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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묵상글 ( 연중 제17주일. - 소용없는 것을 소중히 쓰시는. 등 )
** 20:45. 키엣 대주교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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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소용없는 것을 소중히 쓰시는
빵의 기적 얘기는 네 복음에 다 나오는 얘깁니다.
그런데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조금 더 다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역할을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가 특별히 거명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안드레아 사도의 언급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등장시키고
안드레아 사도는 다른 곳에서처럼 사람을 주님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복음 다른 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시키지요.
그렇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반신반의하는 거 같습니다.
이 작은 아이의 이 적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이 적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묻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으면 아예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자기 생각에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주님께 가면 어떤 가능성과 소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나
소용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아이를 데려온 것입니다.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처럼 반신반의의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반신반의의 우리 믿음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 것입니다.
반신반의란 적어도 완전 불신보다는 반만큼 믿은 것이기 때문이고,
인간에게는 완전 불신이지만 주님께는 믿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보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뭣이든 소용이 있기에 하느님께는 믿음을 둘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창조하실 수 있으시기에
주님께서는 안드레아와 아이를 빵의 기적의 협력자와 도구로 삼으시고,
인간의 눈에는 소용없을 그 적은 빵과 고기를 아주 소중하게 쓰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소용없을 것이 하느님께는 소용이 있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아무것 없이 창조하실 수 있고
인간의 아무 도움 없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나든 남이든 인간의 협력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기 아이와 엄마가 있습니다.
혼자서 요리를 다 할 수 있는데
자녀에게 요리를 가르치려고 이것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엄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사랑을
아이가 배우고 사랑 실천의 기쁨을 아이가 알게 되도록
혼자서 해도 되는데 아이와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데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가진 것 없어도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믿게 하시기보다
가진 것 없어도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당신 사랑을 더 느끼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진 것 없고 소용없는 저희를 소중하다고 하시고
당신 사랑과 은총의 도구와 협력자로 쓰시는 주님, 오늘 특별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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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언젠가 뉴스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2020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살던 70대 노인이 자기 반려견과 함께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악어가 나타나 반려견을 물고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노인은 본능적으로 호숫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입을 벌려서 반려견을 구해냈습니다.
사실 악어의 치악력, 치아의 악력 즉 무는 힘은 엄청납니다. 사자, 호랑이, 곰, 하마 등을 제치고 모든 동물 중에서 제일 강력합니다. 그런데 팔 힘만으로 악어의 입을 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어떤 분일까요? 평소 몸 관리를 잘한 보디빌더일까요? 아니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저 강아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히려 도망가는 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 ‘사랑하는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자동차에 깔린 자녀를 보고서 자동차를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도 뉴스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랑의 힘이 별것 아닌가요?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인데도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영적으로는 충만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배고픔으로 힘든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보리 빵은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아주 싼 음식이었고, ‘물고기’로 번역된 그리스 말도 조그만 물고기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가엾이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주님의 사랑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을 통해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기에만 급급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활동을 우리의 사랑 없음으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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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부름받기를 기다리고 있다(쥘 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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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17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빵”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2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 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도데체가 ‘빵’을 주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 그도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 무능하면서도 전능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충만함을, 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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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기적을 낳는 사람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열왕기를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2열왕4,42-44). 믿음에 따르는 기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11,4-6)서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16,20)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당신의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복음을 보면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놓을 수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적어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많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모두를 전적으로 하늘에 맡기면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듯이 주님께서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가끔 로또복권 구매하시나요? 언젠가 40대의 젊은이는 1등에 당첨이 되어 상금이 23억 원이나 되었는데 세금을 제외하고 18억 원을 수령했습니다. 그런데 흥청망청 다 쓰고 5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로또 당첨자 3명 중 1명은 5년 내 파산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알콜 중독, 마약, 도박 등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을 사는 이가 더 많습니다. 저도 로또복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당첨이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헛배가 부르면 안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9,6). 하고 말합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 하고 사랑을 담아 내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성체할 때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 삶의 터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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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당이나, 사찰에 다니는 것이고, 미신은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변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변화 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합니다. 커피, 콜라, 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돈을 먹고,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판기를 흔들기도 하고,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표징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는 걸까요? 그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그분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 그분이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것, 그분이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믿음이 아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빵을 많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닙니다. 사회복지와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회복지는 공동선의 실현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고백한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계심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나의 믿음이 ‘무엇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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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멀쩡한 사람도 있지만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면 그분이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손 한번 얹어서 병을 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그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고 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만나면 병이 낫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같이 있으면 먹을 것도 해결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으로 했습니다. 아마 저 같았어도 왕으로 삼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과 모든 행적은 그 이유를 지닙니다. 그 첫 번째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오늘의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두 번째 모습이 더 강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 분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빵 다섯 개과 물고기 두 마리는 5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있으나 마나 한 음식입니다. 오히려 싸움과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음식이 주님의 손에 들려져 축성되고 모든 이에게 나누어집니다.
지구에 수천억 만 명 중 예수님 한 사람은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예수님이 십자나무에 달려 축성되고 모든 이의 죄를 위해 죽습니다. 그 죽음으로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성체를 모실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비슷합니까? 이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자신들 곁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왕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홀로 축성되어 모든 이를 하늘나라로 이끈 그리스도, 우리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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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 앤 치킨
요즘은 건강을 위해 많은 것을 줄였습니다.
우선 기름진 음식을 줄였습니다.
여러 가지 기름진 음식이 있지만 특히 튀김류를 줄였습니다.
튀김에 관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튀김은 무엇을 튀겨도 맛있다. 그것이 고무신일지라도….’
그런데 지난 금요일 큰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치킨을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은 너무 외져서 배달이 잘되지 않습니다. 된다고 하더라도 배달료 포함 치킨 한 마리가 3만 원인 요즘은 쉽게 손이 안 가더라고요. 치킨은 더 이상 서민의 음식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마트에서 생닭을 샀습니다. 돌아와 재료를 잘 씻고 마늘을 주재료로 하는 치킨 옷을 만들었습니다. 물로 그전에 후추와 소금을 닭 전체에 잘 발라주었습니다. 그 후에 마늘 소스 옷을 더 발라주었습니다.
곱게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기다렸습니다. 180도에 40분 후 뒤집어서 190도에 20분…. 치킨이 되기를….
돌아오는 금요일~ 불금 ~ 수제 치킨 어떨까요? 도전해 보세요. 생각보다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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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키엣 대주교님.
자비로움의 실천
오늘 복음을 통해 자비로움의 실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깊은 동정심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동정과 연민은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없이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실천을 못하는 이유는 제 나름대로 많습니다. 부끄러워서,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등 마치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유를 들어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이 아닌 그들 모두가 당신의 자비의 기적에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지만 아이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아이가 기여한 작은 행동을 통해 큰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렇듯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의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과 은총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방관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절약이란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한 존중입니다.
사람들은 풍족할 때 쉽게 낭비합니다. 군중들은 조금 전까지도 배고픔에 허덕였지만 풍족해지자 먹고 남은 빵을 버리자 예수님께서 남은 조각을 모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절약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는 다른 사람들의 것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빈곤은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분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가진 자들의 낭비와 지나친 소비 때문입니다.
육체를 위한 양식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영적 빈곤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 함께 할 때만이 온전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나눔과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동정심이 관대한 마음으로 승화되어 이웃을 도와줄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의 실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온전한 삶은 주님께 먼저 다가가고, 주님 옆에서 영혼의 양식을 흠뻑 받을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저희를 일깨워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절약과 나눔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절약하고 어떤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 따뜻한 밥과 함께 영혼의 양식도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3.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떤 실천이 필요한 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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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성체성사적 삶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주소서.”(시편145,16)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던중 퍼뜩 떠오른 강론 주제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비단 가톨릭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세초 유럽의 혼란은 종말처럼 생각되었고 이어 유럽을 암흑의 혼돈에서 구한 것이 가톨릭교회요 성 베네딕도 아빠스를 사부로 모신 성 베네딕도 수도회였습니다.
오늘날은 중세초의 유럽처럼 전세계가 흡사 길과 희망을 잃은듯한 혼란한 시기같습니다. 이제는 성소자의 위기와 더불어 교회지도자 부족의 위기라는 극심한 인재난을 겪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망한 후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 처음부더 잘 성장되어야 좋은 목재와 같은 인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거목들 즐비한 심산유곡이 아니라 잡목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과연 디지털 문명, 인공지능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감이 듭니다. 다시 한번 가톨릭교회가 온 세계와 온 인류의 길과 희망이 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여기서 빛처럼 떠오르는 교회요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가톨릭교리서 1324)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온세계, 온인류의 공동자산이 된 성체성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희망과 길을, 중심과 의미를 잃고 혼란을 겪는 작금의 시기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가톡릭교회의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대한 답도 성체성사적 삶이 줍니다.
“하루를 마치며 되돌아 본다, ‘나는 오늘 나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다산>
바로 참 나로 깨어 살게 하는 것이, 참 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삶이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논어의 공자>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삶입니다.
지난 과학잡지 뉴턴 7월호 표지에 한 말마디가 마음에 꽂혔습니다. 이제부터 매달 나오는 과학잡지를 대강이라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제는 “곡선의 신비,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곡선이 넘쳐난다. 우주와 자연은 다양한 곡선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 한반도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곡선의 산능선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세계 어느 곳에도 이런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산능선들의 없습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이, 파스카 신비의 삶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곡선인생을 살게 합니다. 죽어 경직된 꼰대의 직선인생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유연하고 신축성 좋은, 살아 있어 부드러운 곡선인생입니다. 바로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 멋진 곡선인생의 모범이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바로 오늘은 현임 교황이 제정한 가톨릭교회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연중 제17주일 가톨릭교회의 양대신문의 1면 톱기사에 이어 몇면에 상세히 보도할 정도로 교회와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세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1인가구와 노인' 문제에 관한 시사적 주제에 내용이었습니다.
“1인 가구는 외롭다, 통계청 집계 2022년 1인 가구 34.5%, 혼밥 혼술은 쉬운데 홀로 신앙은 어렵네요! 1인 가구 급증하는데 교회 관심은 제자리, 1인 가구 위한 사목에도 관심가져야, 1인 가구는 말한다 ‘공동체가 필요해!”<가톨릭평화신문>
1인 가구 시대에 날로 절실해 지는 교회 공동체성이요,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성체성사적 삶임을 절감합니다. 교회공동체와 성체성사는 하나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공동체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을 능가할 선물은 없습니다. 현 혼란기에 인류에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이자 제사입니다. 또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시급히 부각되는 노인문제입니다.
“노인들 소외되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교회돼야, 노인 요양 사목 관심 필요하다”란 제하에 현실 문제가 가톨릭신문 몇면에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담화문도 구구절절 아름답고 참 깊었습니다. 지면상 인용하여 소개 드리지 못함이 유감입니다만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교회 문헌보다 아름답고 깊고, 풍요하고 정확한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양대 문제의 절박한 현실에 자랑스럽게도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이, 성체성사적 삶이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됩니다. 바로 이런 현실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가 성체성사적 삶에 빛나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 엘리사의 기적은 이의 전조일뿐 파스카 예수님의 성찬례에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첫째,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결정적인 요소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기쁨, 봉헌의 기적...,끝이 없습니다. 믿는 이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봉헌의 삶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빛나는 상징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봉헌에 이은 파스카 예순님의 결정적 봉헌이 짧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의하는 안드레아의 반응에 관계없이 봉헌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
흡사 착한목자 예수님께서 광야여정중 배고프고 고단한 5천여명 인생들에게 시편23장처럼 푸른 풀밭에 앉히시고 배불리 먹이십니다.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오아시스와 같은 쉼터, 샘터, 배움터가 되는 교회공동체 미사를 상징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눠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합니다.
둘째, 나눔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적이 나눔을 통해 실현됩니다. 어린 아이가 먹을 것 모두를 봉헌한 사실에 부끄러움과 동시에 감동한 군중들은, 이어 혼신을 다해 정성껏 하늘 축복을 갈망하며 이 모두를 손에 들고 감사로 봉헌하는 예수님께 감동하여, 각자 꼬불쳐 숨겨 둔 먹을 것을 모두 비워 나눕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하니 봉헌의 기적은 바로 나눔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분배정의가 실현되지 않아서입니다. 하느님 탓인 천재가 아니라 인간의 탓인 인재이나 바로 탐욕과 무지로 인한 독점과 자원의 남용 때문입니다. 사람죽이는 전쟁을 위한 무기생산으로 쓰이는 돈만 고루게 나눈다면 식량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나 언제 이럴때가 올런지요?
바로 성체성사적 삶이 이런 깨달음을 깊이하며 각자 나눔의 실천의 삶에 매진하게 합니다. 정말 가톨릭교회를 믿는 정치지도자들이 공정과 정의의 사람들이 되어 이런 나눔의 삶을 정책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베네딕도 16세의 교황의 결단에 버금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칭송도 자자합니다.
권력 독점이 아니라 때가 됐을 때 겸손이 권력을 내려놓고 아름답게 떠남으로 나눔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59세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 세대에게 횃불을 넘기는 것”이란 말도 멋졌습니다. 오랜만에 검은 먹장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을 본 느낌에 마음도 상쾌했습니다.
셋째, 일치의 삶입니다.
치유와 구원의 일치, 화해와 평화의 온전한 일치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에서 가능합니다. 봉헌의 삶, 나눔의 삶에 이은 순리적 현실입니다. 봉헌과 나눔의 사랑이 일치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멋진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으며,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은총이 이런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문 안에 계십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깊고 아름다운 진리 말씀입니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은혜로운 다양성의 아름다운 일치의 삶인지요! 이 모두를 깨달아 살게 해주는 성체성사적 삶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아름다운 성체성사적 삶을 충실히 잘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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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당신의 고운 눈길을
타고 건너와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보잘것없지만 귀한
벗들이 보고 있는
지치고 주린 벗들
차마 물릴 수 없는
따스하고 넉넉한 품을
늘 그렇게
곱게 간직하고 있는
당신 스스로를
그들은
보았답니다
고단한 삶의 여정에
빛바랜 꿈마저 사라진
퀭한 눈길로
무언가 있으려나
실낱같은 바램
애써 그러모아
다만 그분만을
뚫어지게
그들은
보지 않았답니다
그분의 고운 눈길이
머무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따스한 마음이
품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애틋한 부르심이
울리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한 아이가
보았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저 멀리 그러나 바로 곁에서
나를 보고 계시는
그분을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이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그분이 바라보시니 그분처럼
그분을 바라보니 그분처럼
어느덧 새로 피어난
스스로를
그분은
보셨답니다
한 아이가
그분처럼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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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장정만도 오천명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 주님께서 감사를 통해 드러나는 엄청난 기적의 효과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드린 이런 단순하고 소박한 감사의 행동은 많은 군중을 나눔과 사랑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미약한 어린아이의 보잘 것 없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있게 여기며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는 모습에 군중들은 나눔의 마음을 움직이 시작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감추어진 것들을 내놓아 다른이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미소해서 쓸모가 없고 도움이 않된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어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달아 기쁘게 나누기 시작합니다. 바로 감사가 낳은 엄청난 기적의 효과입니다.
참된 감사는 주는 것이고 나눔이고 사랑입니다. 감사란 기쁨을 돌려주는 행위이며 사랑을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를 통한 나눔의 기쁨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전달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감사할줄 모르는 것은 신앙의 샘과 자비의 이슬과 은총의 물줄기를 말려버리는 타오르는 바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거저 주는 것입니다. 감사는 의무이며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덕행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대신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이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 탁 털어놓고 사랑하지도, 탁 털어놓고 미워하지도 않는 영혼의 미온성은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상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표면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일상적으로 감사할 줄 모를 때 곧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으로 응답하고 자기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감사와 위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 그 자체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감사 할 때 마음 속 깊이 겸손이 자랍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고 힘든 상황에도 감사를 함은 참된 믿음과 희망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감사를 통한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성체에 순종한 스위스의 산
스위스-1873년
1973년은 그 경건한 아넨 신부가 깊은 믿음을 지난 채 로스산에 대해 성체를 들고 십자가를 그어 재난을 막았던 그 일요일 오후 이후로 꼭 100년 째가 되는 해이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는 그 산이 절대로 흔들련 적이 없었다.
1894년 그 신부의 후임자로 부임해 온 쉬뉘리거(Schnüriger) 신부가 슈타이 넨 마을에 있으면서 이 사건에 관해 문의를 한 뀐쯜레(Künzle) 신부에게 보낸 서신이 사건의 진실성을 확고히 입증해 주고 있다.
슈타이넨. 1894년 1월 12일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
1873년 겨울에 이 곳 슈타이넨 마을은 커다란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포근하고 비가 오는 날씨였는데 이 곳 뱃가 마을 뒷쪽에 있는 몇 가구에 갑자기 커다란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위험은 점차로 커졌고 마을 전체에 공포가 만연되었습니다. 이 산사태로 흘러내린 무자비한 바위덩이들이 시냇가로 굴러내렸고 그 시냇물이 마을 전체를 곧바로 역류하여 휩쓸어 버릴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위험이 계속해서 증대되고 공포가 만연하자 고(故) 아넨 신부님께서는 어느 일요일 오후에 축성된 성체를 모시고 그 위험한 곳까지 장엄한 행렬을 갖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때 이후로는 산사태의 위험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제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슈타이넨 마을에서의 그 산사태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이 사건에 관해서 그 곳 교구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문의를 했고 이들이 제가 방금 말씀드린 사실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쉬뉘리거 신부, 슈타이넨(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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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나기정 다니엘신부님.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요한 6,11)
가진 바를 모두 내어놓는 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가진 것을 내어놓아 결국 많은 이들이 풍성하게 될 수 있었던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천 명이지만 실제로는 그 곱절에 해당하는 숫자의 사람들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모였다.
빵이 필요한 시점이다. 빵을 구하기 위해 금전이 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먹을 것’을 가진 이를 찾는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 봐 걱정되어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한 소년이 자신이 가진 것을 밝히고 내어놓는다.
예수님은 이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쪼개고 또 쪼개고 나누어 준다. 모두 배불리 먹는다. 그리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정도로 남는다. 실상 주는 사람이 받는다. 그것도 흘러넘치도록 더 풍성하게 받는다. 주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서, 갖지 못해서 줄 수 없다고 뒷걸음질 칠 필요가 없다.
그냥 내어놓기만 하면 된다. 소년은 가진 것을 다 주고 열두 광주리나 되는 양식을 되받았다. 내어놓고 나눔은 그렇게 우리를 풍요롭게 만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 그것이 사랑이다.
[출처] 나기정 다니엘신부의 편지(13) - 연중 제17일 (7월 27일)|작성자 마르코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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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 이 세상 기적 아닌 게 어디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40727 20:48 ㅣNo.174547
성경에 기적 같은 이야기가 쾌나 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만 같다. 그러니 그 옛날 예수님 따르는 이들은 아마도 넋을 잃고 보았고, 그래서 그분을 죽기 살기로 따랐을 게다. 죽은 이 살린 것,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먹이신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닐까? 실제로 그런 일이 과연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여기지만, 복음이야기이기에 신앙인인 우리는 의당 믿어야만 한다. 예수님께는 분명 그런 능력 있음을. 그분께서는 소경 눈 뜨게 하셨고 불치병 낫게 하셨으며 죽은 이도 살리셨다. 빵 몇 개로 배불리 먹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 아닐 수도.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각자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이에게는 이것이 과연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고 이르셨다. 그리하여 자리 잡은 이들이, 아마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나누셨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다 모아라.”하고 이르셨다. 그랬더니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질서와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표징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다. 수많은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었는지, 우리가 흔히 알 듯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기적의 결과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에 모인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거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따랐던 그들에게는 단순히 빵으로 허기를 채운 게 아닌, 빵보다 더 ‘영적 충만함’으로 가득 차 함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일 게다. 우리 역시 어쩌면 그러한 기적을 좋아한다.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하면 은 나오는 그런 도깨비방망이 하나쯤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기적 속에서 산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먹기만 잘 먹는다. 공장을 다녀 본 적이 없으면서도 옷 잘 입고, 컴퓨터 놀이 잘 하고, 자동차타고 여행도 잘도 다닌다. 값도 치르지 않고 따뜻한 햇볕 즐기고, 시원한 바람 맞는다. 표사지 않고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기적 아닌 게 없다. 기적을 바라볼 눈이 필요하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배고픈 어른 혼자 먹어도 시원찮을 게다. 그런데 이것으로 오천 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나. 철없는 애가 건넨 보잘것없는 간식이 기적의 음식으로 바뀐 거다. 어떻게 그게? 예수님 손 거쳤기에. 그냥 지녔다면, 단 한 사람 음식으로 끝났을 텐데. 그분께서 하셨기에 기적으로 드러난 게다. 어찌 음식뿐이랴? 우리가 겪는 온갖 희로애락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주님이 행하시면, 어김없이 기적으로 바뀌게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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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인원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가져온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자루를 바라보며 엘리사의 시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도 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이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음식으로 빵의 기적을 이루셨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십자가 죽음으로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믿음과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영혼에 생명을 나누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미사 때 선포된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봉헌하고,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더불어 가족과 이웃에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빵”이 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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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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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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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 예언자는 기적의 예언자로 유명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만 14번인데, 기록되지 않은 기적들도 숱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과 자주 겹칩니다.
요르단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 죽은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 나병환자를 치유한 기적,
그리고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 등입니다.
기적하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낙마하고 눈이 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적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하십니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이 터치만 해도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습니다.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추락사한 청년 에우티코스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더 큰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는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주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환한 얼굴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직전 안드레아 사도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복음 6장 9절)
안드레아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 그분이 지니신 권능에 대한 신앙이나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분이나 탁월한 랍비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 기적으로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 살아나고 죽어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정상화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또 다른 누군가가 행할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이자 사도들인 우리 각자가 행할 기적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르신들과 조부모님들을 각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소홀했던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시대를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수록 더 큰 그릇, 더 큰 거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댈 생각 아예 접고, 더 당당하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의 삶도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들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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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오늘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2열왕 4,44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2열왕 4,43)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 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만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제1 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탈출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 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 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생각하고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에페소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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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려면 반응하라
오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많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인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감사로 아버지께 당신의 존재를 어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감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절로 가지게 된 것을 잃어가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믿는 우리는 다 잃어도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게 됩니다.
제가 몸에서 촌충이 나온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평택 장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약을 파는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니 약을 하나 먹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있으니 엉덩이가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팬티를 내려보라고 했는데 이내 길고 흰 촌충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발로 밟았는데 그 안에 새끼들이 수없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살며 피를 빨아먹고 있었는데도 왜 난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본래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존재에게 발각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본인이 잡아먹힙니다.
진화론은 이와 같습니다. 반응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파괴의 신입니다. 영화 ‘더 사일런스’(2019)에 외계 종족들이
쳐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눈은 없지만, 청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많이 본 박효진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형수들은 결국엔 똑같이 두려움에 떨거나 오줌을 지렸다고 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SBS 꼬꼬무 37화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린 한 엄마가 신생아 둘을 냉동실에 넣어 죽인 사건이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엄마는 임신을 거부하였고 태아들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길쭉하게 늘여 배가 많이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어머니 뱃속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두 영아를 살해하였습니다.
사실 한 몸에 기생충도 있을 수 있고 태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엄마가 주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는 하늘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믿는 하늘은 더 사일런스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아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미소 짓고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자기도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짜 소멸의 세상에서 생성의 세상으로 넘어오는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처럼 감사의 반응을 실현할 도구는 십일조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러나 소멸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버튼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에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부모는 그동안 한 모든 고생을 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140년이 지났는데도 몸이 전혀 썩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고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순종하여 그러한 생명을 지금도 얻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이런 현대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주님께 반응하는 이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려면 반응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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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1-7)”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1)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빵의 기적’을,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자비”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신 일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고,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거나 믿고 싶어서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뭔가 새로운 기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려고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군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군중이었는데, 전반적으로 ‘믿음의 방향’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심으로써 바로 그 ‘믿음의 방향’을 바로잡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실행하신 기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작정하셨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군중의 배고픔과는 상관없이.>
2)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말은 ‘어디에서’입니다.
‘어떻게’나 ‘무엇으로’ 라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에서’ 라고 물으신 것도 의도적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정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주님에게서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필립보 사도에게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야기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필립보, 베드로,
안드레아 사도는 모두 ‘벳사이다’ 출신으로서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고(요한 1,44),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벳사이다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세 사도가 뭔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저 군중을 모두 먹이는 것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빵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뒤의 51절에 있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는 말씀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으로’ 드러내신 ‘계시’이고, ‘빵의 기적’은 ‘표징으로’ 드러내신 ‘계시’입니다.>
3)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긴 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라는 말에서 ‘그 예언자’는 모세가 예고했던 예언자인데(신명 18,15), 당시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빵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자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약속했던 ‘그 예언자’ 라고, 즉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지도자’를 버리고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탓할 수만은 없지만, 예수님을
세속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의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주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생명의 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받아먹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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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거나 매우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화되기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폭력을 사랑으로 되갚는 이들 때문에 세상에 평화가 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이기심을 선의와 자비로 뒤덮는 이들 때문에 세상이 따뜻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믿게 된 제자들도 스승님이 먼저 시작하신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기꺼이 동참하였습니다. 세상에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모진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수많은 계란들 덕분에 이 땅 위에 교회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이라는 카펫이 깔린 꽃길을 마다하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수많은 계란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그런 계란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빵의 기적, 사랑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주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수많은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오늘날 우리 상황으로 비유하면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배까지 곯아가며 고생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으며, 모두 함께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일으키실 그 기적이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당신 제자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스승님께서 군중들의 배고픔과 고생을 당신 일처럼 여기며 안쓰러워 하신 것처럼, 이웃의 배고픔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며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하신 또 다른 의도는 우리가 빵을 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참된 빵은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시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물으신 것이지요. 또한 그 질문 안에는 당신 자신을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 ‘표징’이자 ‘암시’처럼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먹여살리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이성과 합리라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숫자라는 물질적인 기준으로 계산한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는데도 그저 한 없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기는 커녕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로 만드는데도 수 천만원이 깨지는 상황이니, 그들을 제대로 먹이려면 대체 얼마가 필요할 지 선뜻 계산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거액을 자기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핑계로 그런 자기 모습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둡시다’. 자선과 나눔을 주저하며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가 없어서 못나눈게 아니라 베풀 마음이 없어서 못나누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일단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자리를 잡고 앉게 하십니다. ‘어차피 안된다’는 실망감에 좌절하여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당신 곁에 단단히 자리를 잡게 하시는 것이지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논리로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늘어나는 것은 걱정과 한숨 뿐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땐 복잡한 생각이나 계산은 다 접어두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서조차 당신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 하나만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이지요. 내가 그런 믿음으로 주님 곁에 자리를 잡으면 바로 그곳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내가 순명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바로 그 실천이 놀라운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너무 밝아서 주님의 뜻을 몰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지만,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으면 ‘주님,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제 전부를 드렸으니 부족한 부분은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차고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수 천명의 군중이 먹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란 양이었지만, 걱정하시기 보다 먼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며 부족함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아버지의 선한 뜻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실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는 시편의 내용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이스라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얼마 안되는 음식을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가 가득찼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너무도 풍부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와 부족함을 충만히 채우고도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다만 그런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기꺼이 그분 뜻을 따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것을 지키겠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내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말겠지요. 그러나 감사와 순명으로 먼저 주님 뜻을 실천하면 그 실천이 은총의 마중물이 되어 내 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펑펑 솟아나게 만들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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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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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
제1독서대목은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떤 사람이 봉헌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를 백 명의 사람들에게 먹이라고 내어 줍니다. 하지만 사람 수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보니 분부를 받은 시종은 사실 믿지 못했지요. 엘리사라고 산수를 못 하겠습니까만,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깁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도입부에 유다인의 파스카 축제를 언급함으로써 복선을 깔아 놓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놀라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희생제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많은 군중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실 생각부터 하십니다. 길고 험한 타향살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을 먼 발치에서 발견한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렇겠지요.
"당신이 하시려는 일"
예수님은 먼저 군중에게 빵을 실제로 먹이려 하십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워 힘과 생명력을 북돋아주시려는 겁니다. 아울러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되살리실 희생 제물, 무죄한 어린양이 되시려는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요한 6,9)
군중 안에 끼어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마침 먹거리를 지니고 따라왔나 봅니다. 모르긴 해도 이 먹거리는 자신과 몇몇 일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요. 이 소박한 양식이 모든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가 관대히 자기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달리 양식을 구할 곳이 없고 그나마 수중의 돈마저 간당간당하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퍽 요긴할 텐데, 아이는 긴 생각 하지 않고 자기 음식을 내어놓습니다. 비록 어린 아이지만 예수님을 믿었고 허기 진 군중을 염려하시는 그분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겠지요.
여분의 빵을 뒷주머니에 예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진 것 전부를 내놓는 행위는 바로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의 봉헌은 미소하나마 파스카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봉헌을 떠올려 줍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통해 아이의 빵과 물고기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 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다고 하지요. 더 보탤 필요 없이 넉넉하고 충만한 생명의 양식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가리킵니다. 열둘이라는 완전한 수로 남은 빵은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을 주님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천 년을 이어오면서 인류가 받아 먹었고 지금 우리도 모시는 성체는 한 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적은 양에서 오천 명을 먹일 양으로 늘어난 기적의 빵은 당신 몸을 내어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빵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우리 온 인류를 한 몸으로 아우르고, 이 빵을 먹는 우리 모두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인종, 국적, 성별, 나이, 빈부를 넘어 같은 몸을 받아먹는 한 식구지요. 우리가 누리는 영육의 모든 것이 서로 한 몸을 이루라고 안배하신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빵을 모시는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될 때 복음 속 빵의 기적이 비로소 지금 여기, 세상 곳곳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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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야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담겨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 줄 빵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셈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논리를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임을 표징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수많은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는 성경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었는지, 우리가 흔히 알 듯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기적의 결과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빵의 기적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빵으로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군중이 빵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찼고 함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을 맛본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겸손과 온유, 인내심과 사랑, 평화와 일치를 말하며 깊은 영적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은 내 배를 불리고 내 행복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와 믿음으로 묶여 한 분이신 주님과 성령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일치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일치는 신앙인이 성령께 받은 가장 큰 선물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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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열왕기 저자는 예언자 엘리사가 사람들의 주 양식인 빵을 많게 하는 기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알 살리사에 온 사람이 맏물 수확인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는 그 빵을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라고 이릅니다. 그의 시종이 이 많은 숫자의 군중에게 어떻게 작은 빵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를 예언자에게 질문합니다.
예언자는 그 시종에게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시종은 빵을 나누어주니 예언자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많은 숫자가 먹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남았습니다.
요한도 갈리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셔서 산에 오르십니다.
마침 그 때에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빠스카의 축제가 가까운 때였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곳에 있었고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필립보에게 이 군중이 빵을 먹으려면 얼마큼이나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십니다.
그때에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고 앉으라고 이르십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고 그들은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켜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빵은 모자르지 않았고 오히려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서로 말합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14절)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 와서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엘리사도 백 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의 기적을 베풀었고 주님께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떼어 주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당신 자신이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일치'를 이루는 또 다른 기적으로 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6)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통해 배우는 가르침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빵을 나누는 우리 각자가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를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2절)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양식이 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빵은 한적한 곳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빵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게 하는 양식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은총이며 그리스도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빵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매일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서로를 참아주며 너그럽고 온유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놀랍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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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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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
제1독서대목은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떤 사람이 봉헌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를 백 명의 사람들에게 먹이라고 내어 줍니다. 하지만 사람 수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보니 분부를 받은 시종은 사실 믿지 못했지요. 엘리사라고 산수를 못 하겠습니까만,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깁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도입부에 유다인의 파스카 축제를 언급함으로써 복선을 깔아 놓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놀라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희생제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많은 군중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실 생각부터 하십니다. 길고 험한 타향살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을 먼 발치에서 발견한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렇겠지요.
"당신이 하시려는 일"
예수님은 먼저 군중에게 빵을 실제로 먹이려 하십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워 힘과 생명력을 북돋아주시려는 겁니다. 아울러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되살리실 희생 제물, 무죄한 어린양이 되시려는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요한 6,9)
군중 안에 끼어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마침 먹거리를 지니고 따라왔나 봅니다. 모르긴 해도 이 먹거리는 자신과 몇몇 일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요. 이 소박한 양식이 모든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가 관대히 자기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달리 양식을 구할 곳이 없고 그나마 수중의 돈마저 간당간당하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퍽 요긴할 텐데, 아이는 긴 생각 하지 않고 자기 음식을 내어놓습니다. 비록 어린 아이지만 예수님을 믿었고 허기 진 군중을 염려하시는 그분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겠지요.
여분의 빵을 뒷주머니에 예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진 것 전부를 내놓는 행위는 바로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의 봉헌은 미소하나마 파스카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봉헌을 떠올려 줍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통해 아이의 빵과 물고기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 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다고 하지요. 더 보탤 필요 없이 넉넉하고 충만한 생명의 양식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가리킵니다. 열둘이라는 완전한 수로 남은 빵은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을 주님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천 년을 이어오면서 인류가 받아 먹었고 지금 우리도 모시는 성체는 한 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적은 양에서 오천 명을 먹일 양으로 늘어난 기적의 빵은 당신 몸을 내어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빵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우리 온 인류를 한 몸으로 아우르고, 이 빵을 먹는 우리 모두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인종, 국적, 성별, 나이, 빈부를 넘어 같은 몸을 받아먹는 한 식구지요. 우리가 누리는 영육의 모든 것이 서로 한 몸을 이루라고 안배하신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빵을 모시는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될 때 복음 속 빵의 기적이 비로소 지금 여기, 세상 곳곳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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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연중 제17주일.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
<2024.7.28>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9:1~18절)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
❚ 예고된 심판의 때를 믿음으로 준비하며 말씀을 붙잡고 구원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말씀을 묵살하고 불신하는 사람은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1~7절).
시드기야 왕 제구 년 열째 달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제십일 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1~2절) 바벨론 왕의 고관들이 성으로 들어와 중문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3절). 성이 함락되자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밤에 도주를 시도하였습니다. 도망친 시드기야 왕은 여리고 평원에서 잡혀 느부갓네살 왕에게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자녀들과 유다 귀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자신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로 결박당하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참혹한 결말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하고, 불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언제까지나 악한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포장된 거짓된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수나 과거의 자랑은 허물일 뿐입니다. 현재, 지금 내 모습이 어떠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다면 즉시 회개하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직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므로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8~14절).
갈대아인들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살랐고,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으며 성중에 있는 백성들과 항복한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에게 땅을 주고 포도원과 밭을 경작하도록 했습니다(8~10절). 예레미야의 선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에게는 긍휼이 임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풀어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11~12절). 예레미야는 바벨론 장관들의 도움으로 구출된 후 그다랴의 보호 아래 그의 집에 거하게 되었습니다(13~14절).
하나님의 예고된 심판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자녀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예레미야를 구출하기 위해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동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우리 자신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므로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신뢰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15~18절).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은 구스인 에벳멜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죽게 되었을 때 그를 구해 준 내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에벳멜렉을 기억하셨고, 그를 구원하시기를 작정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18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것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때로 환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헛된 것을 좇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헛된 것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진 것은 사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므로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마지막 날에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실천하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때를 놓치면 비극적인 심판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내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39:1~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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