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마다 신앙의 숨결이
- 수리치골의 정확한 위치와 주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수리치골은 지금의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인 것으로 나타나 있고 특별히 다른 정확한 고증이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이것이 받아 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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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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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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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 성심 수도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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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 수리치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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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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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다블뤼 안 주교가 쓴 편지에서는 성모 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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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날에 성모 성심회의 교우들이 조선말로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고 상쾌하여,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나라말로 성모를 찬미하고 죄인을 회두케 하시는 은혜를 갈구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여, 많은 지방에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과 같이 우리 지방에도 베풀어 주실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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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수리치골에는 미리내 천주 성삼 수도회의 수련원이 설치돼 있다. 수리치골을 찾는 이들은 32번 국도에서 갈라져 약 3.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이정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옛 교우촌 자리에는 게쎄마니동산이 꾸며져 있고 여기에는 야외 제대가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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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수리치골, 둠벙이, 진밭, 황모실 -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
-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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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이 회의 설립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교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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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게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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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 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 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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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치골은 공주 - 유구 간 국도의 중간 지점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만 하며, 국사봉을 뒤로하고 있는 막다른 골짜기의 궁벽한 곳이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가 1984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뒤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수도회에서는 이 곳에 '성모 성심 수도회 분원'을 건립하였다. 한편 국사봉 너머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교우촌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수리치골에서 직접 갈 수가 없고, 유구 쪽에서 들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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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 성심회를 창립할 무렵에 다블뤼 신부는 주로 둠벙이를 거처로 삼고 있었는데, 1854년에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린 쟝수(Jansou, 楊) 신부가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쟝수 신부는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선종하여 그 곳에 안장되었다. 또 그 무렵에는 '진밭' 교우촌(공주군 사곡면 신영리)도 공소로 설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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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년 이래 둠벙이에 새로 입국한 죠안느(Joanne, 吳) 신부가 거처하면서 이 곳은 본당 중심지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병으로 1863년 4월 13일 둠벙이 교우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때마침 진밭에 거처하던 리델 신부는 그에게 성사를 주고 난 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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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축일 전날 죠안느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 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 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리델 신부의 1863년 9월 9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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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죠안느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마을의 동족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 곳 산 중턱에 남아 있는데, 이름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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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둠벙이 교우촌과 같이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승격되고, 그 곳에 거처하던 선교사 2명이 선종한 또 하나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신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합덕에서 덕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 마을 '황모실'(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이 그 곳이다. 이곳에서는 1858년에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1863년에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30일 두 선교사의 유해가 합덕 성당 경내로 이장되면서 황모실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적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