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億)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와사등(瓦斯燈) 차단ㅡ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긴ㅡ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외인촌(外人村)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 추일서정(秋日序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이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風景)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 은수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려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荒土)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산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葬布)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 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 놨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 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墓標)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 황혼
산은
누구의 무덤이기에
저무는 하늘에 늘어서서
말이 없고나
* 데생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목련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 지도 이제는 10여 년
목련은 해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을고 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이맘때쯤 돌아오셔서
꽃피는 마당을 서성거리고
방안의 애기들을 들여다보실까
손수 가꾸신 가지에 봄이 나리고
바람은 먼 곳에 사람 소릴 가져오는데
임자 없는 꽃나무 두엇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에워싸고 있고나
목련은 슬픈 꽃
사월이 오면 나뭇가지 사이로
어머니 백발은 어른거리나
지금쯤은 먼 곳에서
옛 마당에 핀 꽃을 잊지나 않으셨는지
* 노신(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ㅡ 기적(汽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게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 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五腸)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ㅡ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호마로(湖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 김광균(金光均)시인 -1914~1993 경기도 개성 사람 |
출처: 숲속의 작은 옹달샘 원문보기 글쓴이: 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