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맨우측) 노원구청 퇴임식 (2004년도) 맨좌측이 사랑하는 둘째누나
1. 둘째 누나를 그리며 글/ 만장봉
둘째 누나가 저 세상으로 가신지도 어언 9년째가 되는 거 같다.
내가 노원구청에서 퇴직한지도 벌써10년이 다 되었으니...
참, 세월은 빠른거 같다.
이제는 나도 하루하루 일상을 지내는 일도 조금은 옛날 같지가 않음을
느낀다. 무슨 일을 하면 일을 하다가 잠시라도 조금씩 쉬어야 하니까 말이다.
내가 제일 손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가던 산이 ‘수락산’이다.
배낭하나 가볍게 짊어지고 가까운 친구들하고 지인들하고 오르던 산이고
어떤 어려운 일 있으면 이 산을 한 바퀴 쑥 돌아오고 나면 정신과 육체가
가벼워서 어려운 일도 손쉽게 해치우곤 하였다.
그런데 이 산을 제대로 등산을 못하고 있다. 기력이 떨어졌다는 증거다.
내가 2004년도에 정년퇴직을 앞두고, 아내는 암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전라북도 완주에서 오신 것이다. 아내는 나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도 못하고
대신 둘째누나가 나의 딸아이 하고 내 정년 퇴임식에 참석해 준 것이다.
그때 나의 퇴임식에 참석을 하고 나서,그 이후에는 영영 나와 헤어지는
영면의 길로 가신 것이다.
나와 영영 길이 다른 머나먼 길로 가시기 위해서 그 퇴임식에 참석 하신 것인가?
엊 그제가 둘째누나 그리고 매형의 돌아가신지 9년째의 제삿날이다.
나는 조카들한테 엄마 ,아버지 제사때는 내가 죽는 날까지 꼭 참석 하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나는 1남3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것도 부모님이 위로 딸만3명이 있는
45세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났으니........................
부모님의 사랑 ,아니면 누나들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3이 있으니 얼마나 귀여우랴!
그때 만 해도 남아선호(男 兒選好) 사상이 어느 가정에나 사회에서나 보편적인
생각이었으니 오죽했을까?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인것 같다. 내가 농촌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을때 이니,
그 때만해도 내가 중학교 때 소를 기르는데 쟁기질을 배웠다.
그때 둘째누나는 서울에 살고 계신 때인데, 나에게 손목시계를 사다 주시어 시계를
차고 논농사를 하면서 손목시계를 들어다보고 즐거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지가 어언 50 여년이 지났나 보다.
그때 농촌환경이라는게 논몇마지기 ,밭 몇마지기 정도 아니면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정도의 재산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실현 불가능한 일에 도전을
한것 같다.
그 뒷 배경에는 둘째 누나와 매형이 계신 것이다. 아마 둘째누나가 형님으로 태어
나셨다면 나를 공부하고 싶은 대로 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둘째누나는 친형님 못지않게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하나 뿐이 없는 남동생을
부모님을 대신해서 뒷바라지를 해 주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눈물이 또 날정도로 둘째 누나를 그리면서 글을 쓰고 있다.
이 누나를 그리면서 글을 쓴 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누나의 큰사랑에 무엇으로
갚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갚을 길이 없는것 같다.
내가 66년도에 맨 처음 겨울 방학때 올라와서 서울에 있는 대학입시학원을 다니면서
남산에 있는 ‘시립남산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누나의 사랑스러운
하얀 밥으로 도시락을 싸주시던 누나의 정성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그리고 연이은 대학교 원서를 그 추은 겨울에 사다 주셨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나이가 60이 넘으시고 경제적인 활동은 전혀 할수 없는 나이 이시다.
부모님이 하실 일을 누님이 도 맡은 것이다.
어린 조카들도 많고 시가집 시동생도 많은데 ,친정동생이 이거 함께 살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이거 그 생할이란 이루 말 할수 없었다.
방이 제대로 있나, 용돈을 제대로 가질수가 있나! 둘째 누나가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주신 것이다. 일명 과외공부를 시켜서 겨우 용돈이나 벌었다고
해야 하나?
하루는 나에게 을지로 있는 ‘양복점’으로 가자는 것이다. 너의 의복이 너무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때 내 복장은 미군복을 검정색으로 물을 들인 상의를
줄곳 입었고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사주신 콤비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그 이후로 학교공부를 하고 나에게
대학교 등록금을 대주셨던 둘째누나의 큰사랑을 잊을수가 없다.
내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툭하면 누나에게 손을 벌려서 타서 썼던 기억이.....
그리고 내가 안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침대를 나에게 물려주셨다." 누나를 생각하면서
사용하라고 " 친히 조카들을 시켜서 내게 물려 주고가셨다.
어디 그뿐이랴 !
부모님이 시골에서 살수가 없어서 서울로 올라 오신데도 둘째누나가 모든 것을
판단을 잘하셔서 친정집을 이끌어 왔으며, 마포구 도화동산8번지에다 무허가 집을
지어서 친정집의 주거생활을 할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을 모셔야하는 부양의무자로 노력을 하면서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다하여 ‘인천교육대’에서 초등학교 교사자격증 취득, 또한 계속해서
주경야독(晝 耕 夜 讀)을 하여서 공직의 길을 갈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나의 결혼식 그리고 내 자녀들의 출산 등........................
모든 대소사 일들을 돌보아준분이 둘째누나를 중심을 해서 누나들이다.
영산포에 외롭게 살고 계시는 큰 누나를 비롯해서 지금도 돌아 가신지가 9년이
지났어도 잊을수 없는분이 둘째누나고 매형이고 ,지금 막위로 나의 막내
누나도 몸이 않 좋아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내가 이만큼 그래도 공부를 할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부모님을 중심을 해서
서울에 살고 계셨던 둘째 누나와 매형의 큰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생과 사(生死)의 갈림길에서 몸은 헤어졌지만 저 세상으로 떠 났다
고 해서 어찌 그 고마움의 마음조차 세월이 지났다고 잊을수가 있을까?
인간이 하나의 독립체로 성장하여서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는데는 여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어서 독립된 인격체로써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 도움은 일차적으로 부모님의 도움이며 ,나같은 경우는 둘째누나이다.
반포지효(反 哺 之孝)로써 부모님도 나이 젊어서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그 은공을
못갚고 둘째 누나와 매형에게도 못갚으니 그 배은망덕한 괘심한 마음의 속죄를
어떻게 하리 ....!
보고 싶은 '누나'
이승에서 혼자 있는
동생이
누나를 그리워하는 마음....
혹시 알고 계실까?
누나는 저승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항상 누나가 그리울 때면
내 마음을 글로 표현을 해 보지요
누나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지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히 개척해오신 여장부
미소짖는 얼굴 예쁘기도 하시고
머리도 똑똑해서 여자이면서도
남자의 능력을 갖추어
동생을 보살펴 주었지
누나의 보살핌이 밑 거름이 되어
오늘의 동생이 있었지!
그 은덕을 못잊어
오늘도 누나를 그리며
애타게 살아가고 있다오
누나 오래 오래 편안하게
저승에서 지내시구려
첫댓글 둘째누나가 마음에 사무칠만 하겠습니다.
그 어려운시기에 따뜻한 누나의 사랑 그립기도 하겠습니다.
같은시기에 저의 경우는 허허벌판 정말 힘든 세월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남매간의 애정이 녹아있는 가정사 잘 읽고 갑니다.
방장님 감사합니다
아마도 둘째누나가 서울에 살지앟았다면 올라오지않았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서울에서 공부좀해보겠다고 할수 있었던것은 누나덕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보실핌이 있어야 될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머님 같은 누님이십니다.
그 누님이 어찌 그립기만 하겠어요.
남매의 따뜻한 사람이 가슴을 적십니다.
항상 청량감 있는 훌륭한 글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어머니같은 누나입니다
누나가 계셔서 저의삶에 큰힘이 된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항상 좋은댓글에 감사드림니다
아마도 좋은곳에 가셨을것입니다.동생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실것입니다
저희집도 딸 다섯에 여섯째가 남동생이라 너무도 와 닿는 이야기네요
목숨걸고 50이 다 된 나이에 아들을 낳은 대단하신 우리 어머님들 ㅎㅎ
저희도 동생일이라면 우루루 난리 부르스를 춥니다
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못하고 있어요
정겨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아마도 남동생이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더사랑을 하신것같습니다. 우리큰누나는 저하고 19살차이가 나는데요
만약 동생이없었다면 친정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한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중학교 시절 쟁기질 하던 소년에게 한양의 누나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 듣듣하셨겠는데
실제로 보살핌을 참 많이 받으셨군요.
길이 길이 기릴만도 하겠습니다.
고운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중학교때 '쟁기질'을 배웠는지?
지금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그때 논한마지기를 갈아주면 3일 간 일을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배운것이지요.한양의 큰누나가 제일큰 희망이지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구 제글에 이슬을 맺히게 했다구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누나를 그리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할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훈훈한 글이라니 .........
형재간의 정은 무한한가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누나군요
누나가 하늘에서도 동생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으실겁니다
그런누나가 잇었기에 다행입니다
여자이지만 남자보다 능력이 좋습니다
참똑똑하시고 얼굴도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째 누나얘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핑도네요
아이구 눈가에 이슬을 젖었다고요
감사합니다.저도 눈가에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