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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썩!!!"
엄 기홍의 두툼하고 거친 손이 사내의 뺨을 인정사정 없이 후려쳤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연신 휘둘러대는 엄 기홍의 거친 손지검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멍청한 새끼!!!"
"죄...죄송합니다. 형님!!"
"어느 놈 하나 제대로 쓸만한 놈이 없어!!"
"......."
"그렇게 몰려갔으면서 기껏 손바닥만한 기집애 하나를 잡지못하고 놓쳤단 말야!!!"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들이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엄 기홍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부하들의 뺨을 올려붙인 엄 기홍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것인지 씩씩거리며 옆에 놓인 의자를 걷어차버린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딩구는 의자를 보며 사내들이 움찔한다. 행동대장으로 있을 때부터 성질이 급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했었던 엄 기홍은 조직의 보스 자리를 차지한 뒤로 더욱 흉폭해지는 듯 하다.
"그게.......왠 놈이 그 기집애랑 함께 있는 바람에......."
"왠 놈이라니? 기집애 둘이 산다고 했잖아!"
"분.......분명히 그랬습니다. 여대생 둘이 같이 산다고."
"그런데?"
"찾아갔는데 집이 계속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기다렸는데, 근데 한 년은 왠종일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리고 또 한 년은 자정이 다 되서 나타나더라구요."
"그럼 바로 끌고 왔어야지!!"
"그게 왠 놈팽이 놈이랑 같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밖에서 사내 놈이 돌아가길 기다렸는데......"
"그런데!!!"
"하도 안 나오길래 집으로 들어갔더니 벌써 날랐더라구요."
"날랐다구?"
엄 기홍의 눈썹이 험상궂게 치켜올라갔다. 덩치의 사내들이 그런 엄 기홍의 반응에 겁을 먹은듯 움찔해서는 서둘러 변명 아닌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보는 즉시 잡을려고 했는데 밤이고, 시끄러워지면 혹시나 동네 주민들이 깰까봐....."
"그래서 그 분들 잠 깰까봐 조용히 하느라고 그랬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늘어놓고 있냐?"
"그게 아니라, 어제도 그것들이 신고하는 바람에 애들 몇이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그 집에 대해 몇가지 물어봤더니 수상하다고 신고를 했지 뭡니까. 그래서 이번에 조용히 처리하려고 한다는게 그만....."
"그러니깐 왠 놈이 나타나서 니 놈들을 물 먹이고 두 년을 모두 낚아채갔단 말이지?"
"두 년 모두는 아니고.....아무튼 자정이 넘어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놈팽이 놈, 어떻게 생겼어?"
"너무 어두워서 얼굴을 보진 못했는데, 그냥 보기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몸놀림이 무척 민첩했습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몸놀림이 민첩하다고?"
눈치를 살피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덩치들이 설명하는 인상착의를 듣고 있던 엄 기홍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던 엄 기홍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흘려나왔다.
'놈이 분명해. 혹시나해서 간 좀 보려고 한 것 뿐인데.......훗! 그 놈! 책상머리 샌님이였어.'
엄 기홍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묵직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듯 앉아있던 엄 기홍이 빙글 의자를 돌려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엄 기홍의 매서운 눈길에 잔뜩 긴장한 사내가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기집애 둘이라 생각해서 방심했던겁니다. 그 자식 다시 만나면 상대 할 수 있습니다. 다시가서 잡아오겠습니다."
"됐어. 그깟 년들 이젠 필요 없어졌어."
"네?"
"그것보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무슨......."
"이 윤성 검사 말야!!!"
"아~ 그거........알아봤습니다."
사내는 서둘러 엄 기홍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엄 기홍은 쩔쩔매고 있는 사내가 영 마땅찮은지 잔뜩 인상을 구기며 건네받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읽었다. 일목 요연 정리되어 있는 이 윤성에 대한 신상명세서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읽어내리던 엄 기홍이 한 대목에 이르자 무척이나 놀란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대 건설? 이 윤성이 거대건설 이 태성 사장의 아들이란 말야?"
"네, 돌아가신 큰 형님의 변호사였던 김 변호사와도 사법 연수원 동기였습니다."
"김 변호사와 동기? 허~참! 갈수록 재미있어지는데? 이거 확실한거야?"
"네, 확실합니다."
"그 놈이 이 태성 사장 아들이란 말이지."
"네. 비밀도 아니고, 그 쪽 바닥에선 다들 알고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 놈이 이 태성 사장의 아들이란 말이지.....그런데 왜 그 놈이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 거지?"
엄 기홍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태성 사장의 아들, 이 윤성! 거대 건설의 후계자이면서 현직 검사인 이 윤성이 자신의 형인 엄 기태를 죽이고 사법 연수원 동기라는 김 경석 변호사를 죽였다.
'이유가 뭐지?'
엄 기홍은 재판장에서 본 이 윤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큰 키에 희여멀건하니 한주먹거리도 안되보이는 골방 샌님스타일이었다. 함께 일하던 형사놈들까지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던 놈이었는데, 그런 놈이 형 엄 기태를 죽였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그 날 형 엄 기태와 변호사 김 경석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여버리던 그 놈의 눈빛은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는게 믿어지질 않는다.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엄 기홍은 서류에서 가족관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태성 사장에게 이 윤성 말고 다른 자식이 있어?"
"네, 아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더 있어?"
엄 기홍은 이 태성에게 아들이 하나 더 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다. 형제라면 닮았을것이고 어쩌면 형 엄 기태를 죽인 놈은 이 윤성이 아니라 그 동생일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현실성없는 것이라는걸 알게되었다.
"네, 그런데 둘째 아들은 20년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로 걸을수가 없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그럼 병신이란 말야?"
"네."
"전혀 못 걸어?"
"5살때부터 휠체어를 탔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동생놈이 범인일리는 없다. 그럼 그 놈이 틀림없다는 건데, 검사씩이나 되는 놈이 왜 그런일을 하고 다니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혹시.....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엄 기홍의 머리속에 오래전 잊혀졌던 기억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럴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엄 기홍은 그날 형 엄 기태를 노리던 놈의 눈빛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그 집에 애들 몇명 풀어놔."
"네? 좀 전에 필요없다고...."
"생각해보니깐 필요한거 같아. 애들 몇명 붙여서 감시해."
"그럼 그 년들을 잡아올까요?"
"그래, 데려와. 대어를 잡으려면 미끼가 필요한 법이니깐."
시연은 무척이나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스팩터클한 액션 영화 한편을 찍느라 피곤해 죽을 지경었음에도 말똥말똥 잠이 오질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 탓도 있겠지만, 머리속이 풀리지 않는 퍼즐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렇게 밤새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청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시연은 뿌옇게 주위가 밝아오자 더 이상 안되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는 시연과는 달리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린 희진은 단 한번의 뒤척임도 없이 숙면을 취하는지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에이~ 안되겠다."
창밖으로 희뿌연 매연을 품은 도시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 시연은 발 밑으로 빠르게 속도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을 내려다 보았다. 아찔한 높이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무슨 특급 호텔도 아니고,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길래 서울에서도 제일 땅값 비싼 여기서 사는 거야?'
가장 번화하다는 이 곳에,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빌딩에 사무실이 아닌 주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딱히 전망때문인 거 같지도 않고, 건물의 용도로 보아 사무실이나 호텔이 제격인듯한데 어째서 이런 곳에 주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런 사무실이면 세만 해도 엄청날텐데.......그때 그 어머니란 사람이 사흘동안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왔다고 한 걸보면 집은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독립해서 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어제밤에 동생이라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가족들의 눈을 피해 이런 곳을 만들면서까지 과연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뭘까?'
시연은 검사라고 하면서 경찰을 피하고, 가족들의 눈을 속이고, 칼에 찔리는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그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곳........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지금 이 곳이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닐거라는 것이다.
"오가다 커피 한잔 마시려 오면 딱이겠네."
시연은 꼭 TV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하게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이런 곳에서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어제 잠깐이었긴 했지만 상당히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거실은 일반 가정의 거실이 아니라 개인 사무실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사무실을 개조해 모델 하우스로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집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오가다 커피 한 잔 조용히 마실 수 있는 그런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삭막한 공간에도 아침은 찾아왔다. 곧 있으면 우드 계열의 블라인드로 가려진 발코니 창으로 따뜻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 올 것이다. 시연은 다리사이에 이불을 둘둘 말아 끼고는 골아 떨어져 있는 희진을 보며 어제 밤, 아니 정확히 오늘 새벽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추측만으로 정신없이 이곳까지 따라온 자신과는 달리 딴에 조목조목 따지며 제법 실강이까지 벌였다는 희진은 그나마 주워들은 이야기가 꽤 많았었다.
"저 아저씨, 검사 맞대."
"검사 맞대? 근데 왜 쫓겨다니는거야?"
"자세한건 모르겠지만 작은 아저씨 말로는 그래. 검사 일 하면서 원한 살 일들이 많아서 그래서 저번에 다친거고, 경찰에 알려지면 보호한답시고 경호원 붙고 그러면 괜히 귀찮아진다고 그래서 입 다무는거래."
"넌 지금 그 말을 믿는 거니?"
"안 믿을 이유는 뭔데?"
"너는 머리가 단순해지면 세상 사는 게 편할 거 같지?"
"복잡한거 보다야 낫지."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고해도 그렇지, 검사라면서 어떻게 맨날 사람들한테 쫓기고......"
"니가 저 아저씨 집으로 끌고 오면서 대문에 핏자국을 남겼대. 그것 때문에 그 놈들이 우리가 저 아저씨 도와 준 거 알아냈고, 우리 잡으면 저 아저씨가 찾아올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그래서 우리 집에 그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거야?"
"그럴수도 있지. 맨날 조폭이니 깡패니 그런 사람들 잡아서 감옥 보내는게 검사 일인데 충분히 그럴수도 있잖아."
"그건 그런데.......아무래도 이상해."
"이상할 거 없어. 그냥 속 편하게 그러려니해."
"그럼 그 어머니는 뭐야? 검사씩이나 되는 아들을 노려보는 그 눈빛, 기억 안나?"
"그것까지는........뭐 사이가 안좋은 모자도 있는 거니깐. 계모 맞다니깐!!"
"그거야.......근데 우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글쎄. 윤호씨가 그것까지는 말 안했는데."
"윤호씨?"
"작은 아저씨말야. 근데 어쩜 형제가 저렇게 쌍으로 잘 생긴건지, 저렇게 생기기도 드문 일인데 말야."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희진의 말처럼 어쩌면 깊이 관여 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시연은 윤성에 대한 의문점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현직 검사가 테러를 당했으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어제 자신의 집을 빠져 나올 때도 이상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자신의 방 창턱이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창이 화단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잠깐 신세를 지고 있는 집 구조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건데, 무슨 첩보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더구나 몸 집이 두배는 더 되어보이던 덩치들을 상대 할 때의 몸놀림은 싸움에 문외한인 자신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으으으........ 머리가 아주 터져 버릴 것 같아."
시연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듯 복잡한 머리를 움켜잡아 쥐어뜯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넓은 거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시연은 주방쯤 되어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대충 주방처럼 꾸며진 공간을 찾긴 했지만 밥그릇, 국그릇, 수저나 젓가락등, 뭐 이렇다 할 살림살이들은 눈에 띄질 않고, 한쪽에 자리잡은 커다란 장식장 가득 크리스탈로 만든 글라스가 빼곡히 들어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주방을 멋으로 만들어놨나. 도대체 뭘 먹고 사는거야?"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냉장고 문을 연 시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겉보기엔 더 할 수 없이 근사해 보이는 냉장고 였지만, 그 흔한 김치통 하나 보이질않는 냉장고 속엔 줄을 지어 놓여있는 생수병과 대여섯개의 캔 맥주가 전부였다.
"진짜 너무하네. 이건 냉장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하다못해 달걀이라도 한 줄 사다 넣어놔야지 도무지 냉장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둘러본 주방 그 어디에도 후라이팬이나 냄비 같은 주방 도구가 없다는 걸 알아 차렸다. 달걀이 있어봤자 날것으로 드링킹 하는 방법 외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냉장고 속, 질서정연하게 줄 서 있는 생수병 중 하나를 골라내고 냉장고 문을 닫던 시연은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방금 닫아버린 냉장고 문 뒤로 반쯤 벌거벗은 남자의 등이 보인다. 아마도 아침 일찍 일어난 윤성이 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나보다. 샤워 타올 하나만을 허리에 두른채 물에 젖은 머리를 닦고있는 그의 맨등을 보며, 화들짝 놀란 시연이 휙하고 몸을 돌려리며 어색하게 인기척을 내었다.
"흠, 흠!!"
그녀의 인기척에 윤성이 몸을 돌렸다. 뒤돌아서 흠흠거리고 있는 시연을 본 윤성은 젖어있는 머리를 털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힐끔 고개를 돌리던 시연은 가까이 다가오는 윤성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방으로 들어온 윤성은 시연의 앞을 지나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는 생수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일찍 일어났네."
"네.......넷! 아저씨도........"
"훗! 뭘 그렇게 놀라는거야? 나 벗은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그렇죠."
"안 씻어? 욕실은 저쪽인데. "
"씻......씻어야죠!"
생수병을 꼭 끌어안고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린 채 빠르게 뛰어가는 시연을 보며 윤성은 피식 웃음이 터저나왔다. 대학생씩이나 되면서, 더구나 이 몸은 지난 번에 벌써 봤을텐데 뭘 저리 당황하나 싶다. 허리에 손을 얹은채 천천히 물을 마시며 빙글빙글 웃고있는 윤성을 피해 뛰다시피 욕실로 들어간 시연은 욕실 문을 잠그고서야 한숨을 몰아쉰다.
"저 아저씨 진짜.....허~참! 아무리 자기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손님이, 그것도 여자 손님이 둘씩이나 있는데 기본 에티켓도 없이 저렇게 홀딱 벗고 돌아 다니고 그러냐. 그리고 내가 자기 벗은 몸을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닌데, 걸핏하면 울겨먹고 있어. 내가 웃통 벗은 것만 봤지, 저렇게 홀딱 벗고 있는 걸 봤냐고! 저러다 허리에 묶은 수건이 그냥 확 풀려서 떨어져버리면 어쩌려고."
궁시렁 대던 시연이 손에 든 생수병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을때 그녀는 또 한번 기절할만큼 놀랐다. 이곳이 정말 욕실이 맞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음식은 안 해먹으면서 열심히 씻기는 하는지 고급스러워보이는 샤워용품들이 가지런히 선반을 채우고 있었다. 욕실에 두기엔 아까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장식품들과 달리기를 해도 무관할 정도로 넣은 공간, 두세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될만큼 큰 욕조엔 말로만 듣던 거품 기계까지 설치되어 있었고, 그런 욕조 옆으로 서울의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야가 탁 트여 있는 것이 누가 훔쳐 볼 걱정은 없어보였지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그렇게 넓은 창을 옆에 두고 벌거벗은 채 욕조에 들어가 있는 건 간이 떨려서 못할 것 만 같다.
"거 참! 취향 한번 고약하네. 홀딱 벗고 밖을 내다보면 좋은가? 그러다 지나가는 비행기에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욕실 인테리어에 감탄을 하던 시연은 욕실 한쪽에 설치되어있는 샤워부스를 보며 간단하게나마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지만, 어젯밤 입은 옷 그래도 도망쳐 이곳으로 온 까닭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하다못해 갈아입을 속옷 한장이 없는 실정이다. 희진이 일어나면 우선 속옷부터 몇장 사오던지 해야겠다. 줄줄이 늘어선 욕실 용품속에서 새 칫솔을 찾아낸 시연은 간단히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첫댓글 세수로 만족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