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 떠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귀향한 타락한 동생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저 기다리시고 환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묘사된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사랑,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사랑,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그런데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배은망덕, 배신의 삶, 방황과 타락으로 얼룩진 지난 삶 앞에 눈을 꼭 감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더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우리를 당신 품에 꼭 끌어 안으시며, ‘잘왔다. 잘왔어!’ 라고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품에 안으신 아버지는 혼잣말로 계속 되내이십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거라. 네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도 말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구나!”
그런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있습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신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그분께로 거슬로 올라가는 작업, 바로 회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님)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비를 선포하고 자비를 살 때만이 그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악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행동이 아니라 욕구에 집중하라. 그게 나다!
‘헬과 마리’라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헬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그런 헬이 어느 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를 만납니다.
가슴 깊이 찾아든 사랑의 열정으로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헬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헬에게 가장 온화한 사람의 얼굴 가면을 선물하십니다.
헬은 그 가면을 쓰고 다시 마리를 찾아가 청혼합니다. 마리는 결혼에 응합니다.
결혼하고서도 헬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삽니다.
헬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마리를 보살폈고 마리는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 마리의 행복이 헬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행복을 질투한 친구가 헬의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그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도 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헬의 험상궂은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가면과 같은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도 가면이 있는 것을 안 헬의 친구는 그것을 벗어봅니다.
그런데 헬의 이전 얼굴이 친구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비어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책의 내용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행위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정확히는 ‘욕구’로 드러납니다.
본성이 욕구입니다.
사랑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험상궂어도 속에는 사랑의 본모습이 있고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바라는 것이 험악하면 그 사람의 본 얼굴은 험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욕구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만 의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속은 음탕한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었고
화나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은 죄인이지만 속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세리와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의 형은 아버지 밑에서 죄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온갖 죄를 짓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죄만 짓고 온 놈을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죄는 이것입니다.
동생이 지은 죄를 은근히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흥청대었습니다.
이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도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욕구로는 이미 죄인이지만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니 의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 동생은 이제야 아버지 밑에서 죄 안 짓고 형처럼 일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남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화가 나면 나도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한 본당을 떠나기 직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감사인사를 왔습니다.
형제님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1년 전에 상담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1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지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자매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전엔 남편이 미워서 죽겠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아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불도 깔아주며 잘 주무시고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죄를 지어본 우리들이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이 행복하겠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안다면 그 사람의 가면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떻게 마음먹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노인의 사망 시기를 연구한 결과, 생일 되기 전에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가 생일이 지나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왜 생일 전후에 노인의 사망률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의학계의 거물 한 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훈장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정식으로 수여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병상에서 훈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해서 몇 년을 더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며 온갖 불평불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들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들이십니다.
큰아들의 모습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위한 잔치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하였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 즐기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바꿔 얼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다(이드리스 샤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31)
큰 아들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네.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며
때로는
남들이 못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척척 해 내기도 하지만
남들이
자기보다 인정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질투하며 되질하는
나약한 우리들의 모습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주님의 사랑스런 시선을 피하거나 이별한 채
오랜 시간 해어져 있었던 경험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를 잃고 살아가면 정상적인 살을 살기어렵듯 우리 역시도 주님을 등진 채 세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피폐해집니다. 영적인 메마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저는 고해성사나 면담에서
오랜기간 냉담을 하다
다시 성당에 나오셔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교우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려고 노력하는 교우들을 보면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오리들 마냥 귀엽게 보입니다.
그게 가능한건 둘째 아들과 같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내 생애의 전부이고 나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진리의 영이신 그분을
말씀안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깨어있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 32)
다시 살아나는
축제이며
잃었다가
되찾는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삶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일상을
다시 만나는
사랑의
사순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절실히
우리 삶에서
깨닫습니다.
떠나보내는 일도
맞아들이는 일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간절하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이
돌아가는
우리의
길을 만듭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기에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사람은
기다림과
사랑으로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자아가
무너져야
돌아갈 곳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고귀한
사랑의 관계를
다시 뜨겁게
체험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어느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반겨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회개는
우리 모두의
축제가 됩니다.
새로워지는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의 여정을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림과
돌아감 사이에
참된 만남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되찾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회개가
참된
축제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