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 천호당약국 이광재(헨리코)씨 부부
초로의 아낙이 허리춤에 소쿠리 끼고 아리랑 가락처럼 휘감아도는 황톳길을 걷는다. 늦봄 들판에 지천인 냉이와 쑥 캐러 가는 모양이다. 차창 너머로 올려다본 하늘도 산들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연초록 들판을 닮았다.
충복 영동군 학산면 삼거리. 천호당약국 이광재(헨리코,74)ㆍ임복신(골룸바,72) 부부가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웃는 모습이 영동으로 접어드는 길가의 싱그런 들녘을 쏙 빼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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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당약국 주인 이광재(헨리코)ㆍ임복신(골룸바) 부부가 마을 주민과 정담을 나누고 있다. 이씨 부부는 43년간 이 약국을 지키며 선교사로 살아왔다. |
#43년 산골 약사생활
"뭐 볼 게 있다고 이 먼 산골까지 내려왔대요. 이왕 걸음했으니 맘 편히 점심이나 잡숫고 올라가세요."
순박한 표정이 한눈에 봐도 법 없이 살 사람들이다. 주민 3000여 명인 학산면에는 병원이 한 군데도 없다. 주민 수가 많을 때는 1만 명에 달한 적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픈 사람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천호당약국밖에 없다.
천호당(天護堂)은 '하느님께서 보호해주시는 집'이란 뜻이다. 약국 한 쪽에 긴의자가 서너개 놓여 있는 것만 봐도 산골 주민들 사랑방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이씨 부부는 43년째 이 약국을 지키고 있다.
"옛날에는 다들 돈이 없으니까 외상약을 많이 갖다 먹었어요. 사정 뻔히 아는데 약값 달라고 재촉할 수도 없고…. 몇 년에 한 번씩 외상장부 찢어버리는 게 일이었어요. 요즘은 '외상약 먹으면 병이 안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 외상은 없어요."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부부의 말마디에서 넉넉함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베풀며 사는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넉넉함이다. 그런데 이씨는 약사보다 '회장님'이라는 칭호가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43년 전 학산에 들어오기 전부터 공소회장으로 살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도 '회장'(학산본당 평협회장) 직함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늙은이가 회장을 맡고 있으면 본당이 늙어지기 때문에 빨리 후임자가 나타나야 한다"고 걱정했다.
# 강서와 학산의 '신앙 모퉁잇돌'
이 회장은 충북대 약학과 재학 시절, 메리놀외방전교회 주은로(M.Zunno) 신부를 만나 인생 행로를 바꿨다. 당시 오송본당에서 사목하던 주 신부는 약혼녀를 데리고 인사온 그에게 "충북대 근처 강서지역에 공소를 낼 생각인데, 결혼하면 그 공소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례를 받은 후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는 성실한 약학도를 눈여겨 봐둔 모양이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가겠다"고 했다. 약속대로 강서에 집을 얻어 이불보따리 신접살림을 풀고, 공소 현판을 내걸었다.
"강서에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어요. 자전거 타고 산골 구석구석까지 열심히 사람들을 찾아다녔지요. 새신랑이 학교 공부하랴, 예비신자 교리공부시키랴, 주일이면 공소예절 인도하랴 정말 바빴어요."
부인 임씨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에도, 교리서 「요리문답」을 사다가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왜 책값을 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책장수처럼 보일 것 같아서"라며 수줍게 웃었다. 임씨의 후한 책 인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구입해 둔 예비신자교리서와 신심서적이 약국 뒷방에 한가득이다.
"손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느낌이 와요. 그럼 예비신자교리서를 꺼내다 건네요. 신자들에게는 성인되라고 성인전을 주로 선물하구요."
이 회장이 추억 한자락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 가난했어요. 한겨울에 나무 사다 땔 돈이 없어서 냉골에서 지냈는데, 밤중에 어찌나 춥던지 밖에 나가 손으로 마른 풀을 긁어다 땐 적도 있어요. 그래도 집사람은 신자들과 콩농사 짓고 빈병 모아 팔아 종탑을 세웠어요.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들에서 일하는 주민들이 삼종소리를 듣고 밥 때를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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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이 회장(뒷줄 왼쪽) 인도로 세례를 받은 강소공소 신자들. |
이 회장은 1967년 학산으로 이사왔다. 영동본당에 부임한 주 신부가 천주교 불모지 학산에 '신앙의 모퉁잇돌'을 놓아달라 다시 한 번 부탁한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약국을 열어 형편이 좀 나았어요.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타고 전교하러 다녔으니까. 저 너머 양산면 주민들도 이 약국을 이용하니까, 사람들 만나기가 참 좋아요. 손님의 사돈팔촌이 종교를 갖고 싶다는 얘기만 들려도 달려갔어요. 한 영혼을 하느님께 데려가는 일인데 얼마나 신났겠어요."
이 회장은 "인근에 의사가 없어 예전에는 임종을 지키며 대세(代洗)를 숱하게 줬다"며 "이 또한 산골 신자 약사의 보람"이라고 말했다.
# 내 손으로 어떻게 감옥에...
이 회장은 사람 좋다보니 30여 년 전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 어느 교우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법원에서 재산압류 통보가 날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법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그 교우를 (감옥에) 잡아 넣어야 돈을 건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순간 큰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 회장은 "감옥에 갇힌 사람을 꺼내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내 손으로 잡아 넣을 수 있겠는가…"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엄습한 통증이 심장병 징후였다. 심장병은 당시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그래도 이 회장은 위기 때마다 기적처럼 일어나 전교회장, 교리교사, 공소회장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1990년대 중반,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현 서울대교구장 추기경)는 이 회장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학산공소에 감동해 전격적으로 본당 승격을 허가했다.
"우리 부부는 오뚝이 인생이에요. 그리고 재벌 부럽지 않은 부자입니다. 여기서 자식 5명 대학공부시켰지, 주위에 정든 형제자매들 많지…. 뭐 부러울 게 있겠어요."
이 회장 부부는 딸 하나를 하느님께 봉헌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영혼이 맑았던 딸은 지금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서울관구)에서 수도자로 살아가고 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천호당' 새 주인을 찾습니다
이 회장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작년에만도 3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이 회장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식들이 사는 대전이나 큰 병원 근처로 이사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약국 때문에 선뜻 떠날 수가 없다. 자신이 그러했듯, 천호당(043-743-6021)을 선교 사랑방이자 주민들 쉼터로 운영할 신자 약사가 나타나기 전에는 마음 편히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주민들이 느끼게 될 빈자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의사협회보에 광고를 내면 인수 희망자를 금방 찾을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않아 하느님께 후임자를 보내달라고 청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곳은 의약분업 예외지역이라 의사처방 없이 약을 조제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주민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그간 자신이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베풀면서 살아가고 싶은 신자라면 걱정 없이 넘길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여기서는 먹고 살만큼은 벌지만 큰 돈은 못 번다"며 "대신 산과 물, 인심이 좋고 무엇보다 신앙공동체(학산본당) 형제애가 좋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