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특별한 전시 소식>
"화두와 밥"
2025. 9. 20일 - 10. 19일
여는마당 : 9월 20일(흙날) 늦은 2시
아르떼숲
"박야일, 유진숙 두 작가는 서로가 상대의 작품에서 자신이 떠안을 화두, 즉 '묻는 작품'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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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2인 전'이 아니다_ 서로의 작품에서 스스로가 떠안을 화두, 즉 '묻는 작품'을 찾고, 이에 대해 자신의 작품으로 답하는 아주 특별한 전시이다. 누가 이처럼 무겁고 두려운 자리에 들어서겠는가? 다르지만 같은 두 작가가 (작가로서) 서로 당기는 마음이 있어서 가능했으리라. 두 작가는 인간성의 본질, 그것이 작용하는 현상을 울림이 깊고 강한 메시지로 승화시켜 작품에 담아왔다. 독자적 조형언어를 구축한 두 작가는 서로 만나본 적이 없으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전시기획자로서 두 작가의 성향이나 감성의 결, 작품이 지닌 메시지를 떠올리면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반드시 만날' 것으로 여겨왔다. 두 작가에게 묻고 답하기 전시를 제안했을 때, 그들은 어지간한 일정을 뒤로 미루고 오직 작품에만 매달려왔다. 오죽하면 전시를 앞두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여겨서 애를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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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야일'과 '유진숙'인가?_ 박야일은 작품에서 인간의 욕망, 상처, 존재의 극한 상황을 초현실적 형상으로 표현해 왔다. 그의 인물은 연기나 불길로써 '너머'를 예감하고, 벽에 갇히고, 미궁 속을 헤맨다. 이는 인간 실존의 심연을 향한 질문이다. 반면 유진숙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의 인간, 타자와의 갈등, 구조적 억압과 욕망의 굴절을 날카롭게 드러내 왔다. 그녀의 인물들은 일상적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늘 무언가를 돌아보고, 견디고, 갈망한다. 이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조형언어로써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이들의 '외침과 메아리'는 서로 다른 사유가 교차하고 만나는 마당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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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야일 작가의 선택 <산 나르기>와 그 응답_
유진숙의 작품 <산 나르기>를 박야일은 “묻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노동에 이골이 난 인물이 산을 나르겠다고 턱도 없이 작은 등짝에 산을 짊어지고는 땅으로 꺼지고 있다. 어쩌면 숨이 멎는 듯 통증이 느껴지고 비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모한, 헛된, 혹은 자연과 불화를 일으키는 인간을 그렸다. 이에 박야일은 그 상처 난 등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바다에 잠겨 숨을 내뱉는 몸, 노동에 의한 소금꽃인지 이미 삭아서 생긴 곰팡이인지가 핀 등짝, 나무라는 생명이 피어오른 등짝, 보듬는 손이 감긴 등짝 등 그는 유진숙의 작품을 통해 받아 든 질문에서 필연적 상처가 이어내는 생명, 그것의 역설을 인간의 등짝으로 답을 한다. "고통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관계 속에서 치유된다."는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 아도르노(T. Adorno)의 "예술은 고통의 기억을 보존하는 매개체다"라는 주장을.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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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숙 작가의 선택 <벽을 건너니>와 그 응답_ 박야일의 작품 <벽을 건너니>를 유진숙은 “묻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황량한 들판에 높은 벽이 막혀있다. 저 끝에 건너갈 틈이 보이지만 그것은 빠져나갈 틈이 아니라 벽의 다른 방향에 서게 될 뿐이다. 벽을 보고 선 한 인간은 그저 망연자실하고 있다. 이에 답하는 유진숙의 대답은 한쪽 밖에 없는 푸른 날개를 단 인물이 거대한 미로 앞에 서 있는 장면으로 자유와 욕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날개는 초월을 꿈꾸지만 애석하게도 한쪽 날개로는 날 수가 없다. 이 말고도 세대를 잇는 가난의 굴레, 중심으로 진입하고픈 욕망, 바닥을 닦는 천형과 같은 신분 등을 암시한 작품을 통해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가' 되묻고 있다. 유진숙은 한쪽밖에 없는 날개를 통해 구조적 억압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굴절되는 자유에 대해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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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대담하는 의미_ 두 작가는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라, 상대의 작품 속에서 질문을 읽어내고 자신의 작품으로 응답한다. 이는 "예술은 응답하는 행위"라고 역설한철학자 바흐친(M. Bakhtin)의 주장, 즉 "모든 표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예술 또한 독백이 아니라 응답의 행위이며, 타자의 시선 속에서 살아난다."라는 언급을 되새기게 한다. 그렇다. 예술은 응답이다. 이 전시에 높은 관심이 모여지는 까닭도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세태에 맞서 응답해 온 두 작가의 지속성과 일관성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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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벽은 높고 두텁다. 더욱이 타인의 작품에 대해 배타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떤 작가와 '묻고 답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전시는 박야일과 유진숙이 동시대 작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두 작가가 받아 안고 풀어낸 화두는 곧 밥(생명)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무엇을 길어 올릴 것인가?
글 ㅣ 정요섭 문화비평 ㆍ 아르떼숲 으뜸일꾼
첫댓글 박야일 작가 전시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