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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축복
□ 본문 : 시편 3편 1-8절
시편 첫 머리에 저자와 저작 배경 등이 기록된, 흔히 표제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표제가 있는 시편이 모두 101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B.C. 979년경에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이로 인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길에 나섭니다. 사무엘하 15장에서 18장까지가 이때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 가장 큰 고난이며, 가장 마음 아픈 사건일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지어진 것이 시편 3편입니다. 1절 2절에서 다윗은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압살롬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때는 몰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윗을 좋아하고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유익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사람입니다. 마음을 바꾸는 정도가 아닙니다. 다윗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다윗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편을 읽다보면 ‘셀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음악 전문용어라는 점은 분명한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셀라’를 ‘들어 올리다’는 뜻으로 이해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 음을 높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심벌즈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라는 신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노래와 연주에 변화를 주는 신호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을 향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저주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사무엘하 16장 7절, 8절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다윗을 향해 사악한 자라고 외치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시므이의 저주는 다윗의 영혼에 깊은 절망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죽음을 모면하고자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가는 다윗은 극심한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그 반역을 일으킨 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관계의 아픔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었던 친구의 배신보다, 형제의 배신보다, 배우자의 배신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치와 마음의 고통, 관계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영혼의 고통입니다.
많은 대적들이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너는 절대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마귀가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다윗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한 두 사람이 정죄해도 낙심과 절망인데 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저주하며 정죄하니, 다윗의 영혼이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육신의 고통과 관계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을 동시에 당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동시에 이런 고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다윗이 이런 고난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다윗의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과 고통 속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다윗은 다시 일어납니다. 놀라운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3절,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압살롬을 따릅니다. 유다지파도 압살롬을 따릅니다. 다윗을 따르는 용사들이 있지만 압살롬을 따르는 군사들과 비교하면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볼 때 다윗은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예, 달라집니다. 기도하면 역전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습니다. 이 수치와 마음의 고통을 누가 위로해주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받은 상처 때문에 정신과치료를 받는다고 한다면, 어쩌면 일평생 치료를 받아도 완치가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그 어떤 수치와 부끄러움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받은 그 어떤 상처도 치유하십니다. 수년 아니, 수십 년 동안 시달리던 상처와 아픔도 하나님은 한 순간에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시므이의 저주가 들립니다. 시므이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이런 일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무엇보다도 마귀가 끊임없이 참소합니다. 거짓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버렸다. 네가 얼마나 악하고 추하면 네 아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너는 저주받은 인생이다. 너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너는 이제 끝났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고 말입니다. 이런 참소와 거짓의 소리는 너무 강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참소와 거짓말을 한 순간에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사41:10,11)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저주 받은 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마귀가 끊임없이 참소하며 거짓으로 속여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삽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음성이 들리면 삽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삽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1)주님은 나의 방패이십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다윗은 방패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수도 없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적의 칼과 창으로부터 방패가 지켜줍니다. 적이 날리는 수많은 화살에서 방패가 지켜줍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방패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칼에서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눈에 보이는 칼만이 아닙니다. 시므이의 저주, 많은 사람들의 저주에서 다윗의 영혼을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시편 91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칼에서 지켜주시고 저주에서 지켜주십니다.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에서 지켜주십니다. 천 명이 우리의 왼쪽에서, 만 명이 우리의 오른쪽에서 엎드러져도 이 재앙이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방패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까? 기도할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방패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수치와 마음의 고통이 공격할 때 방패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주가 날아들 때, 마귀가 참소하며 거짓으로 속일 때 방패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을 지켜주십니다.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방패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2)주님은 나의 영광이십니다.
다윗은 주님은 나의 영광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 다윗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서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가고 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갑니다.(삼하15:30) 슬픔과 수치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하고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립니다.(삼하16:13) 다윗의 인생에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이 다윗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돌을 던질 때 아비새가 시므이의 머리를 베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그때 다윗은 아비새의 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16:12)
다윗은 자신의 수치와 모욕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치와 모욕을 거두어 가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죽이겠다는 아비새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시므이를 죽인다고 다윗의 수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시므이를 죽인다고 다윗이 영화롭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수치를 거두어 가실 분도, 다윗의 잃어버린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와 싸우지 않습니다. 시므이를 죽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모욕할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수치를 면하려고 변명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소리치고 싸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수치와 모욕이 떠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수치를 당합니다. 조롱과 모욕이 더 심해집니다. 나중에는 정말 비참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므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낮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수치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3)주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입니다.
머리를 든다는 것은 신분과 명예를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다윗의 용사들과 신하들을 제외하고는 온 이스라엘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따르는 세력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으면 다윗이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가겠습니까!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닥까지 떨어진 다윗의 명예가 원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끝났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바닥까지 떨어진 다윗의 머리가 다시 들려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머리를 능히 드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이 끝났다고 말해도 기도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절대로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해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회복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머리를 드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분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머리도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3절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여 주는 방패시요 영광이시요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인생에 환난을 만날 때마다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방패가 되시고, 주님이 자신의 영광이 되시고, 주님이 자신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 있지만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이야기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자신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50일 기도학교를 통해 주님이 나의 방패가 되시고 나의 영광이 되시고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5절, 6절 말씀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5절과 6절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다윗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어로 잠자는 것을 표현할 때는 ‘누워’로 번역된 ‘솨카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워’라는 단어와 함께 ‘자고’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자고’의 원어 ‘야쉔’은 깊이 잠드는 것입니다. ‘누워’와 ‘자고’가 함께 쓰이면, 잠을 자되 아무런 염려 없이 깊은 단잠을 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꿀잠을 자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으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저주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다윗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깊은 단잠을 자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다윗은 꿀잠을 자고 있습니까? 다윗 안에 놀라운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축복입니다.
저는 다윗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말 아주 조금은 압니다. 다윗이 당한 환난에 비하면 저의 인생에서 환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고백을 조금이라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원리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깊은 잠을 자지 못합니다. 누워는 있었는데 잠을 잔건지 안 잔건지 잘 모릅니다.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마음은 그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단잠을 잡니다. 방패 되시는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영광이 되시는 주님께서 수치의 자리에서 일으키셔서 영광을 주실 것이고, 머리를 드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긴 후로 제가 누리는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당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잠을 잘 잡니다. 단잠을 잡니다. 단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있기는 합니다.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신 날은 단잠을 못잡니다. 그것 외에는 꿀잠을 잡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의 방패가 되시고, 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의 영광이 되시고, 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축복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속이 상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자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때로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잠을 못자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많은 사람들의 저주 속에서도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라고 고백합니다.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50일 기도학교를 통해 불면증이 치유되고 단잠, 꿀잠을 자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한 다윗은 근심 걱정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공격한다고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적들이 공격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를 에워싸 공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자는 강하고 담대합니다.
7절,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원수의 뺨을 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욕하고 저주했던 자가 도리어 모욕을 당하고 저주를 당하도록 기도합니다. 악인의 이를 꺾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도록 악인의 심판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대로 원수의 뺨을 치셨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습니다. 다윗을 모든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셨고, 다윗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고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다윗은 단잠을 잡니다. 기도하는 다윗은 천만인이 에워싸 진을 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여전히 압살롬의 위협가운데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놀라운 평안을 누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합시다. 다윗처럼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그러면 단잠을 잡니다. 다윗에게 임했던 평안과 강하고 담대함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축복을 누립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