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위를 부르심
막 2:13-
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3-17 / [레위를 부르시다;마9:9-13,눅5:27-32]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서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하셨다. 14) 그리고 얼마 후 길을 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섰다. 15) 어느 날 예수께서는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멸시받는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런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그때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평판 나쁜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당신네 선생은 저런 인간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거요?' 17) 예수께서 이 말을 전해 듣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시려고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도, 버려진 자도, 죄인도 예수님께서는 구원하러 오셨고, 그런 자들을 부르셔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레위를 부르신 사건은 어제의 본문과 마찬가지로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3-14)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 저자인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마태입니다. 레위의 직업은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걷는 세리였습니다. 돈 때문에 조국을 배신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레위를 소개할 때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아들의 직업은 부모에게도 큰 부담거리였을 것입니다. 알패오는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소원이 지어준 이름에 있습니다. 그것도 레위 지파처럼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 돼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한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위는 돈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자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14). 돈만을 쫓던 인생의 허망함이 주님의 부르심에 곧 바로 응답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5-17) 병행구절을 보면 레위가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벌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눅 5:29). 그런데 이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레위는 세리와 죄인들도 초대했습니다(15).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 세리와 죄인들이 초대되었을까요? 레위에겐 친구가 세리와 죄인들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직 레위만이 세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17). 병든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 병을 고치듯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세리였던 레위는 회심한 이후에 세리 친구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전할 친구를 찾아보십시오.
저는 초등학생 때에 저를 가르쳐 주신 교회학교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홀 어머님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머니는 고생하시면서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과로와 영양실조로 중병을 앓게 되어 죽음을 앞에 두고 의식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자기의 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이 떨어지는 손가락을 어머니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의 뜨거운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어머니가 살아나셨습니다. 부모님을 향한 선생님의 효심을 모든 사람이 칭찬했습니다. 어머니를 죽음에서 살려내야 한다는 선생님의 뜨거운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 설 교 >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 여러분? 혹시 MBC에서 방영되어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아십니까? 이 드라마를 낳게 한 ‘소설 동의보감’을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그가 내의원의 시험을 보기 위해 경남 산청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막에서 묵다가 우연히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그 소문이 온 동네로 퍼졌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환자들이 몰려왔습니다. 허준은 그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제 급히 떠나지 않으면 내의원 시험을 치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허준의 소문을 들은 환자들은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더욱 많이 몰려왔습니다. 마침내 허준은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내의원 시험을 포기하고 몰려온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허준은 참으로 대단한 의사였습니다. 의사의 본래 의무가 환자를 고치고 살리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다음 시험에 내의원의 궁중의사로 합격한 허준은 혜민서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왕궁의 왕족들을 치료하는 곳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편하고 생색이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허준은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하는 혜민서에 기쁜 마음으로 출근하였습니다. 그리고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돌보고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슈바이처요, 동양의 히포크라테스라고 부를만한 진정한 의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의사는 오직 병든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든 사람이라면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가려서는 안됩니다. 벼슬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환자라면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직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러한 의사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된 의사가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낮이나 밤이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영육을 살리시기 위해서 탄식하시며 일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영혼도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찾아오는 아픔과 고통과 좌절과 낙심과 절망으로 신음하는 인간들을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마태와 그의 친구들을 고쳐주고 계십니다.
다같이 14절과 15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시작)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때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건강한 자를 고치는 의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은 다 고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근심으로 고통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낙심으로 갈 바를 모르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갈 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직장 생활이 어렵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스트레스를 풀어 주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가볍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생활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이 참 쉼을 주시겠다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분명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 갔는데도 쉼을 얻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누구누구만 오라는 것이 아니라 '다' 오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있다면 누구나 다 오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누구나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분명히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조건 없이 믿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다 마음의 병도 치료받고, 육신의 병도 치료받는다고 말씀하시면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통계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치료되는 경우는 백에 하나 둘뿐이고, 열에 아홉은 고침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수많은 분들이 중보기도 했던 24살의 박지현 자매도 결국은 유방암으로 주님 품으로 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때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들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목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99세로 타계한 한경직 목사님은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단 3년만이라고 조국의 교회에서 봉사 하다가 죽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기도를 드린 후 70년이 넘도록 살아서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주안제일교회 나겸일 목사님도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고나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을 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큰빛광성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시면 조현주 집사님께서 지속적으로 들어오셔서 성경쓰기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란에 들어가 보시면 잘 알지도 못하는 암환자의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조현주집사님 남편인 임근수 집사님께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말기 암환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중보기도란에 실린 조현주 집사님의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목사님, 저는 그분의 직분도 알지 못하고 그저 제가 사는 아파트 저희 라인에서 몇 번 만났을 뿐입니다. 문혜경집사님(낙원떡집)께서 그 집의 딱한 실정을 말씀하시는데 제가 힘들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맘을 놓을 상황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웠을 때 목사님의 기도와 우리목장 식구들의 기도 덕분에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은 섬기는 교회가 없지만 그 가정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 제가 하는 기도로는 너무 약하지 않나 싶어서 감히 목사님께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큰빛광성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큰빛광성교회를 섬기는 가정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그 가정에 힘을 주세요. 목사님의 쎈(?) 기도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믿음이 무엇입니까? 백 개중에서 안 되는 구십 구개를 바라보고 믿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면 백에 하나라도 되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 보다 더 큰 일을 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아니 예수님이 하셨던 기적과 능력의 반도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사기꾼일까요? 과연 누가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요?
여러분? 또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는 산을 옮기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태산 같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문제들 앞에서 휘청거리며 살고 있습니까?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들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무능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기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세상 학문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추구하는 그 도를 아침에 들을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하물며 영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얼마나 진리를 갈망하면서 살아갑니까? 얼마나 믿음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헛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 시간 여러분의 가슴에 손을 얹고서 여러분의 신앙양심에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거대한 잠수함의 함장이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웬 불빛이 반짝거렸습니다. 즉시 함장은 신호를 보냈습니다. "좌측으로 비키시오!" 그러나 그 신호를 받은 상대는 오히려 "당신이 좌측으로 비키시오!" 라고 신호하였습니다. 화가 난 함장은 위험하니 속히 좌측으로 비키라고 또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똑같이 위험하니 어서 좌측으로 비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함장은 격분하여 이렇게 신호하였습니다. "나는 핵잠수함의 함장이다. 빨리 좌측으로 비키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겠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렇게 신호가 왔습니다. "나는 등대지기입니다!" 함장은 급히 좌측으로 방향을 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의 이성과 상관없이, 우리의 합리적인 논리와는 상관없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우주의 원리이며 법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중력의 법칙보다 더 확실하게 이루질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쉬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의사라고 말씀하셨다면 모든 질병을 고쳐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바로 죄인인 나를 부르러 오셨음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악들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깨끗이 용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부르십니다. 매일매일 나를 부르십니다. 매 시간 시간 나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진정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 놓으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의 무거운 모든 짐은 새털처럼 가벼워 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반대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못 마땅해 하며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의인된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고 시비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면 비웃습니다.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병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교만함을 보면서 마음이 상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곧 죽을 만큼 위태한 상황입니다.
여러분?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암'입니다. 암이라는 병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무지 아프지 않아서 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손가락이 잘려나가면 즉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에 걸리면 10년이고 15년이고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손을 댈 수가 없는 말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병자들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병에 걸렸는지 모르는 사람도 병자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환자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운 죄인들은 매우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험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허준 보다도, 히포크라테스보다도, 슈바이처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의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바로 죄인들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다, 죽어가는 저 사람들에게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참된 전도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즉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하나님께 모입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축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참된 주님의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나와 여러분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매일 매일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오라고 하십니다. 차별이 없이 다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는 사람들은 다 오라고 하십니다. 짐진 자들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병든 자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사업에 고통당하는 자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짐들로부터 우리를 쉬게 해주시려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주저하십니까? 왜 의심하십니까? 왜 흔들리십니까? 왜 예수님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살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의사이십니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만능의사이십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제 말을 맺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의 품으로 다시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면서 주님의 참사랑을 전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는 의원 / 박성복 목사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시고 이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가르치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릅니다. 다른 성경에는 마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의 레위와 마태는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는 산이면 산, 바닷가면 바닷가, 길거리면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고 “나를 좇으라”고 하는 그 딱 한마디에 돈벌이가 좋은 자리와 모든 것을 마태는 내팽개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 27절 여기에서도 이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친구나 동역자인 여러 세리 등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큰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불러주시고 제자 삼아주시고 이렇게 가까이서 섬길 수 있는 이 일을 생각하면 아마도 마태는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여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섬길 수가 있고, 또 가장 측근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는 최고의 축복된 자리가 사도의 길이요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그분 곁에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마태가 신약성경 중에 맨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데 참으로 가장 많은 내용들이 나오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나 천국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밝혀놓은 것이 마태가 기록한 이 복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아주 비난을 합니다. 가장 지혜롭고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신분이 아주 보잘것없는 죄인들인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저런 사람들하고 어찌 앉아서 먹고 마시느냐면서 강력하게 반발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먹기를 탐하는 자’라거나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라고 하면서 비방을 하는데 이런 비난의 소리는 이방인들이 하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의 입에서 이런 부정적인 소리를 하고 비방과 조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들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가에 붙어있는 티를 탓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오늘 여기의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 여러분,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그들과 함께 같이 앉아있는 것을 놓고 비방하고 힐난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기도할 때에 죄인들과 같이 있지 않다고 하면서도 상석에 앉기를 원하고 대접받고 환영받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인 것을 먼저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부족을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가버나움의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열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런 잔치를 안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마태가 자기 집에서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것처럼 큰 잔치를 배설하는 것을 보고 입방아를 찧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 사람들은 은혜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 앞에 뭔가를 책잡기 위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딱 한마디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라는 한마디를 딱 던졌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건강한 사람은 누굴 가리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강한 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가장 의로운 척하고 가장 잘난 척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외식주의자들입니다. 너무나 형식에 치우친 외식주의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단체를 바라보고 입을 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부족이나 자기의 잘못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남의 약점과 허물을 잡아서 비판하고 성토를 했는데 그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던진 말씀 한마디가 “너희는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너희는 건강한 사람이다. 너희는 절대 나를 필요치 아니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하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도 현대판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돈을 얼마나 움켜쥐기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절대 이 사람들은 돈을 풀지 아니하고, 정말로 상대방의 아픈 데만 찌르고 약점만 잡고 하는데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런 행동을 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 있다’고 했는데 그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자들을 병든 자로 주님께서 비유를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율법주의자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교인들은 영적으로 병이 많이 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육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많이 왔습니다만 자기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육적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고질병은 본인들이 잘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육의 병은 아픔이 있지만 그 영적 병은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병은 알지 못하고, 자기의 고질병은 알지 못하고, 항상 의로운 척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무시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세리들이에요. 세리들인데 그들을 가리켜서 매국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금을 중간에 착취한다면서 도적과 강도떼로 몹니다. 그리고 로마정부의 앞잡이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아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리들을 아예 상종치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로 말하면 친일파, 친북파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리들을 향하여 아주 손가락질을 하고 상종하지 않지요? 그 다음에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들은 누구냐면 창기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을 파는 매춘부를 창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 고향에는 이런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일부종사를 못하면 그 이부부터는 창녀다라고 해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가 한 번 결혼하면 생전 그 집에서 죽어나가도 일부종사를 해야 했습니다. 만약 남편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열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몇년전에 신문 기사를 보니까 열째 부인이라도 돈만 있으면 간다고 하는 내용이 났더라고요. 오늘날 이 세상은 돈이 주인이고 돈 앞에 전부 다 매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리와 매춘부인 창녀들은 아예 상종을 안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돈을 내서 선한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받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면 유리한데도 세리들은 법정에 안 세웁니다. 왜냐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들은 목이 마릅니다. 오늘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지금도 교회서 돈 소리가 많이 나고 사회에도 돈 소리가 많이 나고, 지금 이 세상이 돈 소리가 많이 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 봐보십시오. 이 창기인 여인들은 세상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세리들은 돈은 많지만 소외감을 느끼게 되니 그 무리들이 주님 주위에 둘러앉았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들은 예수가 필요한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말기 때도 어두워진 세상이라 정말로 그들에게는 빛을 원하고 생명의 빛을 요구하고 있을 때라 모였는데 그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 빛을 못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이 말라 애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기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봤을 때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 포근한 가슴을 그들은 느껴봤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세리와 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예 내놓은 사람입니다. 사람 취급도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영혼구원을 받는다는 소리가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현대판 바리새인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대판 의로운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그들은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타낼 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부족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대판 세리와 같고 창기와 같은 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으며, 정말로 우리가 마음의 병든 것, 육의 병든 것, 생활의 병든 것을 전부다 주님께 내놓는 그런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예수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자칭 지식인들입니다. 자칭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들에게는 내가 필요 없지만 세리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이런 죄인들과 창기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태복은 9장 12절에 보면 이 말씀이 또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인데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제사는 제사대로 드리면서 행동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자에겐 해당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참 빛을 보지 못하고 그늘에 가려진 자, 신음하는 자등 이런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 것을 말씀하시고, 오히려 교만하며 아픈 자에게는 더 아프게 하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더 괴롭게하는 자들에겐 제사보다 이런 행동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여기에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랬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는 어떤 죄인이라도 어떤 부족한 자라도 회개하는 자는 주님이 안아주시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이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오늘 이 시대가 어느 시대입니까? 이제 다시 주님이 오실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인심이 얼마나 야박한지 요사이 들려오는 소식들을 매스컴이나 신문지상에서 보십시오. 사람이 사람의 짓을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동물 중에 코끼리가 참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동물이더라고요. 그리고 또 날짐승 중에 가장 지혜롭고 아이큐가 높고 정말로 자기 부모를 섬기는 날짐승은 까마귀더라고요. 그 까마귀가 참 지혜가 있고, 늙은 부모를 섬기는데 까마귀가 날개가 힘이 없어서 못 날면 새끼 까마귀가 부모 까마귀를 먹여 살리는 그런 기사를 읽어보니까 세상에 이 까마귀보다 못한 인간들이 꽉 찼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옛날엔 까치보다 까마귀가 더 길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일본사람과 중국 사람이 대한민국의 까마귀를 흉조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이 까마귀가 울면 집에 초상이 난다고 하면서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전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그때부터이고, 중국 사람들이 그 까마귀의 길조를 흉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지 그전에는 까마귀가 우리나라에서 참 길조로 여겼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까마귀를 꿈에서 본다던지 까마귀가 집 앞에 날아오면 안 좋다고 말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까마귀만큼 부모를 잘 섬기는 조류가 없다고 그래요. 그걸 보니까, 지혜 중에 까마귀 지혜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고 보니 엘리야를 먹여 살리던 까마귀도 역시 그 까마귀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간에 오늘 여기에 계신 여러분, 그 전통을 자랑하고, 그 율법을 앞세우며 장로들의 유전을 앞세우는 자들은 그 천민들,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 시키고 그들의 가슴에다가 못을 박고는 하나님 앞에 회개도 하지 아니하는 자들보다, 오늘 여기의 세리와 창기들은 머리를 하늘을 쳐다보기조차를 두려워하고 그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데, 어쨌든 간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자기가 나타내기를 좋아하고 자기 것을 가지고 으시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싫어하시고 그저 세리와 창기들 같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그랬는데 다른 성경에는 ‘세리와 창기’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그 당시에도 그들이 천대를 받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당시의 창기는 사람대우 받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안아준 것이 주님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이분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소망이 생기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들은 세력이 있는 자가 아니고 없는 자들입니다. 잘 난자가 아니고 못난 자들이고 있는 자가 아니고 어려운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안아주시고, 보듬어 주시며 말씀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부어 주셨는데, 오늘 이시대도 그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교만한지 아십니까?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지 아십니까? 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까? 제가 지난번에 말씀 드렸죠? 돈은 훌륭한 하인도 되지만은 돈은 못된 주인도 됩니다. 나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붙들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항상 소금물을 마신 거와 같이, 돈은 항상 목마르게 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가지고 모신 자가 돈을 가졌을 때는 쓸 줄로 압니다. 여러분에게는 돈이 훌륭한 하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그만 악한 주인이 됩니다. 사람을 망쳐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고, 주님께서 우리의 의원이 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신 주님이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도 그 주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필요한 예수님, 내 마음이 괴로울 때, 나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내가 피곤할 때 힘을 주시는 주님, 내가 괴로워 눈물 흘릴 때 위로해 주시는 주님, 병든 자에게 필요한 그 주님은 내가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마음이 쓸쓸할 때에 꼭 찾아오시는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시는 그 주님을 준비하여 맞이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톨의 밥알에도 / 이병일 목사
어렸을 때에 식사에 대한 기억 중에서 중요한 것은 주변에 있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야지 식사를 했습니다. 식구 중에 한 사람에 주변에 있으면, 불러서 언제나 함께 먹었습니다. 저는 주로 뒷산이나 동네 어귀에 있는 개울에서 잘 놀았는데, 때가 되면 꼭 누나가 부르러 왔습니다. 아침에도 제일 먼저 집을 나가는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식구가 일어나서 함께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그 때부터 생겼습니다. 온 식구들이 함께 둘러앉아 먹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예부터 먹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민간 신앙에도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또한 먹는 방식을 통하여 공동체의 규율이나 전통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 하는 것은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엄격한 자격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각 문화권마다 먹지 못하는 음식으로 규정하여 터부시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까마귀나 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처럼, 힌두교인들은 소를 먹지 않고, 유대교인이나 이슬람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도 식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비난하였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맹목적으로 제의적 정결과 그 전통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율법학자들은 예리하기는 하지만 교묘하게 법망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법통 학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하라”는 명령입니다. “너희의 하느님인 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 이 명령으로 거룩함은 종교적인 삶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모든 면에서 유대인들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파인들에게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오죽하면 바리새라는 말이 ‘거룩하다’라는 말에서 나왔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단어 앞에는 거룩하다는 ‘성’(聖) 자를 붙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분리와 구별을 뜻하고, 심하면 차별을 의미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식사 행위에서는 언제나 거룩함이 제의적으로 구현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상적인 영역은 가장 성결한 성전처럼 이해하였고, 밥상친교를 구원과 관련되어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에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해졌습니다. “성전이 서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속한 것은 제단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식탁이 그를 구속한다.”(B. Berakhoth 55a) 제사장들의 관심이 성전 제사를 통하여 제의적 정결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에 입각한 일상생활을 통하여 제의적 정결을 얻고 지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땅의 제사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마치 자신이 성전의 제사장인 것처럼 정결한 상태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먹는 행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율법 전통에서 먹는 것과 관련된 구절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랍비 전승 중에서 67%(2/3)가 바로 먹는 것과 관련된 규정입니다. 이들은 음식을 위한 정결한 준비에 관한 법, 음식의 정결한 보관에 관한 법, 적법하게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법, 십일조 등등을 엄격하게 규정합니다. 또한 ‘밥상친교 법’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밥상친교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행위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도 함께 먹는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함께 먹는 이야기 이전에 함께 먹는 사람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길을 가다가” 세리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에서도 마가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길”과 “따름”이 있습니다. “따르다”(ἀκολουθέω)는 ‘좇다’라는 의미와 ‘제자가 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길의 복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언제나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고,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야 합니다.
세리인 레위, 그리고 함께 따라온 많은 죄인과 세리들이 이제 예수님과 함께 둘러 앉아 먹습니다. 여기에서 “비스듬히 기대다”(κατάκειμαι)와 “함께 기대다”(συνανάκειμαι)는 유대인의 먹는 자세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먹기 때문에 “먹다”와 “함께 먹다”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 중에는 “먹이고” “함께 먹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밥상에서 나누는 친교 속에 예수님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이 밥상친교로 상징되는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라면, 그 부름에 대한 따름은 함께 먹는 밥상친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됨에는 “따름”과 “먹음”이 있습니다. 따름이 제자 됨을 뜻하고, 함께 먹음도 역시 제자 됨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행위를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히 하느님의 성결 명령과 정결의 전통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먹고 먹이는 예수님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밥상친교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일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식사할 때마다 되뇌는 노래가 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요즘에는 너무 과해서 문제가 되지만, 음식이 귀해서 먹을 것이 부족할 때에 이 말은 복음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먹을 양식을 주십시오.”라며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속에는 나눔의 진정한 힘을 보여줍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으며 생존하고 생명을 키워가며 세상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활에서 중요한 3대 요소에도 먹는 것이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그것을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식의주(食衣住)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라.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서로 나누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생명의 생명권의 보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밥은 연대입니다.” 밥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유대를 만들고 연대하게 합니다. 함께 먹으면 서로 닮아갑니다. 함께 먹으면 서로 가까워지고 친구가 됩니다. 하늘땅 어린이들과 가끔 점심을 함께 먹을 뿐인데,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함께 먹는 사람들을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밥상으로 부르고 그들과 함께 밥상에서 어우러졌다는 것은 ‘세리의 친구’가 되고 ‘죄인의 식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밥상친교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가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식사는 그들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룩함은 동질성만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 자기들이 만들고 지켜온 규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을 인정하겠다는 동질성입니다. 그것이 심하면 배타성이 됩니다. 나와 다른 작은 차이도 차별의 구실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밥상은 죄인들까지도 한데 어우러지는 다양성이며 이질성입니다. 그것은 개방성입니다. 예수님의 밥상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인 것은 바로 개방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모두를 받고 모두를 품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도 예수님의 밥을 먹을 수 있고, 하혈하는 부정한 여인도 예수님의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밥을 먹는 행동을 통하여 당시 유대 사회를 갈라놓고 차별하는 중요한 벽을 허물었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정결함과 부정함,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을 철폐하신 것입니다.
차별을 당하여 움츠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을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룩함(holiness)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택받았다고 하는 소수의 차별적 거룩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온전한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느님 나라는 <이른바> 건강한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병든 사람은 치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죄인은 용서하고 용서받기 위해 함께 눈물 흘리는 공동체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생명을 불어넣는 기적(奇蹟)이라면, 밥상친교는 생명을 키워가는 일상(日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온전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선언입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지는 가을, 식구로서의 가족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명절에 혹시 나와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 어떤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는지 주위를 둘러봅시다.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이 사회에서 소수라는 이유로, 남과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에, 특히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둘러봅시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고 우리의 밥상으로 초대합시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서로를 닮아가며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갑시다. 쌀 한 톨, 밥 한 숟가락, 국 한 솥에는 생명이 있고, 나눔이 있고 연대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자라나고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을 안아주세요 / 조상호 목사
1999년 한국의 TV에서 방영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던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원래 허준은 조선시대(1546~1615)에 활동하던 의학자로서, ‘동의보감‘이라는 유명한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한방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조선시대 명의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라 평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양반과 평민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허준은 평민이면서도 양반집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평민이 양반집 딸과 결혼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서, 이것은 당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허준은 평민인 주제에 양반집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이유로, 모든 관직을 잃게 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귀향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왕비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자, 허준은 왕비의 병을 치료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왕비를 살려주었습니다. 왕은 왕비를 살려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풀어주려고 했지만, 많은 신하들은 국법을 어긴 허준을 풀어준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질 수 있다고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왕은 반대를 무릅쓰고 허준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왕족의 건강을 돌보는 왕실의 어의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결정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 다스릴 것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왕의 서슬 퍼런 이 말에 어떤 신하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허준은 귀향살이를 떠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법에 의해서는 용서받을 수 없었지만 왕으로부터 용서 받고 왕실의 어의가 된 ‘허준‘처럼, 율법에 의해서는 용서받을 수 없었지만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TV 드라마의 주인공은 ’허준’ 이지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입니다. 후에 그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물(The gift of God)'이란 뜻을 가진 ‘마태’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원래 그의 직업은 ‘세리’로 오늘날로 말하면 Tax Collector, 세무 공무원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당시 어부나 농부와는 달리, 나름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계산능력이 있어야 했으며 당시 통용되는 아람어와 헬라어, 등을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세리는 도둑, 살인자, 창기 등과 함께 천대 받는 사람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는 지식인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리들이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에서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해, 유대인들 중에서 세리를 고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세리로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이 부패하다보니 관리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세리를 임명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거액을 들여 로마제국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샀기 때문에 본전 뿐 아니라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중앙정부에서 할당한 액수뿐 아니라, 더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정부로부터 1,000불을 할당받았다면 2,000불의 세금을 거둬들인 후, 1,000불은 로마정부에 내고 나머지 1,000불은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습니다. 당시의 세금에는 크게 통행세와 인두세가 있었습니다. 통행세는 도로 통행료, 항구 사용료, 시장사용료 등의 명목으로 내는데, 세리들은 마차 한 대 당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마차를 끄는 말의 수나 바퀴의 수에 따라서 세금을 부과하곤 했습니다. 또한 인두세는 성인이 되는 나이인 14세 이상의 남자와 12세 이상의 여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인데, 세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나이를 마구 낮추었습니다. 나이가 점점 낮아지다 보니 나중에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는 태아에까지 인두세를 미리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엿장수 마음대로 가위질 하듯, 세리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해서 착복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세금을 거두었는지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산에 가면 사자가 있고, 동네에 가면 세리가 있다.”는 속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세리라는 단어는 욕에 들어가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빌어먹을 자식’,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 등의 욕이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이고, 서양에서는 ‘사생자’라는 욕이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가장 심한 욕은 ‘이 세리 같은 놈’이었다고 합니다. 세리는 법정에서도 증인이 될 수 없었고, 유대인이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회당도 출입할 수 없었고 심지어 세리가 낸 헌금은 더럽다고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당시 세리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세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능성의 시각’으로 세리를 보셨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정죄하는 시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인 레위는 통행세나 통관세를 거둬들이기 위해서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그를 보셨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눈으로 레위를 보셨을까요? 그가 동족을 등쳐먹고 산다고 경멸하는 눈으로 보셨을까요? 아니면 세금 얼마나 내야 하나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능성의 눈으로 레위를 보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지만, 앞으로 그가 위대한 복음증거자가 될 것을 꿈꾸며 미래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을 보고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다윗이 걸어 나온다. 다윗이 걷고 있어.” 주변 사람들은 그의 한심하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돌을 보면서 그 돌이 다듬어지고 깎여져 장차 다윗의 모습을 한 석상이 만들어질 위대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가능성의 안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우리들의 시각과 다릅니다. 우리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형제 안드레의 손에 이끌리어 온 시몬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시몬’은 갈대라는 의미이고,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지만, 앞으로는 어지간한 힘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베드로의 현재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앞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될 미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앞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될 미래의 모습을 보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목수가 나무를 나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고 버려진 나무 같은 우리들이 다듬어지고 깎여져서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될 훌륭한 재목으로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매우 실망스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실수투성인 자녀라 할지라도, 부족한 현재의 모습을 보지 말고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기 보다는 주님의 시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죄의 시각이 아닌 가능성의 시각으로 세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게 “Follow me!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현재 미완료형으로서, 한번만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에로의 초청이자, 제자에로의 초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일 뿐 아니라,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로 선택하신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빌립 같은 사람들은 고기를 잡아 생활을 유지하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또 시몬 같은 사람은 열심당원으로서 로마에게 빼앗긴 유대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던, 요즘으로 말하면 독립투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선발한 제자들이 비록 가문이 좋지 못하고 돈이 없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무식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손가질 당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가 들어있다는 것은 제자들의 팀웍도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위대한 스승일수록 자기의 제자를 뽑을 때, 훌륭한 제자를 뽑으려고 합니다. 서류전형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또 심하면 뒷조사까지 해서 할 수만 있으면 훌륭한 제자를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도저히 제자로 심을 수 없는 레위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활의 명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재활시키신다는 것입니다.
2005년 말과 작년 초에 한국의 ‘한화 이글스 프로야구팀’의 김인식감독이 신드롬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히딩크 감독과 김인식감독을 비교하는 책들이 서점가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김인식감독이 한국팀 감독으로 WBC(World Baseball Classic) 야구대회에 참가하여 미국과 일본 등의 강팀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한국팀을 4강에 오르게 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한화 이글스팀’은 2005년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꼴찌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팀으로 버림받은 외야수 김인철선수와 이미 은퇴하여 플레잉 코치를 하고 있던 지연규코치와 2002년에 사실상 야구를 그만둔 후 인기 탤런트 최모씨와 이혼과 사업 실패, 등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을 접고 야구경기 해설가로 활동하던 조성민씨를 다시 선수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실패의 아픔을 맛보았던 이 선수들이 김인식감독의 손을 통해 성장하여 ‘한화 이글스’가 돌풍을 일으키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결국 ‘한화 이글스’는 꼴찌후보에서 플레이오프에 출전할 수 있는 4강에 들어가는 깜짝쇼를 일으켰고, 그 다음 해인 작년에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어 한국팀을 세계4강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김인식감독에게 ‘재활의 신(神)’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김인식감독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재활시켰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반했던 베드로를 재활시키셔서 목숨 걸고 복음 증거하는 제자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으며 고생하던 여인을 재활시키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면서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 여인을 재활시키셔서 복음증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세리를 재활시키셔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재활의 신‘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어떠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고 포기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에게 기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가 장차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레위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다시 한 번 14절을 보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 본문에서는 단순히 ‘일어나 따랐다’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 5장 28절을 보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 동안 손가락질 당하며 벌어놓은 돈도 버리고, 힘들게 구한 호화로운 집과 값비싼 살림살이들을 버리고, 거액의 뇌물을 써서 힘들게 차지한 세리라는 직업도 버리고, 시간 날 때마다 즐기던 취미활동도 버리는 등,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가장 고귀한 예수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돈 때문에 민족도 잃고, 친구도 잃고, 인간성도 잃고, 양심도 잃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의 참된 목적과 목숨 걸고 달려가야 할 사명도 찾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도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에서,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위대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 미치는 위대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리인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을 때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이 생겼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다른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도 초대했습니다. 그 동안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던 그의 집에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맛있는 음식냄새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시며 그 동안 가슴 속에 쌓인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 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 불청객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로서, 트집을 잡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대를 받아 세리 레위의 집에 가셨는데, 트집을 잡기 위해 거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예수님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실 수 있느냐? 어떻게 민족을 배신하고 로마에 앞잡이가 된 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난하며 따지는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보실 때 의사의 눈으로 보십니다. 의사는 병든 사람을 보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문제 있는 의사라면 모를까 정상적인 의사라면 환자를 살리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2,000년 전, 죄인을 정죄하여 멸망시키러 오시지 않고, 영적 의사가 되어 죄인을 치료하여 살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죄하기 위해 오셨다면, 이 땅에 고발당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형사의 눈‘으로 보고 정죄했습니다만, 예수님은 세리를 ’의사의 눈‘으로 보고 용서해주셨습니다. 형사는 사람을 볼 때 조그마한 잘못이 드러나면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를 볼 때 병이 드러나면 치료에 힘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형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의사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향해 정죄하고 멸망시키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 1세는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사전에 왕실에 있는 신하들이 오리엔테이션을 해서 만찬을 드는 요령을 설명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만찬이 시작되자 한 추장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져서 그것들을 놓아두고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함께 만찬을 들던 영국 각료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치를 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만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온 손님들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남아프리카를 통합하자는 여왕의 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여왕이 나이프와 포크를 놓아두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그 추장을 책망했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왕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여왕의 모습이 우리 주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거절치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자리에 바리새인들처럼 잘잘못을 따지고 파헤쳐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형사와 같은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잘못과 허물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영적인 의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요즈음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한 운동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마 들어보신 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름 하여 '안아 주세요(free hugs) 운동‘입니다. 호주 시드니의 '후안 만이'라는 청년이 거리에서 '무료로 안아 드립니다.’ 라는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안아 주기 시작한 이 운동이,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포르투갈, 캐나다에 이어서 한국에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웃기는 일로 치부하던 사람들도 '후안 만이'의 진심을 알고는 동참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사람들이 웃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안아 준다'는 것은 포옹을 의미하는데, 이 포옹에는 사랑, 위로, 격려, 관용, 반가움, 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안아 주십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치고 힘들어하는 인생들을 그 품에 안아 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어떤 사람이든지 안아 주십니다. 믿고 의지하면 어떤 심령이라 할지라도 안아 주십니다. 저는 어떠한 사람도 거절치 않으시고 안아 주시는 주님께 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넓은 가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까이에 있는 친한 사람만 품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손가락질 당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따라가기(관심과 돌봄) / 임현수 목사
티파니 필드의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 Touch”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도 좋았고 식량도 충분하게 공급되었지만, 강 건너편 다른 고아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기본 식량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설이 좋았던 고아원 아이들보다 시설이 열악했던 고아원 아이들의 발병률이나 사망률이 크게 낮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몇 학자가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시설이 열악했던 고아원에 전쟁이 한창인 어느 날 자신의 아이를 잃어버리고 정신이 나간 한 엄마가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고아원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로 착각해 날마다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 고아원 간에 결정적 차이를 낳게 했습니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음식보다 사랑입니다. 사랑의 터치, 손길, 눈길, 집중적인 관심…. 그러나 이런 사랑의 터치는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한 것 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 삶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의 영혼을 ‘터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터치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치유 사역 집회를 통해서 느낀 것도 바로 이런 사람들의 필요입니다. 치유 받고자 소리치며 나오는 사람들… 사랑의 터치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 상처를 치유 받고자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시는 친절하고 사랑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병원에 갈 때 병 고침 받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 하지만 <그 병원이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캐나다 병원이 좋은 이유는 대부분 간호사들이 친절하기 때문 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세상의 죄인들을 접촉 할 때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만> 우리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다루어야 하느냐에 대한 모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어떻게 접촉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시는 모습을 주목해서 관찰해 보시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리 마태(레위)를 만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먼저 14절을 읽겠습니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여기서 <보시고>가 중요합니다.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 당시에는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었기 때문 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의 랍비는 세리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리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번 너무도 무안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칼가리 식당에서 북한 사람들(선수들)과 함께 나오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한국 분(65세 정도)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다가 인사를 나누는데… 이 분들이 북한 운동선수들이라고 소개 하니까… 어린 자식 같은 북한 선수들 앞에서 …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난 이런 사람들하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 싫어요… 그러면서 떠나가는데… 북한 형제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저도 어쩔 줄을 몰라…. 몹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어떤 인종 차별의식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민족에게도 배타감정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들.. 인도 사람들… 동남아 사람들.. 원주민들… 한국 일본, 유대인과 독일인,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
그런데 주님을 보십시오.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세리는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쓰레기였고, 민족의 반역자들 이었으며, 동족을 착취하여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자기도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반 민족주의자들 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당시 유대의 세리는 로마에 고용된 세리로서 일종의 세금 청부업자였습니다. 이들 세리들은 일정한 할당액을 대납한 후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악착같이 걷기 위해 억압과 착취를 예사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창기와 더불어 공인된 대표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로마는 강력한 군국주의 사회였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많은 수의 군사를 먹여 살리고, 또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 광활한 식민지로부터 거둬드린 모든 세금은 식민지 백성들의 혈세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로마의 세금제도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직접세로서 정세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당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 보유한 토지만큼 세금을 내는 토지세, 12세부터 65세까지 소득의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내는 소득세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가 정한 세를 직접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세리들이 파고 들어 더 많이 거둘 여지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관세로서 통행세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로 세리들이 노리는 세금이었습니다.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도 바로 이 통행세를 더 많이, 그리고 철저하게 거두어서 착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통행세에는 사람은 물론 마차마다 세금을 매기는 마차세, 그리고 그런 마차에도 바퀴가 많아지면 바퀴마다 세금을 매겨서 내는 바퀴세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물고기에도 물고기 세를 매겨 악착같이 거두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세금을 더 잘 걷기 위해 살인청부업자들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세리들을 유대사회에서는 아예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에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법정증인 자격도 없을 만큼 아주 천한 자요, 쓰레기 같은 자들로 분류되었습니다. 로마에 빌붙어 사는 반민족주의자, 반유대주의자들로 낙인 찍혀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고통스런 삶을 각오하고서라도 레위가 세리가 된 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이 뭐라 하든,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지독하게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고, 돈이 사람구실을 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가 세리가 되고, 돈을 얻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고귀한 가치들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얻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인 그 앞에서 굽신거리고 아첨하는 말을 하였지만, 돌아서면 침을 뱉고 욕을 해대었습니다. “똥파리, 날파리, 거머리, 매국노, 찢어죽일 놈, 인간쓰레기, 상종못할 놈” 이것이 세리 레위가 매일 뒤에서 들어야 하는 욕이자 저주스런 말이었습니다.
그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고독에 몸부림치는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철저히 소외되고 고통받은 저주스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레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세리로서의 운명에 걸려들어 그냥 고통스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신이 세리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러한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보셨다”는 헬라어 동사는 `이두`로서 보통 문장 처음에 쓰이는 감탄사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아주 놀랄만한 충격적인 일이요, 혁명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리 레위를 아예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세리 레위가 저쪽에서 오면, 반대방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저쪽에서 싫은 사람이 오면 아예 시선을 내리깔거나 다른 쪽으로 돌리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세리 레위를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피하고 다른데로 도망갔습니다. 세리가 유대인들의 기피대상 1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바라보시는 눈길은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세리 레위를 불쌍히 여기시며 바라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길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따스한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따스한 눈길로 레위의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비전과 가능성을 가지고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세리로서의 레위의 모습만을 보시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성경학자는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리를 보았을 때 그 안에 있는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버려진 인생 레위 속에 있는 위대한 인물 마태를 보신 것 입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 입니다. 결국 그는 이런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 합니다. 비록 천대 받는 직업이었지만 그래도 지식 있는 관리였기에 신약성경의 첫 책인 마태 복음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이 사람을 회피하시면서 <너 같은 인간은 상대하지 않아> 라고 하셨다면…
레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신 것 입니다. 그냥 쳐다 보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시고 보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 무조건 불쌍히 여기십니다. 한없는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보십니다. 또 예수님은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 미래 가능성을 가지고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동생 안드레의 초청으로 처음 나온 시몬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혈질의 사람, 충동적인 사람, 종잡을 수 없는 격정의 사나이, 변하기 잘하는 사람, 신뢰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 조변석개하는 사람…갈대 같고, 모래 같은 시몬을 향해 든든한 인류의 지도자, 반석으로 보시는 것이 예수님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 마리아 안에서 성녀 마리아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천한 여자… 막달란 마리아는 막주는 마리아로 변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까지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부활의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 나온 제자가 되었습니다.
1,500년 초에 이태리의 프로랜스라는 도시에 <도나텔로>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태리에서 대리석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채석장에 가서 자기 필생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 값비싼 돈을 지불을 하고 대리석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물건 가운데 어떤 것을 보더니 이것은 쓸모가 없겠다고 하면서 성당 뒷 뜰에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무명의 젊은 조각가가 그 버려진 대리석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돌을 보면서 꽤 괜찮은 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리석을 집으로 가져 갑니다. 2년 동안 열정을 퍼부어서 한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2년 후 1504년 1월 25일 프로랜스의 많은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이 조각상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거두자 프로랜스의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기억할 작품이다.>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저 유면한 <다비드 상> 입니다. David 상입니다. 그는 거친 대리석 안에서 위대한 다비드상의 가능성을 본 것 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러한 예수님의 관점을 배우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과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관점과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시선이 바뀌고 내면이 성숙해집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람 보는 관점을 새롭게 배워야겠습니다.
여러분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람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성령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어떻게 변할까? 라는 이런 가능성을 갖고 사람을 보십니까?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신 후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랍비들이 제자를 부를 때 쓰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신 것도 충격적인 일인데, 제자로 부르신 것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명성과도 관계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얻으신 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부담스러운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 레위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부르심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리로서의 인생을 청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욕을 얻어먹는 인생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생에서 참으로 귀한 성 마태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부르심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자신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습니다. 여러분, 교회에만 나오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당만 밟고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너희가 내 마당만 밟는 도다> 제일 불쌍한 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재미나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나아가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은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의 생활은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좇아가다 보면 그것이 너무 놀라워서… 너무 좋아서…그래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이 여자가 자꾸 귀챦게 합니다. 쫓아버립시다>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 만나려고 소리 지르니까…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잠잠하라> 고 꾸짖습니다. 이 불쌍한 소경이 빛을 보고 싶어서, 생명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 앞에 간절히 나오고 있는데 그 길을 차단한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데 가장 큰 방해요인이 무엇입니까?
교회 때문입니다. 교인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변질되기 쉽고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욱 변질되고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여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말구유정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 희생과 섬김 정신, 예수님의 종의 정신,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이 예수님을 놓치면 변질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만 촛점을 맞추고 죽어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세리 레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4b절을 보십시오. 그는 일어나 그 즉시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결단하여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세리로서의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처럼 결단하는 면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나를 따르라” “일어나 따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은 과감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분을 보면, 이런 인간 편에서의 대가 지불이나 결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자리에서 지지부진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주의 부르심 앞에 레위처럼 응답하시는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처럼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선입관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좇아 가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하면 <잔치를 연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감격하여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누가복음 5:29절에서는 “큰 잔치”라고 말합니다. 이 잔치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초청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로운 잔치를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비난의 소리를 퍼부었습니다.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리와 죄인과 함께 예수님이 정죄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로운 자들이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자기 생각과 잣대로 세리와 예수님을 함께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다 끌어안고, 그들을 모두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람들에게 죄인의 타이틀을 붙여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의인이고 다른 사람은 죄인이고…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정죄 풍토였습니다. 3장 4절에도 보시면 바리새인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중간기 400년 암흑 시대에 생겨난 하나의 분파입니다.
그들은 BC 165년에 일어났던 마카비 혁명의 후예들로서 모세의 율법 뿐 아니라 조상의 유전을 중시하며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하며 헬라 문화에 대해 서는 거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국자였고, 이스라엘의 도덕의 기준이었고, 이스라엘의 자존심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 당시에는 그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높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권위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통렬하게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23장)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종교의 변질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변질 되었을까요? 3장5절에 보시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막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지금 생명을 살리시려고 애쓰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마음의 완악함 때문 입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남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상태로 굳어진 마음을 말 합니다.
인격이 자라지 못하고,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화석화되면 이렇게 자기들의 종교적 주장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교리를 만들고, 내규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신조를 만들고, 전통을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완악한 이기주의는 독단적 신앙구조로 발전하여 변질되는 것 입니다. 독단적 신앙이란 말은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이 아닌 <nonessential> 한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절대화 시키고, 그것을 이슈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이것이 교파주의가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나는 로마 카톨릭이다. 나는 러시아 정교회다. 그리이스 정교회. 이집트 콥틱. 장로교다. 감리교다. 구세군이다. 침례교다. 회중교회다. 순복음이다. …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조와 정통을 고수하기 위해서 <헌법>을 만들고 <규칙과 법규>를 만들고 구체적인 내규도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제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종교 재판에 내놓아 죽이기도 하고, 출교시켜 버리기도 하고, 법대로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것을 저는 <종교적 이기주의의 화석화 현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란 원래 굴레를 말합니다. 제도와 조직을 벗어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교회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절대적으로 고칠 수 없는 고정된 교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고치고, 새로운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변화 시키고 예수님 닮게 만드는 것은 생명이지 어떤 인간의 조직이나 제도나 전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데 병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독단적 신앙구조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로교가 아니면 다 이단같이 여기고… 순복음이 아니면 교회도 아닌 줄 알고… 순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배타적입니까? 자기들만 full gospel 이고 …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교회에는 복음이 약하고 성령도 없고… 침례교는 재세례파가 되어서 다시 침례 받아야 하고… 카톨릭은 교황만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우기고 있고… 자기들만이 가장 전통적인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병든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런 바리새인들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교리와 조직과 제도와 전통이라는 독단적 신앙 구조 속에서 굳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미숙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법보다, 제도보다, 전통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성숙한 인격입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뜻은 바로 인격적으로 성숙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계속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생명을 살리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온 세상이 버린 세리까지도 소중하게 생각 하시고 사랑하십니다. 3장에 나오는 손마른 사람,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여러분 성경을 편견없이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가장 관심이 많으십니까? 나그네, 고아, 과부를 편애하실 정도로 소중히 여기십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사람 살리는 운동은 시작된 것 입니다.
예수님은 매춘부들, 세리들, 죄인들, 각색 병든 자들, 귀신들렸던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런 죄인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장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종교적 외식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세리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그를 자비로운 눈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세리는 돈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았기에 외롭고, 내적 불안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인정이 필요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 민족의 반역자,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상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공개적으로 세리들의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레위의 집에도, 삭개오의 집에도… 그리고 공개적으로 잔치를 열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세리들의 친구라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생명을 살리시는 운동을 하면서 오해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도 받으셨습니다. 핍박도 받으시고, 비판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오해와 누명과 비판을 받으면서도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기꺼이, 기쁘게 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캐나다 교회가 약해진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교회당은 많아졌는데도 왜 사회가 변하지 않을까요? 이웃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 입니다.
세상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북한을 죽이는 길도 쉽습니다. 그들을 욕하고, 무시하고, 격멸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죽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바리새인들처럼 완악해져서는 안됩니다. 독단적인 신앙구조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말로 행동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사람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생명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