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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글 | 김현재 전직 관우
내 고향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로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돼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진 곳이다. 나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내평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이던 해 6․25 사변이 일어났다. 내평리는 38선에서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6․25 전에도 38선을 지키던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서 수시로 분쟁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한밤중이라도 식구들이 강 건넛마을로 피난했다가 조용해지면 돌아오곤 했다.
6․25가 일어난 일요일 아침, 북산면사무소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늦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밖이 소란하다며 나갔다가 오시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춘천 가는 큰 길이 피난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고 놀라신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도 빨리 피난 가야겠다고 서두르는데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우리 식구는 칠순이 넘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나와 두 살 아래 남동생, 그리고 갓난아기인 여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였다. 아버지는 남동생을 업고 어머니는 여동생을 업은 채 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할머니께서 집을 지키겠다고 하시기에 다섯 식구가 서둘러 대문 앞을 나서는데 뒷산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피난민을 따라 춘천 쪽으로 뛰다시피 하며 걷는데 바로 뒤에서 총소리가 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파출소 가까이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뒷담 밑에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인민군 선발대가 지서를 집중해서 총을 쏘아대는 데 그 소리가 귀가 멍할 정도로 들리더니 잠잠해 지면서 총격을 멈추라는 듯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무서워 어머니와 나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도 쥐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그때 갓난아기인 여동생이 답답한지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기관총을 들은 인민군이 달려와 우리에게 손을 들라고 하면서 “우리는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러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그러고는 밖은 위험하니 가만히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남동생을 업고 바로 뒷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에 살던 노부부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 아버지는 어린 동생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인민군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인민군 2명이 나타나 아버지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거짓말하면 총살하겠다는 말에 다섯 살 난 남동생은 무서웠는지 울며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침착하게 “나는 면사무소 옆에서 조그만 잡화상을 하는 사람이요.”라고 하니 인민군 한 명이 손을 보고는 “장사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손이 깨끗하냐.”면서 노부부에게 아버지의 말이 맞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수년 전부터 만물상을 하고 있다.”며 자신들이 보증한다고 말해 위기를 면했다.
밖으로 뛰쳐나간 남동생은 춘천으로 가는 길로 걷다가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데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면사무소 직원이 멀리서 알아보고 집으로 데려가 보호해 주셨다. 총소리가 멎고 사방이 조용해져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는 동생을 찾아 나섰는데 그분 덕에 남동생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면사무소와 지서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 걸었다. 38선을 넘어오는 마차 부대가 짐을 가득 싣고 온종일 춘천 쪽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회계 담당으로 금고 열쇠를 갖고 강 건넛마을로 혼자 몸을 피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숨어 있는 아버지를 인민군이 찾아와 면사무소 금고를 열라고 했다. 아버지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하니 인민군은 다음날 정오까지 면사무소로 와서 금고를 열지 않으면 인민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숨어 있던 집 돌담 사이에 금고 열쇠를 감췄는데, 찾을 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다행히 고맙게도 집주인이 담을 헐어 녹슨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열쇠를 갖고 면사무소로 가 금고를 열고는 현금과 유가증권을 보이며 인수증을 써 달라고 했다. 인민군이 인수증을 써 줄 수는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부자간에도 돈을 세어 받는 것이 우리 관습이 아니냐.”고 따져 결국 인수증을 받아냈다. 그 덕에 국군이 수복한 후 금고 문제를 따졌을 때 인수증을 보여줘 별 탈이 없었다.
우리 식구들은 북한군이 점령한 3개월여를 고생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밀려 후퇴하면서 다시 평화를 찾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추운 겨울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라 춘천을 거쳐 마석에서 한 달간 머물며 피난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피난민을 상대로 마석 읍내에서 노점상을 했다. 그런데 피난민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홍역이 퍼져 남동생이 홍역에 시달리다가 치료가 부실한 탓인지 어린 생명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가운데 남쪽으로 피난 가야 한다고 해서 할머니를 모시고 외가 식구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원주까지 갔다.
큰 외삼촌은 개인 트럭을 몰았는데, 군에 징발돼 직접 운전하면서 차를 관리했다. 문막에서 외가 식구와 우리는 큰 외삼촌을 만나 걷는데 힘들어하시는 할머니와 나, 한 달 전 아기를 낳은 이모님과 나와 같은 또래의 외사촌들은 외삼촌 트럭을 타고 여주에서 어른들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외삼촌 차를 타고 후퇴하는 군인들과 함께 영주까지 가서 방을 한 칸 얻어 한 달간 피난살이를 했다. 다시 전세가 호전돼 국군이 밀고 올라가 원주까지 와서 며칠 지내다 식구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전세가 불리해 듯해서 남쪽으로 가려는데 민간인은 징발한 차에 탈 수 없다고 해 하는 수 없이 할머니와 나는 걸어서 충주까지 내려왔다. 할머니는 체력이 떨어져 이모님과 외사촌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행과 헤어져 나를 데리고 자꾸 시골 길로 들어섰다. 도시는 위험하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밥을 얻어먹으며 추운 겨울 산길을 헤매다 충주 달래랑 부근에서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것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고맙게도 할머니와 나를 데리다 집에서 쉴 수 있게 해줬다. 우리는 그 집 건넛방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식사를 못 하시더니 그만, 내 손을 꼭 붙잡고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주인집 아저씨는 난리 통에 할머니를 뒷산에 묻어 주시고 부모님을 만나면 전하라면서 편지를 써 주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던 그 집은 인적이 드문 달래강 언저리에 외롭게 한 채밖에 없던 집이었는데 아저씨는 고맙게도 나를 데리다 읍내에 있는 밥집에 맡기면서 “여기 있다가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을 꼭 만나라”고 하셨다.
지서 앞 밥집에 며칠 있으니 눈치가 보여 그 집을 나와 혼자 무작정 북쪽으로 걸어갔다. 달래강 근처 미군 부대 부교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를 만나 내 딱한 처지를 말씀 드리니 한 흑인 미군 아저씨에게 나를 강원도 춘천까지 데려다 주라고 부탁하셨다. 덕분에 미군 트럭을 타고 홍천까지 왔지만, 교전 중이라 민간인은 더는 갈 수 없다고 해서 후방 부대를 찾아가는 국군 아저씨에게 나를 맡겼다. 국군 아저씨와 걸어서 경북 영천까지 내려와야 했다.
국군 아저씨는 부대로 돌아가야 해서 나를 고아원에 맡기려 했다. 하지만 고아원도 만원이라 더 받을 수 없다는 말에 혼자 남겨진 채 서성이다 마침 귀향하는 의용군을 만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니 자신들도 목적지가 서울이라며 같이 가자고 해 다시 고향을 찾아가게 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여러 날을 노숙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탓인지 몸에 열이 나면서 기침과 함께 앓기 시작했다. 의용군 아저씨가 나를 업고 경북 문경까지 왔다. 장마라 비가 계속 내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파출소 앞집 처마 밑에서 쉬고 있었다. 의용군 아저씨가 그 집, 주인 아주머니께 “아이가 병이 났으니 당분간 맡아 주시면 고향에 사는 부모에게 연락해 찾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사정해 잠깐 그 집에 머물게 됐다.
며칠 동안 심하게 몸살을 앓았지만 따뜻한 방에서 쉬니 밥도 챙겨 먹어선지 금세 건강을 회복했다. 이 댁 주인인 성 씨 아저씨 내외는 아들 셋과 딸이 셋인 대가족으로 농사를 조금밖에 짖지 못하는 소농가였다. 나는 여기서 부모님이 나를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2년 가까이 살았다.
학교 다닐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밥값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게를 지고 나가 산을 돌아다니며 땔나무를 구했다. 어느 날 청평이 고향인 피난민을 집 앞에서 만나 “나는 본적이 가평이고 살던 곳은 춘천”이라 이야기했더니 이들이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보겠다며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꼭 기다리라 당부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이들이 가평에서 잔칫날 모여 피난살이 이야기를 하는데 경상도 문경지서 앞에 춘천 살던 아이가 부모를 잃고 더부살이하고 있다는 말을 친척 한 분이 듣고는 춘천에서 쌀가게 하시던 부모님께 연락했다. 마침 다니러 오셨던 외할아버지가 벌써 1년 전 이야기니 지금도 그곳에 있을지 확실하지 않으니 당신께서 직접 문경으로 가 찾아보겠다고 하시고는 봇짐을 지고 문경 경찰서로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서 앞에는 그런 아이가 산적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외할아버지는 문경군에 파출소를 모두 들러 찾아보기로 하셨다. 일곱 번째 파출소인 마성면 신현리 파출소를 들리던 새벽, 여관방에서 잠을 취하는데 꿈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산신령이 나타나 긴 담뱃대로 할아버지를 깨우며 “현재 봤지?” 하는 통에 깜짝 놀라 깨셨단다.
외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앞산을 향해 절을 하고는 ‘오늘은 꼭 외손자를 찾게 해 달라.’고 기원하고는 오전에 마성면 신현리 파출소를 찾아가 경찰관에게 내 사진을 보여 주면서 물으니 길 건넛집에 산다는 말에 경찰관 아저씨와 함께 집을 찾아오셨다.
나는 그때 오전에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오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산에 가려고 낫을 갈고 있었다. 양어머니께서 “현재야, 할아버지가 너를 찾아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뛰쳐나가 보니 동네에서 호랑이 할아버지로 소문났던 외할아버지께서 서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얼싸 안고 할아버지와 나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이발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룻밤을 할아버지 품에 자고 이튿날 버스를 타고 문경새재를 넘어 원주 외가에 도착했다. 외가에서 외할머니, 외삼촌을 만나 하루를 쉬고 나보다 한 살 위인 외사촌 형 옷으로 갈아입고 큰 외삼촌이 나를 데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춘천 집으로 갔다.
낙원동에서 쌀가게 하시던 어머니는 먼발치서 큰 외삼촌이 손을 잡고 오는 아이가 조카인 줄 아셨던 모양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를 확인하고 뛰어와 덥석 끌어안으셨다. 그러고는 “이게 꿈이나 생시냐” 하시며 울음을 터트렸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눈물바다가 된 우리를 보면서 손뼉 치고 축하해 줬다.
병환으로 누워계시던 아버지도 벌떡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피난길에 충주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면서 땅을 치고 통곡하셨다. 집에는 이제 4살 된 어린 누이동생만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지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 어머니가 네 오빠라고 하니까 낯선 듯 아니라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집을 찾아온 그 날부터 병상에서 일어나 가게 일을 보면서 건강을 되찾으셨다. 내가 집을 찾아오던 해에 휴전이 이루어지고, 그 해 충주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해를 찾으러 갔다. 아버지와 큰 고모부가 나를 앞세워 충주 달래강변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고맙게도 그 댁이 아직 그 곳에 살고 있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적어 놓은 메모지를 찾아 음력 2월 1일이 제사인 것을 알게 됐다. 몇 년 후 윤달에 할머니의 유해를 가평 선산으로 모셔왔다.
6・25사변이 나던 1950년 7살이었던 내가 63년이 지난 지금 70세의 노인이 됐다.
나는 지금 손자 다섯을 뒀는데 큰손자가 9살이다. 내 간절한 소망이라면 우리 민족의 동족상잔 비극인 6・25의 참상을 회상하면서, 정전 60주년인 올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 후손에 물려줬으면하는 바람이다
*1953년,집을 찾아와서 누이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
추신;본문은 월간 “관우”지 10월,11월호에 실린 수필입니다.
6.25 사변으로 폐허가 된 춘천 시내의 모습
1.4후퇴때 피난민의 행렬
첫댓글 우리 모두 6.25때 몇번을 죽을뻔 하며 살아 왔지만 고생 많이 했구나 살아 있어서 우리 만남이 있구나 고생했다 나도 고생 억시게 했데이
우리가 대부분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눈물이 저절로 빰을 적시는 생생한 글입니다.
지금 세대는 이해못하겠지요.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입니다
여하튼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위로는 되지만 빨리 통일이되여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옛 날의 고생을 되새기며 짠하고 가슴 뭉쿨한 마음인데, 이제 흰 머리 카락의 고희가 넘었습니다
현재씨 생생한 글 고맙고 참으로 고생많았습니다
6.25 사변 때 나도 7살이었는데 그때 나는 춘주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집은 지금 춘고 건너편에서 조금 위쪽에 있었는데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피난민들이 비를 맞으며 한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선하다. 그리고 피난길에 여러가지 고생한 기억은 나는데 현재처럼 정확하지 않다. 현재는 기억력도 좋고 글재주도 있어 이런 좋은 글을 남겼구나. 수고 많이 했다.
아주 옛 기역를 생생하게 표현 하였네요. 귀한 사잔도 보관 하시고... 울라지보스톡 기행문 등등 글솜씨가 대단 하구려 !
수필가로 등용 하세요.
옛날 기억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니 놀랄수 밖에 없구료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구료
그래도 똑똑하고 대찬 어린이었던가 봐요 그험한
일을 슬기럽게 버터온 힘이
장하기만 보입니다
이제는 옛날 말울 할수 있는
현실에 서있는 우리는 또다시 동족상전의 아픈 일이 알어나지 않기를 바라야갰어요 힘들지만 노력 해야 겠읍니다
" 자손에게 더 이상 아픈 고통울 남겨서는 안돨겁니다
노력합시다!!" ♥
현재야! 6.25참상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보는듯 생생한 추억이 아주리얼하게 표현 되어
우리를 감동 하게하는군요 !
이런글을 널리 알려 지금도 준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나도 6.25때 피난나와서 9.28수복이되서 고향에 돌아갔다가 1.4후퇴때 다시 피난나오면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자네글을 읽고 다시 생생하게 옛기억이 되살아 나는구나. 이대로 더 늙어 그나마 기억을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나마 남겨야겠다 생각이 든다. 고생많이 했구나. 정말 우리세대에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