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를 심다
그래요
외로움은
땅 속에 묻어 두는 것
몇 달
푹 썩혀서
거름이 될 때쯤
천천히
갈아 엎으리라
순한 고추 심으리라
여린 가지들이
지주목에 기대어
거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새빨갛게 익으리라
배추흰나비
어릴 때
솎아 먹고
봄동으로 꺾어 먹고도
살아 남은 몇 포기
노란 배추꽃에
착륙한
배추흰나비
노를 저어 어디 가나
검정 고무신 다섯
- 섯알오름 소고
누가
아버지를 빨갱이로 낙안찍었나
6.25 피바람에 밤 2시 예비검속자*들 싣고
달리는 GMC에서
벗어 던진 고무신
칠석날
한 줄로 세워
탕, 탕탕 쓰러진 후
아버지 고무신 따라
찾아간 섯알오름 탄약고
막아선 철조망 잡고
통곡하는 어머니
7년 애원 끝에 해제된 출입금지
파헤친 구덩이엔 뼈와 뼈 엉겨 붙어
누군지 알 수가 없어
백조일손百祖一孫** 되었다
견우직녀 만나는 밤 집마다 향을 피워
제사상 영정 앞에 한 잔의 술을 올리고
엎드린 어머니 아들딸
흐느낀지 72년
원혼이 서려 있는 학살 터 길을 돌아
추모비 앞에 서면 명치를 꾸욱 누르는
다섯 쪽 검정 고무신
가득 고인 하얀 눈물
* 6.25 전쟁 초기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라고 미리 잡아 가두었던 사람들
**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한 자손이 되었다는 뜻
4월의 평화공원
4월
동백꽃이
뒹구는 거친 오름* 자락
억새밭
뚫고 나온
여린 고시리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묵념만 하고 있다
늙은
휘파람새
행불자 묘비 위에 앉아
호오익
호오오익
수백 번 호명해도
벚꽃만
꽃비처럼 날리고
침묵으로 답할 뿐
* 4.3평화공원이 있는 오름
- 시집 『농막일기』 동학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