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민다나오섬에 살고 있는 이슬람 신자들의 영적 상황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이곳 인근에 살고 있는 13개 이슬람종족들은 말할 것도 없이 미전도종족이다. 물론 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의 대부분의 이슬람 종족들은 미전도종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특유의 반기독교적 정서와 기독교에 대한 저항감과 복음의 제한성 때문이다. 그러나 민다나오의 이슬람 신자들은 그들의 역사적 배경은 이들만의 특징을 결정하는 독특한 요소이다 . 또 이는 이 지역의 이슬람과 기독교인들의 현재의 관계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민다나오의 이슬람 신자들의 영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도 긴요하다.
민다나오의 이슬람의 역사를 살펴 보면, 기록상 이 지역에 이슬람 신자들이 가장 처음 나타난 것은 13세기 초반이다. 이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을 팔기 위한 무역파트너들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인근 이슬람 종족들과 접촉한 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이 지역의 이슬람 유입은 아주 평화롭고 순조로운 과정을 통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과 접촉하는 것이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니 이슬람교에 대해 반감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어 보였다. 특히 지역의 호족들은 경제적인 이득을 계속 누리기 위해 이슬람 무역상들의 딸들을 맞아 통혼을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력은 서서히 커졌다. 16세기 말경 스페인 세력이 이 지역에 들어올 때까지 이슬람교는 민다나오의 많은 종족들 사이에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해안 지방은 무역상들과의 접촉이 쉽다보니 이슬람의 강세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세력은 서서히 북쪽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닐라에서도 이슬람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 기록으로 입증된다. 그러나 스페인 세력이 들어오면서부터 이슬람과 기독교계 간의 악연이 시작된다.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동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세력과 교전하여 큰 손실을 본 뼈아픈 과거는 스페인으로 하여금 이슬람에 대한 본능적 반감을 갖게 했고, 한편으로는 이슬람을 척결하고 기독교(카톨릭)을 전파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의무감 같은 것을 갖게 했다. 양측간의 무력충돌은 상대방에 대한 적지 않은 적대감을 갖게 되고, 스페인 사람들은 이슬람 신자들을 야만인, 도살자 정도로 매도하며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로 필리핀의 이슬람 세력권은 지금의 민다나오로 축소되게 되었다.
이후 식민지 지배기간 내내 이슬람 세력과 비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당시의 로마카톨릭 수도원은 순수한 종교기관으로서 뿐 아니라 식민통치기지의 역할도 겸하였다. 카톨릭 수도원은 민다나오 전역에 세워졌다. 이처럼 카톨릭 기관들이 식 민통치의 첨병 노릇을 했던 아픈 과거가 지금까지의 양측 간의 깊은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말 경부터 필리핀의 맹주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교체되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장악한 후 이슬람 세력과 미국 식민통치세력 간의 전투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즈음 미국은 콜트45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최신형 권총을 개발했는데 이 총은 연발발사가 가능했고, 이슬람 원주민들이게 이 권총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는 이슬람 무장병력들에게 미국은 무력으로 응수 했고, 그 상징이 콜트45였던 것이다. 미국의 식민통치기간 내내 미국은 이슬람 반군을 완전히 소탕하는데는 실패 했지만 반군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후 독립 후에도 정부와 민다나오반군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69년 마르코스 정부는 이슬람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이 지역의 반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훗날 자비다학살이라고 부르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정부군은 23명의 이슬람 반군을 살해 했는데 23명이라는 숫자는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라하더라도 그 방법과 명분이 정당하지 않아 문제가 된 사건이다. 이에 자극 받은 저항세력이 결성한 단체가 모로국가해방전선(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 MNLF)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이슬람계 최초의 정치적, 군사적 결사체였다. 이후 모로전선은 적극적으로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서서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이슬람국가기구(OIC)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국제기구의 승인을 받은 반군세력이 그 체제를 정비하면서 탄생시킨 조직이 무슬림민다나오자치구(Autonomous Regions of Muslim Mindanao; ARMM)라는 조직이다. 이 기구는 무력투쟁보다는 외교와 정치적인 협상을 통한 투쟁을 추구하였는데 강경한 무장세력은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 결과로 강경파를 중심으로 모로이슬람해방전선(Moro Islamic Liberstion Front; MILF)가 결성되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MNLF와 ARMM을 비토하는 강경세력의 결사체였다. 지금도 이 양대 세력은 민다나오의 이슬람 세력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아 한쪽은 화해와 외교를 통한 독립을 한쪽은 무력을 통한 독립을 주장하면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MILF는 MNLF에 비해서 보다 군사적이고, 강경하며,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세력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주민 들에 대해서도 이슬람율법인 샤리아법의 준수를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들 양대세력과는 별개로 보다 강경한 무장세력인 아부사야프가 새롭게 대두되어 이 지역의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다.
파키스탄, 유럽의 마호멧 만평 사건의 불똥이 성도들에게
덴마크 신문의 마호멧모독만평 사건이 문명간의 충돌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이슬람 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슬람국가에 살고 있는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의 안위이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보복공격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지난 2월 5일 주일에 파키스탄의 한 교회가 유럽 언론의 만평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 신자들의 무리로부터 공격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파키스탄 펀잡주의 주도인 라호르에서 168 km 정도 떨어진 칸완리트 마을에서 한 교회가 공격을 받아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신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폭도들은 교회의 문과 창문, 강대상들을 마구 파손했다.
파키스탄 데일리 타임즈지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여성까지 포함된 20명 가량의 이슬람 신자들이 교회를 공격하여 나이든 여성 한 사람을 권총으로 내려 친 것을 포함하여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보도했다. 목격자는 또 폭도들이 성경책과 찬송가 등을 발 아래로 쏟고 마구 밟았다. 또 폭도들은 동행한 이슬람 여성 신자에게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한수 가르쳐주라."고 지시했다. 이에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남성신자의 이마에 총을 겨누어 위협하기도 했다.
한편 지시를 받은 여성 이슬람 신자는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베로라는 이름의 70대의 노인 여성과 살리마라는 이름의 50대 여성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 베로의 경우 이슬람 여성들의 고문으로 말미암아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황이 발생하자 교회 측과 마을 사람들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에서는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교회측은 주장했다.
네팔의 첫 지방선거 파행적으로 치러질 듯
2월 8일에 치러질 네팔의 지방의회 선거는 네팔에서 치러지는 사실상 첫 민주적 선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이 선거 역시 별로 민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끝날 전망이다. 이미 네팔의 7개 야당연합은 이 선거가 국왕의 전제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며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이다. 또 이 선거를 반대하는 중요한 세력인 마오쩌뚱반군세력은 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제거를 공언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미 2명의 입후보자가 사살되고, 관청과 군부대 주둔지,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이 속출하고 있다. 또 많은 유권자들이 정부군과 공산반군 사이의 충돌을 우려하여 도시외곽의 안전지대로 피신함에 따라 대거 투표 불참이 우려된다. 이로 말미암아 총 4146명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 절반 가량은 입후보자 없어 선거 무산이 이미 확정된 상태이고, 나머지 후보들도 신변안전을 위해 선거운동을 거의 못하고 있다.
발렌타인 초콜렛에 소년 노예들의 눈물이 배어 있다
밸런타인 데이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올해는 초콜릿 맛이 조금 쓸 것 같다. 초콜릿이 어린이 노동 착취의 산물이란 사실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신호(13일자)에서 네슬레, 카길,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 등 주요 초콜릿 회사에 코코아를 공급하는 업체들이 6일 줄줄이 법정에 섰다고 보도했다. 이들 회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정에 출석, 서아프리카 지역의 코코아 농장들이 어린이를 노예처럼 부리며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혐의에 대해 진술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전세계 코코아의 70%가 생산된다.
이번 재판은 국제노동권리기금(ILRF)이 지난해 이들 코코아 공급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ILRF는 6일 인터넷 홈페이지(www.laborrights.org)에서 "최근 우리의 지원을 받은 사진작가가 코트디부아르의 코코아 농장에서 소년들이 노예처럼 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왔다"며 아직도 어린이 노동착취가 근절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초콜릿 원료인 코코아 생산 과정에서 아동 노동 착취가 행해진다는 사실은 2001년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 BBC방송은 서아프리카 코코아 농장 아동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많은 시청자는 자신이 즐기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홉 살 안팎의 어린 소년들이 인간 대접도 못 받으며 거둬들인 '비윤리적인 코코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2003년의 한 조사 결과에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코트디부아르를 중심으로 나이지리아.가나.카메룬 등에서 코코아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이 노동자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중 64%가 14세 이하였으며, 심지어 일꾼으로 팔려와 가족과 연락조차 되지 않는 아이들이 1만2000명이나 됐다. 임금을 받는 아이들은 5100명에 불과했다. '어린이 노예'(child slavery)란 말은 이렇게 나왔다.
각국 초콜릿 업체는 2002년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에 따라 주주.제조업체.소비자그룹.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국제코코아재단(ICI)을 만들어 아동 노동 착취 근절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직접 찾은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남부의 코코아 농장에는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FT는 "이곳에서 13만 명의 어린이가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코코아 농장의 아동 노동 착취는 여전하다"고 보도했다. - 중앙일보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감사합니다...늘 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