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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묵상글 (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 밀이라는 자가 가라지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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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27 02:06
- 밀이라는 자가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묵상 나누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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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기 비하 개그로 유명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가 미국 상원의원을 준비하던 시절, 경쟁자는 유세장에서 링컨을 향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다.”
이 말에 화내거나, 자기 역시 상대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저에게 두 얼굴이 있다면, 중요한 이 자리에 굳이 못생긴 얼굴을 하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평소 못생긴 외모로 놀림을 당해오던 그였기에 좌중은 폭소했고, 이런 그의 대응은 큰 호감을 샀고 결국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대했던 링컨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구보다 탄탄한 자존감에 어떤 말에도,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말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자존감이라는 것이 뜻대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선택하는 방법은 다른 이의 비난에 비난으로 맞대응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그 순간에는 적절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금세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센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난을 충분히 이겨낼 정도로의 커다란 힘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보십시오.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을 때, 종들은 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끝까지 기다리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어 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가 뿌린 가라지 때문에 힘든 삶을 지낼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가려내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때 가장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그리고 주님과 함께할 때만이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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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군더더기와 본질을 판별할 수 있다면 삶의 복잡함이 순식간에 단순해진다(진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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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 13,25).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니,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잠들어버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와 형제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5)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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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좋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곡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만나야 합니다.
농사 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하나를 거둘지 둘을 거둘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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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베짱이는 놀면서 시간 나면 일하는 한량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오면 개미는 여름에 모아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추운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개미에게 구걸하며 겨울을 보냅니다. 과학자들이 일개미를 연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개미 중에도 30%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30%는 대충 일하고, 30%는 다른 일개미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걸 망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만 모아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3 : 3 ; 3’의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세상에도 비슷합니다. 인재들이 모인 대학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속했던 고등학교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모인 대학에서는 모두가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중에서도 30%는 열심히 하고, 30%는 대충 하고, 30%는 포기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도전 골든 벨’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서 문제를 맞히는 프로입니다. 학생들은 하얀 보드 판에 문제의 정답을 적습니다. 정답을 적은 학생은 남고, 오답을 적은 학생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진행자는 탈락자들을 위해서 ‘패자 부활전’을 합니다. 탈락자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히면 다시 골든 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패자 부활전에서 돌아온 학생이 마지막 문제를 맞히면서 우승하는 때도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패자 부활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골든 벨’에 참석하는 학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는 문제를 내십니다.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구원의 골든 벨을 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절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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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주 어릴적 저희 집은 여러 농사를 지었습니다. 돼지 농사도 지었고 호박 농사도 지었습니다. 포도 농사도 지었습니다. 농사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농사일이 얼마나 고된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자라있는 잡초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꼭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처럼 뒤 돌아보면 커져있습니다. 어디서 잡초의 씨앗이 왔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뽑았는데 다시 그 자리에서 잡초는 자라납니다.
이런 잡초의 성장은 군대 생활을 할때도 그 위용을 떨쳤습니다. 훈련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잡초제거가 그날의 훈련이자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뽑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 잡초, 그 씨앗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잡초. 군생활의 많은 부분을 소비한 잡초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라지와 밀을 가르지 말는 뜻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과 가라지를 묶어 태우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끔 밀과 가라지를 우리가 직접 구분하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두고 죄인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을 보고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보는 눈과 하늘에서 보는 눈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완전한 의인도 없고 완전한 죄인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라지와 밀은 주님께서 거르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잡초는 우리가 뽑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라지는 주님께서 태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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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의 춤을….
제가 지내는 이곳에는 뱀이 자주 출몰합니다.
특히 제가 사는 집 뒤가 바로 산이어서 뱀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외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해는 이미 떨어져 어두웠습니다. 가로등 불에 의지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눈앞에 뱀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나타났다기보다는 제가 뱀이 있는 곳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저도 놀랐고 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왼쪽으로 피한다고 몸을 움직이면 뱀도 왼쪽으로 피하고 다시 오른쪽으로 피하면 뱀도 오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달밤에 뱀과의 댄스였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면 말입니다.
처음에는 뱀이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려고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뱀도 제가 무서워서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제가 가만히 서 있으니 뱀은 알아서 저를 피해 달아났습니다. 뱀도 제가 무서웠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도 사실은 우리를 두려워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 마세요. 그 두려워하는 무엇이 오히려 피해 갈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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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밀이냐 가라지냐?”
공존의 사랑과 지혜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오늘도 계속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가라지의 비유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예수님은 역시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죽어서 시작되는 하늘 나라의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가라지의 신비는 악의 신비입니다. 복음은 이어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며 간략히 악의 정체인 가라지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악의 신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매사 사건이나 병들 역시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병의 신비, 사건의 신비라 뭉뚱거려 지칭할 만 합니다. 그러니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심연의 늪에 빠질 뿐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원인을 해명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이 처방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 묻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답은 그대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공존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밀과 가라지를 분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처리하기도 난망합니다. “공존의 사랑과 지혜, 밀이냐 가라지냐?”,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사람의 판단은 얼마나 불확실한지요? 과연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볼 수 있겠는지요? 가라지인줄로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내눈에 가라지이지 타인의 눈엔, 하느님의 눈엔 밀일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에서 바뀔수도 있습니다. 밀같은 존재가 가라지로 타락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은 존재도 개관천선의 은총으로 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발본색원, 과연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을런지요? 인류의 혁명과 전쟁사가 불가능함을 입증합니다. 도저히 악순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의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됩니다.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묘연할뿐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하는 악의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들여다 보면 온통 가라지밭 같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진리의 승리를 말하지만 악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한다 하지만, 현재 갈수록 악화되는 지구의 현실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의 현실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정말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 대해 회의하실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 자신만 봐도 악의 존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마음밭입니다. 말 그대로 밀과 가라지가,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 혼재하는 마음밭입니다. 순수한 천사도 순수한 악마도 없는 이 둘이 함께하는 인간존재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의 실체도 모호할 뿐 아니라. 실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선과 악에 대하여'라는 글이 깊은 통찰을 줍니다.
“내 그대 안의 선에 대하여 말할 순 있으나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구나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먹이를 찾고
목마를 때면 죽은 강물이라도 마시는 법”
어찌보면 선의 결핍이 악일 수 있고, 치유받아야할 선이 악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악의 신비를 궁구하기 보다는 부단히 선을, 사랑을 체험하고 쌓아가는 것이 악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악으로 상징되는 가라지를 뽑는다고 해결될까요? 뽑을 수록 숱하게 생겨나는 가라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뽑아도 계속 돋아나는 가라지 같은 잡초들, 제초제를 뿌리면 밀도 땅도 죽습니다. 가라지들 없는 순수한 밀같은 선의 현실이 가능할까요. 아예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악의 가라지들 속에 단련되는 선의 밀들입니다. 제거가 아닌 함께 공존의 균형과 조화가 답입니다.
이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양방의 처방이 아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한방의 경우를 닮았습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 세력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영적수행입니다. 농사를 짓는 밭의 이치만 봐도 이해가 됩니다. 채소밭을 그대로 놔두면 잡초밭이 됩니다. 그러나 채소들을 잘 가꿔 왕성해지면 잡초들도 점차 약화되어 힘을 못씁니다.
그러니 밀의 선한 세력을 강화하고 가라지 악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이 필수입니다. 순수한 선의 밀만의 세상이라면 영적전쟁도, 영적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은 무기력과 무의욕으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문제는 가라지 세력의 제거가 아닌 적절한 상태에서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실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십시오.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밀로 보이다가 가라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재한 선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밀인데 내재한 악이 드러날 때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니 평화공존이 답입니다. 최종의 판단은,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으로 대변되는 주인의 말씀이 답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져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끝까지 밀에로의 가능성을 믿으며 기다리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일체의 판단은 유보한채 하느님을 닮아 공존의 사랑과 지혜로, 지극한 관용, 인내, 연민, 이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전을 사는 길이자 가라지 악의 세력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겠습니다. 이에 대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선의 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속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이땅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우리 길과 행실을 바로 잡아 가는 것이 가라지 악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하늘 나라를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 <관자>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일을 잘 모르면 옛날을 비춰보고,
미래를 알지 못하면 과거를 살펴보라.”
현실적 삶의 지혜를 위한 필수 공부가 역사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하는 수행들이, 전례기도은총이,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라지 악의 세력을 견제하며 공존의 사랑과 지혜, 균형과 조화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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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 가꾸는 사람>
밀
가운데에
가라지
눈살
찌푸리게
하여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고운 눈길을
밀
가운데에
가라지
손길
거칠게
뻗고 싶어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부드러운 손길을
가라지를
뽑는
사람이 아니라
밀을
가꾸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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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밭에서 무엇이 되기를 바리는지 생각헤 보십시오. 수확 때 우리가 이 둘가운데 어떤 것이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밭’은 세상을 나타내고. 교회는 세상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밀’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견뎌 내도록 하심시오. ‘가라지’인 자들은 밀이 되도록 하십시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릅니다. 밭에서 밀이었던 것은 밀이고. 가라지였던 것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밭, 곧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때로는 가라지가 되기도 하고, 가라지였던 것이 때로는 밀이 됩니다. 그들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눈이 하늘은 알아보면서 나의 발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찌된 노룻인가? 이는 나의 눈이 나의 발보다는 하늘을 더 닮았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이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하늘의 성품을 지녀야 할 것이다" 나의 영혼이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알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늘은 낯선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데”라고 대가는 말합나다. 하늘을 그 궤도에서 억지로 분리시키는 것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은 하느님 안에 굳건히 서서, 기쁨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사량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 무엇도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할 따름입니다. 하늘은 지상의 모든 곳에서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지상의 모든 물질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어야만 합나다.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가까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21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에서 '성전'은 없다
‘지하드' 라는 아랍어는 본래 ‘애쓰다' 또는 ‘투쟁하다' 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이 알라의 전능하심과 사람이 그 뜻을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경륜과 사후 세계를 믿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초기 무하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꾸란>에 니타나는 바처럼, ‘시비와 정의'의 알라께서 전체 아랍인과 인류를 축복하시려는 경륜 속에서 이슬람 신앙과 정치 종교 공동체를 이루어가는데, 이에 저항하고 방해하거나 무하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불의한 세력은 곧 알라의 뜻에 저항하는 셈이 되었다.
특히 이슬람교 발생 초기에 무하마드가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수탈당하고 억압받는 자를 강력한 기득권 세력으르부터 해방시키고 보호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무하마드와 초기 이슬람 지도자들이 '지하드'를 거룩한 신앙 행위로까지 규정한 동기가 이슬람 제국의 군사적 무력 확장을 정당시하려는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알라는 전쟁시에 무조건 아랍인 편을 들어준다는 고대 부족 신앙의 잔재물도 아니고, 전쟁 승리를 목적으로 인간의 존귀한 생명을 함부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고대 전쟁 승리주의의 표현도 아니었다.
지하드의 발생 동기에는 한편으로 전능한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전적인 신앙과,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 약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삶의 질을 고양시키려는 저항적 해방 이데올로기가 저변에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불의한 폭력 집단에 의해 무자비하게 약탈당하고 생명이 위협받는 실존적 한계 상황에서, '신의 정의와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악의 세력에 저항하고 징벌하려는 거룩한 인간의 분노의 발현이다. 신의 전능함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무엇, 곧 ‘정의와 진실의 거룩함'을 위해 '성전' 에 참여하는 것을 삶의 최고 의미로 받아들이는 신앙적 삶의 자세를 관념적인 평화주의자들이 쉽게 비판하기 힘든 측면이 있는 것이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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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13,29~30)
예수님의 선포와 실천의 핵심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 곧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에 있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그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3,1~23)와 가라지의 비유(13,24~30)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행에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의도와는 달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기를 악에서 분리하려는 의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밭에 좋은 씨(13,27)를 뿌린 주인이십니다. 밭에 뿌려진 좋은 씨인 밀은 선이며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밭에 가라지는 덧뿌려진 악이며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뿌린 그 실체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하고 지적하신 것은 이미 그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분명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밀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듯이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진솔한 세상, 교회, 가정, 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하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 신앙의 시선에서보다 신중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 두어라.”(13,30)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 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밀과 가라지를, 선과 악을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도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뽑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버릴 수가 있으며(13,29참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가 뿌리로부터 서로 얽혀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오히려 밀까지 뽑아낼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를 그냥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 개인이나, 집단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살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선민의식,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악의 실체를 인지하면서도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됩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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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 기다림은 나쁜 놈보다 착한 분이 더 많기에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6 ㅣNo.174523
밭에 밀만 뿌렸다는데 웬일인지 가라지도 다소 섞였단다. ‘저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낼까요?’ 라는 그 자신의 꼬락서니는 뒤로 한 채, 버티는 어느 잘난 이의 말에 하느님은 그냥 기다리잔다. 가라지를 뽑다 어쩌다 잘못되어 밀을 뽑으면 안 된다는 걸까? 사실 가라지는 처음에는 밀과 비슷하여 구별이 어려우나, 이삭이 패면 밀과 구별된다. 그리고 자랄 때는 그 뿌리가 밀과 일부 감기어, 자칫 버린다는 가벼운 맘으로 잘못 뽑을 때, 일부 밀도 함께 뽑힐 수가 있단다.
알고 보면 어쩜 우리네 인생에도 밝은 쪽과 어두운 게, 대게는 반반으로 있는 모양이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보는지에 따라, 대충 삶의 기본자세가 달라진다. 어디 악인 없는 세상이 과연 어디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어느 조직이든, 말썽 피우는 이가 고문관마냥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쭉 따지고 보면 나쁜 놈보다는 착한 이가 더 많은 게 우리네 사회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자비의 그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그나마 여유롭게 멀리 내다보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좀 넓게 보며 산다는 우리지만, 가끔은 살면서 남의 단점을 고쳐 주지 못해 애태우는 때가 간혹 있다. 백지 위에 검은 점 하나 잘못 찍혀도, 그것 하나에다 온통 신경을 둔다. 결국 그 점 하나에 그 종이는 못 쓰게 될 수도. 사실 종말까지 선과 악은 함께 할 게다. 어둠의 요소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좋은 씨가 많이 뿌려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누가 뭐래도 그럴 수밖에. 잡초인 가라지가 더 많았더라면 하느님은 벌써 밭을 갈아엎었으리라.
거듭 말하지만 악인들이 많은 것 같이 보여도 주위에는 착한 분이 훨씬 더 많다. 우리의 삶에도 고통이 많을 것 같지만 실은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행복이 더 많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이웃을 들추어서 심판하는 이는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가 가꿀 뿐이다. 심판은 오직 그분만이 할 게다.
그러기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분께서는 밭에 뿌려진 씨앗 가운데 밀뿐만이 아닌 가라지가 있는 것을 아시고도, 이를 뽑아 버리자는 못된 우리의 청에 수확 때까지, 둘 다가 함께 자라도록 그냥 모른 채로 내버려두잔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어머님처럼 매사에 늘 자비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인내심이 정말로 엄청난 분이시기에.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가라지를 잘라 버리고 정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될 때가 시도 때도 없이 있으리라. 그러면 밀도 방해받지 않고 훨씬 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 같기에 그리 여길 게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아주 어리석게만 보일지라도 효과적인 그 방법을 결코 바라지 않으신다. 대신에 모두가 다 함께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원하시는지는 몰라도, 마지막 그날까지 마냥 참고 기다리시는 것만을 선택하신다.
사실 오래 참고 모든 일에 기다리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한 모습일 게다. 지금은 비록 잘못된 채 버려두지만, 언젠가는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긴 안목으로 열어 두는 것이기에. 세상이 더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신속한 것에만 익숙해져 간다. 훨씬 편하게 산다지만, 동시에 옛날의 그 인내심은 줄고 단순해지려는 조급증만 는다. 그러기에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 둘 다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보자는, 주님의 그 인내와 기다림을 깊이 묵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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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한 첫 행동은 ‘알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더 이상 알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을 보여 주기 싫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착각을 일으킵니다. 죄 안에 있거나 그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착각, 하느님과 깨져 버린 관계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착각 속에 우리를 가둡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미루셨습니다. 모두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소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 우리의 알몸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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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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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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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혈기왕성했던 나머지 이리 충돌 저리 충돌, 사방으로 다니면서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나 자신의 심각한 결핍이나 죄 앞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웃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 앞에는 엄청나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께서 나를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이웃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냈어야 마땅한데...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거듭되어온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에도 또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나무는 즉시 톱을 들고 나가 바로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 29-30)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모순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종들처럼 생각합니다.
“저 악한 인간들을 지금 당장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인간이 직접 수행해버리려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깊은 침묵 속에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 홀로 한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권리를 지니고 계십니다.
악의 세력들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와 보복은 주님께 맡겨드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 주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는 종종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의 밭에다가도 가라지를 뿌려놓고 갑니다.
공동체를 좀먹게 하는 불평불만의 가라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이단의 가라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심의 가라지...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다양한 가라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 주님의 뜻,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다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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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으므로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있지 못하는 그때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 고 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때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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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법
김지은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와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시골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녀는 보다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 3년간 파출부와 도시락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도 불안을 느껴 미얀마로 피신했지만 또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의사가 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죽는 수밖에 ...’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 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장동료들은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는 국회청원을 내서 지방 한의대 편입학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입니다.
주님의 씨는 밀이고 사탄이 뿌린 씨는 가라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 구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사랑과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너무 좋아서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면 그건 집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옥 간다고 지옥까지 쫓아가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집착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자아의 집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잃더라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김지은 원장은 자살하려고 할 때까지가 가라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내려놓자 밀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다른 본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고 돈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장애가 되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면 굳이 가난을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일부러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랩퍼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도끼는 돈이 엄청 많습니다.
한 달에 수천 만원하는 백 평이 넘는 초호화 호텔 방에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명품 옷, 장신구,
운동화들을 갖춰놓고 살아갑니다.
고양이 방이 보통 집 안방보다 큽니다.
차고엔 초고가 외제차들이 즐비합니다.
진열장엔 5만 원짜리 돈다발이 수북이 놓여있습니다.
매달 한 뭉치씩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는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2년 간 기획사 옥상 컨테이너에 살며 랩을 배울 땐 단 돈 5백 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때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술, 담배, 커피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뒤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그가 돈 버는 것이 돈에 집착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이 없어도 잘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은 사랑하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가라지는 집착의 본성이고 밀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람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지, 집착하는지 살펴야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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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직은 모릅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ㄴ-30).”
1)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 또는 교회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 세상에, 또는 교회에 왜 악인들과 의인들이 섞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신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에제 33,11).
2)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라는 말은,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는 동안에” 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냥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 기원과 활동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즉 ‘신비’ 속에 숨어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비유를 생각하면, 악마는 교회 안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말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0ㄴ-41).”
죄를 지은 다음에 악마가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악마 핑계를 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유혹한 악마는 하느님께서 따로 엄하게 심판하시겠지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사람 자신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항력에 끌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모두 함께 믿고 함께 회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유혹과 압박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신앙을 아예 잃어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면서 끝까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우선 먼저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는,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어떤 형제가 악인이 아닌데도 함부로 악인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그 형제의 구원이 막히는 것은 아닌데, 그를 판단하고 단죄한 내 죄만 커지게 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는 용서의 권한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ㄴ-23).”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또는 교회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신 말씀들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사목 직무와 권한을 ‘위임’해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도들은(교회는) 아무나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직무와 그 직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4)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혹시 진짜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라.”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은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악인이라도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라도 타락해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는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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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내와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즉시 단죄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보시고, 스스로 죄를 깨닫고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다시 당신께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은 이런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하루 하루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런 자기 처지를 망각하고 하느님께 이런 불평 불만을 쏟아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저 착한 사람이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저 못된 놈이 저렇게나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이런 불의와 부정을 왜 지켜보고만 계시느냐’는 겁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저런 나쁜 놈들에게는 즉시 ‘천벌’을 내리시는 것이 ‘정의’가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분노를 쏟아내며 즉시 심판을 내리신다면 그 심판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요? 세상 종말의 순간 구원받을 사람이 남아있기는 할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길게 보시며 충분히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인간은 세상에 가득한 부정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심판하지 않는 하느님을 탓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들이 생긴건 하느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당신 밭인 이 세상에 ‘좋은 씨’를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심어주신 좋은 씨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안일함과 나태함에 빠져 잠든 사이, 우리 원수인 악마가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마음에 욕망 시기 질투 교만 분노 같은 가라지들을 뿌려놓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를 찾아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면 결국 우리 자신을 탓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잠들었다고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가라지가 자라도록 방치했다고 나무라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라지에 치여 다치거나 구원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시고 격려하시며 응원해 주십니다.
사실 가라지 때문에 피해를 보는건 우리 종들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뿌리신 씨앗의 양에 비해, 그것을 가꾸느라 들이신 노력의 정도에 비해, 거둬들일 수확량이 터무니 없이 적을 것이 뻔하지만 그분은 기꺼이 감수하십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맺는 열매의 양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구원의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몇 등으로 들어갔는지, 몇 점을 받고 들어갔는지는 중요치 않지요. 그러니 세상에 심어진 가라지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 안에 가라지가 심어져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우리였는데, 그분 뜻에 깨어있지 못한 채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 새 가라지들이 우리 마음 속 깊숙이 박혀 버렸습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라고 의식하는 순간은 이미 나 혼자 힘으로는 그 가라지를 뽑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자리잡은 다음이지요. 그럴 땐 그 가라지에만 온통 시선을 뺏긴 채 ‘나는 이거밖에 안되는구나’하고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있을 게 아니라, 가라지마저 당신 섭리 안에 포함시켜 큰 그림을 그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자비의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한 채 그분 뜻을 실천하는 일에만 전념하다보면, 어느 새 그분께서 준비해두신 구원의 곳간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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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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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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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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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을 누리는 삶
<2024.7.27>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8:14~28절)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을 누리는 삶❞
❚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의 미래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구원함을 받기 때문입니다(14~18절).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포위되고 성읍에 양식이 떨어진 위기 상황에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자 했습니다. “...한 마디도 내게 숨지지 말라...”(14절)... 그만큼 시드기야가 처한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자기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이는 단순히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시드기야는 한 번도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관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존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16절).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만일...’ ‘...항복하면...’ 살겠고(17절) 반대로 ‘...항복하지 아니하면...’(18절)... 재앙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뜻은 시드기야 왕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뜻이 비록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아가 내 자신을 위태롭게 한다 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손해가 있을 것 같다고, 아프다고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이 세대의 사람들은 책망과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한 말씀보다는 축복의 말씀만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것처럼, 아픈 부위가 있다면 절개하고 환부를 드러내서 수술을 해야만 살 수 있듯이 고통스러운 말씀이라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의지를 꺾고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구원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19~23절).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벨론에 항복했을 때 백성이 자신을 조롱하며 괴롭힐 것을 염려했습니다(19절). 그래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간청했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20절). 즉, 항복하라는 명령을 듣고 순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라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예레미야에게 ‘...보이신 말씀대로...’(21절) 시드기야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22~23절).
신앙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애매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 이외의 어떤 것에도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재물과 권력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를 하나님이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평안함을 받기 때문입니다(24~28절).
‘...너는 이 말을 어느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24절) 지금까지의 예레미야의 충고가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보다 고관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만남을 알게 된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대화 내용을 묻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왕이 명한 대로만 답변을 하고 실제 대화 내용은 밝히지 않습니다. 즉,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26절)라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의 거짓말을 사용하여 고관들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거짓에 동조한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로서 담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적인 연약함과 갈등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와 평안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권력자인 시드기야는 명예와 재물,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소유하였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평안하지 못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재 삶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사람과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답게 우리의 삶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편안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의지를 꺾고 온전히 순종하며, 신뢰하므로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므로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8:14~2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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