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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Work / 1981 / 97.5 x 130 / 캔버스에 유채
작품 Work / 1981 / 73 x 91 / 캔버스에 유채
작품 Work / 1981 / 73 x 100 / 캔버스에 유채
▲대담하는 이경성, 유영국씨 |
자유전에서 신상회까지
저도 그럭저럭 80을 바라보는 나이고, 말하자면 인생을 결론짓는 시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도 1916년 생이시니까 그야말로 한 세기를 걸쳐서 살아오신 셈이지요 이번 대담은 20세기를 한결같이 추상미술에 전념해 온 한 사람의 작가를 기념하고 길이 남긴다는 의미도 있고, 선생님의 삶을 통해 한국미술의 발자취를 다시 재점검해보는 의미도 있지요, 일생동안 굽히지 않고 한길을 걸어오신 분들은 많지 않지요.
그저 제가하고 싶은 대로 해온 것뿐인데요.
선생님이 처음 미술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 동경 문화학원 시절부터인데,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을 지닌 문화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도 어떤 선생님의 작가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일본이 점점 군국주의가 되어가면서 자유로움을 보장해 주는 학교가 많지 않았지요. 그래도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이런 것이 보장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나중에 폐교를 당했지만요.
경성 제2고보 4학년까지만 마치고 동경으로 갔지요. 마지막 1년이 남아 있었지만 일본식의 규율이 얽매인 교육 방식이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선택한 것이 미술이었지요. 4학년을 마치고 간 것도 당시 동경미술학교의 입학자격이 4학년 이상을 마치고 가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한국화가들의 목표는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아주 까다로운 석고데생 시험을 거쳐야 했고, 심지어 5수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문화학원은 보다 쉽게 입학할 수 있었지요, 당시 문화학원은 남녀공학이었는데 구상과 추상 등이 공존했어요. 착실하게 선생들이 시키는 데로 하면 성적은 좋았지만, 결코 좋은 작가는 될 수 없었지요. 나는 될 수 있는대로 간섭받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하고 싶었어요.
▲Work, 134×134cm, Oil on Canvas, 1974 |
1930년 당시 일본화단에 문무성이 주관하는 관전인 문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이과전, 독립전, 자유전등 많은 재야단체들이 생겨났었지요. 선생님은 주로 자유전을 통해 활동하셨지요.
문전에서 떨어져나온 사람들이 이과전과 일수회 라는 것을 만들었고, 이과전으로부터 야수파와 초현실주의가 떨어져 나와 독립전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또 그뒤에 자유전이 생겼습니다. 당시 이과전은 동경 예술대학교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는데 극사실적 경향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이 가담했지요. 이과전의 일부와 자유전의 반정도가 추상미술을 했어요. 자유전 1회 때 이과전이 22회, 독립전은 7회 였습니다. 당시 김환기, 이중섭, 문학수 등이 자유전에 함께 참가했지요. 김환기는 자유전이 창립될 때 회우가 되었지요, 자유전에 1회 참가하고 서울로 갔지만, 당시 화가가 될 만하다 싶은 사람들을 협회에서 회원제같은 것으로 멤버를 만들었지요.
야수파와 초현실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전이 만들어지면서 이과전의 재야적 성격이 약화됐지요. 다시 자유전은 파리에서 유학한 서양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위적인 추상미술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선생님이 하셨던 작품들도 상당히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요.
나무판을 사용한 릴리프작품으로 기하학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당시 경제형편도 어렵고 미술재료를 구하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건축자재를 파는 곳에서 내가 작가라는 것을 알게되자 선뜻 자재부스러기 등을 주었습니다. 자유전에서 김환기는 <향>과 같은 추상작품들을 했고, 문학수는<춘향단죄지도> 같은 작품들을 선보였고 이중섭은 "소"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을 했지요.
우리나라의 특이한 경향분포 가운데 하나가 이북 출신화가들은 기독교 교육을 받아 서양화가 많았고 남쪽 지방엔 동양화, 한국화를 하는 화가들이 많았지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유일하게 경상도 출신으로 서양화를 하셨던 경우이지요. 동경유학시절 시작되었던 추상작업은 그후 서울에서 보다 본격화되었지요.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접어들면서 점차 군국주의적 기운이 팽배해지고 자유주의사상이 탄압을 받아서 더 이상 아방가르드적인 추상작업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1942년에는 경주 남산에 가서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 등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도 했는데, 추상을 하던 사람이 다른 것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친구들과 젊은 사람들이 모두 전쟁에 끌려가 동료집단 마저 없으니 작업은 더욱 힘들어지더군요. 결국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해방되기 만 2년전에 서울로 나왔어요. 당시 서울에서의 유일한 친구는 김환기 뿐이었지요.
전쟁말기는 화단 전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지요, 해방 후 2~3년간도 혼란기였고, 좌우익의 대립 등 사상문제 때문에 작품하기가 힘들었지요.
▲제3회 모던아트전에서의 이규상(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유영국(세번째) |
당시 <50년미술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우리 동시대인들이 함께 한국화단을 이룩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김환기와 이쾌대등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지요. 1950년 7월 1일에 경복궁미술관시 모던아트협회는 반아카데미즘적인 경향을 가진 중견작가들의 모임으로 온건하게 모더니즘을 전개해 나갔지요.
모던아트협회는 1957년 한묵, 정점식, 박고석, 이규상등 7.8명이 모여 반 아카데미즘을 천명하면서 결성하였지요. 그러다가 1958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 참가했는데, 다른 회원들은 이 초대전에 참가하기를 거부해서 나는 결국 모던아트협회 2회전을 끝으로 협회에서 나오게 되었지요.
1957년부터 개최된 현대작가 초대전은 당시 확산되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전개와 때를 맞추어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요. 당시 신문사 위주의 초대전이 하나의 유행처럼 생겨났지요. 그때 선생님의 작품들은 젊은 작가들의 앵포르멜 미술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양식을 모색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정시기마다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구성적인 패턴을 기본 구조로 하면서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적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지요.
현대작가 초대전에는 1962년까지 출품하고 그만두었지요, 처음에는 반국전을 표방하는 작가들만을 받아들였는데 나중엔 이 구분이 모호해졌지요. 심지어는 왜 우리 현대작가 초대전의 추천작가는 국전에 넣어주지 않는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에까지 이르렀지요. 결국 그만두고 1962년에 <신상회>를 조직했지요. 신상회를 만들기 위해 1년 이상을 돌아다녔지만 모두 국전이 무서워서 피했지요. 국전에 참가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많이 당했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래서 이봉상을 대표로 시작을 하긴 했지만 집단의 이합집산이 계속되면서 3회만에 그만두었지요. 그 이후로는 개인전위주의 활동만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1960년대 후반부터는 화단과 단체들을 떠나서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에 몰입하셨지요. 그 때 더 좋은 작품을 많이 하셨지요. 어찌 보면 일정한 조직이나 단체에 오랫동안 몸담지 못하는 것도 일정부분 선생님의 내적 요소로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요. 학교에 몸담았던 시기로는 해방 후 서울대에 잠깐 계셨던 것과 1960년대 중반 홍익대 교수로 2년 남짓 근무하신 것이 전부니까요.
▲1965년 열린 <한국현대작가 7인전>의 참가작가들. 왼쪽부터 김흥수, 박서보, 최기원, 김영주, 유영국. |
홍대를 그만둔 후 월급생활 정도의 수입은 고향의 양조장에서 충당될 수 있었지요.
5,60년대 당시의 우리 작가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지요. 고향에서의 수입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겠군요. 사실 작품의 매매가 일반화된 오늘날의 작가들과 달리 당시 화단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정신으로 작품을 해 왔다고도 볼 수 있지요. 지금 현대미술관에 걸려있는 선생님의 큰 작품의 경우도 팔려고 그린 그림이 아니지요.
그림을 처음으로 팔았던 때가 60년대, 그러니까 제 나이 47,8세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그림을 팔아서 산 작가는 박수근 밖에 없었지요. 지금은 억대의 작품들이 그 당시에는 4만원 정도에 팔리곤 했었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지금 세대들은 행복한 거지요.
어쨌든 선생님은 시류에 타협하기보다는 꿋꿋하게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여 추상미술을 견지해옴으로써 우리나라 추상미술계의 형성에 큰 획을 그으셨던 거지요.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초대전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의 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 월간미술 1996.10월호
Work, 70×90cm, Oil on Wood, 1938
1.
화가 유영국은 우리나라 추상예술의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동안 고집스럽게 자기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다. 80이 갓 넘은 나이, 생애의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서사시적 장대함에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전환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물체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나라 추상예술의 선구자로서는 유일하게 오랜 기간동안 흔들림 없이 추상 양식을 지속시켜 왔기 때문에 유영국을 단순한 추상화가로 여기기 쉽지만 그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출발한다. 그가 바라보고 표현하는 자연은 다른 자연주의자처럼 묘사를 위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거시적인 시야에서의 자연이다. 유영국이 추상화가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자연의 근원이 형과 색으로 조형화되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유영국이 이룩하고 있는 작품세계는 유영국이라는 예술가를 통해서 창조된 또 하나의 자연이기에 자연주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재현보다는 실현을 성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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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38×45cm, Oil on Canvas, 1940
추상예술은 좁은 의미에서의 추상미술과 넓은 의미로서의 추상에 들어가는 비구상 영역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좁은 의미로서의 추상미술이란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이미지가 완전히 제거되어 철저하게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채로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서 비구상 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양식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작품 속에서 반드시 자연의 형태가 잔존하거나 그 흔적이 남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참고로 할 때 유영국의 작품은 엄격히 말하면 비구상에 속한다고 하겠다. 초기 일본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 작품 표현에 있어 자연을 떠난 적이 없고 생활 주변에서 체험하는 산, 바다 등 자연 공간의 형상이 추상적 기호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흔적을 여전히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Work, 38×45cm, Oil on Canvas, 1940
2.
유영국은 1916년 4월 7일 강원도 울진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933년 경성제 2고보를 4년간 다니다가 일본식의 규율에 얽매인 교육방식이 체질에 맞지 않아 마지막 1년을 마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유영국은 경성제2고보 시절 미술반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 결과, 문학보다는 미술이 맞는 것 같아 선택한 것이 결국 미술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미술학교로서는 진보적인 미술교육을 시행하던 동경문화학원 서양화과를 선택하여 입학하였다. 형식을 싫어하고 자유를 향유하는 기질의 유영국이 보다 자유로운 학풍을 지닌 문화학원에 진학한 것은 단지 우연의 결과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선택이며 귀결이었다고 보인다. 서구 미술을 수용한 지 채 20년 남짓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은 피식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시 일본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위미술에 경도하고, 그러한 학풍의 학교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영국의 작가적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 될 것이다.
문화학원에는 한국인으로서 박일주, 이철이 먼저 다니고 있었고, 유영국, 김병기가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그보다 한 해 뒤에 문학수가 입학했으며, 그 뒤로 이중섭, 안기풍 등이 입학하였다. 구성주의적 경향의 유영국,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하였던 문학수, 야수파에 경도한 이중섭 등 문화학원 졸업자들의 작품 경향은 대체로 일본 화단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성향을 띤 것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독립전이나 이과전, 자유전 등 재야 미술단체전에 출품하였는데, 유영국은 주로 자유전을 통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일본 화단은 문부성에서 주관하는 문전이 1과는 동양화, 2과는 서양화, 3과는 조각으로 나뉘어 화단의 보수 세력을 형성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아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반문전파적 성향의 서양화가들이 문전을 떠나 이과전, 독립전 및 자유전을 창설하여 신예술의 터전을 만들었다. 포비즘과 초현실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전의 출현으로 이과회의 재야성은 상실되었고, 파리에서 유학한 서양화가들을 중심으로 일본 최초의 전위미술 공모 단체인 자유미술협회가 창설되었다. 자유전은 추상미술이 주를 이루는 전위미술의 집합이었으며, 유영국은 일본에서 가장 전위적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전의 회우로서 추상작품을 출품하였고, 그밖에 한국작가로 김환기, 이중섭, 송혜수, 문학수, 안기풍, 조우식 등이 참여하였다.
▲Work, 74×90cm, Oil on Wood, 1940 |
▲Work, 130×162cm, Oil on Canvas, 1965 |
Work, 53×45.5cm, Oil on Canvas, 1949
3.
9년 3개월 동안의 일본 활동 기간을 마치고 귀국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약 3년 동안, 유영국은 미술보국이라는 전시체제의 문화행정을 피하게 위해 잠적하였다가 해방이 되자 곧 상경, 1947년 신사실파 창립에 가담하였다. 신사실파 창립 회원은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3인으로서 이들이 모두 추상미술 작가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그룹 성격이 강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2회전 개최시 장욱진이 새롭게 참가하였고, 3회전에는 백영수가 참여하여 그룹의 성격은 추상미술을 주축으로 한 넓은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듯 하였지만, 이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3회전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당시의 화단 실정으로서는 추상미술을 전개하고 추진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유영국과 김환기가 일본에서 추상 작업을 시도했었고, 국내에도 이규상이라는 추상미술 작가가 있었지만, 추상미술 운동이 지속될 만한 기반이나 원동력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유영국과 김환기의 작품 성향이 귀국 후에 이전의 완전추상에서 반추상적 경향으로 변하였던 저간의 사정도 추상미술을 실현시킬 만한 자극이나 힘이 부재했던 우리나라 화단의 빈곤함에서 비롯된 점이 클 것이다.
해방 이후 신사실파를 통해 발표된 유영국의 화면에는 산이나 바다 등 자연의 보편 형상이 화면 구성의 형식적 요인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4후퇴시 고향 울진으로 피난하여 생활하는 동안 자연과의 교감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작품 상에 새로운 변환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에도 방학 때면 근처의 해변에 나가 하루종일 먼 산을 쳐다보거나 수영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곤 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연 속에서의 생활과 체험이 유영국의 화풍을 전개시키는 자양분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해방 이후 유영국의 작품은 명확하고 단순한 구성주의적 경향에서 자연에 대한 깊은 감동을 전하는 비구상적 경향으로 전환되었다.
▲Work, 130×162cm, Oil on Canvas, 1986-87 |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