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환의 돈황벽화로 읽는 불교경전
4. 막고굴 243굴 ‘미륵상생경변도’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도솔천이 정토인 이유 ‘법·서원·사유’로 표현
미륵보살이 설법·마정수기·반가사유하는 모습 벽화에 담아
미래세 구원자인 미륵신앙 4~5세기 전란 이후 급속히 성행
도솔천 향한 열망은 불안·고단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막고굴 423굴 천장부의 미륵상생경변도. 화면은 도솔천궁에서 설법하는 미륵보살(중앙), 마정수기하는 미륵보살(우측), 좌측에 사유에 잠긴 미륵보살(좌측)의 세부분으로 나뉜다. 이것은 곧 법, 서원(=수기), 사유를 나타낸다.
막고굴 423굴 주존불. 의좌상의 형식을 통해 이 굴이 하생한 미륵불을 주존으로 하는 석굴임을 알 수 있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떴으니 이를 어찌할꼬?” 신라 경덕왕 19년(760)에 일어난 이 기이한 현상을 해결하고자 왕은 월명 스님(月明師)에게 산화공덕을 주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월명 스님은 다음과 같은 향가를 불러 이 괴이한 혼란을 해결하였다.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르며 뿌리는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 모셔라.”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이 향가를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모시고자 하는 ‘도솔가’라고 설명했다. 이 일화의 배경에 정치적 대립이 있는지 아니면 혜성의 출현과 같은 천체현상의 이변이 있었는지 논란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이 도솔가 속에 불안한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기대가 투영된 것은 명확하다.
미륵은 도솔천궁의 천주(天主)이자, 성불이 예정된 보처(補處) 보살이며, 미래세에 이 땅에 하생할 보리의 구원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과 국가가 할거하여 전란에 휩싸였던 4-5세기에 주요 경전이 잇달아 번역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미륵삼부경 중 ‘미륵하생경’(303년 축법호역)과 ‘불설미륵대성불경’(402년 구마라집역)이 미래세에 미륵의 성불을 중심으로 설했다면,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설천경’(5세기중엽 저거경성역. 이하 ‘미륵상생경’)은 미륵보살이 상생하여 머무는 도솔천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남북조 시기 돈황, 운강, 용문 등지의 석굴에는 부처, 혹은 보살로서의 미륵상이 다양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그 신앙의 열기를 가늠케 한다.
수대에 이르러 돈황석굴에는 이 미륵경전을 바탕으로 한 경변도가 출현하였다. 초기의 경변은 주로 상생경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막고굴 423굴은 당시 미륵신앙의 표현방식에 있어 조각 중심에서 경변도 중심으로 전환하는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423굴의 주실은 전체적으로 ‘인(人)’자형의 천장 형식을 갖추고, 주실의 정면(서벽)에는 감실을 내어 주존불을 모시고 있다. 주존불은 의자형의 대좌에 걸터앉은 채 시무외여원인의 수인(手印)을 취한 모습이다. 이러한 의좌불상(倚坐佛像)은 하생하여 성불한 후 중생에게 설법을 펼치시는 미륵 부처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식이었다. 감실 위로 이어진 천장부에는 마치 천상의 도솔천을 표현하듯 미륵상생경변을 그려놓았다. 이 경변은 후대에 복잡하고 세밀한 묘사로 발전한 미륵경변도들과 비교하여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었지만, 모자람 없이 경의 주요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
화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중앙을 보면 중국의 목조건축 형식으로 간략히 표현된 궁전과 누각이 보인다. 궁전의 가운데에는 보관을 쓰고 다리를 X형으로 교차한 보살이 연꽃 위에 단좌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형의 교각상(交脚像)은 도솔천상의 미륵보살을 나타내는 독특한 불상형식이다. ‘미륵상생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이 이곳 염부제에서 수명을 다한 후 도솔천에 왕생한다. 5백만억의 천인들이 신통력으로 궁전을 지어 미륵보살을 모시는데, 미륵보살은 이 궁전의 사자상좌에서 홀연 화생하여 연꽃 위에 단좌하고 도솔천궁을 주재하신다. 칠보로 장식된 도솔천궁에서는 천신들에 의해 묘한 음악, 꽃, 향기, 음성, 여의주 등 온갖 보배로운 것들로 둘러싸여 묘한 환희심이 끊이지 않는다. 미륵보살은 이곳에서 이 57억만년 간 법음으로 미혹함을 제거하고 천인들과 중생들을 제도하신다. 423굴의 미륵상생경변의 중앙의 장면은 바로 도솔천궁에서 설법하시는 미륵보살을 묘사한 것이다. 중앙에 자리한 교각자세의 미륵보살을 중심으로 보살과 천인 및 천신들이 둘러싸서 설법을 듣고, 공중에는 비천들이 악기로 묘음을 연주하고 있다.
둘째, 화면의 양쪽 끝단에는 두 보살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중 우측의 보살은 오른손을 내려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사람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 ‘미륵상생경’에서 중생들이 도솔천에 왕생하면 다시는 괴로움의 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를 얻으며, 미륵보살과 함께 하생하여 미래세의 부처님을 만날 것을 약속받는다고 설하였다. 이 장면은 곧 미륵보살이 막 도솔천에 왕생한 중생에게 마정수기를 하는 모습이다.
셋째, 화면의 좌측에 앉은 보살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걸치고 왼손을 괸 채 생각에 잠겨있다.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 반가사유상은 본래 출가하기 전의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느나 나중에 미륵보살의 상으로 그 의미가 전이되었다. 423굴 상생경변도에서는 미륵으로 표현되어 보살의 법과 자비에 대한 사유를 훌륭히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서 이 경변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법, 그 법을 반드시 깨우치고자 하는 서원(=수기), 그리고 끊임없는 사유. 석굴의 설계자는 이 세 가지야말로 도솔천이 정토인 이유라고 피력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당시에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은 보리를 위한 불퇴전의 자리이자 안락과 환희가 충만한 이상향으로 인식되었고, 대중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미륵상생경’에서는 “도솔천에 왕생하려는 자는 마땅히 한 생각으로 오직 끊임없이 도솔천을 관하고, 부처님의 금계(禁戒)를 지녀 하루 내지 7일 동안이라도 십선(十善)을 생각하고 십선을 행하라”고 설한다. 또한 당시 선풍적인 인기로 신앙을 이끌던 ‘법화경’은 말미의 유통분에서 ‘법화경’의 수지독송하면 미륵보살의 도솔천에 왕생한다고 설하였다.
법상종을 확립한 현장 역시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친견하기를 간절히 꿈꿨다. ‘대자은사삼장법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현장은 평생 미륵상 1천구를 조성하였다. 또 현장은 입적이 임박하였을 때(664), 제자들에게 ‘나무미륵불’을 염하게 하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도솔천에 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도솔천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시대의 어두움을 강렬하게 반영한다. 사회의 불안과 삶의 고단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이 도솔천을 “이곳에 없는” 유토피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월명 스님이 꽃을 던지며 미륵보살을 부른 것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결의(決疑)하고 정토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노래일 것이다.
[1622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