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주는 행복
신귀숙
아침이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에 현관문을 나선다. 새벽마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이곳을 찾으면, 달님이 두고 간 맑은 바람이 가슴 가득 안겨온다. 밤에도 가만가만 줄기와 잎을 키웠을 저들이 보고픈 이를 만나러 가는 마음처럼 가벼운 발걸음마저도 서두르게 한다. 어제 저녁 해가 기울 무렵 물을 주며 눈여겨보았던 실한 호박 줄기에서 노란꽃망울들이 막 피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밤새 별들이 뿌려 주기라도 했을까 싱그러운 잎마다 옥구슬이 영롱하다.
몇 년 전 헌집을 헐어내고 새로 집을 지었을 때, 이층 옥상에다 남은 벽돌로 둘레를 쌓아 제법 그럴 듯한 밭을 만들었다. 번잡한 도시에서 텃밭이 달린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난생 처음 호미를 잡고 향긋한 흙냄새를 맡으며 흙덩이를 고르는 손길은 어느새 시골 아낙을 닮아갔다. 봄볕이 유난히 따스하던 날, 이랑을 파고 내 소박한 꿈과 함께 채소씨앗들을 조심스레 묻었다. 가벼운 바람에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이 작은 씨앗들이 정말로 줄기와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어줄까 하는 걱정이 앞을 섰다.
그러나 노란 새싹들이 부드러운 흙을 살며시 들추며 돋아남을 보았을 때는 마치 내 첫아이를 만나던 날의 기쁨처럼 작은 떨림까지 느껴왔다. 어쩌면 그리도 오묘하고 신비스런 비밀을 그 작은 알갱이 속에 숨겨놓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들인 정성보다 더 충실하게 자라주는 여린 싹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이제는 이파리의 빛깔만 보아도 목마름과 거름 줄 때를 감지하기도 하며, 논밭의 작물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농부의 마음과 부지런함을 조금씩 닮아감이 느껴진다.
사랑스런 손자의 손을 잡듯 가만 가만 연한 상추와 들깻잎을 딴다. 풋고추와 가지 토마토를 따는 즐거움은 이곳으로 내 발걸음을 더욱 자주 놓게 한다. 육거리 장날이 돌아오면 장에 나가 올갱이를 사 오리라. 된장을 푼 국물에 내 텃밭에서 자란 부추를 듬뿍 넣고, 구수한 올갱이국을 끓여 식탁에 올리면 남편 또한 얼마나 반기겠는가.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갓 따온 상추와 깻잎에 싸서 맛있는 쌈밥이라도 먹는 저녁이면 나는 남편 앞에서 수다쟁이가 된다. 끼니마다 싱싱한 푸성귀를 식탁에 오르게 해 주는 고작 너 댓 평의 작은 텃밭이 남의 수천 평 넓은 농장이 하나도 부럽지 않게 해준다.
내 소박한 행복이 저들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알토란같은 우리 농장이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부자富者도 부럽지 않다며 신명이 나서 지껄인다. 자주하는 이런 수다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는 남편을 바라보면 또 다시 즐거워지는 걸 어쩌랴.
아끼던 난분蘭盆마저 친지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무소유의 자유를 즐긴다고 법정스님은 말했지만, 나는 작은 소유에서 얻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이 아닌가. 윤기가 반지르르한 푸른 잎새와, 화려함이 없는 작은 꽃들의 도란거림에 귀 기울이노라면 가슴이 맑아지고 스님의 훌륭한 법문을 듣는 만큼이나 깊은 위안을 받는다.
때를 맞추어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주는 자연의 순리 앞에 설 때마다, 속임수가 없는 겸손함의 교훈을 얻는다. 인간 세상에나 존재하는 조급함과 질투가 없는 이곳은 언제 와도 내 마음의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싱싱한 야채로 채워진 작은 바구니를 가슴에 안고 이층 계단을 내려설 때면, 오붓한 행복의 곳간庫間을 두고 있음을 누구인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주말마다 에미를 따라오는 어린 손자는 대문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옥상 밭에 가자고 내 손을 잡아끈다.
“와! 방울토마토다.”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앙증맞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따 보면서 즐거워하는 손자의 모습을 보면, 내 가슴속에 숨어서 자라는 행복이란 나무가 덩달아 키를 키운다. 흙과의 만남은 무료하던 내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주고 작은 것에서 얻는 행복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어느새 날아 왔는지 벌들의 화려한 춤사위에 새로운 결실을 꿈꾸는 호박꽃들이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
첫댓글 모든 살아있는 식물에게 정성과 사라을 기울이는
선생님의 여린 마음과 고운마음을 느낌니다.
감사합니다 . 선생님
좋은 작품 대하니 기쁩니다 선생님 잘 읽고 갑니다.선생님 경인년에도 더욱 건강 하시고 건필 하소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행복이 가득한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나는 군요. 늘 그렇게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때를 맞추어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주는 자연의 순리 앞에 설 때마다, 속임수가 없는 겸손함의 교훈을 얻는다. 인간 세상에나 존재하는 조급함과 질투가 없는 이곳은 언제 와도 내 마음의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싱싱한 야채로 채워진 작은 바구니를 가슴에 안고 이층 계단을 내려설 때면, 오붓한 행복의 곳간庫間을 두고 있음을 누구인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운글 잘 읽고 갑니다. 신귀숙선생님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글만으로도 반갑기만 합니다. 선생님 모습만큼이나 자애로운 글에 제 마음도 푸근해저 마음놓고 머물러 있답니다. 달빛처럼 마음으로 스며드는 글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선생님 개강하면 만나게 되시겠지요. 뵘고 싶어져요.
맑고 고운 선생님의 글을 마주하니 내마음도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모습같다고나 할까요! 좋은글 잘 감상했습니다. 올해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소서.
오붓한 행복의 곳간庫間을 두고 있음을 누구인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반갑습니다.함께 행복합니다.사랑합니다.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