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욕
권 명 자
몸이 으스스하고 나른하다. 이런 날은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 서둘러 목욕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목욕탕은 붐비지도 않고 통마다 깨끗한 물이 가득가득 채워져 넘쳐나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온탕에서 담소를 나누는 서너명의 여인들의 모습이 참 여유로워 보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비누거품을 내어 대충 몸을 씻고 머리도 감는다. 타월로 머리를 감싸고 온탕으로 들어가 몸을 축 담그고 있노라니 온 뭄에 서렸던 한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술술 쏟아져 나온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아! 시원하다.' 온 세상이 다 내것인양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 문득 목욕탕에 함께 간 부자지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따끈한 탕 안에 들어가 앉아 '아이구, 시원하다'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에 멋 모르고 뛰어 든 어린아들이 '앗! 뜨거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라고 소리치며 뛰쳐 나갔다는 이야기말이다. 그 아들도 아버지 나이가 되면 그 시원함을 실감하며 그렇게 말하겠지! 살포시 웃음이 번진다.
내가 처음으로 목욕탕에 간 건 중학교 일학년 겨울방학을 충주에서 보냈을 때다. 여대생인 당고모를 따라 간 목욕탕은 별천지였다. 남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하는 난감함, 펑펑 쏟아지며 탕마다 가득 넘쳐 흐르는 아까운 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거리낌이 없고 의연하게 목욕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오직 동네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열 식구도 넘는 가족이 먹고 씻고 청소까지 하려면 물을 아껴써야하는 것은 기본이고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날이 가까우면 할머니는 길어온 물을 가마솥으로 한가득 끓여 목욕물을 준비 하시고는 부엌으로 우리들을 부르셨다. 빗장으로 문을 잠그고 큰 자배기에 준비해 놓은 따끈한 물에 들어앉혀 놓고는 물이 식을세라 서둘러 몸을 닦아 주시며 '아이구, 이것 좀 봐라 밀리는 때가 뚝다리국수가락 같다. 때가 한말은 나오네, 때 구정물이 걸어서 논 밭에 거름하면 곡식이 잘 되겠다면서 익살스레 놀리셨다. 설 무렵 날씨는 왜 그리도 혹독하게 추웠는지 목욕을 마치고 나면 입술이 새파래져 이를 딱딱 부딪치며 달달 떨면서도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맑은 물로 마무리를 하고 수건으로 몸을 감싸주시면 '아이 추워'를 연발하며 안방으로 뛰어들어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목욕을 하니 딴 인물이 나고 아주 이뻐졌다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인자하신 할머니, 어릴적 목욕을 떠올리며 그리움도 한 몫을 한다.
'목욕(沐浴)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청결하게 한다'는 뜻이며 건강과 미용 질병치료, 의식(儀式)의 수단으로 인식 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은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하며, 왕비 알영은 입술이 닭의 벼슬같았는데 북천(北川)에서 목욕을 하고 완벽한 미인이 되었다'는 기록이나 강제로 목욕을 시키는 형벌,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의 전례등은 신체의 청결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청결은 상류층 뿐만 아니라 누구나 선호하는 덕목이다. 세조의 피부병과 세종대왕의 눈병을 낫게 했다는 초정약수와 세조길의 목욕소 이야기는 씻어내고 비움으로 치유되는 진리의 길을 깨닫게한다. 제례나 치성, 모든 의식절차에도 가장 먼저 하는 건 목욕재계요, 건강과 아름다움을 위해서도 기본이 되는 건 목욕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것도 목욕이요, 일상 생활에서도, 생을 마치는 순간 까지도 빼놓을 수 없는 겻이 목욕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일렁이는 잔물결에 몸을 맡긴다. 참으로 펀안하고 꿈결같은 시간이다. 목욕은 몸도 마음도 신성하게 한다. 옷깃을 여미고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싶어진다. 청결함에서 오는 치유의 신비는 건강한 사고와 함께 격의 없이 친근감을 갖게 하는 묘약이고 매력이다. 목욕후에 다가오는 개운하고 산뜻한 이 기분을 어디다 비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