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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회재 이언적의 경주 독락당(慶州 獨樂堂)
이장희 추천 0 조회 310 17.09.28 18: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 독락당(慶州 獨樂堂)

종   목 : 보물 제413

지정일 : 1964.11.14

 

답사일자 : 2015년 8월 23일(일)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옥산서원은 쉽게 볼수 있으나 현재 회재선생의 후손이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독락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하나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집 주인의 승락을 사전에 받아야 한다.

그 방법중에 하나는 이곳 옥산리를 '세심마을( http://sesim.go2vil.org)'이라 하여 테마체험,예절교육 등 여러가지 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 일을 맡고 있는 위원장에게 연락을 취하면 될 수도 있다.

보고자 하는 사람의 호기심과 관리하는 사람(거주하는 종손)의 사생활이 충돌하는 곳이다. 쉽게 열어두니 문화재가 훼손되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사전 협의하여 서로의 입장이 배려되거나 순수한 문화재관리인이 상주하여 마찰로 인한 나쁜 인식이 서로 없는 원만한 방법을 찾아야 될 듯하다.

 

독락(獨樂)’이라 함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천진(天眞) 본체(本體)를 홀로 즐긴다는 의미로 이 집은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봉사(奉祀)하고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이다.

조선 중종 11(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으로 서쪽에 정면 1,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의 정면 3, 측면 2칸에는 전부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대청으로 하였다.

대청의 마루 가운데에는 온돌방의 중앙기둥처럼 네모진 기둥이 서 있고 주선(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이곳도 서쪽의 온돌방처럼 벽체를 만들고 방으로 꾸몄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간살은 오량(五樑)으로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양봉형(樑奉形)의 대공에 소로를 짜넣어 종보를 받치고 있다.

종보 위에는 다시 양봉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는데, 측면 벽체 위에서는 단순한 동자기둥으로 대공을 만들어 종도리를 받치며 직선재로 된 소슬합장을 두었음이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 사적 제109)에서의 모습과 흡사하다.

온돌방에는 띠살 창호를 달았으나, 대청에는 정면 3칸을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하였고, 뒷면과 측면에는 띠살 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독락당(獨樂堂)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고, 옥산정사(玉山精舍)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다.

 

 

▲독락당 입구

 

 

 

▲경청재(敬淸齋)

 

 

▲들어가면서 우측에 별채

 

독락당(獨樂堂)

 

 

독락당(獨樂堂)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고, 옥산정사(玉山精舍)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

 

 

 

 

 

 

▲독락당의 뒷 모습

 

▲해동명적(海東名蹟)이 보관되어 있다는 안내문과 뒤의 유물관. 출입이 불가능하다.

 

해동명적(海東名蹟, 보물 제526-1)

이 책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申公濟)가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탁본이라 하더라도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비문에 나타나지 않은 필적을 많이 수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자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의 효심과 서얼차별과의 싸움

 

7년간 유배지를 따라와 여러 시중을 들며 관서문답이란 책까지 쓸 수 있게 해준 아들 이전인, 그러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라 할 수 없고 이전인은 회재를 대감이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검을 고향 경주까지 운구하고 시묘살이까지 한 친자이지만 서자 이전인에게 회재는 파격적으로 재산을 남겨주기 위해 먼저 둘째 부인에게 재산을 주고 아들에게도 자신이 일군 재산인 독락당을 물려줄 뜻을 양자 이응인과 정실부인에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러한 회재의 뜻이 조선사회의 서얼차별 철폐의 시작이 된다 

 

옥산서원을 건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이전인과 그 후손들은 옥산서원의 실질적인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옥산서원에 출입조차 허락받을 수 없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서얼배격은 조선 중후기 강력한 사회불만 세력으로 서얼세력을 급부상시키기도 했다.

조선 서얼차별의 시작은 태종 때 정도전을 배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드라마 뿌나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정도전은 서자 출신이었고 그의 반대편에서 태종의 사람들이었던 신하들은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막는 법을 만들고 이를 시행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과 사대부는 끊임없이 대립했다. 태종은 본인의 뜻으로 서얼차대를 본격화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금은 서자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허용하고자 했다.

사대부들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노론에 밀려 중앙권력에서 밀리게 되자 지역에서의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얼들을 강하게 배척했다. 한편 선조 16년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고 파격 제안을 했다.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했지만 이것은 곧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서얼들은 왕이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할 때 주로 상소를 올리며 힘을 합쳤다. 

 

서얼차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는 양반이라는 새롭게 진입하는 사람들을 조절함으로써 양반의 권리와 권위를 보장하기 위한 꼼수였으나 정작 서얼 출신들은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차별 속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그 서얼들의 설움과 고통이 잘 드러난 것이 칠서의 난이고 이런 서얼차별의 문제에 공감하는 주류들은 허균이나 이이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임진왜란 후 많은 관리들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새로 조정에서 일할 양반들이 부족하자 서얼을 일정의 댓가를 받고 등용하며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제안하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서얼의 과거시험이 허통된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 등에 의해 관리들이 모자라자 서얼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댓가로 쌀 등을 받았다 

 

이전인의 아들 이준은 쌀 1600말을 내고 관직에 나아갈 허통을 얻는다. 선조 3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43년에는 숭정대부 청도군수직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 진정으로 양반다운 양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관직의 길이 열리고 이를 국왕의 명으로 보장받은 것만으로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사회 당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역의 삼소 즉 유향소, 향교, 서원 등에 모두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문과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고 난 후에도 각 지역의 양반들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삼소에 그들을 들이는 데 반대하며 극심한 삼소 서얼허통의 분쟁이 일어난다 

 

이전인 일가도 서자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하여 옥산서원의 출입을 막는 양반세력과 끝없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자신은 모르더라도 적어도 자식들은 서얼의 굴레를 벗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 회재의 학문 전파와 보급에 열을 올렸고 그 때문에 만든 옥산서원을 허무하게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어렵고 승산없어 보이는 싸움을 해서 마침내 이겨냈다. 이 승리는 남인을 견제하려 했던 노론 세력이 적극적으로 남인세력을 와해시키는데 영남학파의 서얼출신 유림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략적 판단에 의한 거짓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전인 기적비각은 이렇게 승산없는 싸움을 이겨내고 후손들에게 서얼차별의 굴레를 벗게 해준 이전인의 은공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라 할 수 있으며 서자의 신분이면서도 결국 아버지 이언적의 명예를 지키고 옥산서원을 통해 아버지의 학문을 널리 알리고 계승시켜 나간 이전인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자 이전인은 옥산서원에 서얼허통에 성공하고 아버지 회재의 명예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자신도 이렇게 서원에 배향된다. 서자는 서원출입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서자를 배향하는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진암(養眞庵)

이는 암자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실제 회재선생과 친하게 지낸 정혜사의 스님에게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머물게 하려는 배려에서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계정의 한쪽 작은방 위에는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이 퇴계선생의 글씨다.

 

 

 

 ▲계정(溪亭)

독락당 뒤 개울을 끼고 자리하고 있는 계정(溪亭)은 독락당과는 또 다른 담백한 풍모를 연출한다. 계곡을 향해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작은 집이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것만 같은 낮은 천장과 처마를 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건물의 구성이 보여주는 질박한 활달함과 여유가 찾은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계정에는 계정(溪亭)이라는 현판 이외에도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둘 다 한석봉의 글씨다. 특히 인지헌의 인()과 지()는 회재선생의 구인(求仁)과 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T자형으로 이어져 있는 양진암과 계정

 

▲독락당의 중국주엽나무(일명 : 조각자나무)

천연기념물 제115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인 그와 깊은 인연을 맺는 나무가 있다. 중종 27(1532) 동료 문신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쫓겨나 잠시 낙향할 때다. 지금의 옥산서원을 따라 흐르는 옥계의 안쪽에다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건물 뒤뜰에는 특별한 나무 몇 그루를 심는다. 그 중에서 한 그루가 독락당 뒷담, 새로 지은 어서각(御書閣) 앞에서 470년 풍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나무는 밑동부터 썩어버려 우레탄 수지로 뒤집어쓰고, 겨우 생명을 부지한 줄기 셋을 간신히 비끄러매고 있다.

독락당 울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 6.5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4.6m에 이르며,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7.9m 남북이 5.1m에 달하는 거목이다. 특별히 이 나무를 심은 데는 이유가 있다. 거의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만큼 널리 쓰이는 약나무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50대 초반에 몸이 아파 벼슬을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고, 벼슬살이 동안에도 병든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낙향할 때는 41살의 장년이었지만 약에 널리 쓰이는 중국주엽나무를 찾아 심을 만큼 건강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아울러 학문에 정진하고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한 덕분에 칩거 5년 만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친다.

중국주엽나무를 어디서 구해다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자신은 중국에 다녀온 적이 없으니 중국 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직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민간에 널리 심겨진 것을 옮겨 올 수도 있다. 잠시 나무의 과거를 들춰보면, 고려 중엽 경기가사 한림별곡 8장 그네 뛰는 모습을 그린 글에 주엽나무가 등장한다.

호두나무, 조협()나무에 붉은 실로 붉은 그네를 매옵니다/그네를 당기시라, 밀어시라 정 소년이여하였다. 조협나무가 바로 주엽나무다. 우리나라에도 토종 주엽나무가 있으나 집 가까이 호두나무와 같이 일부러 심었다면 중국주엽나무로 보아야 될 터이다. 민간 약나무로 벌써 고려 때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여러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잎사귀는 아카시아나무 잎 생기듯 하였다. 나무껍질은 아름드리가 되어도 매끄러워 나무를 보는 느낌은 평안하다. 그러나 줄기 아무데서나 갑자기 솟아오른 이 나무의 가시를 만나면 그 지독한 험상궂음에 크게 놀란다. 한번 내민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가시 자체가 두 번 세 번 가지치기를 한다. 이 가시가 조각자라 하여 옛 사람들의 명약이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부스럼을 터지게 하고 이미 터진 때에는 약 기운이 스며들게 하여 모든 악창을 낫게 하고 문둥병에도 좋은 약이 된다고 한다. 조협이라는 열매 역시 뼈마디를 잘 쓰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하며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다.

세종 때 명의들이 모여 저술한 향약집성방을 찾아보니, 주엽나무 가시와 열매를 약제로 한 처방전이 100여가지에 이른다. 중국주엽나무의 정식이름은 조각자(角刺)나무이고 열매가 꼬이지 않고 똑바르다. 반면에 우리 주엽나무는 다른 이름이 쥐엄나무이고 열매가 꽈배기처럼 꼬여 있다.

 

이언적은 을사사화에 뒤이어 벌어진 양재역벽서사건(1547)’에 연루되어 쉰일곱의 나이에 북한 자강도 강계로 유배되어 버린다. 강계 땅에서 6년을 더 살았지만 그리던 독락당도 중국주엽나무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63세로 세상을 뜬다 

 

 

▲살창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살창이 있어 앉은 곳에 따라서 계류가 달리 보이게 된다.

 

밖에 있는 관어대쪽에서 본 계정. 인지헌과 양진암 현판이 보인다.

 

 

 

 

계정에서 볼 수 있는 계곡의 바위 다섯을 골라 오대(五臺)라고 이름 붙였다.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관조하는 관어대(觀魚臺)

돌아감을 노래하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맑게 하는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깨끗이 하는 세심대(洗心臺)가 그것이다. 

 

 

 

가사 독락당(獨樂堂)’

조선 중기에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로 노계집(蘆溪集) 3에 실려 있다. 3음보 혹은 4음보를 1행으로 헤아려 총 123행으로, 박인로가 지은 가사 가운데 최장편이다. 주제는 작자가 이언적(李彦迪)의 유적인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을 찾아가 그를 사모하는 심회와 주변 경치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10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단락에서는 임진왜란을 당해 무부(武夫)로서 여가 없이 분주하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오랜만에 독락당을 찾으니 산봉우리는 빼어나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武夷山)과 같고, 흐르는 물은 감돌아 정이(程?)가 살던 이천(伊川)과 같다고 하였다.

 

둘째 단락에서는 신라 천년 고려 오백 년 사이에도 성현군자는 많았는데, 이러한 명승지를 하늘이 감추어서 이언적에게 준 것은 물각유주(物各有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의 유한한 경치와,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잠겨 생각하고 깨닫던 이언적의 모습을 안증(顔曾)과 유하(游夏)를 좌우에 거느린 공자에 비유하였다.

 

넷째 단락에서는 이황(李滉)의 친필이 담긴 양진암(養眞庵)과 관어대(觀魚臺) 반석(盤石) 위에 남은 이언적의 지팡이와 신발 자국, 손수 심은 큰 소나무를 대하니 마치 지란실(芝蘭室)에 들어간 듯하다고 읊었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병풍 같은 층암절벽, 하늘과 구름이 비친 백척징담(百尺澄潭), 저녁 안개에 잠긴 청계조기(淸溪釣磯)의 묘사를 통해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던 이언적의 자취를 더듬었다.

 

여섯째 단락에서는 영귀대(詠歸臺)의 아름다운 경치에 풍영이귀(風詠而歸)한 증석(曾晳)의 옛일을 생각하고, 자연(紫烟) 비낀 폭포를 보며 여산(廬山)에 비기고, 징심대(澄心臺) 맑은 물에 가슴속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탁영대(濯纓臺)를 보고는 속세에서 부귀공명을 어지럽게 다투는 속인들을 생각하고 개탄하고 있다.

 

일곱째 단락에서는 사자암(獅子巖)에 올라 도덕산(道德山)을 바라보며, 이언적의 덕망이 구슬이 쌓여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고 추앙하고, 이백(李白)의 시를 빌려 이언적을 봉()에 비겨 봉새 날아간 빈 산에 두견새만 저녁에 운다고 하여, 그가 가고 없는 쓸쓸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선생의 자취를 천태산(天台山)과 무릉도원에 비겨 신선으로 받들면서 해질 무렵까지 돌아갈 줄 모르는 간절한 사모의 정을 그렸다.

 

여덟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에 다시 올라 이언적의 풍채와 덕행을 다시금 추앙하고 독서 소리가 이어졌던 서원의 번성함을 읊었다. 동방의 군자인 그가 직설(稷契)과 같은 충성으로 당우(唐虞 : 요순시대)의 성시를 이루려 했는데 불행히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가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적소에서도 끼친 감화가 깊어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 사당까지 세우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아홉째 단락에서는 구인당(求仁堂)에 올라가 체인묘(?仁廟)의 엄숙함을 보고 동방의 문물을 한((()에 비유, 주자가 살던 자양운곡(紫陽雲谷)이 바로 여기라고 감탄하였다. 세심대(洗心臺) 물에는 덕택(德澤)이 지금도 이어 흐르는 듯하고, 용추(龍湫) 깊은 곳에는 신물(神物)조차 잠겨 있는 듯, 그의 무궁한 덕화력(德化力)은 기이한 하늘의 조화와 함께 어울린 듯하다는 느낌을 말하였다.

달포를 머물면서 그의 문집을 살펴보고, 그것이 모두 성현의 말이어서 일월같이 밝으므로 밤길에 촛불 잡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끝으로 열 번째 단락에서는 이언적의 유훈(遺訓)을 가슴깊이 새겨 그를 오래도록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추앙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박인로의 가사에는 성현의 치세에 대한 동경이 나타난 것과, 현실과 이상이 합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작자의 고민이 함께 표출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선현을 사모하고 추앙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도 옥산서원처럼 들어가지 못하는 유물관 옆모습

 

 

[출처 : 검색조합인용, 사진-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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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2년전에 독락당 종택에 하룻밤 잘 기회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날 밤에 종손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여 답사를 못했습니다.언제 기회가 되면 1박2일로 답사를 해볼려고 합니다.ㅎ
    이장희 선생님이 한번 추진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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