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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삼손의 후반전
삿 16:21-31
지난달 4월 11일, 캐나다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 3000m 계주 결승 레이스에서 두 바퀴를 남기고 3등으로 처진 한국. 최종 주자로 나선 만나교회에 출석하는 최민정 선수는 이를 앙다물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습니다. 직선 주로에서 1·2위 선수들이 서너 걸음 달릴 때 최민정은 잰걸음으로 7번이나 스케이트를 지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코너에서 둘을 따라잡았고 눈 깜짝할 새 1위로 훅 들어왔습니다. 한국 4분9초683, 캐나다 4분9초717, 네덜란드 4분9초779. 1·2위 격차가 0.034초, 스케이트 날 하나 차이였습니다. 순식간에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최민정 3000m 계주에서 대역전 레이스를 펼쳤다. 막판 힘내기로 우승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마라톤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려면 ‘마지막 골인’을 잘해야 합니다. ‘끝판 힘내기’ 또는 ‘막판 힘내기’를 잘 해야합니다. 마라톤의 마지막 목표점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라톤 선수들은 아무리 초반에서 잘 달렸어도, 이 마지막 골인에서 실패 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적인 위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마치기 전, 남은 여생을 허비하거나, 또는 반대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히려 인생의 후반부에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왕성한 연구나 사회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골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대한 최종평가도 크게 달라집니다.
1. 삼손의 마지막 후반전
지난 수요예배 설교에 이어서 삼손은 건달 같았지만, 이스라엘의 마지막 12번째 사사요 민족을 사랑하는 나라의 영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가장 큰 적이 블레셋이었습니다. 삼손의 적수도 블레셋이었습니다. 삼손 기사는 사사기 13~16장에 걸쳐 있는데, 삼손의 출생기와 성장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완전히 눌려 있었습니다. 삼손의 단 지파는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자식도 없었습니다. 마노아의 인생 자체가 이스라엘의 축소판처럼 하나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아들 수태를 고지하면서 태어나면 나실인으로 살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술과 여자를 찾아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역에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여자 들릴라에게는 자신의 머리카락 비밀까지 가르쳐주고, 결국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엄청나게 죽이게는 되었지만, 그 끝에 자신도 죽습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모조리 어기면서 제멋대로 살다가 죽은 것이죠. 그러나 그 어두운 때에 하나님은 이 제멋대로인 나실인 삼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해방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신앙이 그렇게 좋지도 않았습니다. 기회만 되면 부패의 냄새가 나는 블레셋 사람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선사합니다. 본문 16장 30절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사사기 14장 4절에서 삼손의 이 모든 행적이 하나님 뜻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은 어둡고, 그 백성 중에 어려움을 해결할 만한 인물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방탕한 사사 삼손을 들어서 백성의 숨통을 틔워주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삼손은 ‘인생의 마지막 사명’에 최선을 다 합니다. 모든 소망을 잃고, 두 눈을 뽑힌 채 감옥에서 처량하게 맷돌을 돌리던 삼손이 자신의 남은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삼손이 과연 성공한 영웅인가, 실패하고 타락한 인물인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인생의 마지막 사명를 다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인생 후반전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중한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혹시 오늘 이곳에도 ‘나는 이미 끝났다!’며 절망하는 분이 있습니까?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다며 자포자기하는 분이 있습니까?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인생의 마지막 승리를 하는 삼손을 보면서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2. 살아있음이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떠나신 후,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끝 모를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삼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 힘겹게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삼손이 비참한 모습으로 맷돌을 돌렸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절망의 시간이 사실상 회복의 시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사사기 16:22). 사실 삼손의 머리털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을 내는 원인은 아닙니다. 다만 삼손의 머리털은 ‘하나님과 삼손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삼손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자라는 동안, 삼손은 많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여인의 배신과 블레셋 사람들의 심한 고문 때문에 분노가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삼손은 이 모든 것이 교만하고 방탕했던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철저히 회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육체의 눈이 뽑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가 ‘살아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당시의 수치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선택했더라면, 그에게는 회개도, 회복도, 소망의 기회도 생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힘만 세고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한낱 이스라엘의 건달꾼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하루 빨리 잊고 싶은 수치스럽고 불쾌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경제적 불황이 장기화 되면서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상류층들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학업 스트레스와 학교 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마치 자살이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자살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아닐뿐더러,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기는 길입니다.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들의 명예조차 온전히 회복될 길이 없습니다. 살아있어야 진정한 회복의 기회도 생깁니다. 살아있어야 새로운 소망과 가능성도 생깁니다. 살아있어야 세상의 온갖 부정의를 몰아내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바꿀 일꾼도 생깁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이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살아있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도서 9:4). 그렇습니다. 밀림의 왕 사자도 일단 죽으면 살아있는 똥개보다 못한 법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3.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이 견뎌내야 했던 치욕과 수모는 두 눈이 뽑힌 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 ‘다곤’이 원수 삼손을 이기게 해주었다며, ‘다곤’을 위한 큰 축제를 열었습니다. 한창 축제의 흥이 돋았을 때, ‘다곤’ 신전에 모여든 수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천지원수였던 삼손을 불러내어 놀잇감을 삼자고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그들 앞에 끌려 나온 삼손을 향해, 그들은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우스꽝스러운 ‘쇼’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삼손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자신을 이끌던 소년에게, 자신을 ‘다곤’ 신전의 중심기둥으로 인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즉 삼손은 ‘다곤’ 신전을 떠받드는 중심기둥들을 무너뜨림으로써 그 안에 들어온 모든 블레셋 사람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품었습니다. 그것이 삼손이 그 당시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던 예수님께로 몰려 들자 다양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식량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천 명의 군중들을 인근 마을로 흩어 각자 식사를 하게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가복음 6:37)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말도 안 된다며 아우성치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마가복음 6:38). 그러자 제자들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나누기 시작하자 성인 남성만 5천 명이 식사를 했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장 그곳에 있는 것’을 점검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문제를 만나면 침착하게 ‘현재의 최선’을 찾기보다,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거나 암울한 현실을 놓고 불평만 터뜨립니다. 우리가 당장 해야할 일은 ‘현재의 최선’을 찾는 것이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비되면 좋겠지만 어차피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나는 현재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지금 현실에 없거나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놓고 쓸데 없이 힘만 빼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길부터 찾기를 원하십니다.
4.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마침내 삼손은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로 웅장했던 ‘다곤’ 신전의 2개의 중심기둥들을 두 손으로 붙들고 섰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그 기둥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에 대하여,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기둥을 밀며 낑낑대다가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더 큰 조롱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간절히 기도한 후, 삼손이 기합을 주며 거대한 중심기둥들을 밀자, 그 기둥들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삽시간에 ‘다곤’ 신전 건물 전체가 그 곳에 모인 무리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바람에, 지붕에만 3천 명이 모일 정도로 인파가 몰렸던 ‘다곤’ 신전은 순식간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 곳에는 블레셋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도 대규모로 참여했었는데, 그들도 함께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삼손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 삼손 때문에 죽은 블레셋 사람들의 숫자가 삼손이 그때가지 죽인 블레셋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았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민족을 외적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임무를 지닌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생 최대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고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 한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어떠한 결과를 주시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후, 간절히 기도하며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더니 하나님은 그의 인생 중 최대의 업적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사사기 16:31).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조상의 묘에 장사되는 것을 중요한 영예와 복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성경은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20년 동안 봉직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록합니다. 이것은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최종적으로 인정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삼손은 그의 최후 업적을 통해 잃었던 과거의 명예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삼손이 원래 계획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도하며 최선을 다한 삼손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5. 최선을 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한 후에는 불안해 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걷는 인생길의 방향과 끝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문제투성이 삼손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스스로 방심한 결과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다시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하며, 또 다른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후반전의 승리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대에 도달하기 직전, 그 어둠을 홀로 밝힌 빛이 삼손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패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했습니다. 28절에 삼손의 부르짖음이 훨씬 더 잘 이해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이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강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도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삼손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까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의 선한 일에 쓰임 받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사용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마지막 까지 내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마음에 품고, 이 지역과 주님의 몸된 교회과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복음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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