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민군주, 중흥군주.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을 통해 이 시대 - 작가 정윤미 |
1. 사도세자는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
창경궁 휘령전(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둔다.
"속히 이곳에 들어가거라!~"
"아바마마!~살려주시옵소서!~"
울부짖는 아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못질을 하고 있는 아버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상은 물론
오늘날에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게다가 이 비극의 주인공이 왕과 왕세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뒤주속에 갇혀 죽었다는 특수한 상황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 더 비극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
흔히들 이 비극의 발단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아들을 죽일 만한 이유가 되었을까?
사실 이 사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영조 38년 5월 22일 국청 현장.
사도세자의 비극은
'나경언의 고변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십여 가지에 달하는
사도세자의 비행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고변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곧바로 고변서를 불태워버렸다.
따라서 구체적인 고변 내용은
영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뭐라, 내 진작 이런 변이 있을까 염려했었다!~"
"네가 후궁을 죽이고 여승을 궁궐로 불러들였느냐?"
"그리고 성문밖으로 나가 놀았다는데 그것이 과연 세자가 할 일이냐?"
영조의 말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정신병 때문에 수많은 비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2.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동궁 사도세자의 편지들!~
"몰래 약을 지어 보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 보낸 친필 편지 >
과연 사도세자는 죽임을 당할 만큼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던 것일까?
일본 야마구치 <야마구치현립도서관>.
이곳에서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영조, 정조, 사도세자 3대 어필서첩>.
왕실의 전용 무늬인 용무늬로 되어있다.
이 서첩들속에서 사도세자의 편지도 발견되었다.
"동궁 사도세자가 10세 때 쓴 친필 편지입니다.
갑자년, 이 때가 혜경궁 홍씨하고 혼인을 맺은 해입니다."
편지는 세자가 10살 때 혜경궁 홍씨와 혼인한 후
처가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안부하여(安否何如)'
꽃그림이 인쇄된 고급편지지에
봉투까지 정성스럽게 제본되어있다.
사도세자의 친필편지는 모두 26통,
대부분 장인 앞으로 되어있다.
진하고 힘있는 필체가 있는 반면 흐리거나 지워진 글씨도 있다.
사도세자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장인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사적인 기록으로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편지 곳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말하는 부분이 있구요,
우리들을 오랫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
사도세자의 병세를 직접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 권두환 교수(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나는 한 가지 병이 있어 나을 기약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의 고민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사도세자의 정신병 문제가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불안과 초조함을 호소하는 불안신경증.
번개와 천둥 소리조차 두려워하는 공포증(뇌벽증).
그리고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강박증(의대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공포증, 우울증, 공항 발작, 강박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신경증이 혼합되어있는,
그리고 때에 따라서 조금씩 양상을 달리하는,
그런 신경계 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김영진 박사(신경정신과 전문의)
사도세자의 병명은
뭔가에 억눌린 심리 상태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신경증세로 발전하였다.
세자 스스로도 자신의 병세를 의식했고
이를 치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세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의원들과 상의하기를 꺼려했다는 점이다.
"열은 높고
울화는 극도에 달해
마치 미칠 듯 같습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상의할 수 없습니다."
- 1753~1755년의 편지
"그런데 병을 더 확실하게 알게 하는 구절이 그 뒤에 나오는데,
'장인 어른은 그동안 울화를 씻어내는 약재를 잘 알고 계시니까
잠시 약을 조재해서 보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런데 편지를 보내는데 다시한번 읽어봤겠지요.
그리고 사이에 '몰래잠(潛)'자를 써넣었습니다.
장인에게 편하게 약을 좀 지어주십시요 말씀을 드렸다가,
나중에 다시 보낼 때는 '남몰래 해달라'고,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부왕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 권두환 교수(서울대 국어국문학과)
3.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
크게 키우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
1735년 1월 집복현.
영조는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을 얻는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죽은 후
7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왕자의 탄생은 곧 왕권의 안정을 의미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왕통의 후계자.
더구나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이기에
세자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도 컸다.
세 살이 되던 해부터
영조는 아들의 교육을 서둘렀다.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어린 시절의 세자는 영특한 기질을 엿보여
영조를 기쁘게 했다.
"영조는 마흔 넘어 아들을 얻었으니 상당히 늦게 자식을 본거거든요.
그리고 차후에 왕위를 계승할 유일한 아들이니까
아들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 기대가 나타난 게 아들에 대한 조기 교육이지요.
두 살때 세자에 책봉하고
세 살때 서연(왕세자 교육)을 시작하지요.
세 살때 서연을 시작한 것은 유례가 없이 일찍 한 것이지요."
- 김문식 교수(단국대 문과대 인문학부)
<어제상훈(御製常訓)>
<어제자성록>
영조는 세자를 위해
직접 책을 써서 교재로 삼게 했다.
이는 조선 시대 임금 중 유례가 없는 높은 교육열이었다.
<서시춘방관>
세자를 가르치는 춘방에 걸어둔 영조의 친필 현판.
춘방관들에게 태만하지 말고
열심히 세자를 가르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영조는 종종 세자를 불러 공부한 내용을 직접 물었다.
세자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영조는 엄하게 세자를 꾸짖었다.
이 때문에 세자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아버지의 엄격한 태도 때문에 세자는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전하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고 있어 대할 때 머뭇거리게 됩니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3년 11월 11일.
영조는 왜 이렇게 엄했던 것일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
숙빈 최씨는
궁에서 청소를 하던 무수리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라는 사실은
영조에게 늘 콤플렉스였다.
왕이 된 후 영조는
숙빈 최씨의 묘호를 높이고 웅장한 신도비를 세우는 등
어머니의 위신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영조는 당초 왕위를 이을 왕세자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10년간 궁밖에서
서민들과 더불어 생활해야만 했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과
서민 생활의 체험으로 인해
영조는 남달리 신중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내가 일생에 걸쳐 노력한 것은
'근신(勤愼)'이란 두 글자다."
- <어제자성편>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강한 의지로 일관한 인물이었다.
항상 열심히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이루어냈다.
"요즘에도 특히 자수성가를 해서 자기 영역에서 확신이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똑같은 요구와 기대를 할 때 아들은 감당하기 어렵죠.
이런 아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결여되고 위축되고,
남 앞에서 활발하지 못하고,
행동면에서는 더 활발하지 못하게 되고,
나이가 들면서 신경질적인 증상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 김영진 박사(신경전신과 전문의)
능력있는 아버지의 기대는
세자에게 부담으로 작용을 했다.
성장하면서 세자는
점차 학문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조때 편찬된 중앙무예교본서 <무예도보통지>
이는 사도세자가 지은 <무기신식>이란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학문을 연마해 성인군자가 되길 바라는 영조의 바람.
그러나 세자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갔다.
"아들에게는 어쩌면 슈퍼맨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도저히 자기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고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왜소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그것이 자기에 대한 평가절하와 자기경멸로 이어졌을 것이구요.
그래서 더욱더 불안해지고 공포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 김영진 박사(신경전신과 전문의)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으로 생긴 마음의 병.
결코 표현할 수도, 풀 수도 없었던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어찌 그리 나약해서 장차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너무나도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영조.
그러나 기대가 컸던 탓에 아들은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4. 의혹투성이 사도세자의 죽음
1755년, <승정원일기>에는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
사도세자는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 발견된 그의 친필 서한을 통해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세자는 아이를 낳은 부인 혜경궁 홍씨의 몸조리를 걱정하면서
또 처가에 생일까지 몸소 챙기는 등 자상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 세자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면서도
장인에게 <남한형지> <양향군무도서> 같은
그러니까 한강 이남의 지도와
군사, 말 사료 등에 대한 책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남한형지>, <양향군무도서>를 보내 주심이 어떨는지요?"
이처럼 사도세자는 아픈 와중에도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조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영조는
부지런하고 명석했으며
학문에 정진했던 군주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백성들을 위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신문고를 부활시켜서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균역법을 실시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영조는 5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일을 했고
그래서 영조는 '중흥의 군주'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비극은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일까?
의혹 1) 고변자 나경언
실록에 의하면
나경언은
궁중별감 나성언의 형이었다고 한다.
궁중별감이라고 하면
왕이나 왕실 사람들이 행차할 때
이를 수행하며 호위하는 직책으로,
중인들이 그 일을 맡았다.
그렇다면 어떡해서 이렇게 미천한 신분을 가진 나경언이
일국의 세자를 직접 고발할 수 있었을까?
나경언의 고변 소식을 들은 영조는
곧바로 국청을 설치한다.
이때 나경언은 옷소매에 감춰둔 고변서를
직접 영조에게 바친다.
그러나 이렇게 현장에서
고변서가 전달되는 경우는 흔치 않는 경우였다.
"일반적인 죄수가 잡혀왔을 때도
소매를 풀고, 버선도 벗기고, 요대도 풀고,
이렇게 몸수색을 엄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 내용을 검토해보고
국가 기관의 정해진 절차를 따라서 보고 체계가 이루어지는데,
물론 좀더 긴급한 경우에는 좀더 빠를 수는 있지만,
나경언 사건 같은 경우를 보면
절차상으로도 굉장히 비상식적입니다."
- 김성윤 교수(경북대 사학과)
일국의 세자를 고발하는 사건임에도
기본적인 조사 절차까지 생략되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조선 시대 당쟁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대천록(待闡錄)>.
이 책에서 나경언의 의혹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경언의 신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다.
'나경언은 윤급의 옛 청지기'
윤급(1697~1770)은
당시 노론의 주요 인물.
나경언의 배후에
노론 세력이 있음을 의심케 한다.
또 다른 단서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었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8년 5월 22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경언은
댓가를 받고 고변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를 사주한 세력은 노론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의혹 2) 사도세자의 대응
"이게 과연 세자로서 할 일이냐!~"
나경언의 고변 직후부터
세자는 죄수복을 입고
대죄를 시작했다.
죄의 여부를 떠나
일국의 세자로서 고변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부덕을 자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죄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신하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영조에게 알리지 않았다.
세자가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세자는 도움을 요청한다.
"즉시 조재호를 불러오너라!~"
조재호(1702~1762)는 소론의 중심 인물.
당시 그는 춘천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재호는
세자의 도움을 요청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사약을 받게 된다.
세자와
소론 세력의 제거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의혹 3) 영조의 처분
"뭐라!~내 진작에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했었다!~"
나경언은 이내
고변 내용이 거짓이었음을 실토했었다.
일국의 세자를 모함한 크나큰 죄.
그렇다면 당연히 대대적인 배후 세력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여기서 영조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나경언이 죄를 자백했는데도
영조는 죄를 미루려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영조는 오히려
나경언의 배후 세력을 조사하라는
신하들을 꾸짖고 역정을 냈다.
"전하!~나경언을 벌 주시옵소서!~"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 된단 말이냐!~
오늘날 그대들이 당파 싸움을 이어
부당(父黨), 자당(子黨)으로 갈라섰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다 역적들이오!~역적!~"
부당(父黨).
자당(子黨).
아버지와 아들이 속한 당파가 달랐다는 뜻이다.
나경언의 고변서에는
당파 싸움과 관련된
정치적인 싸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신병 그 이상의 문제,
바로 정치적인 갈등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부당과 자당.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실 영조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
이 당쟁의 종식이었다.
헌데 왜 영조는 왜 당쟁에 대해 이처럼 민감했던 것일까?
그것은 영조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 뿐만 아니라
영조는 경종(장희빈 아들)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아들로 왕위가 계승되는 조선 왕조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고 있었다.
노론은,
후사가 없고 병약한 장희빈 소생의 경종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강행했고,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소론과의 극심한 정치적 갈등속에서
영조는 등극해야 했다.
성균관대 교정에 있는 <탕평비>.
1742년 당시 8살이었던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 세운 비다.
영조는 친히 세자에게 비문을 내려
당파에 물들지 않고 공정한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
'원만하여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벽되고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탕평.
그것은 당파에 물들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정치 대화합의 이념이다.
궁중 음식에서도
탕평을 이루려는 영조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탕평을 논하는 자리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탕평채.
탕평채는
청포에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서 무쳐내는 요리다.
가르거나 구별하지 않고
골고루 잘 섞어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탕평의 정신이다.
5. 열다섯살 대리청정. '나주벽서사건'!
"부종(不從) - 따르지 않겠다."
집요한 노론의 참소로 부자 관계는 멀어지고!~
영조는 즉위 때부터
'경종독살설'과,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 <한중록中>
창경궁은
세자가 태어난 때부터
뒤주에 갇혀 죽는 순간까지의
모든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15살이 되던 해에
영조는 대리청정을 명한다.
대리청정.
이는 왕을 대신해서 업무를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조는 인사권과 군사권 등 민감한 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사를 세자에게 맡겼다.
이로서 세자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이것은 기회일 수도 있지만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권력이든지 권력의 분화가 일어났을 때는
굉장히 미묘한 입장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데,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영조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과
세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이 조금 차이가 있고
그 다음에 정책적으로 그런 차이가 좀더 노출이 되었을 때
사실 그것을 잘 조절하는 것이 사실 세자의 임무거든요.
국왕에게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국왕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서 조절을 해나가면서
시행을 해나갔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대리청정기의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는 그런 조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 김문식 교수(단국대 문화대학 인문학부)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승정원일기 - 사도세자와 관련된 부분에서 지워진 흔적들이 발견
조선 시대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기록해놓은 <승정원일기>.
그런데 사도세자와 관련된 부분에서
지워진 흔적들이 발견됐다.
이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지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세초했다.'
- 영조 32년 3월 15일 기사
삭제된 부분은 사도세자가 죽기 8년전인
을해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55년 영조 31년 을해년 5월.
전국을 뒤흔드는 역모 사건이 발생한다.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나주객사에 걸린 한 장의 벽서.
영조와 노론 세력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곧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고
관련자들은 속속 체포되었다.
범인들은 나주에 유배되어있던
윤지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 인물들.
이들은 노론 세력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영조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그동안 탕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여전히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까지 끌어안으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던
영조의 노력이 배반당하는 순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석 달 동안 매일 친국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해옥사'라고 불리는 이 옥사를 통해
소론 인사 수 백명이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세자 중심이던 소론 세력들은 제거당하고
정국은 노론 세력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탕평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정국의 변화는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론은 이 기회에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집요하게 주장했다.
계속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부종(不從) - 따르지 않겠다."
이러한 세자의 태도 때문에
노론은 세자의 정치적 입장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노론은
세자를 겨냥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한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번안국시(飜案國是)'(<사백록> 권9 영조조)
세자가 영조가 정한 국시를 뒤집으려한다는 것이다.
"세자의 정치적인 조치는 영조 부왕의 뜻을 따랐습니다마는
그러한 계속된 정치적 공방 과정에서
노론측에서는 '번안국시'라고 하는,
영조가 구축해놓은 국시를 세자가 변경하려고 한다는
그러한 식의 모해와 공작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그 속에서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더욱 악화일로로 점철되게 됩니다."
- 김성윤 교수(경북대 사학과)
계속되는 노론의 정치적 공세에 세자에 대한 모함이 계속되면서
영조는 점점 아들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업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동궁일기(장현세자동궁일기)>는
당시 세자의 업무가 마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양연정(兩筵停) - 경연과 서연이 모두 정지됨'
정치적 보호 세력을 잃고
부왕과도 멀어지게 된 세자.
세자는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기 2년전.
영조는 처소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긴다.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부자 사이에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줄어드는데
이 무렵부터 부자는 몇달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 된다.
세자는 병을 핑계로 부왕께 문안을 피하는 일이 잦아졌고
영조 또한 세자를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인 왕과 왕세자 사이가 벌어지면
반드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기 마련,
이 기회를 통해 세자를 노리고 있던 반대 세력들은
각종 모함을 통해 부자 사이를 더욱 더 멀게 만들었다.
부자 사이에 대화의 단절.
점점 비극을 향해 치닫게 된다.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6.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부소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과연 효인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은
천고의 중요한 부분이다. 바라건대 의견을 들려 달라."
- 1762년 4월 21일자 서연강의에서 사도세자의 물음.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 <한중록>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0여 일후,
마침내 영조는 세자를 부른다
영조 38년(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 휘령전.
"자!~모두들 칼을 빼들라!~"
이때 영조는 비상시에 준하는 군사 조치를 취했다.
궁궐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신하들의 출입을 봉쇄했다.
그리고 매섭게 세자를 추긍하기 시작했다.
"정순왕후가 내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에 있다'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8년 음 5월 22일
변란이 눈앞에 다가왔다.
영조가 내건 혐의는
'세자가 변란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망하고
니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될 것이니
내 어찌 너 하나를 베지 않고 종사를 망하게 하겠느냐"
계속해서 영조는 세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종용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속히 자결하거라."
조정의 대신들조차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궐문을 걸어잠근 채 진행된 이 날의 사건.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 날의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사건 내막은 알 수가 없다.
민간의 기록들을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는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
이곳 서고에서
당시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권정침 <평암집>
당시 세자 교육관이었던
평암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平庵集)>.
이 책에 수록된 서연강의에는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까지
서연관들과 공부하고 문답했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부소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과연 효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은 천고의 중요한 부분이다. 바라건대 의견을 들려 달라."
- 1762년 4월 21일자 서연강의
"부소는
아시다시피 진시황의 태자로서,
진시황이 천하 주유중에 병을 얻자
변방에 나가 있는 아들 부소에게
돌아와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는 조칙을 내리지만,
조고가 진시황이 사사를 명한 것으로 위조하여
부소는 자살하게 되는 그런 인물입니다.
당시 사도세자가
'부소사건'을 대비해서
자기 자신의 위치라든가 그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짚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세자가 죽기 두 달 전의 일입니다."
- 김병수 박사(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
사도세자는 옛중국의 폐세자 사건을 빗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세자는 이미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치적인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죽을 죄가 있다."
"신은 죄가 많지만 죽을 죄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네가 어찌 모르느냐?
네가 세자궁 후원에 굴을 파고
상복과 지팡이를 갖다 둔 이유는 무엇이냐?"
영조는
세자가 상복을 입고
자신을 저주했다고 믿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이것이 정선왕후가 죽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해명했고
확인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영조는 오해를 풀지 않았다.
"영조가 그동안 많은 참소를 받아왔기 때문에
세자에 대한 인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으로 되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 참소 내용에는
세자가 저질러서는 안 되는 그러한 비행도 있지만,
세자가 직접 거병해서
영조에게 무력적으로 대항할 지 모른다는 그런 참소가 많았고,
일부는 저주와 같은 것을 통해서
영조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그런 참소 내용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 김성윤 교수(경북대 사학과)
을해옥사 이후 세자에게는 어떤 보호세력도 없었다.
그 빈틈을 이용해 참소는 더욱 거세졌고
이것이 부자관계를 악화시켰다.
세자의 무인적인 기질 또한 모함의 빌미로 제공되었다.
심지어 세자가 성밖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고
변란을 도모한다는 모함까지 있었다.
"세자에 대한 모함 같은 그 정치적 시도라 하는 것은
크게 보면 노론과 소론간의 정치적 알력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세자를 모함하는데 가담했던 세력을 보면은,
정순왕후(영조비) 같은 궁중 세력이 있을 수 있겠고,
김성로나 홍계희 같은 관료 세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함의 동기나 과정을 살펴보면은
김성로나 홍계희 같은 노론 세력의 주도하에서 모함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성윤 교수(경북대 사학과)
이날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너, 속히 이곳에 들어가거라"
"아바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아바마마를 살려주시옵소서"
"세손을 데리고 나가거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죽어가는 비극의 현장.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직접 뒤주에 대못을 박았다.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뒤주에 갇혀 사도세자는 죽어갔다.
"글쎄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고 할까요.
대리청정 이후에는
부자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 김문식 교수(단국대 문과대학 인문학부)
"결국 이러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상호간의 대화의 단절이 크게 작용합니다.
이러한 대화의 단절을 만들었던 것이 참소입니다."
- 김성윤 교수(경북대 사학과)
"뒤주속에 들어가라 영조가 명령을 하고, 못까지 박습니다.
다른 누구도 거기에 못을 박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누가 못을 직접 박았다가
나중에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다거나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한다거나 했을 때는
이것은 삼족이 멸함을 당할 사건이기 때문에
결국 못을 박는 것은 영조 자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것이죠."
- 이덕일, 역사저술가
8일 밤낮을 뒤주에 갇힌 채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사도세자는 죽어갔다...
7.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
세자가 죽어가던 그 시간
노론 대신들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호를 회복시키고 장례를 치뤄줬다.
영조가 친히 쓴 사도세자묘비명.
'사도(思悼)' ...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들을 죽인 이유와 함께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다.
"내가 13일의 일을
어찌 좋아서 하였으랴?"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는고?"
종사를 보존하기 위해 아들을 죽였다는 영조.
과연 역사는 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검소하고 성실했으며 부단히 학문에 정진했던 임금 영조.
백성의 고통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애민군주 영조.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영조는 어떠했을까?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누구보다 기대가 컸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였다.
영조는 훗날 사도세자에게 내린 처분을 후회하며
이렇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만일 영조가 아들을 조금만 더 믿었더라면,
아들에 대해 조금만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들을 사랑하셨다면서 너무 엄하게 대하신 것은 아닙니까?"
"내 나이 마흔 넘어 얻은 혈육이라오."
"차라리 세자에게 정치를 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요?"
"........."
"지금 그 때의 처분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 한국사 전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