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처음(?) 시작하는 동양고전 입문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는 법이다.”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
“높은 산을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한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말들이다. 출처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현실과 이상 사이에 있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실에 대응한 이런 말에서 향기를 느끼기도 하고 기쁨과 안도를 느끼기도 한다. 나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옳다는 아집을 버리면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할 것이다.”저자인 이현성 선생이 머리말에서 한 말이다.
저자는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해 박사가 된 뒤, LG오사카지점에서 근무하다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중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사기를 공부하고 삼국지를 통하고 홍루몽을 즐겨라」,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 「15살부터 만나는 논어」, 「조금 비겁해도 괜찮은 지혜」, 「교양으로 읽는 인문학 클래식」, 「지금 청춘이라면 심리학에 미쳐라」, 「상대를 기쁘게 하는 대화법」, 「하지 않으면 좋은 말」, 「말 잘하는 사람의 10가지 습관」등 동양고전과 심리학에 대한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편저했다.
이 책은 처음 동양고전을 대하는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인간사를 망라하는 모든 것의 인문학’‘실천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지침서’‘흥망의 기록에서 얻는 가치’등 크게 세 개로 구분한 뒤 《논어》《노자》《장자》《맹자》《순자》등 고전의 사상과 가치를 살핀 뒤에 《근사록》《채근담》《전습록》《좌전》《사기》《삼국지》《십팔사략》등에 대해서도 훑어보고 있다. 내용의 깊이까지는 몰라도, 고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 본다.
《논어》는 하도 많이 알려지고,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어느 날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신(神)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섬겨야 합니까?”
“신을 섬기기 전에 우선 사람을 섬기게.”
“그렇다면 스승님,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는 것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는 현실적 인간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인간관계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공자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신(信)을 꼽았다.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로 ‘성실’로도 바꿀 수 있는 이 신에 대하여 공자는 “사람에게 신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풍족한 식량과 군비강화 그리고 신이 있는 사회를 확립하는 일이다.”
“그중 하나를 단념해야 한다면 어느 것이 좋겠습니까?”
“그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이지.”
“나머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단념해야 한다면요?”
“그야 식량이지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신이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나라네.”
《노자》는 노자 잠언집으로 알려져 있고, 총81장으로 되어 있다. 훗날 도가의 원전이 되었고, 도와 덕을 중시해 《도덕경》이라고도 한다. 노자는 공자 이전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이설도 많다. 《노자》는 특정 인물이 썼다기보다 사상이 같은 불특정 다수가 정리했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하고 공자 후대 전국시대에 성립한 책으로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도가 원전이라고 해서 구름 잡는 소리가 많은 줄 알지만, 사실은 만물의 근원에는 보편적 원리가 작용하며 이를 도(道)라고 한다고 했다. 덕은 무심(無心), 무욕(無慾), 유연(柔軟), 겸허(謙虛), 유약(柔弱), 질박(質朴), 겸양(謙讓)등 7가지를 말하고 이는 현실에 밀착한 서민 사상으로, 유교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내세운 ‘외면적 도덕’이라면, 도교는 생활을 지탱하는‘내면적 도덕’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을 하나로 묶어서 보기도 하지만, 실제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은 취지가 상당히 다르다. 《장자》는 현실을 초월하고 해탈할 것을 가르치는 반면, 《노자》는 냉혹한 현실을 헤쳐가는 지혜를 가르친다. 노장사상의 기본이 현실을 등지고 살아가는 은둔사상을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도 사실과 다르다. 《노자》는 현실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강하게 맞서 대처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장자》는 조금 다르기는 하다.
《노자》의 핵심사상 중 하나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인데, 노자는 왜 물의 형상을 이상적이라고 보았을까? 첫째, 물은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대응하는 유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이는 인간의 겸허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셋째, 물은 항상 약하다고 하지만 어떨땐 그것이 강한 힘을 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했다.
“물과 같은 생활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이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낮은 곳에 몸을 두고 심연과 같은 깊은 마음을 겸비하고 있다. 줄 때는 차별을 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파탄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일에 적절하게 대응하여 시기를 보아 적합한 때에 행동한다. 이것이 바로 물의 형상이다. 물과 같이 거스름 없는 생활방식을 취하면 실패를 막을 수 있다.”
이런 말도 했다.
“이 세상에 물만큼 약한 것은 없다. 그러면서도 물을 이길 만큼 강한 것은 없다. 이는 물이 항상 약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재능을 과시하지 마라, 만족함을 알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주라,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다, 자신을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등 숫한 명언을 남겼는데, 그중에 이런 말도 했다.
“도를 익힌 사람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도를 터득했다고 할 수 없다.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지식에 현혹되지 않으며 재능을 숨기고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는 인물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훌륭한 재능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말이 요즘 세상에도 맞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노자의 말이니 그 말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장자》에는 우화가 많아서 고전 중에 가장 재미있다고 소문난 책이다. 그런데 이숍우화와는 달리 현실감이 너무 떨어져 우스운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등 모두 33편으로 약 6만 5천자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 장자가 직접 쓴 것은 내편 뿐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대의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근원에 도가 있다고 하고, 도(道)에 입각하면 모든 사물에 차별이 없다고 하는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이 기반이다. 그러나 노자가 현실을 헤쳐나가는 처세의 지혜를 배우라고 한 것과 달리 현실을 초월해 해탈하라고 한다. 장자는 기원전 4세기 송나라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벼슬과는 멀어 오로지 초야에 묻혀 생애를 마쳤다.
《장자》에 우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비열하거나, 비굴하거나 혹은 속물인 인간을 짐승에 비유한 것이 많기 때문으로, 물고기인 곤, 새인 붕, 그리고 매미와 비둘기, 원숭이를 통한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까치, 사마귀, 목계 등이 그것이다. 또한 공자와 제자 안회를 빗대어서 무엇이 참 진실인지 설명하기도 한다. 오래전에 읽고 감명받았던 글을 하나 소개하면, 무용함의 유용함으로 우리가 필요 없다고 하는 무용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가치관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장자는 곡원 지방의 상수리 나무를 소개하면서 무용해야만 천수를 누린다고 하였고 올곧으면 사람들에 의해 베어지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과 논쟁의 적수이자 친구인 혜시(惠施, 전국시대 송나라 논객)와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혜시가 장자의 주장을 비판했다.
“자네의 이론은 현실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네.”
그러자 장가가 바로 되받아쳤다.
“나는 무용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유용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예를 들어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는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만큼 넓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두 발을 디딜 작은 공간이면 충분해. 그렇다고 해서 발을 디딜 만큼만 남기고 주위의 땅을 깊이 파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물론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
“그것 보게,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쓰임이 있는 것일세. 알겠는가!”
어쩌면 《장자》는 “곧은 나무가 먼저 잘리고, 맛있는 우물이 먼저 마른다.”는 이 말이 핵심 사상 같기도 한데, 우리가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맹자》의 저자 맹자는 공자만큼 알려진 인물이다. 《맹자》는 7편으로 구성되었다. 전편 3편은 주로 유세 활동을 기록하였고, 후편 4편은 그가 은퇴한 후 그의 사상과 연설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맹자는 기원전 370년 추(鄒)나라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유교를 배웠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과 인의에 따른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유교 사상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40대에 등(滕)양(梁)임(任)제(齊)노(魯)설(薛)등 여러 나라를 돌며서 유세활동을 펼쳤으나, 현실적 이익에 급급했던 당시 군주들은 맹자의 주장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맹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기르며 살다 기원전 289년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강조했는데, 왕도정치란 무엇인가? 맹자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 중기로 모든 나라들이 앞다투어 부국강병을 꾀하던 시대였다. 인의를 앞세운 이상정치가 먹힐 리 없었지만, 맹자는 그의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맹자가 위나라 혜왕을 만나자 혜왕이 물었다.
“선생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주신 것을 보니 분명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 만한 묘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그리 이익만을 생각하십니까? 이익보다는 인의가 중요합니다. 왕께서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하신다면 중신들은 어떻게 하면 가문에 이익이 될지를 생각할 터이고, 관리나 서민들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면, 나라가 어찌 바로 서겠습니까. 만승(萬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죽이는 것은, 천승의 녹을 먹는 중신이며,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죽이는 것은, 백승의 녹을 먹는 중신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의 녹을 먹고,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의 녹을 먹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거늘,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라를 통째로 빼앗으려는 것은 인의를 무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을 갖춘 사람은 부모를 버리지 않으며, 의를 아는 사람은 주군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인의를 중시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익만을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란 군주, 즉 ‘위에 있는 사람’이 인의를 갖추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인은 배려이고, 의는 이치에 맞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혜왕이 다시 물었다.
“짐은 온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항상 노력해 왔소. 짐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런데도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소?”
“폐하께서 싸움을 좋아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갑옷을 벗어 던지고 칼을 끌며 도망가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백 보를 달아나다 멈추고,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보를 달아나다가 멈추었습니다. 이때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소. 백 보를 달아났건, 오십 보를 달아났건 도망간 건 마찬가지지 않소.”
“그렇다면 폐하께서 펼친 정책과 부국강병을 꾀하는 다른 나라의 왕이 펼친 정책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농번기에는 징용하지 않으면 식량이 부족하지 않아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물고기 잡는 양을 제한하면 씨가 마르지 않으며,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게하면 목재가 부족한 사태는 생기지 않을 것이며 백성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이 불만을 품지 않고 왕도정치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개나 돼지가 백성의 식량을 마구 먹어 치우는데도 말리지 않고, 굶어 죽은 시체가 쌓여 있는데도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주지 않고, 백성이 굶어 죽는 것은 흉년이 들어 그러니 짐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칼에 찔려 죽어도 칼이 죽인 것이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백성의 굶주림이 흉년 탓이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왕도정치와 반대되는 정치가 패도(霸道)정치다. 인의를 무시하고 무력과 권모술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가 살던 시대도 오늘날의 부패정치만큼 패도정치를 추구했다. 어쩌면 그러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만, 더 심했던 모양이다.
맹자가 주장한 왕도정치는 인간이 완성하기는 불가능한 이상정치인지 모른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도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맹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노력하면, 본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성이 아무리 선하다 해도 방치하면 점차 악으로 변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격을 수양해 덕을 쌓고,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을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대장부(大丈夫), 호연지기(浩然之氣), 부동심(不動心),불괴어천(不愧於天), 인생삼락(人生三樂)등 좋은 말만 남기고, 인의와 왕도를 고집한 맹자를 꽉 막힌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맹자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맹자가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자신의 말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또 한번 시작한 일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의를 따를 뿐이다.” 의를 따르면 약속에 집착하거나 하찮은 일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다. 상황에 맞게 적당히 응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벼슬을 하는 것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라야 할 때도 있다.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기 위해 아내를 맞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맹자의 한마디, 더 들어 들어보자.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를 따르지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를 따르지 못한다.”- 양혜왕 편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하다. 다만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수양을 쌓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익을 추구한다. 이를 그대로 방치해두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마음이 사라져 다툼이 일어난다. 증오하는 마음을 방치하면 진실한 마음을 잃고 배반한다.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겠다는 욕구가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규범이 무너지고 나쁜 짓을 일삼는다.”
순자는 맹자보다 30년 뒤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대부분 혼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책이 《순자》다. 순자가 맹자의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유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수정하고 맹자와 대립함으로써 유가에서 출발해 유가를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순자는 예와 의는 내면과 상관없이 외부 세계에 확립된 규범으로 타고난 성품을 규제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기존의 유가 사상인 덕치주의와는 사뭇 달랐다.
순자의 제자인 한비(韓非)가 법치주의를 주장하고, 이를 집대성한 것이 《한비자》인데 진시황이 이를 수용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과 한비와 동문수학한 이사(李斯)가 진나라 승상이 되어 법가 이론을 정치에 적용해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해 한비를 죽게 한 얄팍한 수를 쓴 이사지만, 이렇듯 순자는 유가를 이어받았지만 법가를 대표하는 이론가와 실천가를 배출해 낸 인물이다. 《순자》에는 교육론적 사상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는 물론 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다른 책들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비록 본성이 악하더라도 노력하면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고,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던 순자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일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순자가 말했다.
“쪽이라는 풀에서 나온 청색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로 만들어졌지만, 물보다 더 차다. 재목은 먹줄에 따라 잘라야 곧게 잘리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진다. 사람도 이같이 매일 반성하고 학문을 닦아야 지혜가 쌓이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학문은 지식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능력과 인격을 갖춘 교양인을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1)좋은 환경을 선택해야 한다. (2)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3)어떤 사람과 교류할지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 (4)일을 할 때는 철저하게 해야한다. 네 가지를 강조했는데 실제로 아무리 인격으로 완성된 사람도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 함만 못할 것이다.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라고 한 순자는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때 유의해야 할 사항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돌봐야 한다.
둘째, 예를 존중하고 뛰어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셋째,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유능한 인물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또 순자는 살아남기 위한 편법으로 폭군인 군주를 섬겨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면서, 이럴 때는 군주의 장점만 보고 결점을 덮어둔다. 공적을 세우면 칭찬하고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면서 폭군을 섬기는 일은 사나운 말을 타는 것에 비유되므로 상대의 기분에 맞춰주되 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고분고분 따르되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상대의 명령에 거역하지 않되 절대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라고도 했다.
덕과 인의를 강조했던 공자·맹자와 달리 순자는 균형 잡힌 조직관리와 착오 없는 판단으로 법치를 강조했다. 유가에서 출발했으나 그에서 벗어나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현대적인 주장을 편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이 아닌가 싶다.
이상 〈세상사를 망라하는 모든 인문학〉에 대해서 보았다. 다음은 〈실천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지침서〉‘근사록, 채근담, 전습록’이라고 하는 다소 생소한 것에 대해서다.
「근사록(近思錄)」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남송시대 때 사상가로 주자(朱子)가 친구인 여조겸의 도움으로 이미 유학자로 이름이 알려진 주돈이, 정명도, 정이, 장횡거 등 네 명의 선비들 저술에서 정수를 추려 편집한 어록집이랄까. 유교(儒敎)는 공자·맹자가 주장한 가르침을 말하고 이를 유학이라 하고,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을 유가 또는 유자라고 하는데, 유학이 송대에 이르러서는 훈고(訓詁-고증, 해명)나 주석(注釋-뜻풀이)으로 흐르자 이를 일신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로부터 개인 수양까지 포함한 장대한 철학 체계로 새로 만든 것’즉 유학을 새로 집대성한 것이 ‘주자학’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못 난해하여 주자가 이미 알려진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622개의 짧은 문장으로 만든 것이 「근사록」이다.
공자가 말했듯이 유학의 목표는 자기를 수양하는 것과 사람을 다스리는 것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를 단련하기 위한 노력을 수양 또는 수신이라 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유학의 근본인데, 유학도 후대에 오면서 이 원칙이 퇴색되고 학문을 위한 연구로 전락해 사상으로서의 활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일어난 것이 바로 새로운 유학, 처음엔 송학(宋學)이라고 했지만, 그 유학을 새롭게 이룬 이가 주자의 이름을 따 ‘주자학’이라고 부른다. 주자학의 핵심이 이(理)이기 때문에 이학(理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란 ‘우주 만물의 근거이며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원리’를 말한다. 이는 외계의 사물뿐 아니라 인간 내부의 마음에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성리학은 바로 이런 근본을 나타낸 말이다.
이상적 인간이 되려면 이런 근본원리에 따라야 하나, 정(情)이나 욕심 때문에 흐려질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온전하게 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적절하게 행동하고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릇된 판단과 그릇된 방향의 설정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맞는 말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인데, 거경은 ‘마음을 오직 한 곳에만 집중한다’는 것이고, 궁리는 ‘근본원리를 파고들어 깊이 있게 연구한다’는 것으로 격물지치(格物至治)라고 하기도 한다. 즉 ‘거경’에 의해, 인간으로서 도덕성을 높이고 ‘궁리’에 의해, 폭넓은 지식을 쌓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주자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근사록」을 요약하면, 주자 이전에 송학의 기초를 닦은 사상가들이 있었고, 이전까지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완성한 주자가 선배들의 저술 가운데 특히 중요한 가르침을 뽑아서 편찬하였고, 그것이 방대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것을 비교적 짧게 추려서 이해하기도 쉽게 만든 것이 「근사록」이다.
622문장이나 되는 것을 여기 다 옮길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인터넷에 그것이 있을 것 같아서 책에서 뽑은 몇 가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 배우지 않으면 노쇠한다.
- 책은 반드시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대략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 말을 삼감으로써 그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그 몸을 기른다.
- 현자는 理에 따라서 완전하게 행한다. 지자(智者)는 기미를 알아서 굳게 지킨다.
- 사람이 환난에 처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으로서의 모든 노력을 다한 뒤에 도리어 태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 앞을 내다보고 기약하는 바를 멀리 또는 크게 할지어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함에는 모름지기 능력을 헤아려서 서서히 하라...
「채근담」은 일상 관련 내용이 많아서인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현실에서의 처세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거(閑居)와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360개의 잠언이 담긴 이 책은 명나라 시대에 쓰인 것으로 비교적 최근의 고전이다. 저자가 홍응명(洪應明)으로, 그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으나 도중에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저자 자신의 생활방식과 융합된 처세술이 담겨 있으므로, 연구대상이 아닌 생활과 인생의 실천적 지침서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유교·불교·도교를 융합하고 그에 입각한 처세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다른 고전과 다르며 중국인들은 오로지 냉엄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지 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마음의 고뇌를 극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가 불교사상이 들어옴으로써 독자적 전개를 보인 것이 선(禪)사상이다. 세 가지 사상을 접합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로 다룬 단문의 잠언집이 「채근담」인 것이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다. 길어야 백 년인 인간의 수명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삶을 즐겁게 보내려 노력하는 동시에 한 번뿐인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는지 항상 주의해야 한다.”인생을 즐기고자 하면 쾌락주의에 물들기 쉽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는 동시에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는 유교의 영향이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든 줄이려고 하면 그만큼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남을 줄이면 다툼을 줄일 수 있고, 말수를 줄이면 비난을 줄일 수 있고, 생각을 줄이면 근심이 줄어든다. 머리를 덜 굴리면 진실 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줄일 생각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세의 굴레를 쓰는 것과 같다.”이는 도교의 영향이다.
“부동(不動)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성공했다고 기뻐 날뛰지 않으며, 실패했다고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어떤 일에든 의연하게 대처한다. 외부의 충격에 마음이 동요하는 사람은 한계에 부딪치면 화를 내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에만 집착하며 사소한 일에 얽매여 자유를 잃는다.”그러므로 어떤 일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선의 영향이다. 「채근담」은 어설픈 서생론이 아니다. 원숙한 경지에서 거침없는 처세술을 담고 있다.
“어려운 길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라. 난관에 부딪쳤을 때는 인내심으로 초지일관하라.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기는 쉬워도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기는 어렵다. 꽃은 반쯤 피었을 때가 아름답고 술은 약하게 취했을 때가 좋다. 이로운 일이 있으면 해로운 일도 있다.”등 주옥같은 명구를 담고 있는 「채근담」도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전습록(傳習錄)」이라는 책은 좀 생소하다. 양명학에 대해 배워보기는 했으나,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양명학의 입문서가 바로 「전습록」으로 어록·서간집 형식인 이것은 1556년 왕양명(王陽明)의 사후에 그의 제자 전덕홍(錢德洪)이 정리한 것이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 열렬히 주자학을 따랐으나, 차츰 이에 의문을 품고 번민 끝에 실천을 중시한 양명학을 부르짖게 되었다. 「전습록」전편에 흐르는 실천에의 끊일 줄 모르는 욕구가 이후에 다수의 신봉자를 낳았던 것이다.
양명학이 어려운지, 주자학이 어려운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지만, 왕양명에 대한 야담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왕양명은 친구와 둘이서 뜰 앞의 대나무의 이치를 연구하고자 주자의 격물치지를 실천에 옮겨, 대나무 앞에서 대나무에 대해 궁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구는 3일 만에 신경증에 걸려 포기하고, 자신도 7일 만에 역시 병에 걸려 그만두었다. 결국 둘은 ‘성인이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익살이 담긴 이야기긴 하지만, 젊은 날 왕양명은 이 격물지치의 해석을 둘러싸고 고민했다. 나이 37세가 되던 해에 마침내 주자학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어 ‘양명학’이란 것을 내놨는데 심즉리(心卽理)라는 것으로 ‘마음이 곧 리’라는 것이다. ‘천하는 마음 바깥의 일이며, 마음 바깥에 리는 없다’는 것으로, ‘마음이 바로 마땅한 이치이며 마음 바깥에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해 격물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마음에 있다고 한 것이다. 또 마음의 본체는 양지(良知)이고, 이 마음의 본체를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 곧 격물이라고 했다.
그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은 단순한 내뱉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는데, “지는 행의 시초이며, 행은 지의 이룸(成)이다.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지에 속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본 순간에 그것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며 보고 난 뒤 새로이 다른 마음이 작용하여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다른 것과 비교하면 “부모에게 효도함에 있어서 이미 그것을 실행하고 있어야만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말한다고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양명학에서는 지행합일을 요체로 한다. 앎과 행위의 분열은 본래 있어서는 안 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말을 내뱉은 일에 소비할 시간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더 강한 도전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실패했을 때는 원인을 규명하고 다시 고치면 된다고 한다. 그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퇴색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행동을 중시한다 해도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행동은 맹목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누구나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한두 번 역경에 처하고, 준엄한 시련을 겪을 수가 있다. 문제는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다. 이성을 잃는다든가, 자포자기에 빠진다든가, 위험한 일에 손을 대 자멸의 길을 걷는다든가, 긴급한 때에 대응을 그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상황에도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자신을 단단하게 단련해 두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연마다. 왕양명이 말했다.
“사람은 마땅히 매일매일 일하는 가운데 연마하고 연구해야 쓸모가 있다. 만일 그저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을 만나면 허둥거리게 되어 결국 발전하지 못하므로 조용한 때에는 항상 연구를 해야 한다.”
왕양명은 1472년에 태어나 1528년에 세상을 떠났다. 28세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고급 관리로서 길을 걷기 시작해, 종종 군사령관으로 기용되어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는데 출병해서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정치가뿐 아니라 용병가로서도 특출한 역량을 지닌 듯 보인다. 한번은 관청에 관리로 있는 제자가 찾아 와 불평을 했다.
“선생님, 저는 학문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관청에서 장부 정리와 재판에 관한 일에 쫓겨서 차분히 공부할 겨를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그러자 양왕명이 훈계했다.
“내가 이제까지 자네에게 관청의 일을 제쳐두고 학문에 힘쓰라고 가르친 적이 없네. 자네에게는 관청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거기에 근무하는 가운데 자기를 연마하도록 유념하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관청에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실제 학문의 장이 되는 것일세. 만일 그 일을 떠나서 학문을 하려고 한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학문이 되고 말걸세.”
양명학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라 실학이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이 곧 격물이다. 인생의 위중한 병폐는 오직 하나 오만함이다.’「견습록」에 있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좌전』,『사기』,『삼국지』,『십팔사략』등 나라와 인간, 흥망에 담긴 고전들이다. 「좌전(左傳)」은 「춘추좌씨전」의 줄인 말로, 노나라 은공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 242년간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공자의 저술로 알려진 『춘추』와 달리 좌구명(左丘明)이 갖가지 여담을 보태어서 흥미롭게 편찬한 책이다. 한마디로 『좌전』은 혼란스러운 춘추시대 세상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역사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나라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는데, 진나라 목공(穆公) 이야기가 흥미롭다. 목공은 진시황이 진나라를 통일하기(기원전 221년) 400년 전쯤 서쪽 변두리에 있던 미개한 후진국을 일으켜 세운 군주다. 목공이 충실히 국력을 키워서 서융(西戎)의 패자가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부국강병책은 인재의 확보와 등용이었다. 인재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인물들로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유여(由余) 등이 그들이다. 목공은 부하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내정의 대계를 그들에게 일임했다. 또한 그들이 분발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 넣어 주었으며, 넓은 도량과 재각(才覺)이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이다.
어느 해, 목공이 맹명시(孟明視)라는 인물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진(晋)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런데 진(秦)나라 군사들이 효(殽)라는 곳에서 적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궤멸당하고 맹명시는 사로잡혔다. 협상을 통해 맹명시가 풀려나자, 목공은 상복을 입고 교외로 마중 나가 그를 위로했다. “용서하시오. 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니까, 그대는 이 수치를 잊지 말고 직무에 힘써 주시오.”그리고 포로가 되었던 부하들을 처벌은커녕 이전보다 더 후대하였다. 그리고 3년 뒤 진나라를 공격해 이전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하였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등의 고사성어를 낳은 오나라와 월나라는 양쯔강 남쪽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오나라 합려와 아들 부차, 그리고 월나라 구천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역경 속에서 보여준 그들의 집념과 끈기는 실로 놀랍다. 그러나 둘에게는 지도자로서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있음을 간과해서 안 된다. 부차의 경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후이지산(會稽山)에서 구천을 추격해 사로잡았으나, 오자서(伍子胥)의 고언이었던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구천은 명군인데다 범여와 같은 뛰어난 참모가 있습니다. 그를 살려두면 언젠가 우리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는 말을 듣지 않고 항복만 받아들이고, 구천을 돌려보냈다.
그 후에 오자서의 예측이 적중했고, 결단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비극을 자초했던 것이다. 상대인 구천도 20년 동안 부국강병으로 나라를 일으켜 오나라와 부차를 쳐부수었음에도 승리에 도취 되어 한때 패자의 지위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점점 왕년의 활력을 잃고 월나라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충성스런 신하 범여와 사랑했던? 서시도 떠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역정에 처했을 때는 이를 감내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고 정상에 도달한 뒤에는 안일한 판단과 해이해진 마음으로 어리석음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나라 재상을 지낸 안영(晏嬰)과 관련한 이야기도 많은데, 그는 키도 작고 풍채도 별로였다. 그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초나라 왕이 안영이 용모 없음을 조롱해 주려고 만나자마자 으쓱대면서 말했다.
“제나라에는 그렇게 사람이 없소? 그대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니 말이오”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안영이 답했다.
“저희 나라에는 사람이 넘칠 지경입니다. 사람이 없다니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대 같은 위인을 사신으로 보낸단 말이오?”
“지당한 물음이오나, 저희 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할 때 현명한 자는 현명한 나라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나라에 파견토록 하고 있습니다. 소인은 가장 어리석기 때문에 귀국에 파견되어 왔습지요.”
이 얼마나 통쾌한 한 방인가!
지칠 줄 모르는 이야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사기』는 한나라 때 사마천이 쓴 역사책이다. 전설 시대부터 하·은·주 왕조를 거쳐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의한 통일과 와해, 그리고 한나라 초기까지 긴 역사가 담겨져 있다. 총 130권으로, 일반 역사서는 보통 연대별로 사건을 기록한 ‘편년체’지만 『사기』는 「본기」와 「열전」중심의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를 시작으로 이 기전체는 정사를 편찬하는 규범이 되었고 《삼국사기》도 그렇게 쓰였다.
『손자병법』에 비견되는 병법서로 『오자』가 있다. 『오자병법』이라고 하기도 하는 『오자』의 저자 오기(吳起)는 전국시대 위나라 장군으로 그는 무후왕과 같이했다. 무후왕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왕의 의견에 토를 다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무후가 흡족해하며 밖으로 나가는데 오기가 달려가 말했다.
“옛날 초나라 장왕이 신하와 회의를 할 때 왕보다 좋은 의견을 말하는 신하가 없었습니다. 회의를 마친 장왕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신공이라는 신하가 ‘무슨 일로 그리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묻자, 장왕은 ‘어느 시대든 성인이 있고, 어느 나라든 현자가 있기 마련이오. 성인을 찾아 스승으로 삼는 자는 왕이 되고 현자를 찾아 벗으로 삼는 자는 패자가 된다고 했소. 그런데 내 곁에는 나보다 좋은 의견을 낼 수 있는 인재가 없소.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오’라고 대답했다 하옵니다. 장왕은 신하들의 무능함을 한탄한 것이지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계시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오기의 말을 들은 무후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오기는 지도자는 늘 겸허해야 하고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기』에는 협객의 이야기도 여럿 나온다. 이는 다른 역사서에는 없는 것으로 진시황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형가(荊軻)도 있지만, 곽해(郭解)라는 인물도 있다. 아마도 사마천이 협객에 대해 공감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곽해는 서민 출신이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천도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일전에 곽해를 본 적이 있다. 그의 외모는 다소 떨어지고 어조에도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좋았다. 지위를 막론하고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협객이라 하면 그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곽해가 사람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은 것은 탁월한 인심수람술(人心收攬術- 인심을 거두어 잡음) 때문이었다. 곽해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누나의 아들인 조카가 싫다는 사람을 잡고 억지로 술을 먹게 하는 행패를 부렸다. 결국 부아가 치민 상대가 조카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에 누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니? 나뿐만 아니라 네 체면이 걸린 문제란 말이다.”곽해는 조카를 죽인 사람을 데려오게 해 자초지종을 듣고는 “당신이 내 조카를 죽일만했군. 잘못은 내 조카가 했소.”라며 조카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나이를 돌려보냈다. 이 일로 사람들은 곽해를 더욱 존경했다고 한다.
『좌전』에도 『사기』나오는 월왕 구천을 도와 20년 만에 오왕 부차를 패배시키고 잠시나마 구천을 패자로 만든 데는 신하였던 범여의 역할이 컸다.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보낸 것도 범여의 꾀였다. 그런데 『사기』에 보면 범여는 우리가 생각하는 충신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구천이 패자에 오를 때 범여는 대장군으로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범여는 말했다.
“최고가 된 군주를 오래 섬기는 일은 위험하다. 무엇보다 구천은 고난을 함께할 수 있어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고 생각하고는 사퇴를 상소했다. 속마음을 모른 구천은 만류했지만, 결국 범여는 제나라로 갔다. 도대체 범여는 무슨 이유로 높은 지위를 마다하고 구천을 떠났을까?
제나라에서 범여는 사업수완을 발휘해 부자가 되었다. 제나라에서 재상이 되어 달라는 제안했지만,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천금의 부를 쌓고 벼슬길에 올라 재상이 되었는데 필부의 몸으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도 오래 지속되면 오히려 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제나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재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몰래 제나라를 떠나 도라는 마을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즈음에 범여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여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범여는 재빨리 막내에게 엄청난 황금을 건네주며 초나라로 가서 둘째를 구출해 오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때 장남이 나섰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해야 합니다.”범여의 부인도 큰애에게 맡기라고 거들었다. 결국 장남에게 일을 맡겼다. 그러나 장남은 황금을 뇌물로 쓰기가 아까웠다. 결국 동생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장남은 처형당한 동생의 유해를 안고 돌아왔다. 부인이 슬퍼하자 범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큰애가 동생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오. 큰애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온갖 고생을 해 왔기 때문에 돈을 쉽게 쓰지 못하오.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은 막내라면 주저 없이 돈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큰 애는 절대 그러지 못하오. 둘째는 죽고 말았지만, 이것도 다 그 아이의 운명이니 슬퍼하지 마시오.”
범여가 구천을 떠난 것, 제나라의 재상 제안을 거절한 것, 사업에 성공한 것, 아들을 잃은 것, 모두에서 놀라운 통찰력을 보인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는 말이 있다. 깊은 통찰력으로 몸을 지킨다는 뜻이다. 범여는 충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명철보신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기』에는 가슴깊이 담아 둘 말들이 아주 많다. ‘기회 잡기는 어려우나 놓치기는 쉽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없애야 할 것을 없애지 않으면 화가 된다. 군자는 절교를 할지언정, 남을 험담하지는 않는다. 빛은 바래고 사랑은 시든다. 결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귀신도 방해하지 못한다. 패전한 장군은 병법을 논할 자격이 없다. 덕이 있는 자에게는 저절로 사람이 모인다.’주옥 같은 말들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는 여러 번 읽어 새로 들여다볼 생각이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삼국지』는 내가 읽은 『삼국지』가 아니라, 정사 『삼국지』다. 정사 『삼국지』는 『사기』『한서』『후한서』에 이은, 네 번째로 기술된 역사서로 위·촉·오를 거쳐 진(晋)이 통일할 때까지 흥망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인 진수(陳壽)는 당초 촉나라 사람이었으나, 촉이 멸망한 뒤 진나라의 사관이 되어 『삼국지』를 완성했다. 이를 송대 배송지(裵松之)가 주석을 달고 보완하여 재미를 더했다. 명대에 나관중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삼국지연의』를 썼다. 설화와 허구를 섞어 흥미와 박진감 넘치는 역사소설이 된 것이다. 연의는 재미와 현대인에게도 공감이 가는 문장 때문에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삼국지』정사에도 ‘난세의 간웅’으로 묘사된 조조는 실제 악인으로 평가받을 요소가 많았다. 그는 야비하고 간교하며 비판적 술책을 거리낌 없이 구사했다.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든 조조가 실권을 장악하고 위엄을 떨칠 때, 조조의 횡포를 보다 못한 조정 관리들이 비밀리에 조조의 집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반란은 허망하게 진압되고 모조리 붙잡혀 조조 앞에 끌려왔다. 조조가 말했다.
“불을 끄려 했던 자는 왼쪽에 그렇지 않은 자는 오른쪽에 서시오.”
왼쪽에 서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관리들이 그곳에 모였다. 그러나 조조는 “불을 끄려 했던 자들이 진짜 적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는 권모술수고 속임수였던 것이다. 조조는 평생 30회가 넘는 싸움에서 80% 이상 승률을 자랑한다. 그의 전법은 『손자병법』을 철저히 연구해 항상 정석을 따랐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는 싸움은 재빨리 퇴각해 불필요한 손실을 줄였다. 조조는 이런 방법으로 난세를 헤쳐나갔던 것이다.
유비는 조조와 달리 전쟁승률이 겨우 20%에 불과했다. 능력과 재주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덕으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나이 50이 되어서였다. 그 나이에 20대에 불과한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는 작전 계획을 그에게 전임시켰다. 그래서 만년에 충칭(重慶)과 청두(成都)가 있는 쓰찬성(泗川省)에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비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부하들의 힘이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관우·장비·조자룡 등 많은 부하가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다름 아닌 유비의 인덕 때문이다. 권모술수에 뛰어나고 엄청난 세력을 갖추었던 조조가 무능한 유비를 경계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조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덕을 갖추지는 못했다. 유비를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오나라의 손권이 성공하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방어형 전략을 훌륭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지도자로서 조조와 유비에게 없는 두 가지 장점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의 경영은 유연했고, 부하를 이끄는 방법이 남달랐다. ‘장점은 높이 평가하고 단점은 눈감아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조조는 엄격한 선별주의를 택해 능력 있으면 등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았다. 유비는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부하를 깊이 신뢰하는 온정주의였다. 둘 다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손권에게는 쟁쟁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과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 조조와 유비에 비해 다소 비중이 떨어지지만, 촉나라와 위나라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았던 손권을 보면 생존전략에서 귀감(龜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제갈량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가 여러 곳에서 차이가 난다. 제갈량은 작전의 귀재가 아니었다. 위험부담이 큰 계략은 절대 채용하지 않았다. 임기응변에도 뛰어나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그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히 행동했다. 제갈량을 신뢰한 유비가 뒷일을 그에게 부탁했다. 유선(劉瑄)이 왕위를 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유선은 부친의 유언대로 모든 국정을 제갈량에게 맡겼다. 이런 상황에서 매사를 신중히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제갈량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촉의 군사는 위의 7분의 1수준인데다 잔도(棧道)같은 험난한 길을 통과해야 했고, 조교(弔橋)를 통해서 이동과 물자공급을 한다는 것은 두 번의 출사표와 출전에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촉의 원정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손자병법』에 ‘승산없는 싸움은 하지 말라’는 말을 잘 알고 있던 제갈량은 싸움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는데 자신을 믿고 아껴준 유비의 간곡한 부탁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지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싸워 이기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패한 것도 아닌, 제갈량은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말년에 우장위안(五丈原)에서 제갈량의 사자가 사마의를 찾아왔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안부를 묻자 사자가 대답했다.
“공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사무를 보시고, 형장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직접 관장하십니다. 식사는 조금만 드십니다.”
이에 사마의가 혼자 중얼거렸다.
“제갈량의 목숨도 길지 않겠군.”
사실 형장 20대 정도의 형벌은 대대장이 처리할 일이지, 총사령관이었던 제갈량이 할 일은 아니다.
마지막은 『십팔사략』이다. ‘십팔사(十八史)는 송나라 대에 18가지 역사저작물을 말하는 것이고 략(略)은 저작물을 간추린 서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증선지(曾先之)라는 송말원초 인물로서 그의 저서로 남은 것이 이 『십팔사략』뿐이어서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원나라에 나라가 망할 위기를 의식하고 중국(한족)의 전통을 계승할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십팔사략』에는 3000년 전 황허 유역에서 주(周)왕조부터 시작된 중국 문명을 보여주는데, 그전 은·하가 있었다고 하나 전설의 왕조였다. 주는 문왕·무왕·성왕이 기반을 다졌고, 이들의 창업을 도운 조력자가 주공(周公)으로 훗날 공자는 주공을 이상적인 정치가로 칭송했다.
주공은 무왕의 동생이자 성왕의 숙부로 공을 인정받아 노(魯)나라 영지를 하사받았으나 바쁜 국정으로 임지로 떠날 수 없자 대신 아들 백금을 보내며 예의를 다해 백성을 섬기라고 당부했다. 3년 뒤 백금이 돌아오자 “꽤 늦었구나.”하면서 그동안 어땠느냐고 묻자, 백금이 “낡은 관습을 정비하여 새로운 규범을 제정하고, 삼년상을 지키도록 하다 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주공은 같은 시기에 제나라 영주로 떠났다가 5개월 만에 돌아온 태공망에게 “오호 굉장히 빨리 돌아왔구나.”고 하였는데, 태공망은 “저는 군신의 예를 간소하게 줄이고 백성의 관습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일찍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한 것을 생각했다.
“원래 명령이 복잡하면 백성들이 꺼리기 마련이다. 구속받는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백성 스스로 따르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헌데 백금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유감이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건설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이 많지만 간단히 사면초가에 빠져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항우가 지었다는 시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지만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때가 불리하고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리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야 우야 나를 어찌한단 말인가.
초반에 열세였지만 유방이 역전승할 수 있었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유방은 항우의 군대에 대항해 포위망을 만든 것을 들 수 있는데,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적에 대한 포위망을 풀지 않았는데 이것이 점차 효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이는 작전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간질로 적의 조직력을 약화시켰다. 첩보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군에 대한 원활한 보급체계도 승리의 요인이었다. 참모인 소화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으로 초반에 매번 패하면서도 곧바로 정비하여 결정타를 허용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 보급의 확보였다. 물론 유방과 항우 두 사람의 됨됨이도 한몫한 것이다. 유방이 부하들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공을 세우면 합당한 보상을 한 것과 달리 항우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나눠주지도 않았다. 스물다섯에 군사를 일으켜 서른에 결국 유방군에게 쫓겨 자살한 항우의 활동기간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결국 지도자가 조직의 힘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승패를 좌우한 것이다.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데는 한신, 장량, 소화 등 장수들과 모사꾼들이 많았다. 2년 전 시안에 여행 갔을 때 양귀비와 더불어 문화유적이 많았던 당나라 현종은, 은나라 주왕(紂王)처럼 처음부터 주지육림에 묻혀있던 폭군 군주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쌓은 실적과 명성을 허사로 많던 군주의 표본이다. 현종은 당나라 6대 황제로 44년 동안 보위에 있었는데, 27세 한창나이에 황제가 되어 의욕과 지혜로운 성군이었다. 현종의 시대를 ‘개원의 치’라고 하는 태평시대였던 것이다. 그는 결단력을 갖춘 군주였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현종 밑에 요숭(姚崇)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날 요숭이 신하들의 인사에 대해 현종의 의견을 물었으나, 현종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민망한 요숭이 물러가자 옆에 있던 측근이 물었다.
“재상이 정무에 대해 묻는 데 어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짐은 요숭에게 모든 정사를 맡겼소. 국가 중대사라면 몰라도, 관리의 인사 문제로 짐을 귀찮게 할 필요가 있소?”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폐하께서 정말 정치를 잘한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종은 말기에 이르러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마음이 느슨해져서 오로지 양귀비한테 묻혀 향락에 빠졌다. 틈을 노려 아첨하는 자들이 왕의 환심을 사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반란이 일어나 왕조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제왕이 제대로 나라를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지렁이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