상은 부지기수 인 것을 우리 믿는자들도 잘압니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저지런 목사들은 당연히 사죄하고 참회하면서, 죄과를 치르고 일선에서 물러나 근신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나 이렇게 하는 목사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그들은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아서 하니까 교인들이 가타부타 하지 말라, 주의 종을 비판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말도 않되는 공갈과 협박을 일삼아 왔던 것이 우리들 개신교의 목사님들 이었습니다. (뭔놈에 집사가 되가지고 안티보다 더한 폭로의 글을 쓰느냐 하며 또 어영구영 피하려고만 하지 마세요, 좀 더러운 글은 삼가려 하는 수준이 이것이며 좀더 노골적이라면 아마도 기절할 말도 무수히 많치요...)
셋째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 실패를 하는 것이 당연 하므로 용서하고 감싸 줄 수 있는대도, 목사자신들이 목회를 하다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변명이나 도피의 구실로 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교회행사나 교회건축 등을 리더해 가며,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통이나 민주적 회의 없이 교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실패했을 경우,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또 흔히 요럴 때 잘 써먹는 말로 폭압을 합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남이 판단하시니 교인들이 함부로 주의 종에게 왈가왈부 하지 말고, 주의 종의 영적권위를 인정하고 입을 다물어라, 주의 종을 간섭하는 사람치고 잘된 사람 없다”고 거짓 권위와 억지를 부리며 어영구영 당면한 위기를 피해나가기 위한 수법으로 사용해 왔던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해 왔습니다.
좀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으나 아마도 분명한 것은 신약 현 시대의 목사님들은 주님의 종 님이 아니고 저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주에 일 열심히 해야하는 20여 가지의 은사 중 하나를 가진 자 임에 분명한 앞장서서 죽는 날 까지 뼈빠지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십자가에 깔려 죽어야하는 주님의 일꾼 종놈임이 분명합니다. 구약의 예 이기는 하지만 모세는 순종이나 존경을 강요 하거나 고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민12:6~8) 모세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 자기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일대일 관계를 대치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시지 않으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 이외에는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하나님 중간에 누구를 두지 않습니다. 그 카리스마적 육적 권위가 영적권위라는 듯이 이용하여 목사님들에게 세속적으로 잘못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급적 독제, 교회 재정적 특권, 장기집권, 영적 무기력, 본 섬김 부족, 서로 사랑 부족, 애뜻한 따스함 상실, 교만, 게으름, 탐욕, 세속적 부와 명예, 행정적 부정행위, 정신적 나태, 교인들의 부족한 영적 수준들이 유발될 것입니다. 약3:1 =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그러므로 정직한 부흥을 위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주신 참 지도자는 손 발로 직접 뛰며 누추하게 진정한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본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존경으로 감동시키며 스스로 본이 되어 행동하여 실천하고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 인하여 자연스레 존경받음으로 리더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말도 않되게 낮아지셨고 이를 통해 참된 지도력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3장:1 ~ 15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내용인대 (본 발 씻김 사역의 또 다른 의미...) 2000년 전 그 시대엔, 예수님 제자들 모두가 아마도 구약적 율법적 유대교적 바리세인적 목에 힘주는 권위권력적 신앙 문화와 제도와 관습에 물들어 살아 왔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변화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수도 없이 리더자로서 섬김의 자세를 희생의 자세를 사랑 행함의 자세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며 권면하고 명령 하였을 것이나, 섬김에 대하여 제자들은 진정으로 실감나게 깨달아 실행치 못했을 것이며, 오히려 그 시대의 관습대로 난 예수님의 제자다 너희들보다 한수위다 하며 목에 힘을 주고 특별권위적인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고난 당 하시기 전 날에 예수님이 직접 섬김 실천의 모습의 예로, 그들 앞에 무릎꿀고 제자들의 발을 싯겨 본을 보여주시며 너희도 꼭 이렇게 해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종의 의식을 가지고 섬기셨으며, 목사 장로가 인간적으로도 존경 받을 수 있는 인격의 수준을 요구 하시며 누추하게 꼬랑내나는 남의 발을 씻겨 주는 믿바닦형 남을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발을 씻길 수준의 섬김은 한 두 번 해가지고 돼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속에서 백번 천번 누추하게 목에 힘주지 말고 평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예외 일리 없으며 먼저 앞장서 리더로서의 첫 번째 원칙으로 정하여 평생을 행해야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 행함 없는 믿음은 헛것... 믿음이 좋다 있다 없다의 척도 증좌는 행함 실천의 수준...) 매일 남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듯 하는 권력 권위 그런것 아예 없이 비참한 방법으로의 섬김의 리더법이라면 누가 그 존경 앞에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목사님들은 구약의 끝자락에있는 1세기 그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니십니까???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호의호식 자가 아니더라도 왼갖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지금 것 양들을 자신의 양 놈들인 것처럼 (우리는 목사의 양이 아니요 주님의 양~, 목사님들도 그냥 가르치는 은사자 일 뿐 그냥 우리와 똑 같은 양 ) 함부로 다루더니 정작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사 장로를 예수님 말고는 저는 거의 본바가 없습니다. 목사가 전도사를 핍박하며 사탄의 괴수로서 권력을 만끽하는 목사 장로는 보았어도 양들을 지키기 위해 늑대와 싸우다 죽었다는 목사 장로는 전혀 본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고린도전서 4장 신약성경의 말씀처럼 미말에 선자처럼 고난 핍박당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목사 장로가 있다면 이 글을 쓰는 제가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그 목사 장로님이 목에 힘주지 않아도 내 놓고 존경하여 따르고 또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볼 문제는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지요- 양이 양을 전도하고, 양이 양을 양육하고, 양이 양을 먹이고, 양이 양의 상처를 치료하고, 양이 양을 심방하고, 양이 양을 위로 하고? 양이 양을~~~?? 그러면 목회자 즉 목자는 뭘 하나요??? 아~ 목사님은 설교 해야지~.!!!..??? 그러면 직함을 목사라(목자라) 자칭 하지 말고 “설교사”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 까요...?
영국의 역사 학자 엑톤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말했지요. -이것은 목사가 아니어도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일인독재적 리더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의 의견과는 하나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네들 끼리만의 헌법에 보장해 놓고 그것이 마치 성경 말씀인 것 처럼 주장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또한, 국내 주요 교파의 헌법에는 비성경적인 목사님들이 독제적으로 리더하기 편리하게 꾸며진 교단 헌법 내용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법으로 부폐를 저지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이러한 것에 대해 일부 양심적인 목사들은 잘못된 자기네 헌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최근 들어서야 쬐끔씩 말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세상은 너무 너무 밝아저 버려 우리가 목사님들보다도 더 쉽게 박식하게 공부해 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순수한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권위권력주의 기복주의 미신주의 다 걷어치우고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오직 예수만을 신약성경 본래에만을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기복주의 미신주의 권위권력계급주의를 짬뽐하면 틀림 없이 아닌틱히 하지만 사이비 교주로 육적인 부자 목회에 성공하는 또다른 이단이 됩니다. 신약 본래의 아름다운 멋진 리더십이 무엇인지 무식 할 정도로 모르면서 군림으로 독단으로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주님 말씀을 위반하고, 자기 뜻대로만 지배하려고 강제를 동원하여 아멘을 강요하고 쌩으로 조작으로 거짓 존경의 자리를 얻으려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말씀 조작 금지 고전4:6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2세기 이후에 초기 초대교회 처음 성직자가 출현 하면서, 처음에는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심으로 일체의 권위감 없이 진짜 종놈 마당쇠로서 진실로 섬김의 의무로만 헌신적인 나날로 가득히 하며 출발 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그들의 신앙이 숭고하고 아름다워 그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성직자라는 성직이 종교적인 만족을 줄뿐만 아니라, 사회속에서 남 좋은 일로 타인을 섬기고 사랑하니 명성과 존경이 자연스레 우러나 사람들이 알아주며 잘 따라주다가 뻔한 인간 권력의지 심리에 의해 변질로 흘러 육적 권력과 영향력, 개인의 재능을 활용한데 대한 만족감등이 발생되어 사회적 우위에 자리 하다가 차츰 차츰 세속적 욕심으로 변질 발달되어 흐르면서 중세엔 정치와 종교 유착으로 악질 성직자들이 판을 첬으며, 하나의 숨겨진 악질 쓰레기 인간 이기적 집단으로 형성 외곡 변질되고 타락 개판이 되어 그래도 부실한 것이 만치만 그나마 다행스레 16세기의 종교개혁을(기독교개혁) 맞이하였고, 다시금 세월이 흐르면서 동일한 현상이 또 다른 형태로 일어나 썩고 변질 세속화 되어 오늘 날에 목사님들의 행태에 이르렀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목사의 아내 사모들의 목사의 권위주의에 기승하여 별짓을 다하는 사모들도 일부 있다는 것이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모가 또 하나의 목사인양 설교하려 들고 또 다른 대장 노릇하는 교회치고 부흥을 이룬 교회는 없음이 사실이니, 성도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 존재감을 드높이려 목숨 걸고 엉뚱한 일에 열정을 품지 말고, 목사의 아내 사모는 교회 안의 한결같은 따스함 유발자 이어야합니다. 수 천년 내려온 우리 문화를 이해한다면 입은 꽉 다물고 여성의 섬세함을 잘 살려 그 수 많은 성도들의 상처를 싸메어 주는 따스함의 역할만을 비밀리에 꼬~오~옥 해야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머리가 좋아 아는 것이 많터라도 그런 목에 힘주는 사모는 사사건건 불란만 일으킵니다. 교회 안에서 입은 꽉 다물고 따스한 여성성으로 해야 할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사모의 따스함이 없다면 그 교회는 결코 부흥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도 좋을 것입니다. 말없이 따스하고 포근한 사모님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대단히 많음을 안다면 나대지 못하는 것에 섭섭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엉뚱하게 하면 않될 권면 충고하는데 열정을 쏫으면 우리나라 정서상 그러한 여성성의 섬김 없는 나대는 사모 때문에 아마도 부흥이 않되는 것도 상당량 실존합니다. 대한민국의 사모님들께 죄송 하지만 사모님의 잔소리나 잘난체나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넘처나는 이 시대이니 불란만 일어납니다. 부디 사랑 따스함 유발자가 반드시 되어 주셔야합니다. 땅 끝 까지 복음을 전하라함은 교회에 들어 앉아 영적권위를 핑계삼은 권력으로 계급으로 어디 사모니~임 한테 가~암~히~ 나 외치면 아니되는 것이며 그 땅 끝 방법은 목사님들이 게으르지 말고 직접 그 땅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 없이 따스하면 칭찬과 존경과 자동적 따름이 적극적으로 발생됩니다. (고후6:16 두루 돌아 다니며 행하여...) 오히려 교회 안에 이 요상한 계급주의 꼴보기 싫어서 목사 사모님의 권위주의 꼴보기 싫어서 21세기 현대인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진실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목회자로서 성공 하려면 과거의 권위주의는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어린시절 친구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존제감 없이 살아오다가 권위 권력 존대를 받다보면 그 달콤함에 절어 인간 심리상 그거 내려 놓기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적 말장난만 일삼지 마시고, 종 놈으로 돌아가 믿바닦에서 엎드려저 꼬랑내나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으로 진짜로 가슴으로하는 목회로 사람들에게 눈물나게 진실로 존경 받음으로서 거기에서 유발되는 목회의 기쁨을 황홀을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지금 무겁게 지고 있는 십자가는 거뜬히 신나게 가벼워 질 것입니다. 그 권위주의 때문에 신약엔 있지도 않는 독단주의 억지로 지키려다가 스트레스 디지게 받는 목사님들이 불쌍합니다. 그 권위주의에서 홀가분하게 팽개치고 예수님 만으로 자유 하세요.
그러다 그 권위 독제 권력 지키려다가 성경과 아무 상관 없는 상처 디지게 받고, 인본적인 독제권력 지키려고 쪽팔린지도 모르고 버티고 버티다가 정말 스트레스 디지게 받아 암 병 걸리십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21세기 공동체는 그러한 권위 권력적 계급주의형 리더쉽을 세상은 경멸합니다. 목사 장로면 무엇이든 아는 사실들이 모두 지혜로운 내용 일 것이라 생각하며 이 시대의 그 똑똑한 많은 성도들의 의견을 무시 하며 대장노릇 교주노릇으로 상처 주는 짓 좀 하지 마세요. 권위주의로 성도를 함부로 대하고 반말 하지 마세요. 모두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의견과 유사해야 자신의 의견이 조금이나마 적용되어야 어떠한 일에 동참을 해줍니다.
이미 변해버린 시대입니다. 이런 무지막지한 글을 썻다고 욕만 하지 마시고, 좀더 노골적이여도 괸찬으니 속 진실에 우리들의 사실적 처지에 한번 정직해저 보게요. 이미 누구나 알아지는 진리의 말씀 비밀이 밝히 널려저 있어저 버린 세상을 아니라고 권한 운운하여 계급주의로 욱이며 잘못되었던 예전의 전통적 카리스마 독단 독제적 미신식 리더십을 발휘해봐야 무용지물입니다. 목사님을 나타내는 것은 목사님의 신앙을 나타내는 것은 능숙한 유창한 설교나 학벌이나 생각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 정신 = 희생 헌신 섬김, 사단을 향한 영적권위의 힘, 한결 같은 따스한 가슴에서 울어나는 사랑”으로의 순수한 본 실천 행동을 직접 손수 한결같이 하는 것입니다. 신약 사도행전의 사도로서의 모든 고생스런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리더자로서의 본이 되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행위로서의 삶 자체가 순수한 삶에 존경받는 모습들 자체가 진정한 리더십 입니다. 왜 ? 주변에 존경스런 목사님들이 전무한 것입니까?
목사님들을 진심으로 잘 따르는 권력 권위적이지 않아 남을 힘써 거들어 주어 성도님들의 믿음이 장성한자로 성장하게 “섬김의 도우미적 존중의 리더십”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우리나라 기독교회는 반드시 부흥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정으로 신앙 안에서 진짜 존경을 해주는 목사라는 종놈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21세기 밝디 밝은 현 시대엔 어쩌면 설교사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했다 저 말 했다 기복주의 말 장난에 복잡한 신앙관에 혼란스러워 죽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권력으로 성도들의 어깨에만 얹어주고 자기는 편안히 권력으로 목에 힘주며 편안한 리더법으로... 그러면서 본인스스로는 받지 말아야할 엉뚱한 권위감을 품고 있으므로 인해서 입지 말아야 할 상처를, 주지도 않는 왼갖 스트레스는 감히 목사한테 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않 받아야 마땅할 누가 주지도 않은 스스로의 권위주의 목에 힘주는 것 때문에, 목사님 스스로 스트레스 디지게 받으며 자기가 알아서 엉뚱하게 힘들어하고 열매는 없고, 그것이 엉뚱한 리더법으로 인한 스스로의 깨닳음 없음을 모르는 요즘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각각의 교단들이 (지 맘대로 않되니까 찟어지고 찟어저 124개로) 제각각 타락하고 각각의 개교회가 변질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포도주의 물탄 격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임을 아닌 척 하지만 교회다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것들은 다 잘못된 육적 권위주의로 부터 생성된 것임을 잘 알지 않습니까?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풍요와 더불어 목회자들이 청빈을 멀리하고 물질적 부요가 찾아와 그때부터 벌써 영적 적신호가 켜진 것이지요.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을 향한 더욱더 소금이 제 역할을 않하니 이로서 한층 더 부패되어 가는 것이지요.
지금의 때가 말라기 때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신령해야 하는 목자들이 타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발 말로만 설교로만 외치며 리더 하지 마시고 꾸준한 순~수한 한결같은 자기부인과 십자가 정신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 리더 하세요. 말씀이 넘처 나는 이 시대에 십자가 섬김 정신의 본 없는 설교쟁이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안의 수직관계형 리더 방법? 이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며 목사님들의 잘못된 부분을 본받아 끝도 없이 교회 안에 성도들 끼리 위에 있어 군림하면 그 대장 노릇 제미도 쏠쏠하니 계급으로 헌신과 희생은 없이 성도들 끼리도 못된것만 본받아 서로가 위내 아래내 하며 분쟁과 갈등만 야기시킵니다. “군림하는 계급적 권위주의형 리더법” 이는 목사님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죽여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끌며 도와주는 것이 목에 힘줌 권위주의 방식의 리더로 된다면 참 쉽겠지요. 남들이 내 앞에서 설설 기어주니 얼마나 짜릿 하겠습니까마는 이리하면 망하는 것이 눈에 훤하며 뻔합니다.
아래 7개 페이지는 어느 글에서 발취한 권위주의 반대편 목사님이 추천한 글입니다.
<<< 발취 = 1 >>>
훌륭한 리더십 15계조를 퍼다가 소개합니다.
1.훌륭한 리더십은 학벌이나 자질이 아니라 성과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자이다.
(열매 맺는 포도나무요15:2) - 권력으로 명령하고 강요하고 강권적으로 끌고 가며 장로와 성도들을 복종시키려한다.
2.훌륭한 리더십은 반대자를 끌어 앉고 가는 넓은 가슴의 폭을 가진 능력 있는 자이다.
(관용과 원수를 사랑 눅6:27.28) -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여 성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양보를 비굴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고 고집을 부리며 희생을 강요한다.
3.훌륭한 리더십은 파당을 만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굴러가게 하는 능력자이다. (하나 되게 하는 일치운동 에4:3) - 성도 위에 군림하고 채찍질하며 큰 소리치고 나 싫은 자는 떠나라고 고함친다 (그러므로 양들이 떠나든지 자기가 떠나든지 양단간 결판이 난다).
4.훌륭한 리더십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따라오게 하는 설득력을 가진 능력자이다.
(설교에 영력 능력자 행1:15.2:4) - 자기중심 파를 만들어 뭉치게 하고 근위대를 만들어 성을 쌓고 경호를 하게하고 반대자가 생기면 쓴 뿌리라고 하면서 소외시켜 고사시키려는 우를 범한다. 그럴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반대그룹이 생성된다.
5.훌륭한 리더십은 소란한 교회를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성령의 열매 갈5:22.요14:27) - 욕심, 본능에 끌려 교회 재정을 자기마음대로 주무르려하는데서 갈등을 빚고 분열을 일으킨다(사례비를 적게 올렸다고 예산서를 내어던지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6.훌륭한 리더십은 급변하는 환경에 카멜레온처럼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자이다.
(비천과 존귀에 처 할 줄 아는 빌4:12) - 권위주의 목사는 미운 자를 소외시키고 자기행위를 정당화하며 자신을 보호키 위해 거짓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감사하며 홍보한다(하나님의 뜻은 미운 자(가롯유다)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다).
7.훌륭한 리더십은 적자 공동체를 흑자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 요15:16) -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혈기를 내고 당회나 제직회를 하다가도 고함을 치고 삿대질을 하며 거룩한 설교는 않하고 주일날 강대상에서 반대편 자들을 난도질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 되어야할 주님의 날 설교 중에 개인적인 비난 불평을 일삼는 한심한 짓거리를 많은 목사들이 자행한다.
8.훌륭한 리더십은 복종 순종이 아니라 생동력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자이다.
(성령 충만 받고 성령의 지시대로 행동 행2:4) - 자기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군림하고 발을 씻어주는 제자의 도, 섬김의 도는 입으로만 외친다(그것을 장로들은 면전에선 복배하고 뒤에 가서는 죽일 놈 살릴 놈 헐뜯는다).
9.훌륭한 리더십은 하나의 업에서 많은 지업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해산의 고통 자 대 기업가, 다섯 달란트) - 자기 앞에 밥그릇을 맨 먼저 놓게 하고 위 연배의 장로나 권사는 다음 차례로 받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안다. (어떤 권위주의 목사는 장로에게 세배를 강요하고, 나이 불문하고 반 말을 일삼는다고 한다, 이러니 세상에서 목사는 버림을 받은지 오래...).
10.훌륭한 리더십은 이상과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능력자이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빌1:26.) - 하나님의 돈을 추잡하게 집어다가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하고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자랑스럽게 축복 받았다 하며 과시한다(고급차, 가구 등등). 종교지도 자의 청빈은 거룩성과 정비례한다.
11.훌륭한 리더십은 타인보다 한수 미리 내다보는, 구 시대적 시각을 벋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력을 갖고 합리적 계산을 하는 능력자이다. (높은 단수 로마인 행22:25) - 권위주의 목사의 양들은 갈등의 분위기에 소수만 기쁨이 있고 절대다수는 방황하고 불안해한다. 교회봉사에 생기를 잃고 메마르며 돈을 주고 교회 봉사 일을 시키기 시작하며 그로인해 끝도 없이 신앙질병을 앓는다. 그런고로 양들이 새끼를 낳지 못한다.
12.훌륭한 리더십은 해악의 문제는 끝까지 인내와 침묵의 묵비권 능력자이다.
(인내은사 갈5:22) - 주인 행세하는 장로들을 제쳐두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중직자를 배제 시키며 목사가 교회 주인이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평신도 집사에게 재정부장을 맡기며 자기편으로만 평신도 중심 목회에 생명을 건다.
13.훌륭한 리더십은 눈에 가시 같은 자를 눈에 눈물같이 활용하는 능력자이다.
(적을 충신으로 만드는 자 눅12:20) - 결국엔 목회는 기쁨이 없고 불안하며 자기 자신이 목회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노후가 불안하니 돈 챙기는대 온맘을 다한다.
14.훌륭한 리더십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자기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능력자이다.(진실 정직자 좁은 문 눅13:24) - 자기이상 실현을 위하여 장로 안을 거부하고 자기주장을 최선으로 하여 마구 밀어붙이고 반대자를 각각 불러 훈시 또는 책망한다(교회 건축, 사택수리, 기타 사생활적 부분들 등).
15.훌륭한 리더십은 끝 없는 사랑으로 섬김의 실천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겸손히 행동하는 능력자이다
(제자의 도 실천자 마20: 28.행12:9) - 사실적인 사랑 섬김 없이는 결과적으로 교회는 갈등과 암투와 분열이 생기며 소란하게 되고 무능한 목사로, 무례한 목사로, 권력주의 목사로 삯군 먹사로, 깡패 목사로, 독재 목사로 한 가지 이상 오명을 쓰고 쫓겨나게 되거나 아니면 분열하여 몇 마리 양만 몰고 배고픈 목회로 시름하다가 명예롭지 못한 ‘됫박’ 목회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든지 성장·발전 할 수 있는 여건에서도 말 안 듣는 자, 미운 자를 면전복배하고 뒤에서 헐뜯는 자 등을 잘라버리거나 좇아 내어버리거나 스스로 떠나게 만들고 자기를 좋아하고 따르는 자들만 데리고 목회를 하다보니 ‘섬(石)’ 목회를 하지 못하고 ‘말(斗)’목회로 안주하고 목회를 끝낸다. 또한 카리스마 인본주의 목사는 교회를 육성·발전시켜 큰 군함목회를 하나 은퇴 후에는 면전복배하던 장로들의 반발로 갈등, 멸시, 분열하여 교회는 소란하게 되고 목사는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후임 목사가 정착하기가 심히 힘들게 되기도 한다.
상기 15가지를 우리 교회 목사님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지해로운 자는 원망 불평 않고 취사선택 할 것이다. 미련한자는 그래도 원망 불평만 할 것이다. 여러 내용 중 눈에 띄는 것은 신앙적 위계(僞計)에서 비롯되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성도들의 이성과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온갖 죄들을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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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에 대한 성경적 바른 이해...
일반적으로 한국의 개신교에서 목사라는 직책은 교회를 맡아 다스리고 예배를 인도하고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는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회를 다니는 신자나 목사들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서 믿는 자나 세상 사람들도 그러한 목사라는 직책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점점더 학인해가며 등을 돌리고 있다.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목사는 성직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목사라는 단어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아저 적극적으로 분석해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사실이다.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가 없고 목자만 있을 뿐이다. 목자라는 단어의 헬라 원어는 ‘포이멘(ποιμην)’인데, 헬라 원어 신약성경에 ‘포이멘(ποιμην)’ 이라는 단어가 18번 나오는데 17번은 모두 목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딱 한군데인 에베소서 4장 11절에만 ‘포이멘(ποιμην)’을 목사로 바꾸어 번역했다. 개역 한글판 성경을 비롯하여 10여 종류의 한글성경은 물론이고, 90여 종류의 영어성경도 마찬가지로 목자를 목사로 목사들의 이기적인 의도로 변개시켜 오역을 해 놓았다. 심지어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킹제임스 영어성경마저도 목자인 Shepherd를 에베소서 4장에서만 목사인 Pastor로 오역시켜 놓았다. 왜냐하면 킹제임스 번역도 개신교 목사들 스스로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 지도자들은 목자를 의도적으로 목사로 오역시켰을까?
첫째, 그것은 교회내에 일인 독제적 목회자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만약 목자라고 번역할 경우에는 신약성경에 목자라는 똑같은 단어가 양치기라는 뜻으로만 18번 나오는데다가, 예수님 자신도 세 번이나 목자(선한목자, 큰목자, 목자장) 라고 불리웠기 때문에, 교회내 일인통치자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헬라어 포이멘(ποιμην)은 단순히 목자인 힘겨운 양치기를 의미하며 ‘선생(師)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 곧 설교자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목자(牧者)를 목사(牧師)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역교회에 일인 통치자인 목사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 단어를 고친 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범죄행위는 기독교 역사 이래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구교 학자들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와 현재의 가톨릭성경, 그리고 헬라어 학자들이 직접 번역한 성경에는, 목자를 목사로 바꾸어 번역하지 않고 올바르게 목자로 번역하였다. 공동번역성서는 1968년에 신구교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성경 원본을 공동으로 번역하여 만든 책이다. 그 당시 신구교 학자들은 성경번역의 원칙을 정했는데, 그것은 성경을 원문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번역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개신교 목사들은 가톨릭 신부들 때문에 목자를 목사로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동번역성서에는 원문대로 ‘목자’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개신교에서 별도로 사용하는 10여종의 성경은 모두 ‘목사’로 오역되어 있다. 그것은 개신교 목사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역을 해 놓았던 것이다.
과거 4세기에 생겨난 가톨릭교에서는 일반 신자와 성직자를 별도로 구분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성직 계급인 신부, 주교, 교황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개신교에서도 교회내에서 일반 신자와의 구별된 성직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가톨릭의 신부에 해당하는 성직제도를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한 모든 신자가 목자요 제사장인 진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윽고 개신교에서는 초창기에는 중시여겼던 성찬식이 뒤로 밀려나면서, 어쩌면 목사의 존제 우월성을 위하여 설교가 우선시 되어, 교회에서 말씀을 전담할 일인설교자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신학공부와 설교 훈련을 위한 신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에게 안수하면서 목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장로교 통치형태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성직자인 목사와 일반신자인 평신도를 구분했다(기독교강요4권3장2). 그리고 장로를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로 구분하여,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라 칭하고 나머지 장로를 평장로라 불렀다 (기독교강요4권3장8). 그리하여 목사에게만 성직을 수여하고 성례전을 주관할 인본적 권위를 부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파는 이러한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두가지로 구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교회내의 일인설교자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신학교 건립, 그리고 칼빈의 교리 등에 의해 성경에 없는 가짜 인물인, 가톨릭의 신부와 같은 ‘개신교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자들의 편의에 따라 인위적으로 성경에 없는 ‘목사’가 생겨났고, 이 목사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에베소서 4장의 목자를 목사로 바꾸어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 말로 오역시켜 왔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칼빈은 장로를 ‘목사장로와 평장로’ 두가지로 구분시켜 놓았을까? 성경에 장로라는 직분은 필요에 따라 가르치는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딤전3:2). 그러나 칼빈 당시에는 신학교에서 학위와 안수를 받은 사람만이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평장로는 설교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목사의 기름부음이나 종교적 특권은 다 지어낸 거짓말이다. 칼빈은 지역교회에서 설교자가 두명 이상일 경우 교회의 혼란을 우려했다. 칼빈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에도 그는 성경을 뛰어 넘어 장로를 두 종류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도화되면서 성경엔 없는 칼빈의 조작을 적용하여 그 후에 생겨난 대부분의 개신교파에도 적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개신교파에서 설교는 오직 신학교에서 학위와 안수받은 목사만 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신약성경과는 무관하게 목사 본인들이 교회내에서 인간적인 권력을 행사하기에 유리하게 각 교파의 헌법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대동소이하게 명시하고 있는데 예컨대 장로교 헌법에는 “교회는 담임목사나 당회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이 처럼 모든 교파에서 목사 외에는 설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한사람이 아닌 두 세사람 가운데 은사를 가진 교사들이나 장로들이(두명이나 세명이서 번갈아가며) 설교하도록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전14:29~33 - 둘이나 셋이 설교를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 할 것이요. 옆에 있는 새로운 성도가 말하기 시작하면 먼저 말하던자는 잠잠하고... 너희는 다 모든 사람을 통하여 배우고~~).
오늘날 우리는 목사와 목자의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그 시대적 배경하의 원어 상으로의 목자(牧者)와 목사(牧師)의 차이는 엄청나다. 왜냐하면 목자라는 단어와 인물은 성경에 나오지만 목사라는 단어와 인물은 성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에는 다섯 인물, 즉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자(목사로 오역), 교사가 나오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지역교회가 아닌,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된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 즉 성도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우주적인 몸된 교회와 관계가 있지, 지역교회의 직분이나 직책이나 소위, 성직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지역교회의 직분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집사의 직분이고 다른 하나는 장로 또는 감독의 직분이다. 따라서 목자, 소위 목사는 지역교회의 직책이나 직분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성직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안에서 통용되는 직분은 당연히 모두 없에야하며 집사와 장로 또는 감독이라는 직분만 사용되면 된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자기편의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목사의 지위는 대단히 막강한데, 무엇보다도 일인목회체제가 보장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의 부폐 목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중요한 더러운 기틀이며, 성경에도 없는 그 고유권한을 오직 신앙에 믿음에 관련하여 사용하지 않고 인간적인 사욕을 체우는 대에도 태연하게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문제인 것이다. 일부 대외 권력형 목사들은 권모술수에 능한 것이 국회의원들을 능가하는 수준의 더러운 권모술수자들도 상당수있다. 그리고 목사의 직무와 권한도 교파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거의가 대동소이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요교파의 헌법에서 목사의 직무와 권한을 살펴보면, 그리 전혀 살지 못하면서 육적인 권력으로 “목사는 개교회의 대표자로서 가장 신성하고 존귀한 직분”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목사는 안수를 베풀어 세운 성직으로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며 사도시대의 감독이다. 또한 목사는 단독으로 설교하고, 교회의 모든 예배 절차를 주관하여 세례식, 입교식, 성찬식, 혼례식, 장례식 등을 집례한다 등등이 있다. 이와 같이 교회내에서의 모든 직무와 권한이 목사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일인독재체제인 것이다보니 개신교회는 인간의 죄적 속성상 당연히 부폐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는 분명코 성경과 무관 하므로 이를 신약성경대로 바로잡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국엔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오늘날 담임목사와 같은 권한을 가진 인물을 한군데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이미 예수님께서 구약을 완료완성 해버려 소멸해버린 구약적 제도를 쌩으로 악착 같이 악용한다. 우리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초기 교회시대의 교회 통치형태는 오늘날과 같은 일인목사체재가 아닌 2인 이상의 복수 장로들에 의한 통치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성경학자들은 신약시대 지역교회의 통치 형태는 일인목회가 아닌 복수 장로들에 의한 통치 제도라는 사실을 밝혀 왔다. 성경에 언급된 모든 지역교회에서는 적어도 한명 이상의 장로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복수로 불렸는데 그것은 사도행전14:25, 20:17, 빌립보서1:1, 디도서1:5, 그리고 야고보서5:14 등등, 그 외에도 많은 곳에 나타나 있다. 상당히 오래전 유럽이나 북미 등지에서 장로들의 복수성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고 이미 확정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신약 성경 곳곳에 ‘목사’라는 단어는 한군데도 없는 반면, 지역교회마다 ‘장로들’이라고 복수를 강조하는 구절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베드로나 요한 같은 장로들이 교회 인도자들이었고, 오늘날 목사 같은 인물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장로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대로, 운영위원에 불과한 장로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교회사를 살펴 볼 때, 성경적인 장로제도는 19세기에 고아들의 아버지로 이름난 죠지 뮬러와 영국의 형제운동에 참여했던 존 넬슨 다비, 헨리 무어하우스 등이 성경적인 복수장로제도를 실행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도 실행되었고 오늘날까지 극소수의 교회들만이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목사라는 말에 아주 익숙해져 있지만, 유럽 교회에서는 인간 우두머리로 높아져 있는 목사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 누구도 감히 지역교회에서 일인 지도자의 신분이나 호칭, 우상적 일인목회를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날 일부 목사들 가운데 이러한 목사제도의 불법성과 모순을 발견했지만 명예와 위신에 연연하여 비굴하게 살아가는 자들도 있고, 반면에 성경대로 살기 위해 목사직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제도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이들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반성하면서 목사제도의 모순과 불법성으로 인한 부폐 발생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는 목사제도에 대해 인터넷이나 책 등을 통해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리기도 한다. 그들이 쓴 책은 국내 서점에도 몇권 나와있다. 예컨대 프랭크 바이올라가 쓴 “교회가 없다”(대장간 출판), “평신도 교회 이야기”(대장간), “알렉산더 스트라우커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인도자들”(전도출판사), “예수는 평신도였다”(홍성사) 등이 있다. 이런 책에 소개된 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대개 2인 이상의 복수 장로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채 살아가고 있고 알면서도 그 불법적인 제도를 만끽하며 의도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물론 뿌리를 모르는 목사들 가운데 신앙심적 양심과 인격이 훌륭한 인물들도 많이 있다. 교회를 아끼며 사랑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양떼들을 섬기고 봉사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능하며 존경받을만한 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성경에 없는 유령인물로서 교회내에서 불법체류자들이나 마찬가지다. 비유하자면, 국내에 불법체류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돈벌이를 위하여 국내에 잔류하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양심적이며 좋은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불법체류자로서 아무리 좋은 짓을 한들 떳떳치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불법체류자로서 붙잡히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 한심한 목사들도 교회내에 불법체류자로서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신약성경에서 목자를 목사로 조작 오역하면서 성경적 근거와 토대를 마련하고 성직자 제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변개함으로써 무서운 죄를 저질렀다(대부분의 목사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에 해당).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일한 제사장 신분인 신자들 위에 머리로 군림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진리를 기복형 이단성으로 훼손시킨 죄는 너무나 크다고 볼수있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목사들이 망쳐놓았다고 해도 분명히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교인들이 교황이나 신부들에게 속고 있듯이 개신교인들도 오랜세월 동안 목사들에게 속아 살아왔다. 자질이 형편없는 비성경적인 목사와 삯꾼목사들은 순수한 신앙을 바로 세워주지도 못하였고 자기유익만을 챙긴 꼴이 되어버려 헤아릴 수 없는 벼라별 불법을 자행함으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그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비성경적인 목사와 삯꾼목사들이 주 원인 이었던 것이다.
가톨릭에서 성직자인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는 성경에 없는 유령인물이다. 가톨릭에서는 나름대로 성경을 억지 해석하여 교황을 베드로 후계자로, 사제를 12사도의 후계자로, 성경이 아닌 그들의 교령집에 교리화시켜 놓았다. 그들의 교령집은 성경과 똑같은 권위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직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부르짖고 있어, 성경 외에 다른 교령집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목사 스스로 외치지만 가톨릭의 지어낸 제도와 같이 목사들은 한술 더 떠 불법을 즐기고있다.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신부나 교황을 인정하지 않듯이 성경에 없는 ‘목사’도 인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목사들이 고집하는 스스로를 위하여 지어낸 개신교 목사 교령집 없이, 오직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목자로 즉 양치기 헌신으로 목사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텐데, 그리하지 못함은 인본적으로 일인독제의 달콤함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니 그런 불법인물을 더 이상 용납하지 말고, 성경적인 복수장로체제로 오직 신약성경적인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여 믿는자 모두가 신약성경을 앞에 놓고 새로이 인정하여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 그것이 안될 경우,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신부직을 버리고 가톨릭교회를 떠났듯이 현재의 부패된 제도권을 떠나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 나서는 것이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자신이 사는 길이 될 것이다.
주님만이 친히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어떤 누구에게도 교회에 머리를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교회에서의 전체적 결의는 1개인이 혼자 고유권한 이라하며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도록 전체적으로 예루살렘사도(공)회와 각 지역별 단일 교회로서 장로회(감독자들)를 두고 있는 것이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니다. 전체 교회의 사도(공)회와 지역별 단일 장로(감독)회가 1세기 이후(사도시대 이후) 무너졌으니 이제 마땅히 회복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가톨릭은 사도회의 대신에 교황을 사도대신에 추기경, 주교를, 장로(감독자)대신에 신부를 만들어 놓고 예수 대신에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개신 교회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자, 교사 세움을 부정하거나 대신에 목사로 대체해 놓고 무너진 전체 교회의 사도회, 지역별 장로회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스스로가 부폐 할 수 밖에 없는 목사에 대한 직무와 권한과 우리가 잘못 알고 행하고 있는 목사의 인식 및 대우를 신약성경적으로 완전히 조속히 개선하지 않고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다.
<<<발취 끝.>>>
세상 모든 인간은 목회자도 예외 없이 누구나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에 의하여 완성도가 높아지는 인간입니다. 물론 따로이 특별히 부어준바도 없지만 인본적 편의에 의하여 자기들 끼리 규정을 정하여 기름 부음 받았다 하여, 공부나 학습이나 설교로 신앙 인격이 성숙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겸손과는 무관하게 조직이든 인간이든 믿음으로 발현된 헌신 희생 섬김으로 그러한 과정에 의해서 성숙 되어저 가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천국가기 전 까지 이 땅에서의 성화와 중생된 노력이 하루 하루 성숙 되어저 가는 생활은 보고 배워야 하므로 목사님의 본보기가되는 섬김과 도움이의 리더법에 달려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 예수를 위하여 죽어지는 실생활의 삶의 모든 내용을 이해한다면 목사로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라 하심에 아멘 한다면, 앞서가는 리더자의 희생적 본 꼬랑내나는 남의 발을 매일같이 씻어주고 다니는 사랑과 섬김의 본 그런 종류의 존경스런 본... 걷보기에는 깔끔치 않아 목사 같지 않아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는 짓을 그의 향기를 보면 존경이 절로 되게 더 더 더 낮아저 종놈 마당쇠 처럼 누추하게 남 좋은 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는 수 많은 상대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환경을 리더 자들이 앞장서 실천의 희생의 본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존경스러우니 목사님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 영적권위 눈에 않보이는 영적으로만 따르고 따르지요.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 시대를 우리는 신약시대 라고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엄연한 구분성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 정반대임을 잘 알면서 왜 옛 어약과 새 언약을 어영구영 조작하여 이토록 헛갈리게 성도들을 몰고 가는지 그 속이야 뻔하겠지요. 신약에는 주의 날이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안식일이라고 하는데 그 개념의 다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이 파괴되어 신약이 성취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신약은 구약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신약으로 지향되지 않는 구약은 죽음에 이르는 법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미 파괴된 깨어진 구약의 제도를 육적 인본적인 권위권력계급주의를 창궐 시켜 목에 힘줄 목적으로 벼라별짓 다하고 십어서 진리를 잘 알면서도 엉뚱한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당시의 사회에서 목사라는 호칭은 당연히 없었으며, 그 당시의 목자라함은 목동을 이컫는 말로서 “양 돌보미”라고 보면 확실 합니다. 그리고 목자 즉 양 돌봄이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천민에 속하는 직업군임을 바로 알고, 어영구영 구약 들먹이지 말고 마치 천민에 속한 듯이 낮아저야만 합니다.
참 레위인, 참 제사장, 참 사자, 참 제물, 참 속전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 완성 완료 하시고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시고 승천 하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널리 알고 있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완료완성하신 이후로는 구약의 그 모든 것이 신약의 우리에겐 필요치 않게 되었으며 구약의 왼갖 제도 즉 율법을 지키려 들 경우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말과 똑 같은 말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기 위해서 존제 할 뿐이지 하나님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밝히 알기위한 도구로서 주신 옛날 언약 즉 구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찌 구약을 행 할 수 있으며 누가 구약을 행하라고 하던가요. 구약은 예수님을 예표하기 위해, 예수를 알기 위한 도구적 역할이 구약이지 구약을 실천하려 든다면 유대교인이며 바리세인인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을 (거짓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후서 3장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거짓 사도가 잘못된 것을 밝히기 위한 공격 방법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공격을 전개해 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옛 언약의 대표로, 자기 자신을 새 언약의 대표로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 “거짓 사도와 옛 언약, 참 사도인 바울과 새 언약” 해서 옛 언약이 거짓이라는 말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옛 언약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거짓일 수가 있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구 언약이 거짓이 될 수 있습니까? “새 언약이 없는 옛 언약은 거짓이다” 이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지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옛 언약 홀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만 가지고 예수그리스도 없이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교인들을 우리가 이단으로 이방종교로 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구약의 그 많은 율법과 제사제도와 각종 절기와 계급적 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창세전 처음부터 구약을 주실 때 새 언약을 염두 준비해 두시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구약에만 머물고 있는, 구약을 들먹여 현세에 적용하여 악용하여 먹고 살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코 거짓사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자라면 누구나 아시지 않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에 의미를 둔 것이고, 신약은 믿는자 각 개인에게 목사 장로 차별 구분 없이 공평 균등하게 모든 믿는자에게 균등히 하나님이 직접 임하시여 대면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구약이 현세적으로 목사 장로님들에게 육적 권력이나 악용 농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 완료 완성 해버리신 그 연유로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제발 구약을 어영구영 악용하려들지 맙시다. 제~발~요~. 지구상의 교회안에 그 어떠한 계급도 없이 하나님 아래 모두가 동일 동등 평등한 목사나 성도나 위 아래 없이 똑 같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목사님들은 집사인 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냥 가르치는 은사자로서 성도들이 천국 갈 수 있도록 사랑스런 성도를 위한 “도우미”로서의 목사라는 은사자 이면 충분하며 이에 섭섭해 할 것 절대 절대 없으며 도우미 은사자로서도 성도를 충분히 리더 할 수 있습니다. 쌩으로 대장 노릇 하려고 구약의 레위인 제사장 사자 그런 것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훌륭한 믿음으로 리더 할 수 있는 신약성경적 방법을 개발하면 부지기 수로 많이 개발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 순결성은 지켜나가야합니다.
쓰레기 같은 말도 않되는 무당 교주 잡신 같은 권위주의를 버리시고, 아닌틱히 목사가 앞장서 자기 의를 들어내는 삶 - 롬10:2~6 자기 의를 위하여 하나님을 청종 하는 척,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직 세상을 향해 사단을 향해 인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그 진짜 영적파워 영적권위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짜 영적권위는 눈꼽 만큼도 없으면서 잘못된 인본주의적 권위주의 때문에 변질이 발생 되는 것이 목회자들의 뻔한 현실입니다. 진짜 영적권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육적인 권위권력으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며 썩어가는 것이지요. 에레미아 23장은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철퇴인데, 16절 말씀은 인본주의 자기 유익을 위하여 여기저기 꾀 맞추어 자기 의중의 목회자 자기에게 유리한 자신을 성공시킬 말을 하는 요즘 교회 목사님들을 말함입니다.
렘14:14-설령 자기의 유익을 파먹고 사는 기적과 이적을 행할 줄 아는 자라 할지라도 그는 이리요 강도입니다, 요1서 4:16-목사 자신의 권위주의를 잘 지키게 하여 자기가 유명해지고 인본적 존경을 받으려고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데 이들은 기복신비주의를 창궐 시키며 헌금을 많이 내면 복을 받는다는 둥, 우리 육이 듣기 좋은 이야기 게그콘서트 제미있는 달콤한 이야기만을 합니다. 이들은 진짜 예수 이야기를 할줄도 몰라, 우리의 주홍 같이 붉은 죄를 실토케하는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진짜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할 줄 몰라, 복장사 기적 장사나 일삼지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므로 권위주의나 파먹고 목사 스스로의 성공한 인생을 살아내려는데 먹사로서 육적인 째가나는 유명한 목사가 되려 혼신을 다 하며 예수를 팔아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합니다.
참으로 리더하기가 조금 힘이 들더라도 권위주의는 일부러라도 버리고 힘겹게 그 길 가다가 기진하여 지처 쓰러저 목사님 자기 스스로 자원하여 짋어진 그 자기 십자가에 깔려 죽어 주신다면, 목사님들의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 어떻게 해서든지 권위주의를 버리고 오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예수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 주세요. 앞서 그리 해 주시면 참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어찌 무시 하겠습니까. 그 순결한 거룩한 목사님을 존경하여 따르고 따르려 아우성 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인격, 인간성으로 유발된 진심의 존경심 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존경 받는다는 것은 밥을 사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몇 천만원 돈을 준다고 또 다른 억지나 강요를 가식을 위선을 쇠뇌교육을 동원하여 존경을 유발 시키기도 인간에겐 어려우며, 존경이란 신앙 인생의 순수성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연발생으로만 생성되는 것이니, 목회자의 인간성 인격에서 유발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아무리 쇠뇌교육 잘 시켜도 이 존경 문제 만큼은 아무런 방법이 없지요. 쌩으로 쇠뇌교육 시켜서 무당 교주 방식으로 무조건적 강압이 아닌 진짜 존경? 그렇게 존경 받음으로 리더해 주신다면 우리도 진정심으로 존경하며 덩달아 적극적으로 따르겠습니다. 그런 신앙 인격 존경으로 인한 리더가 되어주세요. 디모데 전 후서와 디도서가 목사가 해야 될 바를 말씀 하심인데, 목사는 일평생 고난만 받으라고 하십니다.(딤후4:1~8)
목에 힘주는 권위주의를 펼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막12:40, 눅20:47) 어쩌자고 이 모양 이십니까? 정말 예수 믿는 집사인 저는 부끄럽고 쪽팔려 죽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판국이니 말입니다. 거의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인본적 이기주의 펼치기 유리한 것만 엉뚱한 구약의 율법을 끌어다가 그런 권위적 리더법 말고는 정말 고상한 리더법은 없는 걸까요? 신약성경 앞에 놓고 연구 하시면 아마도 하루 이틀이면 만들어 질 제도인데, 왜 그리도 권위주의, 관료주의 (보수주의, 비밀주의, 획일주의, 형식주의, 기복주의)에 쩔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목사의 인본주의를 포장하여 더러운 리더법을 버리지 못하나요? 그러나 목사님들은 오히려 저한테 한심한 놈이라 뭔 저따위 싹아지 없는 집사가 다 있어 하며 요지부동이시면 더 이상 아니됩니다.
왜 사람들 성도들 앞에 매일 매일 낮아지고 더 낮아지므로 하나님과 조용히 대화하며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 살아가려 하지 않나요. 성도들과 사랑으로 진심으로 동등히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동역하겠다는 자세로 깍듯이 존대말 써가며 상호존중으로 의논 소통하면 큰 일 나는 가요? 왜 모른척 하시나요. 목사님 장로님들의 말도 않되는 잘난체 권위권력계급주의의 폭앞에 질리고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며, 그 인본적 더러운 권위주의 때문에 소중한 영혼들의 목에 연자멧돌 수 없이 매어달아 전도는 못할망정 그 권력 지키려고 성도를 쫏아내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리도 상좌에 앉아 있으면 기분 째집니까?
조직이란 위계 질서가 필요 하므로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목사의 권위 계급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하며 합리화 시키시는 것 잘 압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약성경의 방법으로는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가 목사라는 구분 없이 동등히 함께 나누는 신약의 방법을 발달시키면 더욱더 예수적인 방법이 충분히 개발 될 수 있습니다. 정말 다 내려놓으시고 엉뚱한 구약성경 들먹이지 마시고 한번 고민해 보세요. 고민 내려놓음을 고민하는길에 이것도 한번 고뇌해 보세요. 왜? 교회 최고기관인 당회 모임의 “당회 회장” 즉 당회장을 담임 목사님만 해야합니까? 기왕 바로 새울 기회가 생기 시거든 “당회장”을 장로님들 중에 돌아가며 공평하게 해보세요. 인간에게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이기심을 유발시켜 응큼한 짓을 하게 만듭니다. 무조건 반감만 갖지 마시고 제발 한번 개선해 보세요. 정말 왜? 우리는 전혀 그 신약적이며 초대교회적인 교회 질서법을 꿈꾸지도 연구 하지도 않음은 왜 일까요? 그 속샘이야 뻔한거 아닌가요???
밝디 밝은 21세기 현대에 신약성경과 무관하게 목사님들 끼리 지여낸 더러운 권위주의와 기복신비주의로 육적인 교회 부흥을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 하나 행위로는 부인 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 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인간적으로 우쭐댐을 즐기는 자(요삼 1:9~12 ~ 군중 앞에 으뜸 되기를 즐기는 자...) 교회 안에 자신의 인본을 변론키 위해 권위주의나 창궐시키며 그 권위로 육적인 일도 맘대로 다 해버리면 교회는 21세기 뭇 사람들에게서 거절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임을 직시해야합니다. 그 권위권력계급으로 육적인 성공을 이루어 돈이나 뜻어 먹는 치사한 삶이 어찌 구원 받은 자가 섬김을 행해야하는 목사가 할 짓입니까. 권위권력주의가 교회안에 창궐하면 “권력, 돈, 여자” 이 문제로 목사가 더러워지면 사탄마귀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각 개 교회에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중에 목사 장로의 권위권력계급주의에 관련하여 더럽고 치사해서, 목사 장로 때문에 이런저런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나가는 성도가 70~80%라는 것, 체면상 짜증나게 할 까바, 나가는 나만 바보 될까바 다른 핑계를 대고 나가지만 실상은 권위권력계급주의 목사 장로들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 제발 한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정말 그놈에 권위권력계급 때문에 대장 사장 노릇으로 아까운 영혼들 상처 받고 목에 연자맷돌 매달고 떠나보내야 하겠습니까? 그~ 수~ 많은 성도들이 목사 장로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아니다고 자기들끼리 시험들어 떠났다고? 아닙니다 ! 한번 적날하게 조용히 심도있게 되집어 보세요?? 목사 장로 에헴 지키려고 그놈에 권위주의가 중요합니까, 십자가복음 영혼구원이 중요합니까 하나님 일이 잘되게 하는대에 목사 장로 목에 힘 없으면 뭐가 그리도 불편합니까?
믿는자의 지상명령 과업인 복음이 전해짐에 있어서 그까짓 목에 힘 않주면 어떻습니까? 신약의 말씀 주심처럼 목사 장로가 낮아지면 복음이 더욱더 잘 전해 질것이 자명한데 다들 목에 힘 못주어 환장한 사람처럼 육의 명예욕에 눈이 멀어 복음은 말뿐이지 고자세로 목에 힘주고 어찌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제발 낮아집시다. 딤후4:2~6 - 범사에 오래 참고 가르치고 경계하고, 자기가 듣기 좋을 말을 즐기며 사람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좆으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충실히 하라. 목사님들이여 자기성찰, 진솔한, 정직한 내부비판 - 제~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세요. 고전4장의-사도의 처신-왼갖 고난당함의 그 모든 말씀처럼 틀림 없이 우리는 목사님들의 비참하게 업어저 남을 섬기는 받들어 거들어 주는 “섬김이, 도우미” 로서의 역할로 일생을 살아 주셔야죠. 기복주의 권위주의 목회에 협조 협력하는 식으로 쪼끔씩 독제에 협력하는 목회로는 교회가 융성 할 수 없습니다.
롬8장 말씀처럼 각자의 은사를 “합력”하여 그 작은 힘들이 합해저서 큰 힘이 되어지므로 교회가 정직히 성장되어 질 것입니다. 그 진짜 사랑 섬김 도움이 역할 없이 처신하는 아닌척 하면서도 한술 더뜨는 인본주의 권위주의 권력주의적 기적주의 신비주의로 사이비 교주 무당 같은 독제적 먹사 육적 사장님식 리더쉽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망해가는 것이지, 사탄을 세상을 탓하기 전에 목사님 자신을 탓해 보고 진짜 신약성경에서 허용하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절로 존중 존경 해 줄만한 멋진 리더쉽으로 돌아가 보시게요. 억지로 쇠뇌시켜 교주 대접을 받는 식의 존중 말고, 진정심으로 존경받는 리더가 되어보세요. 정말 외람되지만 저는 전통적인 모습의 목사 장로님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며, 오직 신약성경적인 목사 장로님 들만을 선호하고 존경합니다. 신약성경을 앞에 놓고 잘못된 목사 장로 더러운 그 전통들 한번 벋어 던저 보시게요.
정말입니다. 목사 장로가 무슨 벼슬입니까? 세상에 할짓이 없어 목사 장로가 자기째 내려고 자기의를 위하여 잘나가 보이려고 주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한다니 이게 무슨 예수 믿는 것입니까? 대한민국 개신교회의 목사 8~90%가 거짓 선지자라고 가짜 목사 교사라고 합니다. 목사 본인 스스로가 거짓 선지자 이면서 어찌 거짓 선지자 설교를 그리도 당당히 하십니까? 거짓 선지자 설교 할 때에 자신에게 먼저 거짓 즉 자기의를 위한 먹사는 아닌지에 대하여 각성해 보세요. 신약성경대로 우리끼리 구약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인본적 제도로서 목사 장로 말고, 신약성경대로 목사직을 교회 안의 계급상 가장 낮은 자리에 두어 낮아저서 진짜로 성도들을 받들어 도움이로서 저자세로 성도를 섬겨 모셔 보세요. 그 성도님들 받들어 모시어 믿음의 장성한자로 성장 되도록 제대로 도움이 노릇 해 줘보게요.
대장, 군림 그런거 다 버려보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과 반대되는 우리끼리의 전통으로 처신하는 목사 장로를 정말 경멸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성도건 육을 입고 살아가는 죄성의 인간이므로 육으로 목에 힘 주어봐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초심 순수를 잃어버리고 더러워지는 것이 인간이예요. 어찌하여 신약성경으로 초대교회로 개혁하자고 하면 말과는 달리 그리도 싫어하십니까? 말로는 신본주의라고 하면서 정작 자가당착적 인본주의를 창궐 시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제발 신약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이토록 비참하고 처절하게 험악한 버르장머리 없는 지저분한 글을 써서 정말~ 정말~ 죄 송 하오나 제~에~발 부탁드립니다. (마23:1~39=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목사, 목사 장로 자기들은 무거운 짐을 않짐, 왼갖 째는 다내고, 높은 자리만 쫏는, 소경된 인도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아,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제~ 에~ 바~ 알~ 요... (약3:1 =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목회자의 덕목++++
- 진짜 영성, 인격, 인간성, 따스한 인정, 친절, 청빈, 겸손, 거룩, 순수한 믿음 -
(마태복음 10장 1~15 -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라~ 전대 돈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배낭에 두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즉 이 말씀은= 먹사가 되지 말라? 그런 뜻이 아닌가요??) 거룩한 삶을 살아 줄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일생을 살아가는 자가 = 목회자 교역자입니다. 조금 부흥하여 교회 형편이 좋아젔다고 의도적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거드름피우며 게을러지면 절대 않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세상에서 상식적인 선에서 논의 되는 도덕, 세상적 거룩 그 이상 이여야 목회자인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21세기 현 세대가 요구하는 인격을 갖추어야합니다. 목사 장로 교역자가 천사가 아니고 그저 인간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요구하는 인간적인 인격 덕목 인간애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머리가 좋아 설교는 잘 하는데 인간성이 형편없다거나, 예의범절이 제로라든가, 인사성도 친절함도 없고 무당 사이비 교주처럼 처신 권위 관료주의만 남발 하거나, 따스한 인간미가 없다거나 등등의 인간미와 도덕적 수준이 목에 힘만 줄줄 알지 평신도보다도 못하다면 절대 건강한 교회를 일굴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 삶 중의 인간적인 인격 ? 이 신앙을 겸비한 인간적인 인격과 실천적 행위가 반영된 설교 ? 설교한대로의 모범된 거룩한 삶? 하나님의 종 놈 다운 종 놈으로 비추어지는 순수한 삶? 목회자의 삶이란 평신도는 감히 상상도 못하게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이는 당연한 문제입니다. 들어내어 그 힘듬을 알아 달라 째낼 필요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인격 인간성 더불어 물질관은 검소와 청빈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최고급으로 그저 이동수단으로서의 티코 같은 정도의 소형차로 검소함을 넘어서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님이 에쿠스를 타고가면 누구나 욕을 해댑니다. 성도들 돈 뜻어다가 물질 탐욕에 절어 사는 성직자로 보는 것이지요. (<- 의미적으로). 동서고금 온갖 종교의 지도자는 그 시대와 후세에까지도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종교 지도자는 계획된 가난 스스로 자원한 가난 즉 “청빈”의 어려움 속에서만 믿음의 꽃을 피울 수 있고, 그러므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심리 상 목사의 청빈은 사회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주변에 자신도 몰래 향기로 풍겨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타 종교 지도자들도 부자 풍요를 누리면 누구나가 욕을 해 댑니다. 세상 사람이 그꼴 봐주질 않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니, 목사가 부요하면 헌금 다 먹었다고 보며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빈정대며 교회에 나오려 들질 않습니다. 그 목사님들의 진짜 영성, 인격, 인간성, 따스한 인정, 친절, 청빈, 겸손, 거룩, 순수한 믿음등의 그 행함의 향기가 되어 전도와 부흥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숭고한 진리의 특성상 가난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진리에도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지도자 삶의 절대적인 미덕인 것입니다. (잠11:24~25, 잠30:8~9)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런 물질에 세상적인 요소들에 매임 당 하지 않았을 때, 순수한 신앙과 믿음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고 변질되고 추잡해지며 게을러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가당착 자기도취 자기과시 자기만족으로 째내며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목자의 일상생활? 이 풍요 위에 빈둥거리는 게으른 생활 ... 거기에선 절대로 순수나 온전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순수 검소를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로 표현 할 수도 있는데, 검정 먹물로 그린 수묵화 그 검정색으로만 그린 검정 색체의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색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화려한 색채만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빈도 그와 같답니다. 화려한 교회는, 풍요로운 목회자는, 절대 주의 종적인 지도자일수 없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가난 즉 청빈은 목회자들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스승입니다. 안타깝지만 “목사” 그분들의 생활은 꼭 반드시 가난해야만합니다.
그분들은 다만 천국에 가서야 부자가 되어야할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청빈한 목사님만을 사랑 하실 것입니다. 목회자의 신앙생활은 평생 동안 청빈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한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검소 가난 청빈하면 그 덕목이 메아리가 되어 온 성도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서로 나눌 수 있는 신앙 인격이 생성 되는 것입니다. 편안함과 화려함이 물질적 부요함이 그 목회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약2:1~10 - 괄시 하면 범죄 자...)
이웃을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목회자의 고결한 덕목에 의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목회자의 도덕성과 윤리성과 탁월한 인격은 따스한 인간성은 세상 안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실제 좁은 길을 갈수 있어야만 가능 할 것입니다. 겉옷은 물론이요 속옷을 벗어 줄 수 있는 모범의 삶이 목회자의 자세이며 덕목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겸비한 인간적 훌륭한 인격이 성격이 반드시 세상에 그러한 덕목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뿌려저야만 합니다. 아마도 목사님들은 인격적으로도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당연한 듯이 대접한다 하며 얻어먹는 거에 길 들여저 있는지 따스함으로 베푸는 덕목은 목사님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돈을 가저다 (교회 재정) 성도들과 목사님 친구들 밥사주는 것, 내 돈이 아닌 하나님의 돈으로 그짓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저 갑니다. 목회자는 왜 본인들의 사적인 덕목을 이런 문제들을 노출시켜 고민하지 않을까요? 교회 건물에 들어 앉아 편안하게만 스스로 희생 섬김 본 행함은 없이 설교가 전 부 인 양? 살아감이 안타깝습니다. 크기가 큰 교회가 능력이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 부자 목사, 편안한 권력의 목회를 부러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다보니, 교회가 수없는 문제를 발생 시키는 것입니다. 제발 그런것에 부러워하지 맙시다. 목회자가 다른 목회자를 만났을 때 서로 인사 말을 나누는데 “교인 수 좀 많이 늘었어, 많이 부흥 했나”가 의례적 인사랍니다.
그런 인사보다는 “온전 하십니까, 순수 하십니까, 요즘은 어떤 무거운 십자가 잘 지고 다니시나요, 요즘 어떤 희생과 섬김을 청빈을 잘 행하시나요” 라는 인사 나눔은 어떨런지요?? 건물 크기가 큰 교회의 목회자는 능력도 크고, 20평 상가 귀퉁이에 전세로 운영하는 교회 목회자는 능력이 작아서 그런다는 듯이, 서로 괄시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못하는 목사님들 끼리의 요상한 열등의식에서 시작된 갈등관계는, 교회 대형화 세 늘리기 교단의 분열 내 것 교회주의 경쟁으로 치닫게 하는 요인입니다. 열받으니까 나도 내것 교회 지어서 교회 숫자만 늘리는... 목사님들의 온전한 덕목의 바로세움 없음으로 인하여 엉뚱하게 추켜세우고 능력있다 숭상을 하니 목회자가 내교회주의의 우상이 되고 미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상이 되고자 목회자 집단에서 유명하고 세속적으로 큰 사람이 되고자 - 해서는 않될 빛내어 미신적의미의 서~엉전 건축이라 호도하며 구약으로 돌아가 성전이라는 교회를 건축합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믿는자 스스로이며 그 믿는자는 기도의 집입니다. 교회 예배당 건물을 두고 성전이라는 단어 좀 제발 쓰지 맙시다. 건축 헌금을 위해 설교를 펴고, 건축 헌금을 위해 부흥을 시키는 인위적 악순환이 우리나라 기독교를 체우며 진정으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목회생활은 사도의 생활은 해나가지 못하게 되고 악순환만 거듭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집단 대중을 위해서만 지향합니다. 예수님 방식의 가난하고 고독한 한사람의 개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지요. 교회 내 대중을 위해 교회 정책을 펴고 지출을 합니다. 목회자가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따스하게 보듬어 주어야할 사람은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교회 내의 말 잘듯는 성도 대중이 아니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가련한 위로해줘야 할 단 한 사람이여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인정받으려고 대중을 위해 설교하고, 대중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목회자는 위선자입니다. 딱 한 사람씩만 사랑 할 수 있음이어야 (의미적으로) 실감나게 진실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 방법의 덕목도 생각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는 99마리의 양을 위해 오신게 아니라, 잃어버린 단 한 마리 양을 위해 오신 예수님 이심을 고민해 봐야합니다? (의미상)?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버리고 99마리를 위해 오셨다면 99마리 모두를 잃었을 것입니다. 이미 순직하신 성직자 테레사 수녀도 역시 버림받은 한 사람만을 끌어 앉았답니다. 그러므로 수 만명을 얻은 것이지요. 한 사람의 영혼 관리가 즉 99명과 연결되어있는 것이지 99명이 한명과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목회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시금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관 신앙관 덕목관들을 목사님들 스스로 한번 적어 보세요. 거짓 선지자들의 위선자들의 교회는 거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외모는 지저분하고, 작업복 평상복 추리닝 평범하게 하여 수시로 아무때나 어디서나 어두운 불쌍한 이웃에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향해 또 낮은 데로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여 손 내밀어 보살피고 돌보아 동질감과 위안과 치유와 예수사랑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검소한 외모와 외향적 태도 실현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은 옷차림을 수수하게 약간 누추하게 입는 생활 이어야 하며, 그것은 가난함을, 청빈을, 희생을, 섬김을 온전한 덕목으로 여기며 평생 동안 실천 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명예에 관심을 갖는 잘못된 덕목은, 실제 아니라 하여도 조금의 탐욕이라도 주변 사람들은 엉뚱하게 눈치를 채며, 믿지 않는 자들에겐 그것이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못하고, 새 신자를 만들어 내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게끔 환경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주변의 수많은 사람이 “목사님을” 항상 하 ~~앙 상 관찰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시시때때로 하~앙상 일상생활 내에서 목사님들의 덕목을 인간성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몹시 측은지심이 듭니다마는... 목회자들이 결혼을 하여 아내와 자녀가 있어 부양을 하여야하는 경제적 인간적 책임감 때문에 순수에서 진짜 신약적 덕목에서 벗어나는 먹사가 되어 권력과 권위와 명예욕과 물질적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요? 내것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큰 소리로 외처 놓고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교회가 자기 물건임을 자기 재산임을 주장합니다. 어찌 보면 기독교의 목회자도 천주교 처럼 결혼을 하지 말아야 이러한 세상적 물질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정작 목사가 교회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참조 - 초대교회 3 ~ 4세기 까지는 성직자도 여러 종류의 직업으로 자급자족을 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향이든 가족이든 육적인 모든 재화를 다 버리고 따르게한 이유는 뭘까요? 속이 뻔한 더러운 목사 일수록 말문이 막히면, 할 말이 없다 싶으면 , 좀 불리하다 싶으면 “순종이 재사보다 낫다” “ 주의 종을 핍박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가라” “시험 들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등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하고 있습니다.
교묘한 발람의 속임수로 일시적인 효과는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러한 부정이 결단코 목회자의 덕목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비 신사적이고 간교한 위선적 행위로서 신약성경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합리적인 태도와 엉뚱한 끝없는 말 조작식 -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말씀을 엮어 달변의 읊조림으로 무마시키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이며 그러한 얼렁뚱땅에 호응해 주지 않는 것이 21세기 현실입니다. 목사님들의 그러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불란을 이르켜 싸우자는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잘못된 덕목에서 유발되는 행위가 사회적, 종교적으로 부작용을 일으키니, 부흥이 않되는 원인중 으뜸이니 쉬 용인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지금의 목사님들은 스스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발전을 저해하며 목회자 자신들도 결국은 존경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목사? 하면 이미지 인식 자체가 신뢰감을 너무 잃어 너무너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순수한 덕목을 갖추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근세 과거 유럽의 성직자들 처럼 교회들 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20여년전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을 욕하며 한심하게 알았을 뿐, 시대를 비난만 디지게 했을 뿐, 2006년 우리의 현실로 닥처버린 기독교의 문제점을 자신들 스스로의 문제점을 자성하진 못했으며, 충분히 준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의 소퇴를 막을 방법을 전혀 준비 하지 않았으니 점점더 우리 개신교회가 한심해저 가는 것일겝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샅샅이 밝아져 가고 있으며 전 국민이 고학력자 화 되었고, 많은 부지런한 사람이 목사님들을 능가하는 학습적 능력 기독교교리 탐구와 성서의 이해와 종교 전문지식 습득 - 조잡한 글을 쓰는 저 자신도 3~4년 전부터 글쓰기를 하다 보니 욕심내어 전문서적 탐독으로 성경 지식이 향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존경 없는 권위주의로 세상 인간의 그 어떠한 조직도 운영 할 수 없는 시대에 이미 진작 들어서 버렸습니다.
외람되지만 오랜 제 사적인 신념이 하나 있는데 “게으름과 허풍과 허세와 낭비와 뜻 없는 자존심이 (쪽팔려 함이, 체면이) 내 인생을 완전히 망친다” 이랍니다, 20여년된 신념인데 아마도 이 신념에서 제 정직함과 자신감과 당당함이 발현되는 것도 있는 듯합니다. 부디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구약에서 끌어다 쓰거나 신약성경 말씀에는 나와 있지도 않는 목회자의 덕목과 규례와 제도에 허세에 우월감에 자존심을 부리며 엉뚱한 덕목만을 붙들고 잘못된 목사들의 처신과 비교하며 인간적 허영심에 억매이며 교회에 세상에 자기만 옳다하며 적용하지 마시고 하루 빨리 진정 자신감있는 하나님 앞에만 헌신하는 삶을 사시여 순수히 자연발생으로 일어나는 인간적인 존경 받음으로 인하여 진심으로 우러나 존중받는 목회자의 삶이 평생의 가장 아름답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성공이요, 그 거룩한 청빈한 희생의 덕목을 갖춘 삶이 노후 연금 보험인 것을 실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면서 성경보다 앞서 교회의 목사님들의 개인적인 고집 - 전승 문화 환경 관행 노회법 우리끼리 지어낸 구습형 덕목들이 성경보다 우선합니다.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오직 예수라 해놓고는 별짓 다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 스스로 자신들 편의대로 정한 목회자의 덕목이 아닌, 믿는 자 모두가 인정하고 동감할 존경이 절로 될, 성경 말씀 안에서 사도들의 행위를 현실에 맞게 그대로 정한 목회자의 진짜 따스한 인간성이 철철 넘치는 덕목의 행함과 모두가 동감해줄 수 있는 뼈빠지게 힘겨운 일상 이어야 하니 목사님들의 덕목을 성경을 앞에 놓고 (고후 6장 4~10 - 고달파야 하는 목자의 일생들...) 평신도인 우리가 함께 그 덕목을 정하여 세워 신약성경과 반대되는 관행 전통들을 무너뜨리고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도록 분위기를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참 목자는 모든 길을 양들에게 입으로 모두다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찿는 방법을 말로 설교로가 아닌 몸소 본이 되어 세세히 보여주어 알려 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일생은 당연히 힘든 인생이여야 합니다. 큰 문 넓은 길, 특별 권력으로 쉽고 편한 쪽으로 부자스럽게 덕목을 잡으시면 분명코 실패한 저주 받아 마땅한 목회입니다. 믿는자로서의 그저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나는 덕목으로 “한 영혼을” 소중히 하는 일상생활 속의 느낌적 태도를 보여 줘야합니다. 존경으로 인해서 그냥 작업복입고 그런 겸손한 덕목으로 사방 팔방 돌아다니시며 진실로 진실된 예수님의 덕목을 생활화 하며 복음 전해 보세요? 정말 인간미 넘치는 그리고 나서 믿음 영성의 위력이 있는 목회 ... 한번 “신앙적 자기철학”을 세워보세요. 진짜 영성, 인격, 인간성, 따스한 인정, 친절, 청빈, 겸손, 거룩, 순수한 믿음으로 모든이에게 공손히 목사로서의 덕목을 죽는 날 까지 한결같이 행하며 그리 살아 보세요. 디모데후서, 디도서 모두 목회 서신 이라고 하지요, 딤후4:1~5, 딛1:2 힘들게 목회 하라는 말씀 이지요, 목에 쌩으로 힘주며 목회자 자기들 끼리 정한 덕목은 빼시고 말이지요.
눅6:39-맹인이 맹인을 인도... 베후2:1~3 그들이 탐심을 가지고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거짓 선지자 , 제자들의 복음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 즉 거짓 목사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며 애굽의 제사장 철럼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많이 나타났다죠? 어떤 목사님 발언으로는 현제 대한민국의 개신교회에도 거짓 가짜 목사가 8~90%라고 하는데, 어쩌면 대다수가 가짠인대 서로 진짜라고 혼란을 주는 형국이니, 제발 이런 비참한 글을 썻다고 분계 하지만 마시고 신약성경을 한번 밝히 보세요. 제발 사탄마귀 탓하지 말게요, 자기우상화로 엉뚱한 짓만을 하는 우리가 사탄마귀예요? 예수님의 12제자가 호의호식 죽은자가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는 제자는 모조리 다 육적으로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 자기는 죽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해야지요. 목회자의 덕목중에 으뜸은 우선 자기자신에게 예수를 바르게 증거하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아내며 나도 성도 여러분과 다를바 없는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지만 가르치는자로 리더로 세워젔으니 제 몸을처 믿는자로서의 삶을 살아 내겠습니다 나를 따라와 주십시오 라고 자신있게 외치는 희생자가 되어 주어야합니다. 유명한 성공한 호의호식한 그런 목사는 분명코 다 가짜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신약성경적 교회로 초대교회로의 개혁에 함께 힘을 내시게요. 제발 진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게요.
++++누구나 알고 있는 목사의 보편적 비 성경적인 더러운 변질과 부패 ++++
불안한 존제 불완전한 존제인 인간에게 종교심은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고대시대부터 그냥 인간의 본능입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왼갖 잡신이라도 결국엔 종교심이 유발되는 본능적 인간심리. 전쟁 중 처참하게 죽어가는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하지요.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 또한 숙명입니다. 그러나 이 일반 모든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리를 악용해 먹는 먹사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목회자의 믿는 자의 재물관 물질관? 이는 믿음의 척도 중에 믿음의 수준을 제는대 제일일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변질은 세상과 주변에 수도 없이 영향을 주어버린다는 것을 단 일초도 잊어선 아니됩니다. 목사의 더러움은 수만명의 성도들을 또한 변질 시킨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셔야합니다. 우리도 함께 더러워짐의 책임이 목사님들에게 상당량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 이지요.
골로세서 = 2장과 3장 심도있는 탐독 = 성경과는 거리가 먼 조작해낸 사이비식 개신교의 물질부분의 문화와 전통... 우리나라의 개신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세상이 악해저 사단의 발악으로 무너짐도 있겠으나, 목사님들의 끝도 없는 세속적 육적권력과 물질 변질적 더러운 미신적 진화가 그 이유일 것입니다. 본 글을 써가는 2005년 요즘 들어서 젊은 새대들의 신학교 입학율도 계속 급격히 줄어 간다고 합니다. 목사의 교회의 수는 증가 하는데 성도의 수는 줄어 가는 현상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20~21세기 목사님들의 부패의 원인은 “돈 여자 권력”으로 조사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로 더러워저 사이비 교주가 되고 전도의 문을 막아버린 목사들이 주변에 즐비 하지요. 100만원을 처먹든 10억을 처먹든 말이지요. 롬8:6~7-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됨~~ 생각 만으로도 그러 할 진데 노골적으로 육의 것을 탐하는 목사들?. 야고보서 5:1~6절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목사직을 이용하여 사회적 명예와 부자가 되려고 물질에 욕심을 내는, 목사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목사님들의 풍요 추구는 스스로의 영혼을 포기하여 사탄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깊이 관찰하면 목회자가 되는 과정이 너무 쉽고 졸속으로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10년 정도의 소명(하나님을 향한 희생 헌신 봉사) => 길 거리에 나가서 365일 매일 8시간씩 매일 전도하기 3년 정도의 실전 훈련 기간 필요, 절대 섬김 생활을 해보고, 적합성을 확인한 후, 그의 자질을 탐색 하여 엄격히 신학교를 입학 ~ 졸업을 시켜, 또 졸업 후 10년 정도를 체계화된 광야적 연단과 길고 충분한 복음훈련 전도훈련을 시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어떨 런지 모르겠습니다. 40~45세 이상쯤에야 즉 광야의 산전수전 왼만한 가난 고난 연단을 충분히 격은 후, 돈 여자 권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오리지날 순수 신앙인격 수준이 완성 될 때 목사가 되는 것이 마땅 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하니 아무나 목사가 되어 아간과 맘몬의 짓거리를 해대는 것입니다.
신학대의 존제 목적이, 목사님들의 학위의 의미가, 누가 묻지도 않는 목사 자신 스스로 자랑하는 학벌이 순결한 전도를 희생을 섬김을 청빈을 순교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느 어느 신학 대학에, 대학원에, 유학을 다녀오면 그 학벌이 교회 안에 대통령 짓과 목에 힘주는 용도 이외에는 더 섬기거나, 더 누추하게 행함을 실천하거나, 더 지저분 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거나, 더 청빈 하거나, 더 겸손 하거나, 더 직접 전도를 많이 하거나, 더 선교를 많이 하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성의 힘으로 아닌척 하며 한다는 것이지요. 나팔불어 외식스런 행위를 하는데 그러한 졸업장을 학위를 사용할 뿐 80kg 무거운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사용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래는180 kg 이라고도 함) 목사님들의 수가 많은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기꾼이 있다면, 곧 인간 본능의 종교심리를 이용하는 성직을 빙자해서 인간의 영혼을 악용 하여 무당 신비주의 기복주의 복장사로 자기이익을 (명성, 명예, 권위, 권력, 특권, 풍요, 부요 등등) 챙기는 자 일 것입니다. 참으로 말세입니다. 세상이 말세인 것은 목사가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죽었다” 어쩌면 니체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목사들이 상상을 초월 할 만큼 더러워졌고, 성직자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물질적 더러운 짓거리들을 서슴없이 해 대니까 그 시대의 환경을 반영하여 신은 죽었다고 터트린 말일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 이지요, 그런 목사님들 뽄을 받아 재정 부장 장로가 집사가 저주 받아 마땅 할 하나님 돈 흠처 먹기를 서슴없이 해댑니다. 금액이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원이든 백만원이든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당연히 돈에 환장한 그런자들은 저주 받아 마땅하며 저주 받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벧후2:15~17,발람→세속적인 권력과 권위적으로 백성을 정복하여 나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 (계2:14) (호세아4:6) 믿는 자 스스로 들추어서는 않될 흉 이지만 사회적으로 소문난 목사들의 부패들의 예 ▶ (고후11:12~15 거짓사도요 ~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하나니 ~~~ 나뿐 짓은 않해도 먹사 짓을 숨어서 하는 교묘한 거짓 목사가 우리 주변엔 많이 존제 ) 다 그렇진 않다 하지만 많은 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럴수도 있지뭐, 목사도 먹고 살아야지, 다른 목사들 다 그러는데 뭐 하며 물들어 있습니다. 인근교회의 퇴직목회자는 4억원을 주면 교회를 교인들에게 넘기고 은퇴하겠다고 처음에 교회 건축 할 때 자신이 헌금한 돈과 수고비라고 하며 그 돈 퇴직금으로 내노으라고 분쟁 중 이랍니다. 퇴직금 쪼로 달라 한다는데 그러면 그 교회에 헌금을 한 수 많은 성도들도 교회를 떠날 때 자신이 헌금한 돈을 받아가야 할것인데 답답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 목사의 길이거늘 목사들이 돈에만 환장을 하고, 모든 일을 돈과 연관지여 살아가는 목사...
내~가~ 개척 했으니까 개인적인 내것 교회라 하며 개인의 돈 인양 이 핑계 저 합리화로 적극적 절약심 청빈함 없이 마구 집어다 썻을 것입니다. 하나님 돈을 끝도 없이 욕심을 내어 아닌틱히 집어다 처먹고 또 처먹으며 친구 목사들에게 축복을 받아서 나는 축복 받은 목사라 풍요로운 부자라고 아~니~ 자기가 더럽게 응큼하게 하나님 돈을 강탈해 집어가 놓고는 축복을 받았다, 지가 지손으로 싸워서 억지로 집어가 놓고는 하나님께 축복 받았다, 이게 무슨 괴변입니까? 참으로 환장 할 일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돈에 환장하여 월급장이 먹사이려 스스로 처신 하니 하나님이 후원자를 만나를 보내 그 목사를 돌보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이런 더러운 사리사욕을 행한다면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정직히 복음주의에 맞는 교회가 아닌 세상에 직접 적극적으로 좀더 풍족히 헌금 할 것입니다. 즉 더러운 교회에는 헌금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저 스스로 직접 하나님의 돈 답게 쓰일 곧에 직접 쓰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회에선 존경받던(자칭) 목회자가 성도 1인당 (500명을) 두당 100만원의 권리금을 받고 5억에 교회를 팔았다고 하며, 어떤 목사님은 아들에게 고급 승용차를 사주고 매월 수 백 만원을 송금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으로 자기 자식을 외국 유학을 보냈다고 크게 자랑 까지 한답니다. 그 돈이 누구의 돈이며 어디에 쓰여저야 할 돈입니까? 목사의 자녀 해외 유학비로 쓰라고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금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사들은 믿음이 전혀 없어 하나님을 없신여기며 하나님을 두려워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남 아시아의 선교사들 중 일부는 선교비를 개인이 치부 하여 골프니 관광이니 가정부니 뭐니 하며 호화롭게 생활을 하며 무리를 일으키고 현지 인들에게 목에 힘을 주며 상류층의 사생활을 즐기며 몰래 한국에서 보다도 더 타락된 짓거리들을 하며 참담한 사단의 괴수짓거리들을 서슴없이 거리낌 없이 하며 하나님을 잡신으로 전파하는 선교사들도 있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사진 촬영 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다는데 그 사진이 고국에 선교비 조달 돈줄 이라내요? 전 세계에 파송되어 나가있는 선교사들이 우리가 상상 하는 것보다 더 혹독한 고생을 하시는 순수한 분들도 분명 있지만 한국에서 해 왔던 외곡된 변질된 짓거리들을 선교지에 가서도 새로이 엉뚱한 문화로 제도로 교주 먹사로 퍼뜨리고 있는 행위들은 또 다른 대한민국형 변질된 개신교회 문화를 외국에 가서 까지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를 참담 하게 하고 있습니다. 성직 매매를 하는 것은 성경의 어느 구절을 근거한 것인지??? 단 돈 조금이라도 임직비라 어떠한 핑개로 금품을 갹출합니다. 그렇게 돈주고 사듯한 장로들의 한심한 작태 또한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헌금 많이한 장로의 한심한 월권, 사기 횡령 불법 무식한 폭군적 주범인 장로님들도 주변에 빈번히 목격됩니다. 그런 개같은 재정부장 장로님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저주 받을 것입니다. 만원을 처먹었든 백만원을 처먹었든 말이지요. 믿음으로 된 목사가 장로가 집사가 아니니 그런짓을 하는 것이겠지요??? 또 노회 총회장에 (그 옛날의 교황에) 출마하는데 수 억원에서 수 천 만원의 돈이 뿌려진다는데 그 돈이 다 하나님께 드린 우리 또는 내 돈이 아니겠습니까?
100% 복음 전하는데 쓰여야 할 하나님의 돈이 사단을 이리를 위해 쓰여지는 꼴이지요. 그렇게 당선된 노회장의 부정은 또 어떠한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참담한 목사들만의 노회 집단의 부패, 자기들 끼리 옳으내 그르내 내가 위내 아래 내 시장판 막말에 욕설이 난무하는 한심한 노회 집단의 작태들... ~ 윗물부터 이토록 썩었으니, 이 목사들이 한국 교회를 쇠퇴와 변질로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 법정 까지 끌고나가 싸움질을 하는데 그것이 개신교 부흥에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에 대하여 생각이 없는 것인지 참으로 부끄럽고 더러워 죽겠습니다. (고전6:5~11- 세상 사람들 앞에서 싸움질 금지) 이 문제는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며, 그 구역질 나는 짓거리들을 개같이 자랑스레 하는 그분들은 왜 그렇게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는 추잡한 생을 사는지 한심할 따름입니다. 이렇듯 많은 목사님들의 동참 하에 이루어지는 자기내들 끼리의 자신들의 이기적인 더러운 노회의 부패행위를 그저 방관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즉 내비둬서는 않된다는 것이지요.
주에 종에게 대적하면 저주 받는다, 무조건 순종하라, 힘겹 도록 헌금하라, 부르면 즉시 동원되라, 목사 말 잘 듯고 잘 따르면 부자축복을 받는다, 이런 신약에 있지도 않는 헛 소리 들으라고 삶에 지친 성도들을 예수께서 교회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신약성경의 어느 말씀에 이런한 순종 복종이 나와있습니까? 눅6:39-맹인이 맹인을 인도... 베후2:1~3 그들이 탐심을 가지고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거짓 선지자, 현대 교회의 교주형 개신교회 목사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위장술에 능한 거짓 선지자들의 위선에 미신스럽게 무턱대고 방관하며 따라 속아선 않된 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는 절대 이런 새습이 없습니다만 어느 특별히 부자교회 교주 같은 여러 목사님들은 아들 목사에게 교회의 재산권을 목사님 개인의 것 처럼, 세속의 대기업 처럼 자식에게 세습을, 교회를 세습 한것이 아니라 돈을 권력을 세습한 것이지요. 이런 되먹지않은 일이 어디있습니까! 가난한 교회는 세습해 달라고 애원을 해도 않하지만, 본레는 전혀 돈을 보지 아니하고 가난한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그 믿음을 그나마 정상으로 훌륭한 것으로 봐줄수 있으나 돈에 환장하여 돈이 조금이라도 넉넉한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교회를 세습 하는게 아니라 돈과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니 순순하게 봐줄 수가 절대 없는 돈 편안 권력 욕심에 부자 교회 세습 이건 썩은 정도가 아니라 지옥 갈 작태중 으뜸입니다. 목사 권력과 풍요의 달콤함에 찌들어 결코 낮아지기 어려운 것이며, 이런 더러운 자들이 무얼 가르칠까요? ?? 그 어떠한 이유를 댄다 하여도 썩은 그들이 반드시 지옥 가기를 기도하며, 그 교회 세습은 목사의 자식과 교회를 이 나라의 부흥을 망칠 것입니다.
이런 행위 자체가 그 목사님에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로써 본인 스스로 사이비 교주라고 자칭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암리에 흔히 있는 일인데 목회자가 은퇴하거나 이교할 때 전임 목회자가 후임목회자에게 권리금을 받고 무식스레 치고 패고 다투기도 하며 교회를 넘긴다고 합니다. 세상의 일반 상가에서 받는 권리금과 똑같은 행태를 벌인다는 것이지요. 또 언제 부턴가 규정에도 없이 마치 법이 되어버린 관행이 목회자의 사례비 문제인데 ? 강남 어느 대형 교회 목회자의 월수입은-사례비 308만원, 월상여금 120만원, 판공비 150만원, 도서비 100만원, 심방비 100만원, 결혼, 장례 등 집례비 200만원 등 978만원과 월4회 부흥강사 사례비 800만원 (최저 200만원씩 잡는다면) -도합 1,800만원 정도 인데다 사택관리비는 무제한 별도로 고지서만 가저다 주면 교회에서 다 내 준다고합니다.
물론 이 경우 부가가치세나 어떤 세금도 공제하지 않는 순 수입이 되지요.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중 하나인 수만명이 모이는 모 독립침례교회는 외부 유명강사의 설교시 사례비로 40불 즉 5만원 정도를 드린다지요. 그리곤 연말만 되면 자기의 뜻을 잘 헤아리는 제직을 재정위원이나 예산위원으로 임명하여 사례비 인상운동을 함으로써 교인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벼라별 비교를 해가면서 하나님의 돈을 강탈해 간다고합니다. 그래놓고는 나는 물질 축복을 받은 성공한 목사다, 이런 버러지 교주 회사 사장 목사들 때문에 이 땅의 개신교회가 이 모양입니다. 요런 목사들이 부패를 확장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않하는지, 이걸 부러워하며 추구하는 수 많은 목사들... 참 답답하지요.
사례비 즉 월급인데 일반 직장인들이 받는 월급 300만원에는 모~든 비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헌금, 모든 자녀교육비, 부식비, 사적인 활동비, 외식비, 전기요금, 계돈, 각종 개인적인 경조사비, 용돈, 전화요금, 각종 공과금, 세금, 보험료, 퇴직 연금 보험 외 기타 등 등 등이 모~든 왼갖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퇴직금도 급여에서 그때 그때 때어서 적립 했다가 퇴직 때 주거나 중간에 소급해서 가저가기도합니다.
성도들 대부분이 대기업을 다니거나 공무원이 아닙니다. 아들이 대학에 진학한다 하여 월급을 인상해 주는 유학을 간다 하여 유학비를 대주는 회사는 없으며, 암에 걸려 죽었다고 따로이 후일을 위하여 생활비 쪼로 위로금을 몇 억씩 준다거나 일반 직장인에게는 그런거 절대 없습니다. 아마도 목사 사모님들이 가정에서 그러한 물질의 욕심을 상당부분 부추겨 조장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도 졸지에 신랑이 암으로 사고로 죽으면, 결국 그 과부는 직업 전선에 과감히 뛰어듭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한 불행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한 불행을 당했다고 더럽고 추잡하게 하나님의 돈을 하나님과 무관한 교회 돈인 것처럼 교회에서 몇 억씩 강탈 해가야 옳은 것이겠습니까. 고후11:2~ - 더러운 것에서 벋어나 무료 복음 헌신...
우리 주변엔 그러한 불행을 숙명으로 즉 가난과 고난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믿음으로 열심히 악착 같이 살아가는 과부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으며 당연한 것 아닙니까. 거의 대부분의 교회 안의 성도들은 퇴직연금 들고 싶지 않아서 적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헌금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형편을 모르는지 이핑개 저핑개로 사례비 외 집어가는 목사님들의 사례비가 150만원이 아닙니다. 이 핑계 저 핑계 집어가고 또 집어가고 400 ~ 500만원이 넘게 가저 간 것입니다. 우선 좀 육이 편하게 살겠다고 하나님의 돈을 인간적으로 특별권위권력을 악용하여 이렇듯 선을 가장하여 강제로 뜻어 가면 그것이 하나님 뜻일까요. 그러면 누가 헌금을 하며 전도를 하겠습니까.
성도들의 무의식적 심리 속에 헌금의 의미를 진정심으로 받아드리지 않는 심리가 유발되어 한국교회가 부흥 않되는 것 당연한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빙신이 아니며, 더러운 목사를 보고 그들은 말은 않해도 금방 눈치챕니다. 믿음이 적다 책망당할 까봐 말은 않하지만 이러한 교회를 위해 목사님과 동행하며 합력하여 헌신하지 아니 할 것이며 마음속엔 목사에 대한 못마땅함이 가득합니다.
차라리 사례비 즉 월급을 두배로 인상 해 주고 현제 지급하는 사례비가 200만원 이면 400만원으로 올려 주더라도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 하여 직ㅂ하고, 목사가 재정부의 참여나 간섭을 근절하여 하나님의 돈을 재정부가 순수히 독립되어 운영되어야합니다. 돈에 대한 목사님의 특별한 독제적 권력 이는 한국교회를 폐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퇴직금 준비도 월급을 넉넉히 미리 주어 그 400만원 월급에 포함시켜 목회자 본인이 스스로 준비하여 추후 퇴직시 진실로 깔끔하게 당연히 퇴직금 퇴직 사례비 아예 지급함 없이, 퇴직 할 때 돈 이야기 별도의 돈 지급 아예 없이, 어영구영 들러붙어 노후에도 편안이 살아보려고 원로 먹사로 생존하지 말고 깔끔히 떠나야 옳은 일입니다. 목사가 돈을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왜 ?? 아닌척 하며 그렇게도 돈에 환장을 하는 걸까요 왜? 그럴까요?? 왜 말도 않되는 다른 구약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그것만 구약의 레위인의 분깃을 운운 할까요. 그 으멍한 먹사의 속내야 뻔한 것 아닙니까? 대체 목사가 뭐라고 세상을 이리도 어지럽히고 기독교 하나님 예수님을 능멸하는 것이니까? 분명코 하나님이 임명한 거룩한 진정한 종놈은 재정부장이 아닙니다. 어떻게 종놈이 주인에 돈을 지 맘대로 관여를 하며 공금 횡령으로 말장난 붙여 멋대로 집어 갈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죽는 날까지 절대로 절대로 거지와 같이 가난하여야만 옳은 것 같습니다, 고전4:7~21, 고후 11:23~28 (청빈, 고난). 돈의 풍족은 사람을 나태하게 하고 변질 시키는 것은 보편적 인간 모두의 악한 특성이니 아예 제도적으로 막아 놓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펴고 자세히 관찰하면 거룩한 척 않 더러운 척 해바야 소용 없습니다. 일반 수 없는 월급 장이도 쥐꼬리만한 월급 받아서 노후대비를 스스로 다 알아서 처절하게 미리미리 해갑니다. 정말 모든 복음엔 고난이 따른 다는 진리는 전혀 신경 쓰이지도 않나요. 검소하고 청빈 아끼고 아끼어서 연금 보험 미리 알아서 들어 놓으세요. 돈 이야기 않꺼내는 아름다운 퇴임은 불가능 한가요?
우리의 이런 모습을 이방인들이 외국인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아는 줄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를 쓰레기로 아는데 그래놓고 전도가 않되내 부흥이 않되내 한국의 기독교인은 계속 감소하내 말세중의 말세네 하는 말이 나옵니까? 그렇게 더러운 교회에 목사님에게 누가 전도되어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기존 성도도 이러한 목사님들의 권위주의 돈 타령 문제 때문에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실족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러한 아름답지 못하고 더러운 돈 타령 때문에 실족하여 목사님들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수도 없이 전도가 않되는지 알기는 하시는지?,
아까운 성도 영혼들 부흥은 고사하고 목에 연자맷돌을 매다는 목사님들의 탐욕?? 사도 바울이 퇴직금 받았다는 말 못들어 봤습니다. 살후2:1~12= 왼갖 기복주의, 율법주의, 조작된 가짜 표적과 이적과 기적으로 미혹의 영이 창궐, 대한민국 전통종교들과 짬뽐된 말장난식 신앙으로 유도, 목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하며 정작 영적 권위는 하나도 없고 그 있어야 한다는 권위를 악용하여 벼라별 인본적 육욕의 짓거리를 행하며 거기에 권위권력계급주의식 교주노릇으로 무소불위의 왼갖 벼라별짓을 다해버리는, 딤전 3:1~13=목사의 자격은 단 하나도 갖추지 아니하고 도저히 목사라고 볼수 없는 먹사가 분명한 짓만 골라가며 하는? 마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믿는자의 먹회자의 끝도 없는 자기합리화는 지금 2005년의 오늘을 만들어 냈습니다. 목사가 설교는 신본주의라 설교하면서 인본주의적 물질욕 권력욕을 아닌척 하며 응큼하게 노골적으로 들어냅니다.
마10:9~10 -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 가지지 말고... 그러나 수도 없는 더러움을 끝도 없이 합리화 시키는 우리들의 행태 그 벼라별 쓰레기 짓을 왼갖 자기들 끼리의 합리화로 어영구영 해봐야 결국엔 전도가 안되는 복음이 않 전해지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청빈) 금전적인 모든 행위들로 인하여 목사님들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세상에 전도가 않되는, 반 기독교 사고를 유발 시켜 주님의 몸된 교회 마져도 위태롭게 만드니 말입니다.
이 외에도 돈 벌이형 카리스마 달변형 부흥강사, 간통, 파렴치 성추행, 횡령, 직함을 이용한 사기, 부동산 투기 등 등 지저분하고 참담한 더러운, 불신자보다 더한 내용들이 너무도 많으나 성경 본래의 복음 전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이런 교주가 판을 치니 목회자가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느니, 평신도는 천국에 갈 사람이 많은데 정작 목사님들은 천국 갈 사람이 몇 않된다는 등의 사실 같은 말이 떠도는 것입니다. 목사의 더러운 손으로 하나님 돈을 마구 집어가 때부자 이면서 하나님이 축복했다고 말장난을 일삼는 먹사님들 창피하거나 수치스럽지 않으십니까? 교회 안에 실존하는 목사들의 더러운 짓거리는 가롯 유다의 행위로서 예수님을 팔아 자기의 이속을 챙기는 자기 권력을 즐기는 먹사적인 목사들이 이 시대의 분명한 가롯 유다입니다. (마9:13-긍휼) (마7:23-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우리도 머리를 맞대고 점검해 봅시다. 건전한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기는 하겠으나 우리 교회의 목사님도 거짓 목회자가 아닌지? 은연중 우리도 동색이 되어 물질적 그러한 부정적 대접을 해 주는 것이 진리인 것 처럼 교주로 부축이는 것은 아닌지? 그 더러운 것들에 우리도 쇠뇌되어 정답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목사님을 가난한 청빈한 목사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 (고후11:12~15 거짓사도~사단의 사도 => 빌1:9~10-선한 것을 분별) 소수의 목사님들은 순수하고 순결 하지만 많은 목사들이 물을 흐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목사님의 잘못된 단 한 번의 실수가 사회 환경에는 엄청난 부흥 전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 이 말씀 저 말씀 꾀 맞추어 끝도 없이 자기합리화 시키지 마시고, (말씀 조작 금지 고전4:6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이런 글을 썻다고 분개하며 15년 넘게 믿음 생활한 집사가 되가지고 불신자 초신자들이 읽으면 어쩌려고 !!! 이렇듯 폭로하면 않된다? 하며 본 글을 쓴 저에게 욕 하신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찌하고 이러한 썩음을 그저 묻어두어 더 썩어 가자는 말씀들 이므로, 우리 믿는 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회개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실은 이보다 더 참혹 한심한 것들이 많으나, 추잡하여 글에 다 올리지 못하는 것들도 부지기 수입니다. 물론 세상엔 완전한 것이 없으며 교회와 목사 또한 완전 할 수는 없습니다. 마15:14 더러운 자가 우리를 더러운 길로 인도... 교회도 그러 하겠으나 2006년 현실을 관찰해 보면 민주자본주의는 조만간 한계에 직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발맞추어 우리나라 교회의 빈부격차 즉 초 대형교회 또는 중 대형교회는 무조건 없어 저야 하며 성도 수가 5~6백명 이하로 교인수를 제 분배가 이루어 저야 합니다? 교회 대형화는 물질의 부패로 이어저 개신교회 전체가 함께 패망으로 가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소 그룹형 교회화? 가정교회? 이미 벤드 교회라는 것도 있지요?? 목회자의 권위 권력 인본적 욕심에 의하여 지금 까지의 문제 야기자인 목사님들이 예외 없이 부정행위를 일삼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권위권력하에 물질욕에 푹 빠저 살아가는 목사들의 먹사적 물질 행위가 없어 지려면 교회의 성도 수 제 분배가 꼭 이루어 저야만 이러한 시장경제 논리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본받은 더러운 교회 목사들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가난한자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극복하기 힘든 이 추악한 자본주의 하에서의 물질의 풍족이 넘치는 초 대형 교회의 더러운 목사들을 어찌하면 아름다운 성직자로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미 자립 교회 불쌍한 목사님들을 방치하는 것은 어찌 할 지? 지금의 종파분열 개교회주의를 연합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 한 것인지?
도대체 이 글을 쓰는 자가 예수 믿는 집사가 맞어?!! 목사님! 이런 과격한 폭로의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 고상한 단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면 이해하는 자가 똑바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가벼이 여겨 자기 맘대로 잘못 알아들으려 하기 때문에 좀 노골적인 표현을 쓸 뿐입니다. 노골적인 표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승리 하려면 목사님이 가난하게 십자가에 깔려 죽어 주셔야만 가능하고 그리 죽어 주시지 않으면 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전4:7~21목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비천하여, 낮아지고 낮아져야 목사. 고린도후서 11:23~28 뼈 빠지게 고생하고 옥에 갖히고 매를 맞고 이런 저런 위험을 당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죽기 직전 까지 고난의 고생의 일생을 살아간 사도들 처럼 이러한 십자가에 깔려 죽음이 목사님의 일생이어야 그 열매로 이 시대에 교회가 부흥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이러한 목사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딤전6:6~10, 17~20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이겨내야, 돈은 일만 악의 뿌리... 목사님이 교회가 하나님 돈을 어디에 쓰는가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그 목사님의 믿음을 분별 할 수있답니다. 돈에 마음을 품으면 바로 쓰레기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더러워지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목사 면전에서는 그럴사하게 미소지으며 존경을 표하는 것 갔지만 절대 아닙니다. 21세기 현제 그런 존경 주는 사람 없음은 목사님 스스로의 탓입니다. 롬2~3장 = 다른이를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도둑질하고 율법을 범하고 아닌척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먹사들...!!! 어쩌자고 그리들 먹사들이 하나님의 돈을 이핑계 저핑계로 집어 처먹다가 결국엔 세상 법정에 까지 가가지고 이 땅을 황패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 세상 법정에 가지 말라함은 그런 개같은 세상 법정에 갈 세속적 더러운 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전6:1~11 아마도 교회법에 명시를 하여 목사들은 모두 가난하게 평생을 살게, 사도바울 베드로 등 열두제자가 육의 생을 마감 하듯이 육으로는 반드시 비참하게 죽어 주셔야합니다. 목사의 경제적 수준은 궁핍을 막 벋어난 수준의 경제 수준을 정하여 물질의 풍요에서 일정 거리를 두어야만 인간의 본질이 탐욕인데 그 탐욕을 법으로라도 막아 놓아야 교회가 살 것입니다. 제발 제발 물질적으로는 초라하게 사세요. 은퇴 할 때 하나님 돈 집어가는 짓거리좀 그만 두시고 초라하게 은퇴하여 본인의 순수한 믿음을 증명 하세요. 그걸보고 부흥이 될것입니다. 잠언 30장 7~9절 아굴의 기도처럼 굶주리지 않을 만큼이면 목사님들의 평생 물질은 충분한 것입니다. 목사에게 풍요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왼갖 더러움이 시작 되는 것임이 우리가 이 시대에 눈으로 확인 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의 물질에 목메지 말아 주세요. 목사님들의 부패의 원인인 “돈 여자 권력” 이것을 이겨 극복해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사님의 목회는 성공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설령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요일2:15~17-영적권위가 주어진 자라 스스로 말하며, 실제 영적 위엄성은 없고 세상의 더러운 육신을 위한 (롬8:6~7-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됨~~ 생각 만으로도 그러 할 진데 노골적으로 육의 것을 탐하는.) 우리끼리 지어낸 제도적 권위를 응근히 아닌틱히 악용하여 순수와 청빈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아닌척 하며 쫏아가는 목사님들의 행실이 선하지 못하고 그럴사한 자기합리화로 더러운 그릇으로 사탄 마귀의 짓거리를 목사가 살아가면 우리 예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쩌란 말입니까? (벧전2:12=너희가 이방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디도서 1장 16절 :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 하나 행위로는 부인 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 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복음을 전하는 곧에는 풍요나 편안이 없고 고난이 항상 따른다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고난은 평생 당연시 여겨야하며 복음을 전하는 중에 내내 잠시라도 늙어 죽기 직전 까지 가난의 고난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 복음적인 삶의 모습을 거룩하다 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진리로의 삶, 세상과는 구별 된 삶을 말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윤리 도덕 착함 선함으로 양복입고 의젓해 보이고 근엄해 보여 육적으로 거룩한 척 하는 것들이 거룩이 절대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란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것으로 만의 삶으로 일평생 애씀의 모습을 거룩 즉 영적인 거룩) 이라고합니다. 목사님들께 유리하게 흘러온 교회의 전통들을 신약성경적으로 되돌려 놓아봅시다.
<<<예레미야 7장 8~11절, 12장 10절 :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권위권력계급주의 거짓으로 육을 위해 돈을 집어가는) 의존하는 도다. 너희가 도둑질 하며...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더러운 목사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아의 말씀 이니라.>>>
+++잘못 변질 조작된 개신교회의 예배, 기도, 헌금, 찬송 문화와 환경과 전통+++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동물이기도 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종교심이 없는 자는 없으며, 지구상 역사적으로 어느 민족이든 종교가 없는 민족의 역사는 없으며, 인간의 종교심은 자연발생이며, 그 수 많은 종교들 또한 예배와 헌금과 기도가 없는 종교 또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하나님은 그런 수 많은 종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수 많은 나무토막 돌덩이 샤마니즘 토테미즘적 우상 잡 종교와 똑 같은 형식?, 성경 본질은 쫏는척만 하고 비 본질에 목숨을 거는 짓거리를 우리 개신교가 한다면 우리의 특별하신 유일신이신 하나님은 어쩌란 말입니까?
이 시대에 신약성경만을 향한 본래로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에 명확히 명시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안에서 우리끼리 또는 목사 장로들이 인본적으로 지어낸 전통 관행 습관들이 믿는자를 힘들게합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살아가고있는 전통들은 시급히 개혁해야합니다. 개혁이라 하여 가장 위험한 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기분 나뿌니까 바꾸자입니다. 아무리 개혁이 중요 하지만 기분나뿌니까 바꾸자는 식의 감정적 개혁은 해서는 절대 않될 짓이겠지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오직 신약성경적인 본질의 문화로 환경으로 전통으로 반드시 바꿔 나아갑시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가 십자가 복음, 오직 믿음에 관련한 본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갖 비 본질로 열심하면 마치 그 비 본질로 구원을 축복을 받을 것처럼 타 종교와 별반 다를바 없는 것이 우리들의 교회들의 2005년 현제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준다는 감언이설식 선동에 인간의 감수성은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혹~ 하게 되어있습니다. 종교적 동물인 인간에게 기복주의와 은사주의로 때부자 무병장수 만사형통으로 선동적 광란의 짓거리로 꼬시면 기독교가 아니어도 부흥 못할 종교가 없을 것이며 이는 인간의 기본 종교심리학적 요소입니다. 우리로서는 측량 못할 전지전능자 천지의 주권자 하나님이 무슨 잡신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이거 밖에 않됩니까? 어쩌다가 이 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닌 척 하며 변질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종교심리를 세상처럼 이용하는 지나친 간증전도형 집회들은 대부분 육적으로 성공한 분들의 간증입니다. 성서는 육적으로 성공한 이야기만 나오지 않습니다. 죄와 허물을 영을 이야기 하는 참 복음은 육의 귀로 듣기에는 항상 거북하고 듣기 싫어야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심리적 동요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간증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넣지만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간증자 자신처럼 육적인 열심으로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성서는 축복을 받으라 보다는 이웃과 고난을 (롬 8장)함께 하라는 말을 더욱 많이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아중심 성공주의 심리학의 영향은 교회안에서 자아중심 축복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신앙은 일평생을 보는 것입니다.
단지 한번 성공했다고 평생을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예인들의 신앙을 보면 인기가 좋을 때 간증집회 강사로 교회들이 불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그 연애인 신앙인들의 거짓된 탈세, 이혼, 타종교로의 개종을 보면서 환멸을 느낍니다. 그가 연애인이 아니라면 교회에 와서 간증을 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육으로 유명해진 쇼멘쉽의 달인들인 연예인을 간증집회에 왜 이용 할까요? 뻔한 것 아닙니까? 헌금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려는 무엇무엇을 하나님께 주었더니 무엇을 풍성히 받았다는 간증으로 엉뚱한 무당 예수를 선전 선동해 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심리학적 이용으로 성공주의와 자아도취, 자기실현, 자존감 이런 것들은 교회에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마음이 맑고 순수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일명 투명한 옷을 입고 길 거리에 행차를 하는데, 군중들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 표명 될 까봐 임금이 홀딱 벗었음에도 우리 임금님 옷 멋지다고 위선을 떠는 동화 이야기 이지요. 그러던 중 어린아이가 소리처 말합니다. 워~메~ 임금님이 빨가 벗었네... 저만 성격이 요 모양이라 그러는 것입니까?. 고상한 척, 거룩한 척, 삶이 예배인 척, 착한 척, 사랑이 넘치는 척, 바리세인식 열매 많이 맺어야 한다하여 중심에 믿음은 없이 믿음이 커 보이려고 자기의적 헌신으로 열매를 까발려 맺는 척, 주변을 의식한 요놈의 인간에 척 척 척의 교회 환경 문화 ! 대체 우리들의 교회와 성전인 믿는자 스스로가 이런 말도 않되는 인간 심리학에 놀아나야 되겠습니까?
한국사회도 진작부터 심리학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종교심리학 = 인간의 종교, 종교체험, 종교와 성격과의 관계, 신앙과 건강과의 관계, 회심체험의 특성, 신비주의 등 수많은 종교심리학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종교체험담을 토대로 사람들은 어떻게 종교체험을 하고 있으며, 그 체험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 탐구하여 이를 아닌척하며 교회문화에 악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찌 생각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기독굡니까?. 부흥강사 초빙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기복주의 물질축복 신비주의 병고침은사주의 등등의 종교심리학을 최대한 잘 이용하는 자들을 섭외하여 십자가복음을 양념으로 섞어 엉뚱한 짓거리만 펼치는 부흥회라는 것을 서슴 없이 해댑니다.
정말 성도들을 잡신자로 만들며 빙신으로 아는 것이지요. 이처럼 교회안에서도 수도 없는 방법으로 심리학이 악용 애용되고, 또 심리학은 상담학이라는 이름으로 응큼하게 성경과 적절히 섞어가며 교회 안에서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해 보이고,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한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티끌 만도 못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야 할 존재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사함을 받아야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심리학에 의한 인간 자아, 인간 자아주의에 도취되어 살아갈 때 인간은 혼자되어 외롭고, 우울하며, 결국 불화하고 폭력화되어 이웃과 분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 진리는 심리학에 놀아나서는 아니되며, 참 진리는 참 복음은 육의 귀로 듣기에는 괴로운 소리입니다. 듣기 좋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후벼파는 고통의 논제를 펴는 것이 목사님들을 괴롭히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니 제발 제발~ 기분 나빠만 하지 마시고 신약성경 본래 순수로 돌아가 보게요.
최초~ 교회의 본래 모습?? 1~2세기 초대교회 예배 문화제도 헌금의 모습은? 디도서2장1절-바른 교훈에 합한 설교 예배만? 성경상 본래에 주님 주신 순수한, 온전한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는, 교회의 본분은 간대 없고, 이교도와 다를바 없는, 종교환경이 엉~뚱한 광란적 저속한 잡 종교 분위기로 우리 믿는 자의 신앙관이 사회적으로 기독교를 저속하게 인식 하도록 만들고, 본질에서 벋어난 이러한 것들이 부흥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정말 전혀 않드시나요.
우리들 스스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육적인 복이나 받는 엉뚱한 방향으로 교회문화와 제도들을 이토록 망처놓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잡신으로 여기어 엉뚱한 예배로 기복주의 잡신으로 예수님을 모독해 놓고는 개신교인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말세 지말이라 하며 엉뚱하게 종말론으로 성도들을 공포심을 동원하여 협박하며 자신들의 더러운 변질 때문에 교회가 이지경인데 엉뚱하게 종말론적 사탄을 핑계삼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목사님과 우리 믿는자들의 탓인데, 자신들의 변질은 성경으로 자기성찰은 아니하고 교회의 제도와 문화를 외곡시켜 우리들이 잘못해놓고는 어찌 사탄을 핑계삼는 걸까요. “에베소서5:15- 주의하여 지혜로 와야~~” “골로세서 2:20~23-“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 우리 한국이 본래 무턱대로 빌어대는 토속 신앙의(기복적 토템 - totem),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유구하게 흘러온 유교적 불교적 샤마니즘의 잔재가 있어 이토록 엉뚱하게 변질됨은, 마24:4~14-하나님의 말씀을 조작하여 하는 거짓 선지자의 설교에 미혹 받지 말라. 요1서4:1-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확인, 그 샤마니즘이 기독 교리와 잘못 짬뽕되어 십자가와 성경말씀과 무관하게 무턱대고 목사님들에게 그대로 따라주는 잘못된 신앙관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우리나라 토속종교와 섞인 샤머니즘에서 흘러온 불교적 무당 교주 느낌에서 목회자 조차도 벗어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무당성을 붙들고 기복주의 신비주의로 예수는 말 하되 진짜 예수는 없는 잡탕비빔짬뽕 현제 우리의 개신교회의 문화 환경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렘23:16-헛된 가르침만 만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유교 불교형 교회문화로 그 특성을 예배문화에 은근히 악용하여 지금의 잡신 잡탕 짬뽕형 한국교회의 모습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님들이 이러한 짬뽕의식을 악용하여 이 땅에서의 기복주의 예배를 참 예배라고 펼치며 꼬시며 렘14:14-왼갖 짓으로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 신약 성경과 무관하게 우리끼리 지어낸 문화로 제도로 벼라 별 짓을 다 하지요. 말로만 예수, 말로만 십자가 복음을 외치고 실제는 기복주의 율법주의에 쩔어 바리세인 보다도 더 바리세인인 저 같은 신앙자가 있다보니 그러다보니 저 같은 헛 집사도 나온 것이지요.
본 글을 쓰는 저만 성격이 못되어서 저만 정직이 지나처서 저만 스스로를 까발려 나는 신앙의 위선자다, 나는 가식적인 형식적인 신앙자다, 나는 구원과 무관한 비 본질에 쩔어있는 장경원 집사인 나는 가라지다... 남들이 손가락질 할까바 믿음 좋은 척 하는 나만 그런 성도 일까요? 저 또한 무엇이든 다 잘되게 해 준다는 하나님이 특별히 나만을 사랑하사 왼갖 기복주의 문화 하에서 전도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영적인 깨닳음을 정직히 찾아내지 못하고 제 영을 목사님이 바로 세워줄거라 믿고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인본주의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하며 나 스스로는 고통스레 고뇌해보지 않고 남들 하는대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확신으로 믿음안에 살아가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목사는 물론이요 성도는 예수를 놓고 생명을 놓고 고뇌해야 당연하며 정녕 고뇌하지 않는 맹신 광신은 분명코 지옥에 끌려갈 것입니다. 믿는자의 자가당착적 충성을 힘써 하고는 종당에는 가라지로 버림받는 (쓰임 받고 버림받는)것 말입니다. 저는 혼돈의 기복주의로 완전 광신도로 성장하지도 못하였고 왼갖 잡종교에서 구하는 육의 것들을 구해 봐도 이방인들과 건강과 돈벌이 소득은 전혀 다를바 없으니, 그리고 이제는 성경과는 다른 헛짓거리가 제 눈에는 훤히 보이니 작심하여 이런 싹아지 없고 슬픈 글을 쓰는 것이겠지요.
에베소서 1장 3절~14절 =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엡2:10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후정론인 것처럼 숨겨진 그 분명한 예정론... 토기장이 비유를 보아도 즉 토기장이 맘대로... 우리들의 소원대로가 아닌, 내가 잘난체 하는대로 쓰임 받아 자아를 충만케 자존감을 만끽하는이 아닌, 나라는 그릇을 만든자의 뜻대로 쓰여지는... 내일 일을 나는 조금치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으니... 저는 개인적으로는 아주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예정론자인 편입니다. 본문 말씀대로라면 그리고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 무한 능력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전지전능보다도 천배는 더 크신 전지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창세 전에 나를 계획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까지 것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경륜” 즉 하나님이 나를 견인해 억지로라도 끌고 가시는데, 하나님이 그까짓 것 못 끌고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무능력한 변덕장이 이시겠습니까?.
즉 전지전능자이신 하나님은 요랬다 죠랬다하는 후정론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는자는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동시에 일평생 뼈빠지게 부지런히 열심히 살도록 섭리되어 있으므로 진정 믿는자라면 결단코 게으르게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예정론의 반대적 성경 말씀도 있음 - 딤전 2:4 -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 하심 등등, 측량할수 없는 크고크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저는 개인적으로 예정론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전 즉 7천년 전에 택함을 받았고, 우리의 지금 현제 나날들의 1분 1초 마다의 모든 일도 이미 정하여진 섭리대로 진행되고 있으나 우리가 내일 일을 알 수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전 뜻에 의하여 우리를 인도해 가는 것이지 벌래만도 못한 유약한 존제가 육적인 기도와 헌금으로 어찌 해 본다고 이랬다 저랬로 하나님 섭리가 바뀐다고 보지 않습니다??
후정론의 약점은 먼지 만도 못한 피조물인 인간이 벼라별 노력으로 된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전지전능자가 아니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저속한 무당 토템 샤먼 교주 같은 말에 속아 뭘하면 뭘주겠다식의, 헌금의 꼬심 선동당하므로 믿음과 무관하게 분위기로 의무감으로 남들 다 하니까로 인간비교심리 문화와 제도로 조작당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후정론 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구원의 조건도 아님에도 원숭이 똥구녁은 빨게 빨가면 사과식의 말장난에 비교 당하고 믿음이 작다고 쪽 팔릴까바 목사님의 말장난에 속아 헌금을 많이 한다하여 하나님의 우리 개개인을 향한 섭리 계획이 무당 잡신들 부적 처럼 매일 바뀌어 영적인 신령과 진정한 믿음 없이 인본적 자아 욕구로 헌금 많이 한다고 우리가 부귀영화 무병장수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님을 에베소서 1:4~5절 말씀만 보아도 쉽게 이해를 할 탠데, 우리 믿는 자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모두 병신입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물질과 편안의 복을 빌고자하는 본질이 죄덩어리인 인간의 종교심적 기복심리가 있기는 하나, 샤마니즘적 엉뚱한 기도로 불교에서 불공을 드리듯, 무당이 굿을 하듯(특히 4~50대 이상의 여성분들의 신앙심은 토속 샤마니즘식 짬뽕 기독신앙 ??) 기도라 하며 빌고 빌어대면 공부를 않 하여 실력이 없는 게으르고 무지한 아들이 합격을 하고, 헌금으로 복을 빌고 빌면 게으른 자도 사기꾼도 부자가 되고,,,, (신23:18 - 창기의 소득과 개 같이 번돈은 여호아 전에 가저오지 말라....) 우리의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 요랬다자 저랬다가 무슨 잡신입니까? (딤후4:3~4-허탄한 이야기를 쫏지 말아야, 고난의 삶) 현실 도피식 열광 광신주의로 은근히 뜨겁다 부추기며 성령 받았다 은해 충만하다 하며 광신으로 오도 시켜가는 기도가 하나님적이지 못한 기도가 진정한 신앙인가에 대하여 우리들의 교회 환경이 참 신약성경적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궁금해 해 보아야합니다.
참으로 말과는 달리 엉뚱한 길을 가는 우리들의 교회가 개신교가 이거 밖에 않된는 종교입니까? “뿌린 대로 거두리라” (헌금을 두고 한 말이 아님) 는 말은 믿음을 심는 뜻의 성경의 명언입니다. 믿는자든 불신자든 인간은 육의 먹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땀을 뿌려 노력해야 밥을 먹고 살수 있습니다. 연보 즉 헌금과 무관하게 아마도 물질에 있어서 만큼은 일반은총으로서 하나님은 인류 모든이에게 공평 하십니다. 그저 모든 인간에게 균형을 맞출 뿐, 믿음의 자녀라 하여 광란으로 눈물로서 모~든 육의 것을 구하고, 기복적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부자로 만드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헌금 많이 해가지고 때부자 된 사람 저는 주변에서 단 한번도 못보았습니다. 막12:41~44과부의 헌금 동전 한 개... 복체를 내고 신께 빌면 무병장수 때부자가 되리라고 기대하는 인간의 기복심리는 지구상의 모든 고등종교는 물론이요, 수 없이 많은 샤머니즘 잡 종교 모두가 기복 때문에 종교생활을합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신앙관이 타종교와 다를바 없는 그저 그런 기복종교적 문화 환경으로 우리나라는 더욱 심각하게 한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타 종교들이 부귀영화 무병장수 기복주의에 현혹되어 놀아난다고 우리도 그리하면 돈과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였는데 우리의 주님은 어찌합니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9:42) 새 신자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딱 두가지 노래만이 귀에 들린다고 하는데, 바로 '복 타령'과 '돈 타령'이랍니다. 어쩌다가 우리 개신교회의 문화 환경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담임목사께서 모처럼 좋은 설교를 오직 예수십자가만을 그 보혈만을 잘 전하시는 듯 하다가도, 은연중 십일조를 잘 하면 때 복을 받는다고 열변을 토하며 '복과 돈'을 복음에 뒤 섞어 버리는 교회 환경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지요.
이러한 태도들로 인해 새 신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히 크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헌금 채에 대한 비난이 매우 신랄하며 마음속에 거부감이 심한데,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유치하고 뻔히 속 보이게 왜 잠자리채를 돌리며 헌금을 강요하냐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누가 주도하여 슬그머니 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도 정확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약에는 분명히 “연보 괴”라는 말이 나와 있음에도 이토록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인 악습이 그토록 오랜 동안 교회 내에서 계속 이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교회에서 왜 구태여 이런 졸렬한 방법으로 인간의 비교 심리를 이용하여 반강제적인 헌금을 거두어야 하는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가장 경건해야 할 예배 속에 위장된 매우 저급한 헌금 강요라는 것을 누구나 느끼지만 쇠뇌되면 당연시되는 것이지요. 세상의 그 어느 모임에서도 모일 때마다 눈앞에서 채를 돌려 가며 돈을 거두는 곳은 없으며 타 종교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이러니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오직 속죄와 구원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퍼 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므로 교회에 열심히 (십일조가 아닌) 영적 은혜에 감사함으로 십에삼조의 감사헌금을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하고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조선의 옛말에 “마음보는 못되게 쓰면서 치성만 잘 드리면 복을 받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교회문화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믿음의 분량과 능력에 따라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은 일이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런 헌금이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기복은 아예 없이 순수한 믿음으로 발현되어 자발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구약을 들먹이며, 물질축복 만사형통 복을 주겠다고 꼬시며 강요하여 더 내게 만드는 방식의 헌금에 대한 문화 제도 환경은 거의 사이비 종교 수준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헌금 강요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며,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시험에 빠트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0여년전 우매 무식한 할머니들이야 그러한 비성경적 사기에 넘어 갔을지 모르나 현제 2005년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응큼한 속 눈치챕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빙신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돈 없으면 교회에 다니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어떤 분의 분류에 따르면 헌금의 명목만 해도 70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 처럼 돈을 밝히는 교회는 결단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헌금 채 앞에서 이를 못 본 척한다거나, 동전이나 저액권을 꺼낼 만큼 얼굴 두껍고 간 큰 성도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드믈며 이는 그냥 인간 채면 심리일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 환경은 성도들을 실족케 할 수 있고, 또한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며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예수님을 점쟁이나 무당 잡신으로 인식케 하는 신앙관을 엉뚱하게 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란 인간이 있는 모든 곧에서 똑 같이 일어나는 현상 이기도 하지만, 교회는 더더욱이 돈이 쌓이면 반드시 교회와 목사 장로가 썩는다는 것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수 없이 많이 더러운 스스로를 잘 증명하고 있지요. "목사님들 월급 두둑히 넣어 주고, 교회 운영, 행사비로 지출하고, 선교 지원 명목으로 동료 목사님들과 나누고, 대외 선전용으로 구제비 생색 좀 내고, 별반 필요도 없는데 목사 자신의 육적인 성공의 모습을 자랑삼기 위하여 교회 신축 증축하는 것에 쓰고 또 쓰지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 교회들은 돈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이고, 반대로 큰 교회들은 넘치는 돈으로 딴 짓을 너무 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중한 교훈은 비만으로 배부른 교회는 틀림없이 부패하고 타락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에 큰 돈이 쌓이면 반드시 썩는다는 것이지요. 헌금을 거두었으면 오직 하나님 뜻에 만 지출하는 분명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핑계 저핑계로 왼갖 이기주의에 쓰다보면 거기에서 악한 사용도 발달되는 것이지요.
<<고후8:14~15 - 성도들이 서로 나누어 평균케 하라. 딤전6:17~19 - 선한 주님의 사업에 나누어라, 남 좋은 일 해라. 신약성경적 헌금 즉 연보의 원칙은 = 1-십일조의 원칙은 예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료 완성하여 없에 버렸으니, 오직 영적 은혜에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더 많이 해라. 1-있는 대로 해라. 1-은혜에 감사함으로 헌금을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라. 1-기복주의 미신 심정 없이 꼬심이나 강제나 눈치봄 체면 비교심 없이 하나님과 일대일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 1-즐거운 뜻으로 하라. 1-모~든 하나님의 돈을 평균하여 나누는 일에 쓰이도록 원하며 해라. 1-목사를 포함하여 그 어떤 누구든 단돈 일원도 일 개인에게 쓰이지 않토록 해라.>>
거두은 헌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우리나라 개신교회 제도에 아주 심각함을 가지고 바로세워야 할 가장 큰 문제 이지요. 하나님께 헌금하라 하니 그 돈은 하나님의 돈이므로 그 돈 쓰여짐의 문제는 헌금을 내는 문제 만큼이나 우리에겐 중대한 문제입니다. (마 23:15)"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헌금 쓰임에 대해서도 고후8:1~15 서로 섬김을 위하여 서로를 평균케 하기위해 나누어 쓰는데 쓰라고 연보하라 하십니다. 고후13~3-아무리 험금을 많이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꽝 이라고도 말씀 주셨죠? (고후9:8) 목사님 월급주는데 쓰라고 우리끼리 교제를 핑계삼아 지가 내놓고 지가 처먹는 형국의 쓰임이 아닌 착하고 선한 불우한 자들을 위하여 공평히 나누어 쓰라하십니다. 딤전6:17~18, 고후9:11~13-부자 복 받으려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해 헌금 하는 것이며 그 헌금으로 모아진 돈은 모두다 이웃을 섬기는데 복음 전하는대 쓰여저야 신약성경적 근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에 환장하시지도 헌금 때문에 움직이시는 그런 허접한 잡신이 아니십니다. 믿음은 쥐뿔도 없는데 육을 위한 기복적 목적으로 하늘의 상급 운운하며 헌금만 많이 한다고 영적인 복을 받거나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시대 개신교회가 신앙심을 볼모로 억지 아멘을 강요시키며 공동체의 맹종을 요구했습니다. 인간은 획일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물 앞에서 물을 마시려거든 무엇을 내라(헌금, 전도, 출석, 건축) 강요하며 물을 준다고 해놓고는 기복주의로 꼬셔 놓고는 물 비슷한 것도 주지 못하고 계속 말장난만 끝도 없이 벌이는 우리들의 교회? 결국에는 성도들이 이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알고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기복에 끌려 다니다가 별달리 효과도 못보고 본심적 의욕이 떨어지니 전도 할 진심이 생성되지 않는 것이지요. 기복의 기적효과로 대박을 터트린 성도가 교회 마다 두세명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을 근거로 기복으로 전도하며 꼬셔 볼텐데 전혀 그러하지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일주일간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상처받고 살다가 교회 와서 위로받고 오직 하나님의 성경 말씀으로만 재충전의 시간을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기복형 예배를 통하여 인간의 종교심리 기복심리를 이용하여 더 큰 부담과 죄의식까지 심어주었습니다. 특히 헌금과 전도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죄인으로 응근히 쥐어짜며 낙인합니다. 1960~80년대에는 그러한 기복주의를 기적주의를 악용하는 목사들의 일방적 독선 무당 교주방법이 그럴사하게 통했기에 한동안 뜨거운 냄비로 달구어 졌습니다. 그러나 2005년 현제엔 미디어 발달로 아무나 진리의 말씀을 사실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려 목사의 말만을 의지 하지 않습니다.과연 우리의 하나님이 돈을 밝히는 하나님 일까요?
목사님의 기복주의 설교에 속아서는 아니되며, 듣기 좋은 설교만하는 목사를 경계해야 하며, 게그콘서트하는 목사 복장사 목사 그로인해 칭찬 받는 목사는 거짓 목사입니다. 글제주가 없어서 인지, 제 성격 탓인지, 본심은 그렇지 않으나 이러한 거친 표현으로 글을 써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어쨋든 왜 오직 예수만을 십자가 복음만을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만을 설교하지 않는 이러한 것도 이단이라 표현되어야 올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교회의 문화 환경이 이리 되었습니까? (살후2:3-배교, 마24:24-거짓 선지자의 육적 표적과 기사, 눅6:26-인기 짱인 목사의 말장난은 거짓 선지자) 우리의 생각으로 상상으로는 조금도 짐작 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거저 구원 받아 가게 하심에 감사 하므로 헌금 하면 되는 것이지 왼 갖 종교와 동일하게 부자되게 해달라고 헌금한다, 이러한 교회 환경 분위기가 정말 답답합니다.
마6:24~34=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땅에서 육을 위한 것들을 구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직 천국의 것만을 위하여 (영의 것을 위하여) 기도하여 구하라 하심은, 왼갖 잡종교에서 구하는 육을 위한 정욕을 탐심을 위한 것을 구해봐야 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의 것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육신에 필요한 만큼만 주신다고 하시며 자족함을 배우라 하셨지, 육을 위하여 기도한 만큼 헌금 한 만큼 육에 것은 주시겠다고 하신적 없습니다."" 성경에 50배 100배라고 나와 있다구요, 그 말씀은 영의 축복임을 분명하게 아셔야지요. 어찌 그 말씀이 때부자 50배 100배입니까? 어쩌다 우리들의 개신교회 환경 문화가 요래 되었는지 참 환장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목사가 아니여도 일정양의 카리스마 언변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복주의 설교만을 합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진짜 예수는 전 할 줄도 모릅니다. 고난의 십자가 복음의 설교는 아예 할 줄을 모르는 것인지, 그 꿀 같은 육에게는 아픈 주린 영혼에겐 달콤한 설교는 좀체 하지도 않으면서, 엉뚱하게 성경말씀 조작하여 감언이설로 꼬시는 말장난으로 선동하는 세상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육으로 착하게 복을 받으며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는 고간에 상급이 싸인다고 사기를 치며 기복주의 환경으로 원칙으로 교회를 회사로 운영합니다. 약4:2~3= 우리가 하나님께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천일기도 일천번제 40일 금식기도 하여도 이 땅에서 정욕과 탐심을 위하여 즉 저만 째내며 호의호식 하려는 정욕을 위한 기도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설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요즘 같은 설교가 아니라 초대교회에는 어느 한 사람만이 고정적으로 설교를하고 성도 모두가 듣기만 하는 설교는 없었답니다. 초대 교회 모임은 종교적 제사식 "예배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으로 자유스럽고,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충만한 비공식적인 모임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또 교회에 속했습니다. 설교용 강대상을 두어 어떤 특정한 목사와 같은 사역 또는 은사 받은 사람을 위한 무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거듭난자이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한다 하였는데, 무슨 성령이 떠돌아 다니는 귀신인지 우리의 몸을 들락날락 하는 것인지 신들림 현상으로 오도 시키며 성령을 귀신화 시키는 우리들의 기독교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대체 신약 성경상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왜 이리도 성령 이라는 용어를 악용해서 벼라별 무당 짓거리를 성경과 무관한 것을 조작하여 성령 하나님을 이토록 모독하는 것입니까?
요즘처럼 예배 방법이 신천지 사이비 영생교도들의 심리학적 적용으로 기획 연출된 광적인 예배 분위기로 성도들이 예배 모임을 갖지 않았음을 우리는 고민하며 초대교회를 확인해야만합니다. 어쩌면 그런 예배로 이끄는 것이 쉬우니까, 인간심리상 현혹시키기 쉬우니까 성경과 무관하게 잡종교적으로 끌고 가는 것일 것입니다. 살후2:9-사단도 혹세무민 미신적 쌩 영으로 기적을 끌어다 뜨겁게 만듭니다. 방언기도 통성기도도 비성경적일 수 있는데 이러한 기도법이 마치 기독교인양 신약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양 어쩌면 방언 및 통성 기도를 잘 하면 믿음이 좋은 척도인양 하는데, 성경에 사도 바올은 오히려 그런 것을 자제하라 주의하라 하며 통변이나 예언 기도를 권장 하였거늘 어쩌자고 무당 짓거리를 하듯이 히스테리 엑스타시적 (신비주의적 무당 샤머니즘식 활홀경 환각) 광신적 방법을 권장하며 교회안에서 거리낌 없이 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심령 부흥회가 아닌 흥분 부흥회, 감정 부흥회가 되어 버리는 것을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데, 입으로 그리스도라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된자는 눈에 않보이는 성령을 이미 받아 버려 성도가 되었는데, 무슨 또 다른 성령을 받겠다는 것인지, 성령은 월래 들락날락 귀신과 같은 것인지, 이미 성령을 받은자가 뜨겁게 은혜받자 하여 요란스레 토템적 무당굿 분위기로 선동하여 감정을 유도시켜 - 웅성웅성 소리를 지르며 무당들이 시끄런 음악과 주술을 이용하여 귀신을 불러내듯 - 조작된 은혜와 성령 충만 - 들띄운 분위기에 약한 여자 성도님들은 더 더더 더 ~임 하 아~소서~~ 성령이여 임~ 하 소 서 하며 입체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면 기절도 합니다만 성경책이 무슨 부적입니까? 성령이 무슨 들락날락하는 귀신입니까? 한번 믿는자에게 임하면 끝이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잡신 성령 교리로 무당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까?
갈1:6-8=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정확한 교리를 모르고 미신식으로 지어내서 엉뚱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과 바른 교훈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의 교회 환경과 문화가 성경적이지 못할 경우 얼마나 위험합니까? 이렇게 올바른 예수를,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무장된 자를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으로 읽어대니까 무당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대적하여 싸울 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성경 말씀 아닙니까?
엡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처럼 올바른 교리의 숙지에서 성령 충만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라.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라. 상전들아 종들에게 공갈치지 마라.’고 성령 충만의 내용을 열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로 믿는자의 일상생활에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은 받았으나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의 내용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갈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자에게서 나오게 되는 성품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사랑, 인내, 자비가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잘남이나 자랑하며 자기의로 째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 잘난채 경쟁은 교회 환경을 요상한 육적인 일상으로 조직을 끌고갑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시고 그 성령께서 끊임없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향해 일평생 째내지 말고 차분히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분위기가 이쪽으로 가는 분위기 문화 환경이 정답입니다.
예수라는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있는 자들은 당연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경 공부나 설교와 같은 학습이 방법으로 개입되는 것이고 그러한 학습과 훈련 속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병이나 낮고 신기한 일이나 행하고 이런 무당 짓거리가 교회 환경이여서야 되겠습니까?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중풍이 걸렸다고 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숟가락을 집어 입으로 넣으라는 머리의 명령을 손이 따라주지 못해 제대로 밥도 못 먹습니다. 오늘날 교회 환경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을 전혀 따라하지 않는 뇌성마비 교인들 그게 우리들의 교회 환경 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합니까? 그것을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인데 거룩을 향해 자라가라는 예수님의 요구와 명령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 무슨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을 해야 하는데 자신을 구원하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로는 인정해도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주인 이십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왜 예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고만 하시나요? 성경은 그렇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 자들 즉, 성령 충만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켜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살전5:19=성령을 소멸치 말며... 엡4: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구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전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심으로써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문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인간에게 책임과 의무로 지우십니다.
그래서 믿는자의 마음속에서 혹은 성경을 통해 외치시는 성령의 조명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옛 미신의 사람들에 습관을 좇아 무당 짓을하며 사는 사람을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요구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며 그 위에 우리의 열심을 보태 성령의 조명을 잘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모든 것을 분명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의 조명에 거부할 수도 있고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들은 그러한 성령의 조명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은혜의 수단인 기도와 말씀과 성례를 소홀히 하는 자는 그러한 이끄심에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무당주의 목회를 하는 그들은 ‘성령 충만’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억누르다”, “묶다” 입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자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에 이끌려 가는 것을 성령을 소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반대하면 점점 그 양심의 소리에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영적 귀머거리가 되어 엉터리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그러한 엉터리 삶 속에서 절대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적 영적이라고 입으로는 말은 하지만 계속해서 육의 것만 찾아대니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반복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요상하게 이용 악용하여 하는 짓을 “빙의 현상, 신 내림 현상, 신 들림 현상, 카타르시스, 엑스타시 = 이런 것들은 모든 인간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인간 심리적 현상입니다. 빙의적 현상 남자 성도님들은 왜 드물까요?, 베버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전 세계 모든 종교의 예언이나 종교 행사에 있어서 여성은 강한 감수성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여성에 관련한 종교 행사 문헌 연구에 여성들은 히스테리라고 할 정도로 인간심리를 이용 조작 기획된 종교 행사의 분위기 연출에 본질과 무관 하게 강렬하게 감정적으로 빨려들어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인류학 중에 여성과 종교 심리학의 연구를 보면 그러한 경향성은 확연하며 우리 개신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복주의와 기적 은사주의와 신비 미신주의 등이 심 하므로 여자 목사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즉 여자 목사는 더욱더 기복주의를 창궐시켜 입으로는 예수를 이야기 하지만 기복과 은사 기적을 빼면 꽝입니다. 목사의 자격=딤전 3:1~13-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등등도 있지만 예수와 무관한 기복주의 무당 짓을 더욱더 창궐하게 하니 여자 목사는 인정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종교 샤머니즘적 인간심리를 잘~ 선동하여 그 흥행에 성공하면 훌륭한 믿음자요, 능력자요 - 개신교가 무슨 잡신교입니까? 허다한 미신과 다를 바 없는 기복주의 교주주의 참으로 저는 이런 것에 쇠뇌되며 믿음 좋은 척 하는 것에 환멸을 느낍니다. 이런거에 고통스럽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라는 것인가요? 정녕?
일반적으로 세상 모든 샤머니즘적 광신도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심리적으로 지나친 열등감, 분노, 적대감, 권위심, 우월감 등을 표출 할 빙의 출구를 무의식적으로 찾는데, 그 광신도들이 신앙이라는 매개체를 만나면 보편적으로 기복 미신식 광신화가 된다고 하는 연구결과가 나와있습니다. 개인적인 성격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처 아무리 순수 본질을 가르쳐도 늘 본질은 간데 없고 본질을 오바하여 광신적이게 되며 일반적으로 이러한 광신성 성도들의 신앙심은 외곡되어 십자가 없이도 스스로의 광기나 자기흡족 자기만족 자기과시 잘난체 때문에도 순교 할 수도 있는 엉뚱한 기복적 신앙의 길을 간다고합니다. 마24:24, 계19:20 신13:1
우리들의 예배 문화가 어쩌다 이리 변질 되었는지, 칼빈도 루터도 어거스틴도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기록에 의하면 방언을 못했다는데, 이 방언에 대한 신빙성 문제도 반드시 집어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방언을 잘 하면 믿음이 큰자이다, 뭐 이런게 다 있습니까. 신약의 현 시대에 저는 개인적으로 예언 방언 신유의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에는 인간의 잘난체 자기의가 숨어 있다고도 봅니다. 고전12장이 은사~~ 그다음 13장이 사랑장인데 아무리 좋고 쨩인 은사도 사랑을 동반 시키지 않으면 꽝 이라고합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방언 예언 신유은사 등들이 어쩌면 대부분이 가짜 사기라고 봅니다. 그들에겐 사랑이 목격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죄성의 인간 본성상 오히려 잘나보이고 믿음이 커보이고에 즉 교만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농후 하다는 것이므로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나 아름다운 덕을 세우는데 쓰거나 조용히 혼자 있을 때 쓰거나 해야지, 이런거에 현혹되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고전14:1~9, 27~30
예배에 기도회에 개신교회 모든 종교행사에 예언 방언 신유의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본이 숨어 있습니다. 육적인 성과주의로 열매~ 열매~ 하며 외형적 육적인 자기의적인 열매를 많이 맺어야 천국에 상급이 싸인다? 대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과연 중심을 보시는 영의 하나님이 외형적인 바리세인식의 성과를 과연 바라실까? 우리는 100% 다 모든 믿음 다가 영적인 내적인 믿음을 일컬음이지 현제 한국 교회에서 하는 열매 열매들이 과연 외형적인 열매를 말함이 아닙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분명코 내적인 열매를 믿음으로 인한 영적인 열매를 말함이지 헌금이나 육적인 노력을 말함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 진정심으로 이웃 사랑은 없이 온갖 육신을 위한 물질축복을 내세우면 결과 없는 육에 복을 받으려고 give and take식 헌금은 많이 할런지 모르지만 이러한 미신적 복체형 헌금은 우리 신앙의 초점만 흐트러질 뿐, 예수하고는 아무상관이 없이, 성서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구약을 악용한 하나님의 실물적 물질 축복과도 무관한 것입니다. (말씀 조작 금지 고전4:6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 가지 말라)
세상 모든 종교에는 기도(방언도)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란 육의 내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타 잡종교에서 하는 기도처럼 하는 기도를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세한탄 기도, 한풀이 기도, 육이 만사형통해달라고 하는 기도, 육신의 병이 낮게 해달라는 기도가 성경이 말하는 기도일까요. 오직 기도의 규칙이란 성경상 “주기도문” 형식만이 참 기도인데 우리들의 기도는 참으로 현란합니다. 진리를 위한 기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나의 영을 위한 기도, 주님 가르처 주신 주기도문의 원리에서 벋어나지 않는 기도, 주기도문의 기도는 모든 단어가 영을 위한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 영의 일용할 양식) 우리들의 통성회중 기도법과 그에 마비된 알맹이 없는 기도법은 반드시 고처 저야 할 기도 문화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기도 사모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릅니다만. 기도는 주님과의 심적 영적인 대화이며 믿는 자의 호홉이요 믿는 자 스스로 골방에서 해야 할 기도인데, 본래의 기도법이 이렇듯 신뢰 할 수 없는 방언과 주술 최면성있는 난장판식 무당 방법의 기도 이였었는지 참으로 궁금해 합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 대화를 폴딱 폴딱 뛰며 무당이나 아프리카 원주민이 하듯 손과 고개를 흔들며 세속의 시끄러운 음악으로 분위기를 잡아 시끌벅적 무당식 집단적으로 소란스럽게 광란적 심리상태를 표현하며 하는 기도법이 주님이 받아주실 기도법일까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의심하여 본래의 찬송법과 기도 법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만가지 육적 탐심에 의한 미신적인 기도를 들어 주실 하나님도 아니시지만 왼 그리도 뻥을 치는지 육을 위한 기도 응답을 오만번 받았다 이런게 없으면 하나님 예수님 않 믿을겁니까? 일반인들도 이러한 자기 암시적 반복형 기도를 심도 있게 장시간 연속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무당이든 잡신이든 자신도 몰래 그리 행동하여 성취해 나가는 것은 일반 심리학에서도 흔이 적용 효과를 보는 그냥 인간심리상 누구나 작용되는 사실입니다. 글을 쓰는 저는 설령 믿음이 작다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쪽팔림 없이 주변인을 의식하여 꾸미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 하고자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늘 나의 곁에 계셔도 내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만나 뵐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라고 알고 살아가며 종일토록 기도로서 살아갑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처럼 이는 육신의 밥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말함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이어야 참 영의 기도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처 주신 기도법 기도의 알맹이 형식이란 고요함 가운데의 완전히 맡기는 “주기도문”식의 속 방법 만으로의 기도입니다. 써거스 곡예단의 공중 줄타기에서 한쪽에서 다른 반대 쪽으로 공중 제비를 돌며 날라가 반대편 곡예사의 손을 잡고 안착하는 아슬아슬한 곡예 인데 공중제비를 돌며 날아온 곡예사는 건너편 상대가 자신의 손을 잡아 줄거라고 완전히 믿고 맞기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완전히 맡기는 기도 우리는 고요함 가운데 완전히 하나님께 맞기는 쉬지말고 기도법을 알아야합니다. 얼버무려도 되고 더듬거려도 괸찬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달변가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홀로 생활 중에 하루종일 입에 기도를 혼자 스스로 달고사는 삶이면 다인 것입니다. 설령 무의미하다 할 지라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할 지라도 늘깨어 쉬지말고 기도하면됩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뜻임을 압니다. 그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인데 이 기도법은 혼자 스스로 나의 하나님의 향하여 그저 정직히 홀로 하는 것입니다. 시끌벅적 분위기를 성령충만으로 은해충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무당에게도 있습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광신 광란의 방법으로 기도하라는 성경말씀은 없습니다. 또 사도행전 8장 36~40 지금은 신약 시대이니 빌립 집사가 축복권을 행하고 세례를 주고 또 만인이 제사장인 신약 시대인 지금 목사님들의 자신들만이 마치 구약적 특별권위주의적 안수기도의 구습은 마땅히 없어저야 할 말도 않되는 말장난인데 반드시 깨 부셔 없어저야 할 악습인 것입니다.
예배 방식에 왁자지걸한 인본적 인위적 잡신 무당식 환경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 그 인간적 감정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무슨 무당으로 불러드립니다. 예수의 이름은 말하지만 예수는 없는, 예를 하나 든다면 대형 콘서트장의 방송 시스템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음질의 스케일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 광란의 콘서트장의 가수가 노래를 잘 하는게 아니라 (실력도 있지만) 그 전자 오디오적 기계음의 웅장함 이란 휘앙찬란한 셋트 조명 시설물들 아마도 상당량 가수의 기량과 상관없이 인간의 심리상 감동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교회 예배에서 이러한 기가막힌 기계음을 이용하여 인위적 영상 등과 같은 인위적 분위기 조성형 음향으로 우리가 현혹되어 감동되는 것이 정녕 성령 받은 것이라 은해 받은 것이라 이해 할 수 있을 까요?
무당이나 아프리카 원주민이 몸을 흔들며 폴딱폴딱 뛰는 행동을 한시간여 하면 발작을 하며 쓰러집니다, 이를 상당수 인간에게 나타나는 “빙의, 카타르시스, 엑스타시” 현상이라고 하는데, 귀신들림 현상으로 혼절을 하지요, 과연 우리의 하나님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런 무당현상으로 우리에게 임하느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을 되 찾아야만 합니다. 마이크 소리가 너무커 귀가 아파 죽겠습니다. 인위적으로 기계를 이용한 분위기로 성령을 외곡 시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고 온갖 인간적인 욕망을 사전 기획된 음향의 분위기로 인하여 미친 듯이 구하면 이는 무당적 방식이며 신앙을 빙자하여 심리적 스트레스 해소 위안 자기암시 등은 될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하나님은 들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획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휘어잡기 유리하게 성령 받음을 오해 시키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
왜? 우리는 기계화 된 현실을 과학화 된 현실을 목사님들 또한 절제 없이 앞장서 즐겨 애용 하면서 말세 지말이네 뭐네 하며 배척 하듯 말로만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 기계음을 이용하여 혹세무민으로 각색하여 세상적이려 적극적일까요? - 그 기계음에 의한 현혹이 성령충만 은해충만 일까요? 이런거 말고 신약성경적인 방법은 없는 걸까요??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요? 어찌해서든지 회중 성도들 흥분 시켜서 그 흥분상태가 성령 받았다고 하며 예수를 무당으로 만들어 쿵짝쿵짝 감동적 분위기를 주어 성령 받은드시 은혜 받은드시 착각에 빠뜨리려는 쑈 수작으로 이해해야 성경적으로 정상 아닙니까? 모든 개신교회가 다 그러니까 남들이 다 그렇게 현실 기계화를 이용하여 신앙생활을 하니까 성경 본질과 무관하게 그냥 따라 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이 성경적인 예배 집회입니까?
그리고 또 수도 없이 많은 CCM복음성가 참으로 눈물나게 감동적입니다. 허나 어떤때 찬양단들을 워쉽 무용자들을 유심히 바라보면 상당량 험난한 자기십자가는 없이 자기도취 자기과시에 의한 박수갈체와 환호를 만끽하는 인간심리가 여실한 것이라 바라바지고, 또 십자가 없이도 순교 할 수 있을 자기만족 자기도취가 보여 그들의 삶 속에는 군중의 박수를 쫏을 뿐 자기과시 도취를 즐기며, 찬양과 같은 십자가 삶은 전혀 없음을 발견합니다.? 믿는자에게 세상적 박수 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CCM가수, 워쉽자, 부흥강사는 물론이요, 목사 마저도 육욕적 그 박수에 넘어가지 않는자가 없지요. 자기의 자기 째내려고 하는 짓거리를 어찌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까?
롬10:2~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 자기 째내는데 아닌틱히 믿음을 가장하여 환장한, 그 추앙 박수로 인하여 더러워진자가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을 교회 안에서 우리는 수시로 목격합니다. 그 수 많은 이들의 위선을 우리는 어찌 바라보고 있나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서로 믿음이 큰척는 심리적 경쟁을 하다보니까, 그런 것이 믿음이 좋은 거라고 거짓말로 믿는게 당연시 되다 보니까, 말 꺼내는 것을 창피하게 아는 것인지 누구하나 참 믿음에 대하여 궁금하지도 않는지 엉뚱한 신앙 취미생활을 자랑스레합니다. 정말로 이러한 개신교회 운영 방식이 성경과 일치 됨 일까요?
찬양은 절절히 감미롭지만 그 찬양에서 찬양자의 자기도취를 빼면 희생도 헌신도 섬김도 믿음의 인간성도 인격도 형편이 없어 예수 닮은 성화 된 인격은 조금도 없어 육의 믿음도 없어 보이는 그 찬양자의 그 워십자의 실제적 십자가 삶은 없어 보이는 허탕한 짓은 아닌지? 어쩌다가 우리들의 예수님의 핏값으로 새워진 이 땅의 교회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고후4:18 골13:1 인간의 자기과시 자기도취형 자신의 취미를 자랑삼아 즐기듯 신앙생활을 빙자하여 자신을 자랑삼는 신앙에 관련한 활동들의 관찰해 보면 진실된 순수한 믿음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수 많은 신앙행위 활동들 박수 갈체가 좋아서 우월감을 만끽하는 - 찬양단, 워쉽단, 등등 ?? 또 여타의 신비주의에 기적주의에는 예수님은 없는 자기도취주의로 몰아넣는 미신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복으로 받은 복을 간증 집회니 뭐니 해가지고 하는데 그 간증이라는 것도 조작된 것도 많겠지만 설령 그 기적들을 간증이내 뭐내 해 가며 이렇게 까지 나팔을 불어 인본적 경쟁심을 유발 시켜야 옳은 것일까요???
아무튼 제 개인적으로는 쇠뇌 의식화 선동 광란의 “인위적 분위기”의 기도원을 싫어하는데, 이는 멀쩡한 사람도 음향에 혼란스런 통성의 분위기에 휩쓸리기만 하면 (모든 종교 샤먼에서 나타나는 빙의 현상) 세상 모든 종교와 집단적 열띤 행사들의 인간 심리학적 차원에서 예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끌려들어 갈수도 있는 (베버의 연구 사실 그대로 신앙이 아닌 “인간 감수성 심리, 종교심리” 만으로도 이러한 분위기적 현상에 몰입되면 얼마든지 혼미 해지는 현상은 일어난다 함 - 불교든 이슬람이든 잡신이든 무당이든 모든 인간의 종교 행사...) 의도적으로 조작 쇠뇌 된 기도와 찬송은 잘못된 종교행위로서 장기적으로는 하나님과 무관한 어떠한 의도가 들통 날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엉뚱하게 망칠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정녕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임제일까에 대하여 우리들 스스로 궁굼해 하며 깊은 연구가 꼭 필요 합니다. (갈5:13~26 믿는 자의 성령 받은 모습 - 음향에 취해 최면 흥분 현상이 아님. 분위기 때문에 유발되는 인간의 현상은 성령과는 무관) 궁굼해 하면 절대로 않되는 것인지?
예배? (성례, 찬송, 기도, 말씀 = 예배) 설교가 예배 일까요? 설교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는 건가요? 신령과 진정으로의 영적 예배는 무엇 인가요? 진짜 신령과 진정으로의 설교 없는 예배란 무엇일까요? 왼만한 설교는 20여분 정도 들으면 인간 심리상 집중력이 현격히 떨어저 무슨 말을 듣는지 종잡을 수 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설교가 길어야 좋은 건가요? 말이좀 이상한데 자기 교회 담임 목사 한 사람에게서만의 말씀만을 듣다보니 몇 십년 그 밥에 그 나물인데 인터넷상 그 아멘이 절로 나오는 수만 시간 분량의 말씀들을 검증하여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목사님 스스로만 욱이며 자기의 고립된 설교가 최고라고 욱이는 자기도취적 생각을 검토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설교가 예배라는 생각을 버리고 성경상 진짜 하나님께 영광이 오로지 돌아 갈 예배 식순 내용들을 이제 성경을 토대로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도, 포교활동, 십일조헌금, 집회, 신앙 프로그램, 에매한 사회적 교회적 행사들은 왜 하는 것일까요? 전능 하신 우리의 하나님은 차원이 다른 절대자 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을 이렇듯 잡신에게 예배 하듯 우리는 조작해 내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연구 - 현실적 예배의 범위???) 또 교회 부흥을 명분삼아 사회적인 돈 많은 VIP를 교회 안에서 VIP로 부자 성도를 의도적인 대접을 받게 하며 엉뚱히 얼굴 마담식으로 띄워주며 무슨 무슨 증거라 하며 활용 하며, 혹은 그 부자 고액의 헌금 납입자들을 교회 안에서 이용하는 것이 성서적인 것일 까요? 성도를 돈으로 보며 저 성도는 짭잘한 성도라는 식의 사람을 돈으로 보는 으멍 한심한 풍조? 더 한심 한 것은 이름 밝혀 거액의 헌금을 크게 나팔불며 하는 장로님들은 거의 대부분 목에 힘을 주며 교회 안에서 강한 입김을 소유하며 요모조모를 좌지우지 하기도 합니다. 또 그 산앙자의 순수성과 온전성의 수준과는 인격과 무관 하게 성직매매로 장로 직분을 주기도합니다. 헌금 많이 내놓고 그 덕에 교회 안에서의 권력자라니 이거 교회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목에 힘주는 헌금 많이하는 돈 발을 발휘하는 VIP장로가 교회 안에 있다면 이건 인본주의이며 상업적 계산 아닙니까? 사업 계산적 헌금 논리형 이야기가 목사님 입에서 나오면 헌금 하기 싫어집니다.? 그 헌금 많이 내놓고 우월주의 힘을 발휘하는 권력자는 천국에 들지 못 할 것이며 저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 헌금 많이 내는 VIP 부자 성도가 이름 없이 겸손히 헌금하는 금액보다도 더욱 무거운 십자가도 지고 헌신 희생도 조용 조용히 한결 같이 열심히 한다면 얼마나 예수 안에서 멋진 신앙자이겠습니까.?
개척 맴바라하여 기존신자들의 텃세 문제는 어찌하면 제거 할 수 있을까요? 이런식으로 교회환경이 변질을 거듭하면 우리나라 개신교회도 유럽화 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닙니까? 유럽과 소아시아를 휩쓸어 기독교의 발상지에서는 기독교교세가 이젠 완전히 거꾸러 진지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유럽의 교회 건물들이 일반 상가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 대한민국도 우리끼리 지어낸 율법으로 그런 잡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위의 그러한 조작의 이유로 우리나라 교회도 유럽화 되는 것은 아닌지?? 우린 회개하여 알아 내야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을 무너뜨리시고 새 시대 신약의 새 언약의 시대를 주셨는데 우리가 다니는 이 땅의 교회들은 왜 구약을 유대교를 바리세인을 쫏으며 살아갈까요? 막2:21~22 (새 술은 새 부대에... 고후3:6~18 =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변경 내용들) 새로운 유사점도 많으나 새 개념의 진정한 믿음과 복음과 빛과 소금의 예수님 십자가 사랑 실천은 없이, 구약의 율법이나 십일조만을 강조하는 것은 나쁜 의도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중세 기독관련 역사서에서 십일조를 “착취”라 언급하는 내용들도 많이 있는데 신학서라 할지라도 착취라고 쓴 서적은 사단의 서적일까요?? 믿는 자의 구원의 조건이 십일조도 헌금도 아님에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엡2:8~9 - 주를 믿는 자에게 조건 없이 구원의 은혜를 그냥 한 박아지 부어주는 선물이 아니라 땜에 담긴 저수지 물을 부어주 듯 부어주시는 어찌 할 바 모르게 그냥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찌하여 구약을 현세에 적용하며 그러한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만약 세상의 허다한 미신들의 복체라면 우리는 우리 맘대로 헌금에 관련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며 잡신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많은 무당 돈벌이형 먹사님들이 뻑하면 구약의 말3:10절 말씀을 들먹여 헌금을 강요 하지만 (십일조 독려의 뜻이 아님), 기독인이 십일조를 잘 하여 대한민국 국민 중에 재벌이 됐다는 사람은 실제로 제 눈으로 제 주변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므로 구약의 십일조 율법을 지켜서는 절대 아니되겠지만, 굳이 구약을 살펴도 강제 징수한 응큼한 목적으로 십일조등의 헌금을 강요하여 거둠으로 저주받는 구약의 예문도 있지요. 바로 열왕기하 5장의 나아만 장군의 요단강에 일곱 번 씻어 문등병이 나았는데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헌금을 하려 청하였으나 오직 믿음을 바라신 하나님은 돈 받는 무당이 아님을 알리기 위함이신지 헌물을 거절하여 받지 않았지요.
엘리사의 사환 (어쩌면 이 시대 목사) 게하시가 나중에사 뒤 쫏아가 사기를 처 헌물을 받아오므로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리는 저주를 받지요.
신약의 계명은 단 두가지인데 신약의 계명도 아닌 십일조를 20년 70년을 한결 같이 기복으로 내고도 찟어지게 가난 하게 사는 성도들도 부지기수로 많이 있지요. 기복주의로 꼬심에 사기를 당한 것이지요. 개신교는 부자축복이 없는 사실 지어내어 강단에서 사기를 처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고있습니다. 우리나라 3대 혹은 10대 재벌...??? 전 세계의 수없이 많은 믿지않는 이교도 거부들...? 그 수억명의 불교 이슬람교 흰두교 잡종교 수 많은 이방인 갑부들은 어디에 어떤 종교에 어떤 십일조를 그리도 많이 해서 그리 갑부가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은 우리를 육으로 만사형통 시키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 아니며, 예수께서 헌금 거두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거 잘 알지 않습니까???
고후3:16~18 (신28:1~20들어가도 복을 받고 ~ 떡반죽 그릇 - 현실적인 물질의 축복은 오직 구약적시대 때의 복 일뿐, 신약에서 논하는 복이란 모두 오직 영적인 것임을 신약의 믿는자는 반드시 깨닳아야합니다. 가난한자나 부자라도 철저히 청빈을 실천 하여야 인간 심리 구조상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확실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도 어찌보면 지나친 부자는 물질 축복은 바래지 말아야 옳을듯합니다. (낙타가 바늘 귀...) 참고로 글 쓰는 본인은 무기명을 실천 하며 여러해째 계속 1년에 1000여 만원 이상 매년 10% 정도 늘려가는 헌금을 계속 교회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 반, 여기 저기 선교비 반 정도로 - 반/반) 자동이체 송금 선교비로 점점더 증액해 나가며 구제와 헌금을 하고 있으며, 조금 밖에 않되지만 이런 저런 몸으로의 헌신도 성실히, 하다말다가 아닌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하는 한결 같이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친 부모 형제에게도 우리 고향에서 제일 갈 만큼 거의 무기명으로 무시로 매년 몇백만원씩 나누어 쓰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저는 25평 아파트에 보잘 것 없는 차를 끌며, 제 세 아이들에게는 용돈도 최저 비용 말고는 절대 풍족히 주어 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실천 때문에 부자 축복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않하고, 하나님 주시는대로 자족하는 믿음을 실현해 나가도록 엄청 늘 다짐하지요? 그리고 이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 들어내어 나팔 부는 의미로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강제와는 상관 없이 십에 이조든 삼조든 복음전함을 위하여 (목사 월급 주기 위하여가 아닌)헌금을 하려 애쓰며 살아봅니다.
마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고후9:1~15)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재물과 하나님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이것을 합리화 시키는 교회의 세속화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변질 된지가 꾀 되었지요. 전통 습관 관행은 작년에도 그랬으니까 다른 교회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는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는 무관하게 관행이 법이 되어버리니 말입니다. 롬15:25~27 많은 헌금의 쓰임이 믿음 안의 간난한 자를 돌보는데 이방인을 돌보는데 쓰여젔다는 신약성경말씀이 있으나 우리끼리 이기적으로 쓰거나 목사님 월급 주는데 썻다는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교사와 목동들이 풍요롭게 살았다는 말씀은 물론 없지요. 오히려 핍절하고 가난하게 고난의 고통의 삶을 살았다는 마씀이 태반이지요. 우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인본적 사고에 의하여 응큼하게 목적된 헌금 지출은 교회 사이비화로 이미 우리의 삶과 교회 내에 꿈틀 꿈틀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켜 분별력을 잃게 하여 나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교회가 목사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교회 건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교회는 성도를 위하여 어두워진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몹시 당연한 것 아닌가요???. 헌금? 본래대로 라면 하나님의 돈을 100% 복음에만 구제 선교에만 온전히 써야할 하나님의 돈인데... 교회건축도 하나님 사업이라고 핑계 삼겠지만 한심 한 짓임은 그 속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 쉬 보입니다 ... , << 교회 재정 지출 방법 3대 원칙 - 1. 100%지향 절대 복음을 위한 지출, 2. 교회 운영비를 쓰더라도 목사 장로를 포함한 동등히 모든 성도를 위한 공의로운 지출, 3. 목사 장로의 지시가 아닌 성도와 해당위원 전원이 심의 협의 의논 동의하는 회계규정에 의거한 민주적인 지출 >>
하나님의 돈이 교회 안의 특정 자들이 아닌척 하며, 기름부음 받은 자니 영적권위니 해가지고 세속적 권력으로 변질시켜 특별권위로 그 재력을 움켜쥐고 교회 지배욕의 권위가 된다면 누가 헌금을 할 것이며, 그 헌금이 문헌상의 잘못된 교주에게 헌납한 것과 부당한 갈취와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 믿는 자들의 심리 속에 이 성경 본래적인 목적에서 벗어남으로 인하여, 헌금자의 의도대로 혹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여지지 않으니까 갈수록 헌금을 일부러 않하는 것은 아닐 까요? (고후9:7 많이 다 몽땅 하라... 십일조가 아닌...) (교회의 크기=목사 개인의 인생 성공 - 아주 미세 하게라도 이런 현상은 근절 ??).
부모가 자식에게도 무엇을 하지마라 규정하여 훈계 했다면 그 하지 말라는 것을 거역하고 빈번히 행했을 때 우리 인간도 분명코 자식을 칭찬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문책 할 것입니다. “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 했냐 너 정말로 말 않듣는다...” 야단만 맞지 하지 말라는 짓을 한 자식에게 잘했다 칭찬하며 용돈을 두둑히 더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들어내며 이름 밝혀 헌금을 하고 하나님이 물질 축복을 오십배 백배 주기는 커녕 야단 책망으로 오십배 백배 물질을 빼앗기는 책망을 받지는 않을 까요? .
대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정녕 육적인 외형적인 눈에 보이는 열매를 그리도 맺으라고 어느 성경구절에 말하던가요? 성경에서의 열매란 히브리 원어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열매랍니다. 헌금 많이하고 헌신 봉사 많이 하는 열매 말고 마음 중심에 진정심으로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부인으로 발생된 믿음으로의 진심의 사랑함이 열매들입니다. 어찌하여 설교나 세미나나 글쓰기에, 자화자찬에 그 훈련된 믿음의 사랑의 무기를 사용 하나요?
왜 꼭 세속적인 인본적인 시각에서의 열매 상급을 그리도 주장하며 보이지 않는 믿음을 장성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형 육적인 이 땅에서의 복과 연관시켜 진짜 영적인 믿음은 성장시켜주지 못하고 바리세인보다 더 바리세인이 되도록 교회 환경이 이끌어지는 것입니까? 목사님들은 왜 그런 외형적인 성과주의에 목슴을 걸지만 왜 몸소 잃어버린 양들을 몰고 오지 않는 건가요?? 쪽팔린가요?? 성도들을 훈련시키면 효과가 더 빠르고 클거라고 생각하나요? 직접하면 부흥이 더딜 것 같나요? 새털 같이 많은 날들 직접 뛰세요. 그저 예배란 “성례” “말씀” “찬송” “기도”가 아닌가요. 설교 해설 없이 성경 말씀 읽으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찬송하면, 하루 종일 쉼 없는 기도를 하면 예배인거 아닙니까?
수도 없이 예배 방식 규격화로 만들어 그대로 해야 예배 인가요?? 성경에 몇시에 기도 했더라 하면 그것을 수요예배니 금요철야니 해가지고 우리끼리 지어낸 예배만이 예배입니까? 과연 우리는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며 살수는 없는겁니까? 끝도 없는 성경공부로 복음 전함, 형식적인 예배가 정말 성경적인 것입니까? 믿는자의 자연 발생으로의 빛으로 향기로의 그냥 놔둬도 전도 되는 것이 아닌, 기계적인 학습으로 보험쟁이 물건 팔아 먹듯 전도하는 것이 신약의 땅 끝 까지의 방법일까요? 누가 그러던가요? 성경 어디에 그리 나와 있나요?? 신약성경상 뼈빠지게 들판을 돌아다녀야하는 목동인 목사님이 직접 전도해야 성경적인 정답 아닌가요?? 전문가인 목자가 목회자가 직접 전도해야 양들을 몰고 와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참으로 게으름과 허풍과 허세와 뜻 없이 의미없는 가치없는 자존심이 쪽팔려함이 체면이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망칩니다.
마치 교주처럼 대장 노릇하며 교회에만 들어 앉아 대장노릇으로 뜻 없는 자존심 부리지 마시고 전문가답게 능수능란하게 직접 전도하며 집중 공략하면 (보험쟁이 방법이 아닌 신약의 단 두가지의 계명과 향기의 법칙으로) 목회자는 고도로 훈련된 양치기 목자이니 하루에 한명이 아닌 1주일 동안 1마리의 양의 생명을 인도 하여도, 1년이면 50여명의 생명을 구원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2년이면 100명, 4년이면 200명, 6년이면 300명,.... 참으로 목사님은 목자가 일까요??? 왜 성도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본인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걸까요? 목사님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본을 평생 해야 하는 것 안닌가요?
10만명이 넘는 대한민국 목회자가 1주일에 한명씩 전도하면 1년에 500만명의 기독인이 늘어 엄청난 부흥을 할 텐데??? 2년이면 1000만명 ~~~?? 좀 무리가 있는 수치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믿음있는 자라면 진정으로 아멘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화 환경이 신약성경 만을 쫏아 변화되어 목사님들이 직접 낮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전문가답게 진정으로 순수하게 자신을 불태워 희생한다면, (말로만이 아닌 실제 행동 본으로) 쉽고도 단순하게 기독교는 부흥될 것이며, 성도들도 본을 받아 아름다이 적극적이면서 자발적으로 전도에 더욱더 동참 할 것입니다.
대형 교회들이 꼭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형 교회들은 부담스럽게 힘들게 피곤하게 하지 않으니까 성도들이 몰림으로 인하여 부흥 대형화된 교회도 요즘 많다고 합니다. ***엉뚱한 해설 하나 -☞ 개척 교회가 힘들여 전도하여 새 신자를 만들어 -☞ 쬐끔 부흥되 -☞ 은행 빛 얻어 (성전이라는 용어 사용 - 서~엉~전 건축이라 사기 호도하여) 교회 건축해 -☞ 온통 예배와 전도가 교회 빛 갑기에 집중 되어 영적인 진실한 선교 복음 전파는 말로만 쬐끔해-☞ 건축헌금 00헌금 00헌금 ...무슨 무슨 헌금에 성도들이 시달리고 시험들어 아파해 -☞헌금 고통없는 대형 교회로 재정적으로 안정된 교회로 몰려들어 -☞ 그 큰 교회 목사님은 능력 있다고 헛 소문이 나서 모이고 휩쓸려 더 모이고 또 더 모여???
이걸 또 부흥이라고 나팔 불며 자랑을 해 ??.. 교회 부흥하면 목에 힘주며 성도들이 목사님! 목사님! 하며 꺼뻑 죽어줘 부요해 지니 돈도 풍요롭게써 자기 째내는데 기똥차 으스대며 동료 목사들의 부러움을 사 - 자세히 관찰하면 이런 목사님들에게서 신앙의 순수란 발견하기 어렵고, 이런분들에게서는 진정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열매는 쬐끔도 없습니다. 나는 목사여~ 장로여~ 하며 고상한 척만 디지게 하지만 세상 인간보다도 더 심히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이 빤히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목사 직분자는 너도 나도 목숨 걸고 육적인 내 것 교회 건물 건축을 반드시 하려고해...?? 이거 정말 요즘 우리나라 교회들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목사님 자신들 끼리도 전혀 화합 단합 협력이 되지 않는데 이 문제 또한 심각하지요. 협력 ! 협력이요 ! 절대로 서로 협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들 끼리 서로 키제기 잘난체 별라별 인본적인 경쟁, 볼쌍 사나웁게 막말하며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조금도 협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목사님들 끼리 단합이 협력이 잘 된다면 그래도 대한민국의 교회가 힘들어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초 이후 2000년 전 3000년 전 기독교의 뿌리부터 분파하기 시작하여 수십 종류로 카토릭이 개신교로 개신교는 또 감리교 장로교 ..무슨교 ..무슨교 . .교 124개 교단 . . 대체 하나님이 천국이 124개씩 따로이 있는 것입니까?
개신교회 통합 문제는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이 시대의 분명한 과제입니다. 한번 그 분열의 과정 역사를 연구해본다면 분명 그 중심엔 목회자들의 나뿐 의도와 분열이 있었을 것입니다. 21세기 개신교의 조건 없는 확실한 하나로의 연합 없이는 유럽화를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도 분명히 있었겠으나 유럽이 왜 그리 되었는지 세세히 분석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왜 목사님만 이토록 험하게 비판 하느냐구요?? 글 쓰는 저도 고통스럽습니다. 각종 부흥성회, 집회시 강연자의 “사례비”, 그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는 이해가 가지만 어찌 사례비를 줄 수 있으며, 받아갈 수 있는 것인가요. 세속스럽게 우리 마음대로 정한 “돈 받고 설교하기” 이거 말이나 되는 작태입니까!
“사례비” 예수님이 교통비, 사례비 받고 설교했나요, 사도 바울이 횟집에서 접대 받으며 복음을 전파했나요? (최저 생활비 지급 방식 이외의) 우리끼리 세속적으로 정하여 행하는 잘못된 관행들을 점검하여야합니다. 한국교회의 수 많은 목사가 “가라지 목사”라 하며 CBS 방송에서도 쓴 소리를 하더군요, 우리 주변에 많은 가라지 싹꾼 목사님들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목회자 자기가 스스로를 바꿀 수 있을까요??? 한국의 1년 헌금 총액이 5조원 가량 된답니다. 이 어마 어마한 돈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우리끼리 처먹고 놀고에 쓰지 말고, 목사의 인간적 의도로 쓰지 말고 예수님의 뜻으로만 과부와 가난한자들에게 만 주님의 이름으로만 100% 구제와 복음에만 쓰여 진다면, 온 누리에 예수님의 사랑이 촉촉히 젖어들어, 교회의 따듯한 문화로 인하여, 쌩으로 성도들 교육시켜 안타까이 전도에 힘쓰지 아니하여도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교회를, 목회자를 우러르며 우리가 굳이 길거리에 나가 전도 하지 않아도 전 국민이 스스로 교회에 몰려와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어떤 자료 조사에 각 종교마다 이웃 사랑에 쓰이는 돈의 비율을 보니, 5조원의 몇%??? 선교비는 복음비는 8%?? 목회자들이 집어가기 24%?, 내교회주의 우리끼리 놀고 먹고 22%, 은행에서 대출한 원금과 이자로 41%?? 기타 5% 와~ 아 답답합니다. -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요??? 아름답게 쓰는 면에 있어서 기독교가 돈은 제일 많은데 그 돈에 비례하여 진리의 말씀 지시 한 대로 구제와 복음비로는 제일 적게 쓴답니다. 교회 건물 짓는데 대부분 쓰고, 목사님들이 은혜롭게 비밀리에 싹꾼비 사례비로 쓰고, 교회 내에서 성도들 자기들끼리 먹고 놀고 쓰고, 구제와 선교에 명분 삼아 째내기로 나팔을 디지게 크게 불며 아주 쬐금 쓰고... 우리 기독교회는 회개 할 수 밖에 없는 내용들 이었습니다.
기독교회의 성직자들이 물질적 대가를 받으며 복음을 전하여 소박하지 못한 행동을 일삼고 호화롭게만, 쉽게만 복음전파를 하려드니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녕 그들이 훈련된 전문 목동이요, 사도요, 믿는 자가 맞는지 교회를 악용한 사업가는 아닌지 회개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미3:11 - (에스겔34:1~6 마7:13 고후2:17- 말씀을 팔아 먹는 이 땅의 싹꾼, 이기적인 노략질만 일삼지 말고 진정으로 사실적으로 양을 돌보아야...)
교회 문화 환경 분위기 제도 등등의 변질 문제 세속화 문제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이 시대의 교회는 본인들의 온전한 초심과 본질적 순수성만이 세상을 감동 감화시킬 수 있음을 본래부터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려야합니다. 예배 내용부분 부분도 지나치게 포장에만 치우쳐서도 아니될 것입니다. 형식적인 교회 행사와 지나친 외식스런 포장 꾸미기가 우리를 천국에 가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 예로 6 ~ 700년 전쯤 (1300년 쯤 - 시기는 부 정확) 피아노라는 악기가 처음 나왔을 때 예배에 피아노 사용을 못하게 하였는데, 경박스럽게 그런 악기를 예배에 사용해서는 절대 않된다는 때도 있었었답니다.
즉 우리의 예배의 모습도 검토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이 넘처나는 이 시대에 주일 날 예배에 대한 깊은 묵상을 주는 말씀인데 - 막2:27 말씀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예배의 중심과 전부는 오직 예수이며, 경건한 찬양, 영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잘 각색 된 쇼를 연출 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 이대로 우리끼리 지어내는 식의 예배 환경이 다른 교회들도 다하니까 정말 암시랑 갠찬은 것인지, 신약성경 본질 본래의 환경은 무시되어도 상관 없이 시대에 발 맞추어 쑈~를 잘~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가슴에 손을 얹고 신약성경을 한번더 몰두해 봅시다.
이 말했다 저 말 했다식의 설교 보다는, 어쩌면 성경 말씀만 그냥 읽어도 충분한데 그 말씀을 설교라 수많은 현실적 적용주의로 해설을 해대쌋는 것에 목숨을 걸고 목사님 설교 말씀이 성경 해설의 말씀이 모두 진리 인양 설교가 예배라는 식의 예배 방식을 우리는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어찌하여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자의 성경 현실 적용주의가 하나님 뜻이란 말입니까? 그 설교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성되어 왔는지 그냥 성경 말씀 몇 구절 읽고 신령과 진정심으로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드리면 예배이지 설교가 예배의 전부인 듯이 되어버린 개신교회의 예배 문화 검토해봅시다. (요4:23~24) 그리고 목회자의 일방적인 뜻에 업드리는 교회직분제도 보다는 변화 있고 활발하며 자유로이 순수히 운영 할 수 있는 자치적 "성도가 직선으로 뽑은 - 교회운영위원회와 개혁위원회" (야고보서 2장 1~13 차별 없는) 같은 것을 결성하여 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 되더라도 좀더 민주적으로 더디지만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목회자는 빼고, 교회를 운영할 필요성도 반드시 있습니다. 독단이나 일방이 없는 상호 존중형 아름다운 전통이 교회안에 새로이 생성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는 그런 일에 관여치 말고 오직 직분에 은사에 알맞게 죽어라고 원어적인 공부를 열심히 하여 본질적 복음 전하는데, 길에 나가 전도 하는데, 성도들의 신앙의 정도를 잘 살피어 심령이 병든자는 치유해주는데 전력을, 말씀을 몰라 가난하여 어둡고 추운 곳에 방치되어있는 불신자들에게 예수사랑을 여기저기 가서 전하는데 전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저 또한 “믿습니다”를 백번하면 믿어질 줄 알고 그짓을 한적도 있고, 아멘을 할렐루야를 많이 하면 믿어 질 줄 알고 수 천번 아~멘~을 연달아 해본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않들어 오고 가슴 속 심연에서의 정직 진실한 믿음은 그렇게 광신도가 된다하여 믿어지는 것이 아니요, 성경상 믿음이란 자기쇠뇌가 아니라 성령께서 어느날 은혜로 거저 주심으로 생성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지존 전지전능자 하나님을 어찌 이해하고 계십니까?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그 세 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으로 일을 하십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하셨고, 성자하나님은 실행에 옮기셨고, 성령하나님께서는 없는 듯이 내 속에 거하시여 육이 아닌 영으로의 적용을 해 나가십니다. 그런데 이 세분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기능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예수 믿는다”하며 그 하나님은 “예수님”으로도 불립니다.
지금 신약의 시대에는 내 안에 늘 들어와 있는 그 하나님을 “성령님”으로 불립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육으로 해석하여 우상으로 바라보면 이름만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믿는다고 하는자의 마음에는 정작 하나님을 실제는 창세기의 금송아지가 되어버립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추측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잘되려고 억지 노력 조작된 선동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다리면 스스로 말씀을 공부하면 알아서 때에 맞게 주십니다. 쇠뇌로 믿음이 생성된다면 그게 무슨 삼위일체 하나님입니까?
신의 인격을 부여 받은 신의 자녀인 그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라...?? 이런 허접한 글을 쓰는 것이 누워서 침 밷기가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으나, 이러한 예배문화, 기도 문화, 헌금문화를 개혁 회복하는 사명을 많은 믿는 자 평신도들이 동참하여야 합니다.예레미야 12장 7~13절 =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 여호아의 분노~. 이런 변질의 예배, 기도, 헌금, 설교 들을 하면 하나님은 분명코 연랍 하시지 않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조작의 시대에게는 주님께서도 기적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끼리 조작한 기적이라 혹세무민 하지만 정직한 사실적 기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막8:12 - 이 시대에 기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집사가 되가지고 이렇게 누어서 침 벧는 글을, 참담하고 처참하며 무지막지한 글을 쓴다고 봐야겠지요. ?? 그러나 우리에겐 변질된 왼갖 것은 있지만 십자가는 말로만 있지 교회 안에 믿는 자 안에 진정한 십자가 정신 십자가 사랑 십자가 보혈 문화는 없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유일하신 신이신 하나님 이라고 우리는 외치고 외치면서 수 많은 이방 신 우상 기복종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질 풍요의 신 맘몬을 그리스도와 짬뽕시켜 맘몬의 축복을 받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인 것처럼 착각을 시키면 어찌합니까? 제발 무당 예수를 버리세요. 이런 무지막지한 글을 쓰는 저 또한 위장된 가식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고통스러워 죽겠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면 성경을 논어 맹자 윤리 도덕으로 보지 않고, 어찌하면 참 진리인 예수만 이야기하고 십자가만 논하는 교회가 될수 있을까요? 성경은 윤리 도덕책이 아니라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보혈이라고 실컷 말해 놓고는, 아닌틱히 복이나 빌어대며 그렇게 잘 살아주는 성격이 못되는 저는 정말 속 터저 죽겠습니다.
오직 영의 복만을 바라고 영의 복만을 하나님 나라의 것만을 받으세요. 세상 모든 종교에 육의 기복 기적주의가 창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육의 것을 지향하는 잡신 무당 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십자가 복음이란 믿는자의 영을 위한 복이니, 이런식으로 가식적인 변질된 교회 문화 하에서 신앙생활 계속하면 저는 천국에 정말 못 갈 것 같아요.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변질 된 것인가요? 목사님 ! 회사 사장으로 대장으로 교주로서 예배 이끌지 마시고, 복음은 교회 안에 들어 앉아 왼갖 것을 개발하여 교육 훈련시키며 말씀 선포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배는 믿는 자의 목사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본인이 설교한대로의 본이되는 삶, 영적인 일용 할 양식 오직 예수, 영혼 사랑, 십자가 보혈, 십자가 정신, 십자가 사랑으로 오직 예수면 그만입니다. 설교 시간에 제발 자기 이야기, 세상 이야기, 재미난 게그콘서트형 예화의 나열로 범벅이 된 그런 잡탕 비빔밥 같은 설교는 제발 하지 마시고, 어떤 본문으로 제목을 잡든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어야 설교다운 설교라는 것을 “복음”만을 전해야 하므로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십자가 복음만을 오직 예수만을 증거해야하는 설교 시간에 목사 자기자랑, 세상 뉴스, 인본적 비유, 세상 윤리 도덕, 우스겟 소리, 공자왈 맹자왈식 바른생활 적용주의 말장난 설교 들으려고 교회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수백 수 천명이 한시간씩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개인별 소중한 시간들 천명이면 천시간을 하례하여 설교자만 바라보고 있는데 제발 열시간씩 이라도 히브리 원문으로 성경을 파고파서 공부 기도하여 설교에 임하셔야지 그렇게 대충 어디서 배껴서 아니면 기복주의나 디지게 섞어 “복 복 복...” 만을 외치는 설교... 회중에 있는 성도들이 병신입니까?
제발 제발 공부 기도 좀 디지게 해서 오직 십자가 보혈 복음만 전해 주세요. 제발 잡담 말고 예수만을 증거해 주세요. 듣기에 아프고 거북한 그 참 십자가 복음 말입니다. 신구약 모든 진리는 영을위한 양식으로 주어진 것이라 해놓고는 모든 것을 육으로 받아 먹으려는 새로운 율법주의의 교회 환경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영으로 무엇을 하면 영의 복을 주겠다는 말씀들이거늘 우리끼리 육을 위해 지어낸 잡신적 예배 기도 교회 내의 문화가 아닌 신약성경 본래대로의 경건한 영적 예배 기도 헌금 찬송 문화가 신약성경 초대교회로 돌아가 결단코 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말이란 본래 최면성이 있습니다. 그 자기도취 자기최면, 이러한 잘못된 기복주의 최면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본질은 무엇인지도 모른다니까요. 비본질에 한번 쇠뇌되면 본질인 예수 십자가는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나요. 원래 하나님이 교회가 이런건가요. 수 많은 성도들이 저와 같이 잘못된 쇠뇌교육으로 기복주의 신앙생활 교회 문화에 무언가 인본적 노력을 해야 구원 받는다는 율법주의 바리세인 신앙생활로 가식적인 형식적인 남 의식하는 믿음 좋은척 거룩한 척 거짓 위선된 신앙생활에 오류 조작 변질된 교회의 문화 환경 분위기에 질리고 지처 있을 것입니다. 고후11:4~9-거짓 복음 다른 복음을 설교 예배를 통해 듣기는 달콤은 하겠으나 우리가 받아들이면 아니 되며, 우리의 믿음은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불편하고 힘이 들며 아파야 진짜 진리 진짜 설교입니다,
갈1:6~11-시끌벅적 요란한 무당 같은 복음 전함은 가짜?. 정말 당분간 부흥이 잘 않되더라도 헌금 많이 않 걷히더라도, 장로 목사님들의 처신과 먹고 살기 조금 힘들어 지더라도, 신약성경 초대교회 방식을 발굴하여 순수 그대로의 예배 교회 문화 환경 전통들을 바꿔봅시다. 이런 무지막지 험악한 글을 써서 참으로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한번 뒤돌아 보게요. 바리세인보다 한층 더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외형으로 보여지는 교회 예배 문화는 쑈이며 다 가짜입니다. 이토록 막말로 썻다하여 기분 나빠만 하지 마시고 오죽했으면 이런 더러운 글을 썻겠습니까? 제발~ 한번 고뇌하여 신약성경 본래로 바꿔 보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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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 11녀째, 2002년 부터 어떠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계기로 맹신이나 광신에서
빠저 나오기 시작하여 오랜시간 고통중에 고뇌하는 근년에 장로 된자입니다.
나름의 선한 글과는 달리 부드러운 방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께 매달리며 눈물로 주변 목사님 성도님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금씩
조금씩 신약성경의 본래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심한 글임에도 호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나드님의 주변에도 신약성경 본래로 돌아가는 힘씀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양두구육 한자]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둘레유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겉과 속이 서로 다른다, 겉은 훌륭한 듯하나 속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뜻....
창경궁님 말씀 잘 보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
제 글이 온전한 신약성경의 본질 그대로라고는 생각지 자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자이면 누구나 절대 절대 목사님들 의지하지 마시고
서점에 가면 성경에 관련한 원어사전들이 알기 쉽게 나와 있습니다.
한권에 3~5만원선이니, 성경구절 한달에 한장만 묵상해도 좋으니
우리가 반드시 본질로 돌아가야만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자존심이 쪽팔림이 뭐가 필요합니까.
인간끼리의 의시댐에 목숨 걸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헌금 한두번 않해도 괸찬으니 타인의 논리를 믿지 말고 믿는자 스스로
원어사전 사서 진리를 직접 파 먹으면 뻥으로 달고도 오묘한 말씀이라고 허세 떨지말고
진짜를 먹어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