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 대통령 후보들이 자주 찾는 곳들이 있습니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시장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후보들의 그런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표를 얻기 위한 가식인지 분별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산업현장으로 시찰을 가기도 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대통령이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전국적으로 호우가 발생해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피해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감독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도자는 무릇 서민들과 함께하는 동반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현장에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반은 맞을지 몰라도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그분들의 삶은 후세의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던 베드로 성인이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회개하며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던 바오로 성인이 있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던 성인들이 있습니다. 성인전을 읽으면 감동의 눈물이 나기도 하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생각도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분들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의 나는 작은 고통에도 참지 못하고, 담대한 용기도 없으며, 뜨거운 열정과 굳건한 신앙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친밀감이 가는 성인도 있습니다. 백정이었고, 글도 잘 몰랐는데 어쩌다 교리를 배워 순교의 영광을 얻은 성인도 있습니다. 평생 수도원의 마당을 쓸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성인이 된 ‘빗자루 수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있습니다. 학문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여러 곳으로 복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생 본당에서 사제로 성사를 충실히 집전했어도 공경 받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생깁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더 나아가 ‘열등감’에서 생기기 마련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