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자동차 브랜드인 폭스바겐 그룹은 프리미엄과 스포츠카, 상용차 등 9개가 넘는 다채로운 제조사를 보유하고 있다.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세아트와 스코다를 비롯해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벤틀리와 포르쉐, 부가티까지. 4바퀴가 달린 라인업 가운데서는 빈틈없는 구성을 갖춘 것이 폭스바겐 그룹의 자랑이자 힘이다.
이쯤되면 모기업인 폭스바겐이 고급차 시장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폭스바겐 그룹의 성장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자 최고의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피에히 박사 아래 진행된 프로젝트는 2002년 페이톤과 투아렉이라는 걸출한 결과물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이후 아픈 손가락으로 남은 페이톤과 달리 투아렉은 3세대 모델까지 이어지며 폭스바겐의 실질적 플래그십 모델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룹내 최고 서열에 위치하는 포르쉐와 아우디 등과의 기술 교류를 통해 1세대 부터 높은 완성도를 자랑해온 투아렉. 3세대에 이르는 완숙미까지 더해진 투아렉은 국내 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을까?
■ 화려하지 않은 독일 남자
폭스바겐의 모델들이 으레 그렇듯 투아렉은 1세대부터 화려한 장식을 앞세우지 않았다. 반듯한 직선과 심심한 캐릭터 라인 등은 브랜드 성격을 그대로 담아내는 아이덴티티와도 같았다.
3세대에 이른 투아렉 역시 최신 폭스바겐 패밀리룩을 따라 화려한 기교보단 정갈한 라인들로 완성됐다. 전장 4880mm, 전폭 1985mm, 전고 1670mm, 휠베이스 2899mm의 투아렉은 자타공인 최고 수준의 프레스 기술을 앞세운 날렵한 선들과 하나로 이어진 듯한 그릴과 LED 헤드램프까지 모두 직선을 활용한 디자인을 채택했다.
전면부를 장식한 화려한 크롬 장식마저 투아렉에 쓰이니 수수하다는 느낌을 전달 받는건 제조사가 가진 선입견 탓일지도 모르겠다. 단정한 투아렉이라고 시골 총각의 이미지만 풍기는 건 아니다.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코 허투루 만든 디테일을 찾아볼 수 없다. 강철 소재를 비롯해 알루미늄과 플라스틱 등 서로 다른 소재가 묶여있음에도 투아렉의 외관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도어 손잡이를 당겨 바라보는 기분좋은 묵직함 너머에는 노트북 크기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자리잡고 있다. 사이즈는 무려 15인치. 휴대용으로 들고다니는 노트북 디스플레이와 맞먹는 크기다.
함께 이어진 12.3인치 크기의 디지털 클러스터 또한 주야간을 가리지 않는 또렷한 시인성과 다양한 정보들을 실시간을 제공해 밖에서 보는 이미지와는 다른 반전 매력을 품고 있다.
차량 조작에 대한 전반적인 기능들 모두를 디스플레이 속에 넣어둔 탓에 물리적인 버튼은 변속기 뒤쪽에 마련된 주행모드 설정과 에어 서스펜션의 차고 조절 정도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실내 역시 실내 전반을 아우르는 나무 장식과 2열 도어까지 이어지는 무드 조명으로 심심함을 덜어냈다.
차체 크기가 큰 만큼 2열의 거주성은 두말할 필요 없을 정도다. 성인 4명이 승차하는 환경을 가뿐히 소화하며, 슬라이딩 기능과 등받이 각도 조절로 용도에 따라 2열의 공간 활용도를 조절할 수 있다.
적재공간도 튀어나온 부분없이 반듯한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에어 서스펜션의 높낮이 조절 버튼을 별도로 두고 있어 무거운 짐을 싣을 때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 모든 것이 가능한 조합
투아렉에는 국내 소개된 6기통 3리터 디젤엔진을 비롯해 가솔린 및 V8 디젤엔진과 최근 선보인 고성능 하이브리드 버전 등이 존재한다. 엔트리급인 231마력의 V6 디젤엔진을 시작으로 전기모터와 결합된 462마력의 투아렉 R까지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담아내는 뼈대는 이미 여러 브랜드를 통해 입증된 MLB 에보 플랫폼이다.
아쉽게도 투아렉까지 전달되지 못했지만 12기통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프리미엄 브랜드를 넘어 럭셔리 브랜드인 벤틀리에 쓰일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들을 모두 갖춘 만능 매력을 지녔다.
뛰어난 원재료를 훌륭하게 빚어내는 최종 몫은 제조사이지만 투아렉은 그마저도 재료가 아깝지 않은 수준 높은 완성도를 선보였다. 브랜드속 이미지에 감춰진 이면에는 6기통 3리터 디젤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 에어 서스펜션이 위치한다.
최고출력 286마력, 최대토크 61.2kgf.m를 발휘하는 6기통 엔진은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요한 숨을 고르며, 네바퀴에 동력을 전달한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나즈막한 특유의 음색을 제외하면 실내에서는 디젤엔진의 존재감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최대토크가 60kgf.m이 넘어가는 강력한 토크에도 투아렉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후 에어 서스펜션을 통해 전달되는 기분 좋은 시작은 플래그십 세단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승차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오른발에 힘을 주는 상황에선 앞머리를 슬며시 들어올리며 그제서야 감춰진 힘을 토해낸다. 디지털 계기반 속 바늘은 속도 상승에 결코 주저함이 없다. RPM을 높이는 최대 가속 순간에도 엔진의 움직임은 여전히 진중하며, 음색은 결코 경박스럽지 않다.
가솔린 엔진처럼 회전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달리는 즐거움은 없다. 그러나 반박자 이상 빠른 변속으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똑똑한 파워트레인 덕분에 갑갑한 도심부터 시원스런 고속주행까지 3리터 디젤엔진의 트집을 잡아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똑똑한 파워트레인만큼 투아렉의 또 다른 강력한 무기는 네바퀴를 지탱하고 있는 공기 주머니다. 온로드를 비롯해 오프로드 주행 모드까지 7가지를 지원하는 에어 서스펜션은 앞서 언급한 플래그십 세단 부럽지 않은 승차감의 1등 공신이기도 하다.
공사현장의 울퉁불퉁한 노면부터 잘 닦인 고속도로 위 매끈한 노면까지 편식하지 않는 에어 서스펜션은 최상의 승차감을 구현해내며, 속도에 따른 고속 안정감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 주행 모드와 운전자 설정에 따라 차고를 변화시키면서 일정한 지상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에어 서스펜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쯤되니 운전대를 돌려가며 일탈을 즐기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생각할 찰라, 투아렉은 이마저도 어렵지 않게 해치워낸다. 굳이 스포츠 모드로 변경하지 않아도 육중한 무게의 투아렉의 움직임을 적절히 제어하며 좁은 굽잇길을 헤쳐나간다.
큰 차체 덕에 날카로운 움직임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끈덕지게 노면을 붙들면서 요리조리 헤쳐나가는 맛도 제법 맛깔스럽다. 애초 투아렉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주행이었지만 이마저도 투아렉은 아무렇지 않게 끝내버릴 만큼 전 영역에서 교과서와 같은 움직임을 나타냈다.
■ 일탈하지 않는 모범생, 가치를 알아봐줄 소비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
투아렉은 1억원 미만으로 구입할 수 있는 수입 SUV 가운데서도 단연 손꼽히는 추천 대상이다. 국내 기준 대형 SUV와 견줄 만큼의 큰 차체와 4기통 디젤엔진과 결을 달리하는 6기통 파워트레인, 경쟁 모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에어 서스펜션까지. 한 과목에 특출나지 않고 모든 교과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 모범생과 같다.
이런 우등생이 갖추지 못한 유일한 점은 화려함을 감춘 브랜드 이미지 뿐이다. 어쩌면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함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강점이지만 적어도 국내 시장에서 만큼은 경쟁자들의 화려한 치장에 못미치는 부분은 여전히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폭스바겐은 1세대 투아렉부터 항상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외모와 그 속에 숨겨진 탄탄한 내실은 3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투아렉의 무기와도 같다.
이제는 동등한 수준까지 가격이 높아진 국산차와 비교가 가능해진 만큼 투아렉의 가치가 빛날 환경은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다. 좋은 상품성을 가진 물건이라면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할만큼 소비자들의 수준도 향상됐다. 이제는 투아렉이 조금 더 빛을 볼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