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도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릴 수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얼마 전에 보고 돌아왔다. 싸늘한 삼베에 돌돌 묶여져 그것도 앙상한 뼈 밖에 남지 않는 모습을......
8년 전 시청에서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온다고 아버지께서 태어나 60년을 넘게 살던 그 고향을 등지고 떠나셔야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면서 갈등과 보상 문제로 친척들과의 마음고생을 하시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60년을 넘게 농사를 지으시던 그 밭과 논을 바라볼 수 있는 복숭아 밭 옆 양지 바른 언덕위에 묘를 써 달라고 하셔서 우리 가족은 돌아가신 할머니 묘 옆에 아버지를 안장시켰다. 하지만 돌아가신지 4년이 지나 아버지께서 묻힌 그 묘 터에 다시 공장이 들어선다고 이장을 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논과 밭을 다 내어주고도 모자라서 아버지께서 누워계시던 그 묘 터까지 이제는 내 놓으라고 하니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밤잠을 못 이루고 계셨다.
‘자식이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더니만 8형제인 우리 형제는 서로의 의견도 분부하다. 어떤 형제는 화장을 원하는 형제, 또 다른 형제들은 이장을 원하는 형제다.
화장을 원하는 형제는 다시 묘를 옮겨도 다 썩어진 몸을 화장하면 깨끗하다고 하고 또 이장을 원하는 형제는 묘 이장 잘못하면 가족들이 원한을 산다는 전래를 전해 들어서이다. 이장을 원하는 형제는 그래도 생전에 아버지께서 화장보다 땅에 묻혀있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난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자식이 되었다. 그저 중립을 지키려는 속셈이었다.
한 동안 큰 오빠는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돌멩이로 때리며 따라 온다고 하여 이장을 하자고 바로 어머니께 연락을 하셨다. 아직도 꿈속에 나타나시는 아버지. 아무리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지만 저 세상에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신가보다. 하지만 이제 이장을 하기로 어머니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윤달인 4월 6일에 이장을 하기로 하였다고 우리 형제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문제로 형제들은 또 다시 옥신각신 하였고 어머니께서도 갈등을 겪고 계셨다. 그래서 다시 이장 날짜를 연기 했다. 그 동안 난 서울에서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우리 시아버님하고 똑 같은 연세이신 아버지께서 군대를 다녀오셨는지 궁금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시아버님은 6.25 전쟁 때 참전 용사라서 돌아가시면 참전용사묘지에 안장이 되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떠올라서 시골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아버지 군대 다녀오셨어요?"
"군대 갔다 왔지. 그런데 그것 왜 묻노?"
"네, 알아 볼 것이 있어서요."
난 궁금한 것이 더 있어서 많은 것을 질문하였다. 전쟁 때에 태어난 오빠를 생각하면서 아버지께서 군대 갔을 때 오빠가 태어났었는지? 아니면 오빠가 태어나고 군대에 갔는지? 얼마 동안 피난을 갔다가 다시 와서 군대를 갔는지 등등 말이다.
내 기억에는 아버지가 살았을 때 군대 다녀온 얘기를 별로 한 기억이 없었고 피난 다녔다는 얘기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첫 아이가 만삭이 되어서 전쟁이 터졌는데 아버지는 그 때 17살이었다. 그 나이에 그냥 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아서 저 멀리 피난을 하셨다. 그것도 외아들이라서 할머니와 만삭이신 어머니를 두고 멀리 내려가셨던 것이다.
우리 시아버님은 시골에서 할아버님을 모시다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군대에 입대하여 3년을 마치고 돌아 오셨다. 정말 다행 중 다행이었다. 그 때 전쟁에 함께 참전한 친구들은 거의 죽고 열명도 채 돌아오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로 우리 시아버님은 대단한 용사이시다. 그러니 참전 용사묘지에 안장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월요일 동사무소 직원이 출근하자마자 아버지 서류를 떼어 보았더니 정말로 전쟁이 끝난 다음에 군대를 다녀오셨다. 어머니 말씀으로도 “아마도 이제 전쟁이 끝나서 괜찮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입대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나의 실마리를 잡고 싶어서 서류를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전쟁이 끝나고 2달 후인 9월에 아버지께서는 군대에 입대하셨다.
‘왜, 아버지께서는 조금만 더 빨리 군대를 다녀왔으면 전쟁 용사묘지라도 갈 수 있을텐데......’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를 다른 좋은 산에 옮겨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이래저래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후회 아닌 후회를 잠시하고 다시 아버지의 묘 이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바꿨다. 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하여 아버지 묘 이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을 믿고 계신 어머니께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다가 너무나 답답하여 큰언니와 철학관에 가서 물어보셨더니 아버지께서 도포를 입고 울고 계신다고 이장을 하라고 하셨다. 아마도 믿거나 말거나 그 말을 들으면 인간인 이상 감정이 북받쳐 올 것이다.
그렇다. 아직 우리나라는 화장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사람이 죽는 것도 서러운데 다시 불에 태워서 또 죽인다는 생각에서 싫으신 게다.
얼마 전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가 잘 만들어 졌다고 해서 진달래 만발한 북한산을 다녀온 후 시간이 남아 아들이랑 오후에 영화를 보는데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났다.
6.25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인데 1950년 전쟁조차 삼킬 수 없었던 두 형제 이야기였다.
6월의 어느 날 한 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호외가 배포되고 평화롭던 서울은 순식간에 비명소리와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 수많은 인파와 함께 피난길에 오르는 ‘진태’와 ‘영신’의 가족. 그러나 피난 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대구역사에서 ‘진태’와 ‘진석’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군용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 때부터 행복한 순간은 사라지고 서로가 살아야겠다는 신념아래 한 민족인 남과 북의 싸움에 참가 한다.
‘왜, 저렇게 한 민족이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할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다. 하루라도 먼저 전쟁에 참가했다가 불행하게 죽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아니, 시체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만약 우리 아버지께서도 6.25전쟁 때 군대에 가서 죽어서 돌아왔다면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많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나서 1953년 7월 27일에 끝났다고 한다. 너무나 길고 긴 고통의 순간들을 보냈을 조상들에 대해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우리 아버지 군대 관련된 서류를 조사한 후 전쟁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시절엔 아마 나라도 도망을 쳤을 것이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나라를 구하는 것 보다 죽음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쉽게 말을 할 수 있지만 전쟁을 겪고 몸에 총알이 박힌 채 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을 마음속에 담아서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우리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 선뜻 나갈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고향땅에 고향 흙냄새를 맡으면서 편안히 누울 쉼터를 마련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다시 회의를 거쳐 이장 날짜를 정하고 고향 선산에 아버지를 이장하기로 결심하였다. 전에 있던 묘에서 오리정도 떨어진 그곳 양지 바른 곳에 할머니와 함께 이장을 했다.
고향을 떠나시기 싫어서 매일 그 고향에 가서 농사를 조금씩 지으시던 아버지. 이제 그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나라의 발전을 위해 아버지께서 누워계시던 자리를 나라에 내 놓고 떠나셨다. 아버지 옆에 계시던 할머니도 함께 말이다.
전쟁 때에는 참전을 못했지만 지금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서 따뜻하고 편안한 그 묘 자리를 나라에 주고 떠나셨다. 영원히......
첫댓글 이상한 그림이 떠서 바탕 화면을 지우니 이제 괜찮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