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타계하기까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마왕』을 비롯한 걸작 소설들과 『짧은 글 긴 침묵』『예찬』『외면일기』 등의 산문집을 선보이며 프랑스 최고 작가이자 유럽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혔던 투르니에가 사진 역사에서 중요한 봉우리를 차지하는 에두아르 부바와 함께 펴낸 이 책은 역자인 김화영 교수가 파리의 중고 서점에서 발견하자마자 단숨에 읽고 번역을 결심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 번역의 오류들을 꼼꼼히 바로잡은 것은 물론, 시대 흐름에 걸맞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까지 세심히 다듬어 투르니에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젊은 독자들도 글의 뉘앙스와 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 모습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이 작은 책이 탐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등 뒤의 진실이다. _본문에서
사진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한순간 정지시킴으로써 익숙하기 그지없던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 그 이미지 뒤에 숨겨진 사연을 상상하게끔 한다. 사진은 분명 인간이 개발해낸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강력한 언어이다. 앙상한 몸으로 쟁기를 지고 가는 농부, 황량한 바닷가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중년 여인, 엎드려 기도하는 신자들, 파도를 바라보는 가난한 연인, 아이를 품에 안고 선 어머니, 키 큰 어른들의 어깨 저 너머가 너무나도 궁금한 어린 천사,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등 굽은 노인, 쓰레기로 가득한 파리의 거리 등, 이 책에는 사람과 세상의 ‘뒷모습’을 포착한 에두아르 부바의 흑백사진 50여 점이 실려 있다. 그리고 미셸 투르니에는 거장다운 상상력과 깊이 있는 통찰을 발휘해 각각의 사진들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를 풍부한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전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뒷모습은 정직하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쓸쓸하지만 한없이 아름답다. 부바와 투르니에는 카메라 렌즈에 비친 ‘뒷모습’을 통해 삶과 인간, 사랑과 우정, 신앙과 우주에 대해 성찰하고 서로 교감한다. 그리고 세상의 진실은 거짓으로 꾸밀 수 있는 앞모습이 아니라 뒤쪽에 있다고, 뒷모습을 통해 우리는 심층적인 내면에 이를 수 있다고 결언한다. 새 번역으로 재탄생한 『뒷모습』은 앞선 20여 년간 그러했듯 새 시대의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사진과 글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인간과 삶, 세상과 사회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충만한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이제 이 책 위에 내려앉은 세월의 먼지를 털고 투르니에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텍스트를 완전히 새롭게 번역하여 새로운 독자들에게 내보낸다. 이 책을 처음 펴낼 때를 전후한 10여 년간 내가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슈아젤로 찾아가 만나곤 했던 작가 미셸 투르니에 씨는 4년 전인 20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친절하고 유머 넘치던 그의 웃는 얼굴도 ‘뒷모습’이 되었다. _2020년판 새 번역에 부쳐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 모습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_5쪽, 「뒤쪽이 진실이다!」
저들 어른들은 대체 무얼 보고 있기에, 저토록 심각한 것일까? 그 무슨 속된 구경거리에 저토록 절박하게 팔려 있기에, 저들은 단 하나 중요한 것을, 잊혀진 채 무시당하고 뒷전이 된 이 어린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여러 번 어리석은 즐거움들을 좇아 무작정 달리곤 하는가, 우리를 기다리는 천사가 등 뒤에 와 있는데.
_32쪽, 「잊혀진 천사」
풀베기의 경쾌한 만족감. 리듬의 맛,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흔드는 두 팔-한편,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반대로 움직여 균형을 잡는 몸-
풀베기 연장의 날이 꽃과 꽃받침과 줄기들의 무더기 진 풀 더미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화본과 식물의 연한 살을 싹둑싹둑 잘라내어 왼쪽에 깔끔하게 쌓아놓으니,
뿜어져 나오는 그 분비액, 수액, 그리고 유액의 세찬 신선함-그 모든 것이 자아내는 단순한 행복, 내 그 맛에 여한 없이 흠뻑 취하노라.
_46쪽, 「풀베기」
돌연 대지가 생기를 띤다, 번뜩인다, 노래하며 하늘도 조금 반사한다.
샘물이 솟아난 것이다. 물은 대지의 시선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물의 전능한 부름에 몸뚱이들이 복종한다. 몸뚱이들은 흐르는 원소 앞에 경배하며 넙죽이
엎드린다. 작은 손들은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된다. 입들이 긴 입맞춤을 갈구하며 앞으로 뻗는다. 물은 차디찬 뱀이 되어 온몸을 타고 내려간다.
_54쪽, 「흐르는 물」
나 죽거든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활기 넘치는 어느 뜰 안에 묻어주고, 산책자의 관심을 끄는, 보기 좋고 기발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덮어주기 바라오. 나의 배 위에서 약사의 헌 신발이나 카드점 치는 여자의 슬리퍼 끄는 익숙한 소리, 어린 사내아이들 맨발이 찰싹대는 소리, 줄넘기 돌차기 놀이 하는 어린 계집아이들 신발 부딪는 소리를 나는 듣고 싶소.
_58쪽, 「발소리」
첫 번째 키워드 - 쓸쓸함
말해봐요, 할머니, 그렇게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땅바닥에 떨어뜨린 젊은 날을
줍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등을 짓누르는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인가요?
-본문 중에서
구부정한 등을 보이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가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다. 검은 상복을 입고 옆구리에는 회양목 가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인 듯. 햇살은 따뜻하고 수풀이 우거진 길은 고즈넉하다. 보고 있으면 문득 슬퍼진다. 아, 너무도 쓸쓸한 당신.
두 번째 키워드 - 골똘함
정오의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나른한 무기력, 삼라만상 속의
약간 쓸쓸하면서도 낙관적인 행복감, 그런
모든 것을 두고 어찌 한동안 짧은 명상에 잠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문 중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골똘하다. 비록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뒷모습은 그가 나른한 명상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벤치 한 구석에 방치된 책이 심증을 굳혀준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가. 아무것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골똘함은 결코 칙칙하거나 무겁지 않고, 고독마저 달콤해 보인다.
세 번째 키워드 - 행복
가난한 사람들은 수줍다. 추위를 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첫날처럼.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여자는 치마를 약간
걷어 올리고. 그러나 이 즐거움과 정다움이 이 한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들어놓는다.
-본문 중에서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연인의 등은 사랑스럽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렇게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 속의 남녀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부자들이라면 아예 수영을 할 것이기에.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남루함 때문에, 그들의 행복은 더욱 빛이 난다. 이 커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네 번째 키워드 - 비밀
모든 강렬한 감정이 다 그렇듯이
우정은 사회의 박해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 우정은
타인들에게 들을 돌리는 방식에 의해서 그 본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낸다.
-본문 중에서
타인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는 이기적이다. 그것은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서로 팔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어린 소녀들의 뒷모습은 깜찍하면서도 은밀하다.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들을세라 꼭 붙어서 가고 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태세다. 우정은 이렇게 정겨우면서도 배타적이다. 뒤통수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다섯 번째 키워드 - 반전
파리? 파리라면 에펠탑이지! 샹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런데 쓰레기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본문 중에서
이 사진의 제목은 ‘등 뒤에서 본 파리’.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배신감에 치를 떨 법도 하다. 에펠탑과 쓰레기 더미가 공존하는 이 노골적인 풍경은 파리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가차 없이 뭉개버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 넝마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거리 역시 낭만의 도시 파리의 엄연한 일부분인 것을. 아마도 뒷모습이 흥미진진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그 이면에 항상 반전의 여지를 숨겨 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덜 보여줌으로써 조금 더 상상하게 만드는 힘, 바로 뒷모습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는지.
뒷모습의 존재는 참 불가사의하다. 분명히 자신의 일부인데, 만지지도 확인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 언젠가 사진에 찍힌 내 뒷모습을 보고 흠칫 놀란 적이 있다. 너무 낯설어서였다. 분명 내가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이 낯선 느낌은 아마도 익숙한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아찔한 간극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앞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뒷모습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묘한 정서들이 있는 것이다. 『뒷모습』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 나의 분위기와 마주한다는 것은 조금은 두렵고 낯선, 그러나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흥미로운 경험이다. 당신의 뒷모습은 어떠한가?
사진 속의 이 다양한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삶의 앞모습을 만나면 즐겁다. 그러나 그 즐거움의 배경에 오래 지워지지 않는 뒷모습들이 더러 있다. 이것이 바로 미적 균형이 아닐까. 에두아르 부바와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에는 우리의 눈높이를 올려주는 그 같은 미적 균형이 있다.
-김화영, ‘문득 걸음을 멈춘 존재의 뒷모습’(역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