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 허드렛일하던 ‘야놀자’
창업가카카오 김범수 의장은
수학과외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은 택시기사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부의 세습이다.
재벌의 재산이 더 불어나 재벌 2세에게,
다시 3세에게 최근엔 4세에게 간다.
없는 사람들이 부를 쌓아
위로 올라갈 길이 없어졌다고 한다.
상류사회로 올라갈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빈손으로 시작해
당대에 큰 부를 이룬다. 지금도 막노동,
알바 같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결국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있다.
당대에 큰 부를 쌓은 자수성가의
표본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모아봤다.
모텔 알바 경험 살려 사업 구상
“스물셋에 할만한 아르바이트는 세 가지였다.
원양어선, 도자기 공장, 모텔 일.
모두 숙식을 해결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텔 청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야놀자 창업자 이수진(41) 총괄대표는
젊은 시절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야놀자는 국내 1위 여가 플랫폼이다.
모바일 앱으로 전세계 숙소와 레저를
예약·결제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5년 이후 연평균 80% 이상 성장해왔다.
작년 188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야놀자 이수진 대표.
출처 : 조선DB
이수진 대표는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다.
충북 충주 출신으로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작농으로 일하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후 이 대표는 조명·금형 제품 설계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업가를 꿈꿨다.
당시 연봉은 2000만원이었다.
다음엔 공짜로 숙식할 수 있다는 말에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4년6개월 동안 청소·주차·프런트·객실관리 등
숙박업소 일을 배웠다.
월 200만~300만원을 벌었지만
모텔업 특성상 24시간 근무했다.
그때 떠오른 사업 아이디어가 지금의 야놀자다.
야놀자 송민규 실장은 “이수진 대표님은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금의 레저 플랫폼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야놀자 사옥.
출처 : 야놀자 제공
2005년 3월 포털 사이트 다음에
모텔의 가격·약도·비품·주차장 정보를 담은
‘야놀자’ 카페를 만들었다.
이후 ‘모티즈’라는 모텔 사이트를 운영했다.
전국 각지의 모텔 정보와 할인 소식을 올렸다.
모텔 리뷰·광고 서비스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2011년 스마트폰을 이용해 위치 기반으로
모텔 정보를 볼 수 있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다.
셀트리온 서정진 대표는 중학생 때 연탄배달
“수저 타령 그만해라. 부모 직업이나 집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성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서정진(62) 셀트리온 그룹 회장은 2017년
세계지식포럼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서정진 회장은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2019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에서
부자 순위 181위를 기록했다. 그의 재산은
81억달러(한화 약 9조1000억원)로 집계됐다.
조선DB
세계적인 부자로 거듭난 서정진 회장이 젊은이들에게
‘출신 타령’ 그만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 은평구
기자촌(진관외동)에서 연탄가게를 했다.
중학생이었던 서 회장도
아버지를 도와 연탄배달을 했다.
학비가 없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추 장사를 하기도 했다.
학비를 직접 버느라
남들보다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6년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서 회장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도 과외가 불법이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아르바이트는 택시 기사였다.
돈을 더 벌기 위해 24시간 택시를 몰았다.
택시를 몰고 다닌 다음날엔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렸다.
4.3점 만점에 평균 4.18점으로 조기졸업했다.
1983년 삼성전기에 입사했다. 1992년 서른넷에
대우자동차 최연소 임원으로 올라섰다.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해체당하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2000년 45살 나이에 아내가 준 5000만원으로
넥솔·넥솔바이오텍을 창업했다.
제약산업 규모가 1000조원 이상이라는
점에서 유망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바이오산업의 메카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관계자를 만났다.
사업 아이템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없어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싸구려 모텔에서 지냈다.
밤엔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2002년 넥솔을 셀트리온으로 다시 창업했다.
2003년 투자금을 모아 인천 송도에
에이즈 백신 생산공장을 세웠다.
2011년 2월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이
인천시 셀트리온 연구실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출처 : 조선DB
하지만 공장 완공 1년 전이었다.
이전 받은 에이즈 백신 기술의 임상3상
(세번째 임상시험)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렸다.
공장을 완공한 다음 일이 풀렸다.
2005년 3월 글로벌 제약업체 BMS와
위탁생산(CMO) 계약을 맺었다.
셀트리온 공장은
아시아 최초로 FDA 설비 승인을 받았다.
2007년 셀트리온은 63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19년 5월15일 시가총액 26조원으로
코스피 시장 5위를 기록했다.
김범수 의장은 500원 점심 사 먹을 돈 없어
방준혁 유년시절 가리봉동 공장지대
“그땐 과외가 금지였지만 전 ‘몰래바이트
(몰래 하는 과외 아르바이트)’ 많이 했습니다.
첫 월급 15만원을 받아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먹었습니다.”
카카오 김범수(53) 의장은 할머니와 함께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재수 후 198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 밥은 500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과외를 금지하던 시절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1992년 석사 졸업 후 삼성SDS에 입사했다.
1998년 한게임을 창업했다. 2000년 한게임과
네이버컴을 합병해 NHN을 설립했다.
2004년 NHN 단독 대표를 맡았다.
이후 2010년 3월 카카오톡을 출시했다.
강연하고 있는 카카오 김범수 의장.
출처 : 조선DB
넷마블 방준혁(50) 의장의 재산은
약 2조4000억원(2019 3월 포브스 자료)다.
방 의장은 고교를 중퇴한 중졸이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공장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방준혁 의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1998년 넷플릭스 초기 사업 모델과 유사한
영화 비디오(VOD) 대여 서비스를 만들기도 했다.
방준혁 넷마블 의장.
출처 : 조선DB
영화 한편 당 500원이라는
가격으로 인터넷에서 영화를 보여줬다.
그러나 당시 영화 한 편을 다 보기엔
인터넷 속도가 느렸다.
또 투자금이 많이 들어 결국 실패했다.
이후 2000년 자본금 1억원을 모아
넷마블을 창업했다.
테트리스·웹보드게임으로 1년 만에
10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넷마블에 ‘킹오파’ 지적재산권(IP)을 제공한
SNK 전세환(38) 대표는
“나 또한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해봤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
학벌이나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자신이 조직에서
얼마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지가
성공을 판가름하는 열쇠“라고 밝혔다.
SNK는 시가총액 약 7700억원에 달하는
게임회사로 올해 5월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글 jobsN 김지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첫댓글 우리주위에 인생역전을 이룬 성공인들은
하나같이 시련을 극복한 의지의 한국인들입니다!~
역시 이런 스토리텔링을 읽으면서
무언가 뭉클한 동기부여가 된다니까요....
어릴때부터 돈에 대한 철학을 가르켜야 합니다!
돈이 얼마나 인생의 품위을 좌우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