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임진왜란 일본 제 1군 총대장
정유재란 일본 제 2 선봉대 총대장
전쟁 내내 조선군으로부터 악명 높았던 일본군 제 1의 선봉장, 반면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것으로도 유명
원래부터 전쟁을 반대했기에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하였다.
그렇게 발생한 명나라 심유경과의 사기극으로 정유재란을 발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초기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 정보를 조선에 흘렸고, 이에 넘어간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시킨다.
전란 이후 일본을 동서로 가른 내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 패배하여 참수당한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임진왜란 일본 제 2군 총대장
정유재란 일본 제 1 선봉대 총대장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1인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임진왜란 시기 조선 내에서 악명이 높았으며, 고니시와 서로 앙숙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함경도까지 진군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았다. 이때 여진족과의 교전도 수행한 듯 보인다.
전란 후반기엔 축성술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을 방어해냈다.
귀국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참여, 승리하여 고니시의 영지를 획득한다.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 長政
임진왜란 일본 제 3군 총대장
정유재란 일본 제 3군 총대장
아버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로 유명한 구로다 칸베에다.
임진왜란 때 연안성 전투에서 조선의 의병장 이정암에게 패하여 황해도 공략에 실패하였다.
정유재란 때 직산 전투에서 명군 기병대에게 패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좌절시켰다.
귀국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측으로 활약하여 후쿠오카 번 52만 3천 석의 대영주가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임진왜란 일본 제 4군 부대장
정유재란 일본 제 5군 총대장
규슈 지방의 통일까지 앞둔 전적이 있었던 전국시대의 유력 다이묘, 시마즈가의 당주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으며, 임진왜란에 참여한 일본 무장들 중 최고의 네임드라 볼 수 있겠다.
정유재란 때 도도 다카도라와 연합하여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으며,
사천 전투에서는 7천의 병력으로 4만의 조명 연합군을 격퇴시켰다.
이 사천 전투의 피해로 인해 명군에서는 '귀석만자(鬼石曼子)' 라 부르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량에서 임자를 잘못 만나 전력의 8할 이상을 상실하고 귀국하였으며,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종반부에 '시마즈의 퇴각' 이라는 탈출전을 감행하여 동군 진영의 찬사를 받는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규슈의 유력 다이묘인 시마즈가의 저항을 부담스러워 했으므로
시마즈가가 가진 다이묘로서의 실권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 귀석만자(鬼石曼子) : 중국어 '꾸이시만쯔' 의 음차, 뜻은 '귀신 시마즈'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임진왜란 일본 제 5군 총대장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그 필두를 자랑하는 맹장, 창술의 달인
임진왜란 때 충청도와 경상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 공으로 오와리 번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영천성 전투에서 조선의 의병장 권응수한테 패하여 영천성을 빼앗긴 뼈아픈 전적을 남기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의 편에 서서 히로시마의 49만 석을 가진 대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이가 틀어져 점점 권지를 빼앗기다 초라하게 사망한다.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小早川隆景
임진왜란 일본 제 6군 총대장
서일본 제일의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3남)
임진왜란 초반부에 금산을 점령하고, 그곳을 거점삼아 전라도를 공략했으나, 이치 전투에서 권율한테 털렸다.
이후 평양성 전투의 승세를 타고 남하하는 남하하는 이여송의 명군을 벽제관에서 격퇴시켰으나(벽제관 전투),
행주산성에서 권율한테 또 털렸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정치와 지모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능력을
"서쪽은 타카카게에게, 동쪽은 이에야스에게 맡기면 걱정할 것이 없다." 라 평했다.
타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
임진왜란 일본 제 6군 소속
정유재란 지원군 위주 참가
젊은 시절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뛰어난 군공을 세워 '서국무쌍(西国無双)' 이라 극찬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주로 지원군으로 활약하여 벽제관 전투, 2차 진주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 각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뼛속까지 털리는 와중에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탈출을 도왔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그는 서군편에 섰기에 영지와 관직을 모두 몰수당했으나
이후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중용되어 옛 영지와 관직을 모두 회복했다고 한다.
인간됨에 있어서는 신의가 있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임진왜란 일본 제 7군 총대장
서일본 제일의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의 장손이며 모리가의 당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조카
조부 때부터 적대세력인 아마고, 오토모 가문과 전쟁을 벌여 이들을 제압하며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에서 약세를 보이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여 자신의 영지 주고쿠 6국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제 7군의 총대장으로서 경상도 침공을 담당하였으며,
이때의 공적으로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오대로' 에 임명되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참전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자신의 거대한 영지가 대부분 몰수당하거나 분산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 오대로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로(대로) 자격으로 정무에 참가하였던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간토(関東) 256만 석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 쥬고쿠(中国) 120만 석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호쿠리쿠(北陸) 및 카가(加賀) 등지 100만 석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쥬고쿠, 비젠(備前) 57만 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 키타큐슈(北九州), 치쿠젠(筑前) 33만 석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임진왜란 일본 제 8군 총대장
(겸 일본군 총사령관)
정유재란 일본 제 8군 좌대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아들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에게 깨지고,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에게도 깨졌다.
그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양아들로 삼았던 만큼 아낀 장수라 '오대로' 로 임명받기도 했으며
조선을 정복할 시, 그 통치자로 내정할 계획도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편을 들었으며, 패전 이후 유배를 당하고 여생을 궁핍하게 살았다.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임진왜란 일본 수군대장 ▶ 정유재란 일본 수군 총대장
이순신의 경험치 셔틀 1, 주군을 수없이 갈아치운 인물로 유명하다.
그 경험들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은 어록도 유명하다.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지조다."
통수의 달인이라고는 해도, 일본 내에서는 '지장으로서의 면모가 강한 우수한 무장' 이라는 평
내정, 축성, 모략, 군쟁은 물론이고, 문학과 다도 등 모든 면에서 재주가 뛰어났던 만능형 인물이다.
구키 요시타카 九鬼嘉隆
임진왜란 일본 수군 총대장
해적출신, 모리가의 수군을 상대하며 펼친 활약으로 전국시대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대형 전함인 니혼마루를 건조하였으며, 안골포에서 이순신에게 쳐발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여파로 정유재란 때 수군 총대장에서 짤렸다고 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임진왜란 일본 수군대장
정유재란 일본 수군대장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1인 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그 입지가 미묘했다.
'한산해전' 을 제외하면, 임진왜란 당시 용인 전투에서 1천 6백의 병력으로 5만의 조선군을 패퇴시킨 일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만 '불멸의 이순신' 방영 이후로 '이순신의 라이벌인 일본 제일의 명장' 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실상은 당시 참전한 일본군 중에서도 급이 낮은 영주에 속했고, '이순신의 경험치 셔틀 2' 였지만...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편에 섰다가 도중에 배신하고, 동군측에 합류해 명을 보존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임진왜란 때 군감을 맡아 일부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으나,
전술, 전략적 식견이 부족한 면모를 수차례 드러내어 정유재란 때는 행정업무를 주로 보게 되었다.
무사들 중에서는 유학적 식견이 있는 편이라 명과의 강화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섰으나 패배하고,
패배하여 처형을 앞둔 상황에서도 다음과 같은 어이없는 유언을 남겼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마지막까지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
저 말을 남기고 미츠나리는 목이 달아났다...
다테 마사무네 伊達政宗
임진왜란 제 2차 진주성 전투 참여
친모에게 소외당한 유년기와 부친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오슈 지방을 제패한 '독안룡(獨眼龍)'
그러나 이 시기 획득한 영지의 대부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무사령' 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몰수당한다.
임진왜란에 참가할 즈음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당 인원의 2배나 되는 인원을 징집하기도 했다.
당시 포로였던 조선의 의병장 강항이 쓴 '간양록' 에서는 '음흉하고 흉포한 왜장' 이라 언급되고 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진행 시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혼인동맹을 맺고, 7개국 50만 석의 봉토를 약속 받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약조를 백지화 시켰으며, 다테 마사무네 본인은 귀국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어렵사리 귀국한 이후, 치수공사를 통해 자신의 봉지인 센다이를 번영시켜 100만 석의 초거대 다이묘로 부상하며
일본제패의 욕심을 완전히 버리고,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하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보여 주었으므로
말년은 도쿠가와 막부의 원로대접을 받으며 평안히 보냈다.
※ 총무사령 : 다이묘 간 사적인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1586)
이미지 출처 : 신장의 야망 '대지'
첫댓글 와키자카는 없네여 와키자카는 상대적으로 급이 떨어지는 인물인감..
여기 인물들에 비하면 일본내에선 상대적으로 급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평이 중론입니다...
@서초패왕 항우 오호 ㅋㅋㅋ 아무래도 게임 영향 때문인지 저 같은 사람에겐 오히려 와키자카가 친숙한데 배워갑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고 불리긴 하는데... 같이 일컬어지는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이묘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 세력을 키우고자 일찍부터 키워줬던 것 뿐이죠. 불멸의 이순신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명장처럼 보는 시각이 있는데, 실상은 그냥 발에 채이는 흔한 전국시대 인물 중 한 명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Jorginho Frello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
도쿠가와도 없네용
참전 안했어요!
왜놈들
거상에 없는 장수들이 많네요
와키자카가 저글링이었던가
얼굴이 너무 서구적
일본놈들이 자국 장수들을 고평가하는 걸 보면 참..때가 이미 16세기인데 삼국지스럽게 서로 갈라져 싸우기나 하고
모리가 없나요?
7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는 그렇게 인지도가 높진 않아서 일부러 넣지 않았습니다.
@서초패왕 항우 그래도 전국시대 네임 가문인데ㅋㅋ
@모모랜드 연우 사실 쓰면서도 귀찮았...
수정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당시에도 120만 석의 초거대 영주인데 언급을 안할 수가 없을것 같네요.
그림 왜구들이 그렸나 참ㅋㅋㅋ
맞아요 ㅋㅋ 코에이 게임이에요 신장의 야망이... 삼국지 만든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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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인왕에서 본거같은데 맞나
서국무쌍
불멸에서 와키자카 비중쩔어서 메이커장순줄알았는디
세이쇼오는 그냥 책산가요 ?ㅋㅋ
사이쇼 쇼(조)타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 고문입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
투구가 걍 나 쏴주쇼구나
늑대낭인 키워서 전직시키고싶네
아 임진록 마렵다...
좋습니다!!! 분부 받습니다!! 지어!!! 짜!!!
사실 히데요시는 조선정도는 쉽게 이길꺼라 생각했는지 자기 휘하의 젊은 장수 위주로 출전시켰죠. 자기에게 위협이 될만한 네임드들은 일본 내에 대기시키고. 결과야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그것보단 네임드들 원정 대군으로 보내는데 반란 목적 회군하면 노답이라 웬만해선 젊은 애들 보냈을거임. 고려말 이성계가 딱 그 상황이였으니
ㅋㅋㅋ 도돜ㅋㅋㅋㅋ 이순신 경험치 셔틀ㅋㅋㅋㅋ
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