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라.
“무명(無名) 무상(無相) 절일체(絶一切)”란 이름도 없고, 모양(相)도 없고
일체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이는 화엄학의 요지를 설한 <法性偈>에서 법성(法性)의 의미를 설한 말이다.
法性이란 곧 佛性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경에 따라 여러 이름이 있다.
이는 모두 실체를 의미하며,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법성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 말을 벗어났기게
무어라 할 수 없기에 법성
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말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X라 불러도 좋고 Y라고 불러도 좋다는 의미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가령 여기에 한 덩어리의 노랗고 긴 나무 열매와
긴 줄기에 푸른색을 한 긴 열매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둘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노란색 긴 열매는 바나나라고 하고, 파란
열매는 오이라 이름 지으면
이제는 그것들(실물)이 없어도 이름만 가지고도
바나나와 가지를 분별하여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모양(相)에 따라 이름을 붙여 놓으면 그 이름이 그 물건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미지가 생기고 우리는 그 이름으로 그 물건을 상징
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괴산 무량약수사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말 배우기를 그토록 갈구(渴求)하는 것이다.
상징이 실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듭거듭 반복되면 반복을 통해 자동으로
최면에 걸리게 된다.
계속된 반복으로 관념이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란 것은 이름
이란 것은 결코 실재가 아니다.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 과정에는 간과(看過) 된 것도 있다.
바로 時間과 空間에 대한 인식 없이 마치 그 이름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바나나를 보자. 바나나는 나무 속에도, 뿌리에도 잎에도 없다.
시절 인연이 닿아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바나나라고 부른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바나나라는 이름만 기억
하는 것이다.
비유로 들어보자. 시간을 X축, 공간을 Y축으로 보자.
공간 속에 시간이 개입되지 않으면 바나나를 찾을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간 속에 공간이 없으면
여기 바나나는 존재할 수 없다.
바나나는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그 지점에서만
바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인연이 생멸한다는 의미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나나는 씨앗이 인(因)이 되어 연(緣)을 만나 뿌리가 되고 뿌리가 가지와 잎을 만들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바나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因)이 연(緣)을 만나 인연으로 생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연의 <連續性>을
사람들은 <同一性>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현상의 변화를 마치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를 자각한다면 상(相)과 이름(名字)이란 단지 허상이며,
말의 기호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의 인식은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지 않아도
유독 모양(相)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심층 의식에 딱 붙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옛적의 아름다운 것, 괴로웠던 것,
분하고 원통했던 것까지도 아물아물해지고 잊혀진다,
그런데 한번 보고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남녀의 상(相)이다.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에 대한 것도 모두 잊혀졌지만 분명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
남자다, 여자다 라는 상(相)이다.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에서
애욕(愛欲)을 그렇게 경계하는 것도 이처럼
남녀의 상에 대한 이미지는
뿌리 깊게 우리 마음속에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이란 바로 심층에 각인된 이런 기억들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잊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말은 마음에 이처럼 달라
붙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중요해지면 그 의미가 상실된다.
상징이 비대해지면 내용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표면이 그대에게 중심을 망각하도록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말에 탐닉하면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길다란 수집물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 이론, 논리, 야망, 욕심, 개념, 사랑과 미움. 찬양과 비판 등,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
내용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모양과 이름을 추구하고 갈구
(渴求)한다.
현실에서 보는 모든 것은 모양과 이름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뿐이다.
이는 마치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는 자> 이 외에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이다.
<보는 자> 이외에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말은
보는 자 이외에는 모든 것이 꿈이란 의미다.
오로지 이를 아는 자만이 진실하다.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 환상이지만
보는 사람은 환상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대가 밤에 한 형태의 꿈을 보았다면 낮에는 다른 형태
의 꿈을 보게 된다.
밤에는 낮의 꿈들이 잊혀
지고, 낮에는 밤의 꿈들이 잊혀진다. 그대는 때때로 눈을 뜬 채 꿈을 꾸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꿈을
꾸기도 하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만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는다.
밤이 낮으로, 낮이 밤으로, 꿈이 생각으로, 생각이 꿈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한 가지 즉 보는 자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영원한 것은 진실하다.
반면 변하는 것은 환상적이다.
법성이란 영원한 진실 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란 영원히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단지 순간적이다.
그 순간 전에는 진실하지 않았고, 그 순간 후에도 진실하지 않다는 의미다.
불교는 물론 동양의 종교에서는 현실의 삶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고
쫓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삶에서 보고 느끼는 일체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인연으로 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적인
현상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거기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법성(法性)은 무명(無名), 무상(無相), 절일체(絶一切)란 이를 일깨워 주기 위한 메시지인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밖으로 나가 그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고,
다른 길은 그대의 안으로 들어가 그대가 그 어느
누구도 아님을 깨닫는 길이다.
어느 누구라는 것은 하나의 경계이다.
어느 누구라는 것은 경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아님을 깨닫는 것은 무한(無限)이다.
이겨야 할 필요는 그대가
어느 누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누구임을 증명하고 하면 그때 그대는 모든
사람의 에고를 다친다.
어느 누구도 아닌 이가 되는 것은 곧 그대가 전체를
깨닫는 것이다.
전체란 이름이 없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일체에 대한 상(相)도 없다. 그것이 바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에는 3단계의 층이 있다.
첫 번째 층은 사고(思考)다. 즉 머리이고,
두 번째 층은 머리보다 가슴, 즉 느낌이다.
그리고 세 번째 층은 가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존재의 층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미리
속으로 스며들게 되면
그것은 다시 가슴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이
가슴의 층을 통과하게 되면
그대의 존재에 닿게 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삶이 나오는 것이다.
머리와 가슴은 이름과 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존재의 층에서는 이름도 상도 사라져 버린다.
법성을 일러 무명 무상 절일체라 한 것은 바로 이 존재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현실의 삶이란 이름(名字)에 갇히고 相에 갇혀 있는 삶이다.
그래서 이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을 받는 것이다.
항상 상반된 것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한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창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방이 너무 크고 넓어서
그 창살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그 창살이란 소위 그대가 말하는 관념, 인격, 도덕,
책임감, 이성, 의무, 사회에 대한, 신에 대한, 사원과 교회에 대한,
국가에 대한 등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름과 상에 얽힌 것들이다.
이것들이 그대를 동물처럼 가두고 있는 그대의 창살들이다.
때로는 지식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고 새로운 상을 만든다.
그것들이 희망을 부풀리고
행복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끝내 불행으로 끝나게 된다.
설령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해도 행복으로 이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산 하나를 오르면 그 뒤에 또 다른 산이 있듯 인간의 욕망은,
이름과 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산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명한 학자, 예술가, 거부, 유명한 스타, 장관, 대통령 등등 그대는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도달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모든 도달은 미래에 있고
삶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는 말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저 그대 본연의 모습이 되어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한 삶을 영위하라.
만일 아무것도 억제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면,
그대가 전체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대의 삶은
갑자기 향기를 가질 것이다.”라고. 그 향기가 법성의 향기다. 존재의 향기다. 이름과 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을 <종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神性이나 非神性, 그리고 미덕이나 죄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을 흐르는 삶, 동적인 삶의 향기이며 결코 정체
하지 않은 자,
분할되지 안 자, 미래도 과거도 갖지 않고
오로지 현재 이 순간만을 갖고 현재에 사는 자의 향기이다.
선가(禪家)에 이른 말이 있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
살아 있을 때는 털끝만큼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죽음에 이르면 티끌만큼도 생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의미다.
찰라 찰나를 영원으로
여기고 살라는 의미다.
<법성게>에서 같은 의미로
一念卽是無量劫 無量遠
劫卽一念” 이라고 했다.
삶의 가치가 행복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있는
자리는 지금 이 공간 속이다.
욕망의 세계란 다름 아닌 이름과 상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 욕망은 그대를 미래로 인도하지만 삶은 지금
이곳에 있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고
꿈은 미래로 인도한다.
그대가 이 순간 속에 없다면 그것이 바로 불행이다.
그래서 불성을 부처라 하고, 적멸이라 하고 구래(舊來)
부동(不動)이라 한 것이다.
변하는 것은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그것을 추구하는 그대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를 경계하는
말 이것이 <無名無相絶一切>라는 말이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원문 : 천성산 용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