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 23,1.4-11.15-16.27.34ㄴ-37)(마태 13,54-58)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23,1.4-11.15-16.27.34ㄴ-37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이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 가까이 하기에 먼 당신 ”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레위기 저자는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규정을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열나흗날, 무교절이 이어서 보름부터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둘 때에 하느님 앞에서 곡식단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치고 일곱 주간을 꼭 차게 계산해서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인
오십일 째에는 새로운 곡식을 또한 주님께 바치라는 규정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인데 그 때에는 고행을 하며 주님께 화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초막절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은 생업을 위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모처럼 고향을 찾은 정경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더 주님을 이해하고 반갑게 맞아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모습입니다.
오히려 과거에 예수님의 집안이 목수의 집안으로 불리는 것을 들어 예수님을 얕잡아 보려고 합니다.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모를 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동포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들어 올리셨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는 속담을 들어 당신이 고향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는 사실을 확인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8)
여기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것이 성모님의 동정과 관련시켜서
가톨릭 외에는 예수님의 친형제들이라고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말은 히브리어 뉴앙스에서 집안 식구들을 통털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집 형제들’이라는 말은 친형제 말고도 사촌부터 멀리 있는 혈육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체험합니다. 생전에 잘 모르던 먼 발치의 사람도 유명하다 싶으면
‘친한친구’로 둔갑하지요. 그리고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이웃에게 잘 아는 양 떠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친하다는 착각에 내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는지요?
우리 말에도 ‘친할 수록 예로써 대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하기 때문에 쉽게 말하고 상처를 주고 불리하다 싶으면 ‘이물이 없는 사이’, 또는
‘농담’이라는 핑계를 내세우며 합리화시키려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부족한 우리이지만 고향 사람들로부터 편견과 푸대접을 받으신 고향에서의 주님을
묵상하며 내 이웃을 가깝다는 핑계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