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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사 믿음
성경 66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시조인 아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고,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알리는 내용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된 인간이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제시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만 얻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 유일하고 표준적인 구원의 믿음에 이르는가 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너무 섬세하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으로 친히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모범적인 답안까지 보여 주시면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친절히 가르쳐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바른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심에도 불구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는 이들은 항상 많지 못하다.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분명하고 바른 믿음에 대한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해 주셨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오해와 그릇된 믿음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일까?
성경은 믿음에 대하여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물론 그 가르침에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린아이들처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믿으라는 교훈이 분명히 들어있다. 믿음의 길이 어렵다기보다는 쉬운 것도 어려운 방향으로 풀어가는 인간의 비뚤어진 기준 때문일 것이다.
1) 인간의 자아와 바른 믿음의 상관관계
인간에게 있어서 자아와 이성(理性)은 참으로 소중한 역할을 한다. 이성이 있기에 동물과는 구별된 행동과 사고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흔히 흉악한 범죄자들을 일컬어 이성 없는 동물과 견주어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이성이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모든 면에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이 가진 이성의 범위를 한참 뛰어넘는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심각한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처럼 참으로 소중한 이성이 어떤 경우에 그릇된 방향으로 작용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는 성경적 믿음과 거의 비슷하여 아주 혼돈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타락된 인간의 본성을 기준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으려는 인본적인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인본적인 믿음은 매사에 인간의 머리와 자아가 중심이 되어서 믿게 되는 믿음의 한 형태이다. 이런 움직임은 기독교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할 정도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형 가운데 분명한 두 흐름이 함께 흘러간다. 하나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신본주의적인 믿음이고, 하나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인본주의적인 믿음의 흐름이다. 이런 흐름은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 때도 교회 안에서 큰 문제점으로 작용되었던 듯하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위의 말씀은 인간의 철학적 사고를 근거로 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계이다. 바울이 사역할 당시에 이미 똑똑하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철학적 사상이 가미된 인본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도들 당시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특별함이 작용했던 듯하다.
역사에 그 이름을 올렸던 많은 나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진 나라에 대하여 묻는다면, 단연 고대의 그리스를 꼽는다. 이처럼 철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기의 유럽 지역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그리스 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이성과 자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음이 분명하다. 오죽 했으면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당시 식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이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최고의 선은 무엇이며,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냐에 대해서 나름대로 심오한 논리를 펴가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이들 중에는 인간의 이성이 만물을 분별하는 최고의 척도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인간의 자아와 이성이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이다. 인간의 자아가 아무리 최고의 선을 추구하여도 죄와 사탄에게 사로잡힌 관계로 그 누구도 죄의 흔적이 묻지 않은 완벽한 선을 이끌어 낼 수 없다(사 59:4-9 참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도록 인간의 자아가 죄에 의하여 단단히 ‘세팅’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인간의 자아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바른 신앙을 가지는 데에도 인간이 가진 자아의 협력이 없이는 뭐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나아갈 바를 밝히 비추어도 이성과 자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신앙은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으며, 제대로 된 회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코드 뽑아진 전자 기기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전혀 비상식적인 사이비 종교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도 건전한 이성과 바른 자아의 코드를 뽑아버리고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미혹의 교리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 시대의 기독교계 타락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도 지나치게 자아를 앞세운 지도자들과 자아를 완전히 무장해제한 일반 신자들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성경은 신자들에게 교회 사역자들의 언행일치에 대하여 주의하여 살펴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전하는 믿음을 받을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 시대의 기독교계는 교회 운영 및 사역자들의 부끄러운 문제들이 곪아 터져서 온 세상에 다 알려지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은 교회와 사역자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전혀 상식 밖의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신자들의 이성적인 판단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질 발언을 하여 전체 기독교를 온 세상에 비난받게 하고도 제대로 된 회개조차 하지 않는 목사를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며 따르는 이들이나, 비리를 저질러 세상 법정을 드나드는 목사를 친위대처럼 따르는 신자들의 이성은 결박되어진 모양이다.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교회가 잘못 운영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질책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어느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섬겨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인본적인 신앙에 대하여 경계를 하는 이유는 이성과 자아를 완전히 버리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세우지 말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냉철한 이성을 사용하여 분별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인도할 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이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억압하시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 문을 두드려 노크를 하여 동의를 구하시는 분으로 아가서와 계시록 등에서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을 깨워서 깨닫게 하시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시대
산업사회로 바뀐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고 분주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과거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여 삶의 자세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살아가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여 업무량이 늘어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슴으로 받아들인 후 찬찬히 소화하여 깨달은 것으로 살아갈 만큼의 시간적, 정서적인 여유가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머리를 복잡하게 써야 할 일들이 많아졌고 빠르게 회전을 시켜야 하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번개같이 회전을 시켜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너무 복잡한 일들과 홍수처럼 밀려오는 많은 정보들을 소화해 내야 한다. 그러다보니 도저히 인간의 머리만으로는 다 처리할 수 없어서 인간 머리의 기능을 보조해 주는 계산기와 컴퓨터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덕택에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여 비상할 정도로 두뇌의 기능이 강화되기는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머리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머리로 접근해서는 안 될 영역마저도 먼저 머리를 들이대는 경향이 생겼다는 점이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나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나 여타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먼저 머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켜 계산하는 경향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아진 것이다. “나에게 덕인가 손해인가를 헤아려 가면서.”
가슴깊이 받아들여 정제되고 절제된 차분한 결정을 따르기보다는 매사에 머리를 급하게 회전시켜서 산출된 값을 근거로 하여 가부를 결정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다. 매사에 항상 머리를 먼저 회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습관화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신앙의 문제마저도 먼저 머리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신앙은 머리나 가슴이 아니고 영혼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불완전하고 잊기 쉬우며 얕은 인간의 머리에 먼저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많아진 것이다. “마치 길가나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그렇다보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중심을 강타하지 못하고 귓전만 살짝 스치는 듯한 가벼운 믿음의 소유자들이 많은 것이 아닐까?
3) 이성적 접근이 가능한 기독교
기독교는 역사적인 충분한 자료와 근거가 있어서 고고학적으로나 현상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많은 증거들이 풍부하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이 요구하는 객관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물론 성경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지만, 그런 부분은 인간에게 있는 종교적 감정의 작용으로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인류와 역사에 끼친 영향과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인간의 머리로도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하여 충분한 공감과 납득할만한 인식을 하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인간의 품성에 내재된 종교 감정을 통하여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외형상 기독교의 신앙과 거의 유사한 종교적 형태가 사람들의 이성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4) 착각을 일으키는 인간의 이성
이처럼 인간의 이성이 빚어내는 착각 현상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임신을 간절히 원하는 여성들에게 가끔 ‘상상임신’ 증세가 나타난다. 임신을 원하지만 오래 동안 임신이 되지 않는 여성이 지나치게 임신에 집착을 하다보면, 간혹 임신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임신을 한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도 약간 불러오고 입덧도 하는 등 전형적으로 임신이 된 것과 거의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상상 임신을 한 여성은 진짜 임신을 한 여성처럼 한참동안 임신을 한 것 같은 증세가 나타나지만 결코 아기를 출산하지는 못한다. 마음으로 임신을 간절히 원하다보니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려서 꼭 임신을 한 것처럼 이성이 마비되어 착각을 한 것이다.
기독교를 단지 이성적으로 이해를 하고 자아를 통하여 생긴 신념 위에 종교 감정까지 더해져서 생긴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과 거의 흡사하지만 결코 올바른 기독교 믿음이 아니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자들은 열심과 확신이 대단하고, 또 자신들이 믿는 교리나 종교적 체계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들의 믿음이란 스스로의 착각에 빠진 이성적 오류와 종교적 감정으로 인해 사탄의 영에 의해 속고 있는 것이다.
5) 유사 믿음의 완벽한 위장
그들의 믿음은 단지 자신의 머리와 자아로 말미암은 인식의 틀에서 생겨난 관념 위에 종교적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형성된 종교 감정이 덧씌워졌을 뿐이다. 이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여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서 희생적인 봉사와 활발한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계에서 지도자 역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성과 성경의 가르침들이 인간의 마음속에 인식되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종교 감정까지 결합되어 안팎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믿음과 거의 비슷한 종교적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한 교리와 자아에서 생긴 신념과 종교 감정이 더해져서 자신의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확신을 가질 것이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죽는 순간까지도 기독교의 참 신앙이 아닌 짝퉁 믿음에 자신과 남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가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이 교훈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마 7:22, 25:44 참조).
착한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적인 범위 내에서 자신의 역량만큼 활동하겠지만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양심적이지 않은 이들이 기독교를 인간의 이성적 인식과 종교 감정으로 받아들여 유사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는, 그의 모든 활동 영역은 그의 야망을 달성시키는 것들로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의 감동이 아닌 인간의 이성과 종교 감정(성령을 가장한 사탄의 역사)으로 믿는 이들은 그들의 행위로 분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6) 자아적 믿음은 자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에서 비롯된 관념이나 신념적 믿음의 형태를 가진 이들은 결코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는 수준의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에게 큰 손해나 세속적인 이익이 달린 문제를 만나게 되면, 인간의 자아는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평상시에 기독교의 신앙과 거의 흡사한 믿음을 가졌던 이들이 믿음을 시험하는 난관을 만나게 되면, 이성과 자아가 동요를 일으키고 자아로 말미암은 짝퉁 믿음은 더 이상 그 기능이 작동을 멈춘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신념은 인간의 머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유효할 뿐 진정한 믿음의 영역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유사 믿음도 한참 동안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평행선을 이루며 같이 갈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따라 하기는 무척 벅차지만 마음으로는 공감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가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길을 성경은 제시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위와 같은 성경 말씀은 신자들에게 단지 추상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바른 믿음의 신자들은 반드시 위의 말씀처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마땅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남을 사랑하라는 것까지 따라하기는 벅차지만, 거부반응까지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이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외우기는 쉬울지 몰라도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남을 위하여 멀쩡한 내 목숨을 바치라 하고선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런 표현은 돈 몇 푼조차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인간의 정서에는 도무지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신앙의 근거인 성경말씀과 넓은 간격이 있지만 좁힐 마음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성경 말씀과 자신과의 사이에서 일치하지 못하는 넓은 간극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간극들을 더 좁히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도 없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결코 적지 않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전에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구매한 자동차의 성능을 확인한다. 최근 유럽의 한 자동차 회사가 운행 기준에 미달되는 자동차를 서류상 조작하여 판매하였다가 천문학적인 벌금과 손해배상을 물고 리콜까지 하게 되었다. 몇 년 정도 사용하기 위하여 구입한 자동차나 전자 기기는 반드시 그 제품의 표준 성능의 충족을 요구한다. 아주 미세한 부분이라도 보상을 요구하고 리콜을 해서라도 표준에 제시된 성능을 충족시키려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바른 믿음은 영원히 거할 집이요 영생 그 자체이다. 이처럼 소중한 자신의 믿음이 성경말씀과 넓은 괴리감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와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이 가진 자동차나 전자 기기들이 약간 표준에 미달되는 것만큼도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그랬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앞서서 그러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그런 믿음이야말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그릇된 믿음임을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믿음의 근거인 성경 말씀의 중요한 부분들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조차 없음은 무슨 이유일까? 바로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아로 말미암은 짝퉁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성령의 비추심이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이 성경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때 절대로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약 4:8-9 참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하신다고 강조하였다. 이 소원은 물질을 더 가짐도 아니요 명예를 더 가지기 위함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도 점도 없는 자신으로 세우기 위하여 더욱 온전한 믿음에 이르려는 성도들의 거룩한 소원인 것이다. 바울도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의 몸을 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굴복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 소홀해서 좋을 일이 없겠지만 특히 완벽을 기해야 하는 더 소중한 일은 분명히 있다. 예전에 자동차가 많지 않을 때 짐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소의 힘을 이용하는 달구지가 많이 사용되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는 워낙 저속으로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대부분 관리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저기 삐거덕 거리고 바퀴도 밸런스가 정확히 맞지 않아서 기우뚱 거리며 겨우 굴러간다. 그래도 달구지를 모는 사람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태연하게 몰고 다닌다. 그러다 가끔 바퀴가 빠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 좀 힘든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달구지의 바퀴가 빠졌다고 그것 때문에 대 참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좀 불완전하게 보여도 달구지는 삐거덕 거리며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주를 향해서 쏘아 올리는 유인 우주선의 경우는 어떠한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분야에서 세밀하고 철저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러다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발견되면 로켓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가도 발사를 중지시키고 만다. 유인 우주선 발사에 있어서 대충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대 재앙이나 참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켓 발사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완벽을 기하는 것이다. 로켓 발사에 있어서 책임을 맡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미처 파악되지 않은 0.001%의 미진함의 결과로 인하여 로켓이 공중 폭발 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믿음에 대하여 마치 우주선 발사에 임하여 고도의 신중함을 기하는 자세 그 이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영원한 미래의 운명까지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기에, 우주를 향하는 로켓발사보다도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함은 당연하다.
“신앙적으로 분명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세상을 향하여 그대로 발진시키는 이들이 있다면 문제가 많은 것이다. 영생으로 인도할 자신의 신앙을 삐거덕 거리는 달구지 취급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천하보다 더 귀한 자신의 영혼문제인 믿음에 대하여 적당히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자아에서 비롯된 믿음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의 이성이나 자아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하여는 반응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에 자신의 신앙적인 모순이 있음에도 별로 심각하게 자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심령 속에 성령의 강력한 비췸이 있을 때는 자신의 믿음에 지극히 작은 모순도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는 처절한 탄식을 했던 이유도 성령의 비췸에 자신의 자아가 낱낱이 비추어져서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삐거덕 거리는 잡음을 내는 정도의 형편없는 믿음 위에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맡긴다는 것은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한 자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이성으로는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추상적인 개념 그 이상의 실제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은혜로운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우면서도 그 말씀과의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가 어느 정도는 믿음과 같이 평행선을 그으며 가다가 딱 멈추는 지점이 있다. 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경우를 만나면 바른 믿음이 증명되어야 할 결정적인 지점에서 더 이상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를 따라서 광야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런 유형의 믿음이었다. 이른바 “유사 믿음 짝퉁 믿음”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자아가 용납할 수 있는 곳까지는 모세를 잘 따랐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자 그들에게는 믿음의 빈껍데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유형의 믿음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들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있다.
“유사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특별히 예민한 부분이 있다.”
성령이 아닌 인간의 자아로 말미암은 유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발달되고 예민한 부분이 있다. 육적인 감각이 예민하다. 한번 세속적인 욕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 그 욕심을 제어할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욕심은 끝을 보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그 아름다운 성직마저도 세속적인 욕심과 바꾸기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자아와 근본 속성 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옛 성품이,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남아있다. 이런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남을 속이는 자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옛 육체의 소욕이 견제되어지고 다스려진다. 이런 믿음의 성도들은 인간의 자아가 용납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을 거뜬히 통과한다. 엔진 성능은 ‘슈퍼카’ 급인데 핸들과 브레이크 기능이 고장난 채로 꾸불꾸불한 길을 고속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자동차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은 일단 충돌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제동장치와 피해갈 수 있는 조향장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된 피를 이어받은 모든 사람은 육체의 소욕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속에 대한 욕망은 그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리 겉으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에 인간의 자아만 덩그렇게 남은 사람은 직분과 상관없이 육체의 소욕과 세속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제어하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육체의 세속적인 욕망을 향하여 ‘액셀러레이터’를 더 힘주어 밟는 이들도 많다. ‘귀소본능’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과 인간의 자아는 둘이 아니고 본래 하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육체의 소욕에 잠시 휘청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넘어질 수 없음은 마음속에 계신 성령께서 비추심과 도우심으로 함께 하시기에 통제 불능의 상태로까지 가지 않는 것이다. 특히 평소에 성령에 의하여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육체의 소욕과 세속적인 유혹이 심각한 유혹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세속적인 것들이 주는 유혹의 강도는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은혜와 정확히 반비례 한다. 이런 계산법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계를 검증해보면 성직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입으로 아무리 천당을 부르짖고 ‘예수 예수 귀한 예수’ 찬송을 불러도 세속적인 것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천당도 예수님도 계신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천하보다 더 귀하신 예수께서 계셨더라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지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그처럼 욕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7)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 사함의 도리인 십자가의 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바른 믿음을 이르기까지 까다롭거나 복잡할 이유가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를 믿는 기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를 믿는 이 시대의 기독교계가 바른 신앙에 대한 수많은 반목과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근거로 믿는 기독교 신앙”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나 철학들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아무리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종교의 창시자나 철학자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한정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보니 모든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바른 교훈이나 절대 진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강요되거나 따라서 하게 할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타 종교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거나 했더라도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하는 종교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 종교의 규율은 어차피 모든 이들에게 고르게 적용하여 일반화 할 수 없는 분명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그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개발하여 그 종교를 유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는 듯하다.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우상과 웅장한 종교 시설들을 통하여 교리적인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기초와 골격과 살을 이루는 모든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성경이 그 전부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품으신 계획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형성시키고 성장시키며 유지시키는 교본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시대를 능히 아우르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비록 오래전에 기록된 성경 말씀이지만 세상 끝 날까지 사람들을 깨우치고 진리로 인도하여 영생을 얻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 어떤 종교처럼 어느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적용되어 일반화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신앙이 세상 가운데서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현상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된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핵심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자 모든 것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위치에 세워지지 못하므로 인하여 비롯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시대의 목회 현장에서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메시지 안에는 인간의 이성과 자아를 자극하는 세상 철학과 귀를 즐겁게 하는 언어들이 많이 혼합되어 있다. 이처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고 세상의 그 무엇과 섞여있는 설교를 영의 양식이라고 받아먹다보니, 믿음의 생명력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추측을 하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꾼들을 배출하는 각 신학교들이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워놓은 ‘커리큘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초등 학문이라고 분명히 명시한 과목들은 잔뜩 집어넣고, 생명의 양식인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대부분 한쪽 구석에 약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섭취한 것을 내놓게 되는 존재이고 보면, 그 신학생들이 장차 목회 현장에서 신자들에게 무엇을 내놓을 지는 자명해지는 것이다. 이 시대 기독교계에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역자들을 배출한 신학교들과 관계자들은 그것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몇 년 타고 다닐 자동차도 제작사의 설계상 결함이나 재질의 불량에 의한 문제점이 발생되면, 리콜을 해서라도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가진다. 하나님의 일꾼들을 바로 가르쳐서 목회 현장에 내보내야 할 신학교들이 신학생들을 모집할 때 사역자로서의 합당한 자질에 대한 검증과 적절한 교육을 거쳐서 내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엄격한 감독과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딤전 6:3-4)
“성경의 모든 내용과 십자가의 도만 믿으면 바른 믿음인가?”
작금의 시대는 인쇄술이 발달하고 더 나아진 경제적인 부유함이 과거 시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아졌다(일부 계층 제외).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과거 시대의 신자들에 비하면 더 많이 알고 폭넓은 신앙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쪽 복음’이라 하여 성경의 한 부분만 인쇄된 성경책을 읽고 전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쪽 복음조차도 신자들이 마음대로 소지할 수 있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의 성도들이 성경 전체의 맥락이나 흐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믿었다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상 매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당시의 신자들은 몇 마디 들은 성경말씀을 어떻게 들어서 소화를 하였는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믿음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경을 거의 꿰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제풀에 지쳐서 넘어지는데 당시의 신자들은 무슨 힘으로 그 모진 시험과 어려움들을 이겨 내었을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제한된 말씀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붙들 수 있는 고 효율의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효율의 믿음과 저효율의 믿음이 있다.”
얼마 전에 오일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을 때에 엔진이 크고 힘도 좋은 자동차를 선호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엔진의 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엔진의 크기를 많이 줄인 ‘다운사이징’ 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대세이다. 이렇게 작은 엔진을 장착하고도 힘과 경제성을 동시에 얻으려는 사람들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요청이 없을까? 지금부터 삼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스바’ 여왕(지금의 에디오피아일 것이다)이 지나가는 뜬소문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과 영생에 대한 희미한 소식을”
그 뜬소문 같은 소식에 ‘스바’ 여왕은 나라의 국정 운영을 내려놓고(누군가에게 맡겼을 것이다)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수천 리길을 여행하여 그 소문의 진위를 바로 알기 원했다. 일국의 최고 통치자인 여왕이 국정 운영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먼 길을 떠나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래야할 충분한 정도의 깨달음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스바’는 소문에 실려 희미하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소문 한 조각을 섭취하여 자신의 운명과 나라와 수많은 영혼들(에디오피아는 기원전부터 유대 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약에 이르러 다시 복음을 받아들임)의 운명을 바꾸는(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으로) 사람이 되었다. 지나가는 소문에 실린 희미한 한 조각의 말씀을 잘 섭취하여 놀라운 영적 능력을 이끌어내는 ‘고효율’의 영성을 지녔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많이 섭취하는 것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 중 한 말씀이라도 영혼의 간절함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놀라운 변화와 영적 능력이 임할 것이다. 성경 안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그 내용들은 짧은 한 말씀 안에 다 압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부분들도 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영생 등”
어떤 이들은 성경 한 구절이라도 잘 소화하여 최대한 믿음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고효율의 영성을 겸비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리 채워도 도무지 줄줄 새는 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깨어진 독 같은 비효율적인 영적 엔진의 소유자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말씀의 능력이 영혼을 직접 강타하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비켜 가면서 옷자락만 살짝 스치고 지나감 때문이 아닐까? 그런 신자들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마저도 CCTV 카메라 렌즈만큼의 부담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이 성경 말씀과 그 안에 제시된 기독교 교리만 붙들고 있다면 그의 신앙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단지 하나의 보험처럼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믿음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있다. 한 기둥은 성경 말씀과 그 안에 기록된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바르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기둥은 인간에게 성경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들에게는 구원이라는 주제가 거의 전부인 것처럼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성경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어떤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도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 안에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막 시작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신자들이 이루어가야 할 많은 부분들은 무엇인가?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물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종하며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신앙적인 안목과 태도를 가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상적인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나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몸부림을 치고 때로는 두려워하면서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그들이지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뛰어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신 경륜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에베소서 1장 5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앞서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에만 집착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 밖에 있는 것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십자가의 도를 믿은 것에 해당)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를 죽이는 재앙은 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자 그 어려움들을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그들 안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하는 신앙적인 회의감마저 들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십계명과 율법을 받고 난 후에도 그들은 돌 판에 새겨진 문자에만 집착하였고,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은 소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그들을 대표적인 불신앙의 사람들로 언급하면서 모든 신자들이 그들과 같은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교리들을 바르게 믿으면서 이와 함께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믿어져야 이것이 바른 믿음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말씀이라도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의 말씀을 영혼 깊숙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해들은 성경 말씀이 믿어졌을 뿐 아니라 그 말씀들을 주신 살아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제처럼 믿어졌으며 자신들이 그 앞에 살고 있음이 온전히 믿어졌던 것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거의 실종된 상태인 것 같다. 성경을 많이 알기는 하지만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인하여 정작 필요할 때에 믿음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앞서서 여러 번 언급 하였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아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자아로 말미암은 믿음은 하나님만 추상적인 위치에 두는 정도로 믿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속죄마저도 추상적인 개념 정도로 막연하게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성과 자아에 의하여 촘촘히 걸러져서 영혼의 깊은 곳을 강타하지 못하다보니 옷깃만 겨우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십자가의 은혜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바른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자아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완전히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도 믿음으로 인정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확실히 믿는 것 같은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는 사람은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인도하심을 바라며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므로 하나님과의 양방향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냥 고향을 나왔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다면 결코 순종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실제처럼 믿어졌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아실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충성스러움과 신실함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의 믿음이 성립되기 위하여 기본으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움과 신실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불신이나 의심의 흔적이 자리를 잡지 않은 완전한 단어이다. 이처럼 믿음은 완전한 단어이지만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로는 그 완전함을 구현하거나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오직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믿게 하실 때 비로소 성경에서 제시하는바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움과 신실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하나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믿음을 주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품은 성도들은 육체의 정욕과 세속의 유혹을 거뜬히 물리친다. 신자들이 오랜 역사속의 인물들과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어떠함을 알기는 쉽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는 그리 쉽지 않다. 쉬웠다면 교인이란 이름만 가졌어도 다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신자들이 스스로의 믿음이 어떠함에 대하여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어떠함에 대하여 간단히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신의 믿음을 계량하여 보라.”
소량의 금은보석을 계량하는 아주 정밀한 저울이 있다. 파리 한 마리만 앉아도 눈금이 움직이는 예민한 저울이다. 그러나 그 저울은 단점이 있다. 무거운 물체를 계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이와 반대로 화물을 가득 실은 대형 화물차도 계량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저울이 있다. 이 저울의 단점은 작은 물건의 무게를 정밀하게 계량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올라가 발을 굴러도 눈금이 움직일까 말까 할 정도이니 가벼운 것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심과 하나님 나라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천국의 무한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천국의 가치가 그의 마음속에서 깨달아진 만큼 계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마음속에 계량되어진 천국의 가치는 분명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값지고 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값지고 중하며 무궁무진한 천국의 가치가 마음속에서 계량되어진 성도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계량한 저울과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그에게 나름대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고 난 뒤에는 전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가치 없게 여겨졌다. 바울의 마음은 더 소중하고 큰 것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배로운 가치를 마음에 담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작은 것들에 의해서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형 트럭을 계량하는 저울에 파리가 떼로 몰려 앉아도 미동도 하지 않듯이,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작은 것에 의하여 동요가 크게 일어난다면 아직 믿음에는 큰 것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 세상 것들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음을 간혹 본다. 그러나 이는 억지이다. 스스로의 입으로도 말하는 보잘 것 없는 이 세상의 것들에 동요를 일으키는 작은 마음의 저울에, 무한하고 중한 하나님의 나라가 계량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약간 얹어도 크게 움직이는 작은 저울일 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작은 것들을 계량하기에도 벅찬 작은 마음의 저울에 영적이면서 무한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계량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서전에 담아 남에게 읽혔다고 가정하여 보라.”
예수를 믿은 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실제를 그대로 꾸밈없이 옮겨서 한 권의 자서전을 만들고, 그 자서전을 사람들이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자서전을 보는 이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기록된 자서전을 보는 이들이 “그렇지. 나도 이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해. 이분의 삶이야말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표본이야.”라고 하며 은혜와 감동을 받고 본받으려 한다면, 그는 헛되게 예수를 믿지는 않은 것이다. 바른 믿음과 그 믿음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성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 읽은 이들이 “어! 이 사람은 불신앙적인 사람의 표본이구만. 이러고도 자신을 하나님 믿는 신자로 알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 막히네.”라고 하는 평가가 나온다면 적어도 그의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아주 잘못 믿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확실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으로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다 아시며 세밀히 보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사람의 눈에 불신앙의 사람처럼 보이고서야 어찌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종교는 아니지만 복음을 헛되이 믿지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었다면 당연히 모든 이들에게 삶을 통하여서도 믿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믿음은 성장하는 증거가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세상에서는 수명의 한계가 있기에 성장이 멈추게 되는 시점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영원히 자라도 이르지 못하지만)에 이르도록 재촉하고 있다(엡 4:15 참조). 날마다 더 거룩해져야 하고, 열심이 더해져야 하며, 날마다 새 노래를 부르도록 영적 감수성과 은혜가 더욱 넘쳐야 한다.
많은 이들이 믿다가 신앙적인 권태기를 맞이하지만 이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방향감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을 향한 방향에 문제가 없다면 반드시 처음 믿을 때보다 더 뜨겁고 열심히 더해지며 은혜가 넘치는 믿음의 성장이 가속화될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하여 잠시 동안은 활주로를 달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활주로 끝에 이르기 전에 이륙에 충분한 가속을 하여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오래 믿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한 일로 인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드는 이들은 비행기로 치자면 날개를 이용하여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계속 바퀴로만 굴러가는 기형적인 신앙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도록 하늘을 날아오르지 못하고 시내까지 진입하려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만나는 것마다 거치고 충돌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 믿은 이들이나 성직자들이라 하더라도 세속적인 욕망에 붙잡혀서 소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눈에 띄는 성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의 성도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믿을 때 약간 뜨겁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지는 믿음은 방향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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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단락이어서 좀 긴 내용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책에서 보고 또 다시 봐도 옳으신 견해이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분별하는 대상 중에 셀프확증이 있는데 이또한
유사믿음과 같은 범주로 생각되어집니다.
유사믿음 + 셀프확증 =?
그 결과는 멸망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앞에 가서까지 이러겠지요
"내가 언제 하지 않더이까?
"학자는 체계라는 집을 짓지만 그집에 살지는 않는다."
(열매)경멸.무시.비판.비하.천박.조롱.우월.교만.없신여김.
@우암산 심판주께서 친히 강림하셨군요^^
@땅끝으로 저의 어떤 부분을 보시고 이처럼 평가하셨는진 모루겠으나 저의 행실을 저도 다시 돌아보기는 하겠습니다
저의 댓글이나 게시글의 돌출된 부분만 보시지 마시고 배경까지 살피시고 판단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땅끝으로 님의 성향을 대충 파악했습니다
님이 저에 대한 어떠한 판단에도 연연치 않겠습니다.
이상--
메가처치 현상은 주님의 열매일까요??
여의도의 조 ㅇㄱ 를 비롯 그들의 지금 열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