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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표지석이 반긴다.
소안도는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된 사람이 800여명이나 됐다.
일제는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사람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며 그렇게 불렀다.
소안도(所安島)는 전남 완도군 소안면에 속한 섬으로 면적 23.16㎢, 해안선의 길이는 42㎞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 지점에 있고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인접한 보길도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이루고 있다.
팔각정자인 학운정(鶴雲亭)은 우리면 출신이신 김종식 완도군수님께서
2009년 4월 소안 가학산 탐방로개설사업을 실시 하시면서 설치한 소안 名山 가학산의 제1정자로서
소안면민은 물론 이곳을 찾아오는 전국의 탐방객에게 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휴식공간과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한 쉼터이자 관광시설이다.
우리지역은 옛날부터 아름답고 살기좋은 편한한 섬이라 하여 소안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가는곳 마다 천혜의 기암괴석과 빼어난 절경이 있어 소안8경과 함께 자랑거리인 학령귀운(鶴嶺歸雲)이 있었으니!
가학산 이 고개에 나래펼친 고운자태 천년학의 발 아래로 하얀솜털 실구름 한타래가 산허리를 휘감아 되돌아 오는구나?
이곳이 천상의 세계와 통하는 곳이요, 신선이 쉬어가는 아름다운 곳 그 아니겠는가!
이 기막힌 아름다운 모습을 옛선비들은 학령귀운이라 이름하여 소안 8경의 하나로 소안면의 역사와 오늘을 함께하고 있는 바,
그 네글귀 중 학(鶴) 자와 운(雲) 자를 가져와 이 정자에 걸어놓으니 이것이 바로 천상천하에 제일가는 학운정이라!
본 정자 현판의 글은 당대 완도 제1의 서예가이신 완도문화원 서예원장 능재 임주섭 선생께서 주셨으며,
현판은 조정석 소안면장과 황영우 소안학산산악회회장께서 협찬 제작해 주셨다.
이곳을 방문하신 탐방객 여러분께서는 본 시설물을 내것처럼 아끼고 사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학산(駕鶴山)은 전남 완도군의 소안면 가학리 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해발 359m).
소안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곳에서 발원한 계류천들이 흘러 남측 산록의 소안저수지로 유입한다.
저수지는 해안에 입지한 미라리(美羅里)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미라리 지명은 아름다운 경치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미라팔경(美羅八景)이 있다.
북측 사면의 말단부에 있는 가학리는 17세기 초계인 최씨와 창원 황씨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전해진다.
지명은 산의 형세가 학을 닮았으며,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소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송내호 선생의 호(號)인 '해도(解濤)'에서 유래했다.
'해도'는 '큰 물결을 헤친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그의 고향에 세워진 정자다.
송내호는 1895년 소안도에서 태어나 1914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뒤에 소안도에서 교사로 일했다.
1920년 11월 무장투쟁 단체 대한독립단 조직책임자,1922년 말 반일비밀결사단체 '수의위친계' 결성을 주도했다.
1926년 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1월 소안도에서 청년비밀결사 '일심단'을 조직하었다.
1927년 수감 중 폐결핵으로 병보석되어 치료 중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 헌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우리면 출신이신 김종식 완도군수님께서 2009년 4월 소안 가학산 탐방로 개설사업을 실시하시면서
소안 名山 가학산(駕鶴山)의 제2정자로서 소안면민은 물론 이곳을 찾아오는 전국의 탐방객에게 보다 안전하고
평안한 휴식공간과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한 쉼터이자 관광시설이다.
소안면은 일제강점기 일경(日警)의 잔악한 총칼앞에 굴하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앞장서 전개했던
역사적인 항일운동의 성지이며, 독립운동을 앞장서 전개하시다 애석하게도 요절하신 대한민국 만고의 충신이요
독립운동가이신 송내호 선생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해도정(解濤亭)의 명칭은 선생의 호인 解濤와 같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자세의 염원을
태평양을 헤쳐 세계로 향하는 독립운동가의 진취적인 기상을 세세만년 이어가고자
소안 가학산에 제2정자의 명칭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본 정자 현판의 글은 당대 완도 제1의 서예가이신 완도문화원 서예원장 능재 임주섭 선생께서 주셨으며,
현판은 조정석 소안면장과 황영우 소안 학산산악회장께서 협찬 제작해 주셨다.
이곳을 방문하신 탐방객 여러분께서는 본 시설물을 내것처럼 아끼고 사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사도(唐寺島)는 신라 시대에 청해진이 설치되었을 때
날씨가 좋지 않으면 당나라 배들이 이 섬에 상륙해
무사고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던 암자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으며,
원래 이름은 자지도(者只島), 항문도(港門島)로 부르다가
어감이 좋지 않아 1982년 당사도(唐寺島)로 개칭하였다.
자지도는 섬이 只자 모양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
두 마리 까치를 닮았다는 뜻의 작이(鵲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항문도는 제주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입구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은 소안도 항일운동의 시작점이다.
1909년 일본은 본국을 향해 먼 바다로 나가는 상선을 돕기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세웠다.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를 비롯한 5명은 일본 선박의 남해 항로를 방해하기 위해
거친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당사도등대가 생긴 지 불과 2개월 만이다.
당시 불빛을 밝히던 등명기를 파괴하려 했지만, 너무 단단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등대 주변에는 당사도등대 습격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항일전적비와
광복 후 파괴된 등대원추모비 일부가 역사의 증인처럼 오롯이 서있다.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린다.
세 지역은 지속적이고 다양한 항일운동을 펼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안도에서는 평화적 시위와 무력 항쟁, 교육 운동과 노농 운동, 비밀결사와 법정투쟁,
섬 주민의 자발적인 학교 설립 등 일제강점기 내내 다양한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비롯해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이 대표적이다.
완도 본섬에서 한참 떨어진데다 인구가 6000여 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 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을 배출한 항일운동의 성지이다.
소안도 항일운동 기념탑이 비자리에 처음 세워졌다. 섬사람들이 직접 다듬었다.
검정 돌은 일제 암흑기, 흰 돌은 광복된 세상을 상징한다.
가학리에 새 기념탑과 기념관도 들어섰다.
섬사람들의 항일정신이 오롯이 밴 옛 소안학교 자리다.
기념관에는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21명의 흉상과 함께 존영이 모셔져 있다.
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만들어져 있다.
소안도의 항일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맹선리 짝지에 막사를 짓고 고기 잡던 일본사람을 섬주민들이 쫓아냈다.
동학혁명 땐 소안도가 농민군 훈련소였다.
섬에 접장을 둘 정도로 동학을 믿고 따르는 주민이 많았다.
1894년 12월 동학 지도자 이강욱, 나민홍, 이순칙 등 7명이 이 섬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곳으로
독립군자금 모금과 노동사,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고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 애국선연들의 항일 투쟁정신을
후손에게 역사의 교훈을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한 현충시설로 소안노인회와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전 면민의 불꽃같은 성원으로 건립하였다.
민족해방의 성지 소안에 1990년 6월 5일 소안면 비자리에 세웠던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의 뜻을 이어 받아
예사 사립소안학교 터에 사립소안학교 복원,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을 한 데 모아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후손들에게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공원화를 조성하였다.
소안도 주민들은 1919년 3·1운동에도 일찍 참여했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이었다.
소안도 주민 송내호, 정남국 등이 주도해 3월15일 완도읍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만세시위(4월1일)보다도 보름이나 빨랐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100여년 전의 일이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1910년 8월29일) 이후 항일운동은 더욱 활발했다.
1909년부터 13년 동안 친일파 이기용에 넘어간 토지소유권 반환 요구 투쟁에서 승리했다.
1913년엔 서당을 통·폐합시켜 신식 교육기관인 중화학원을 설립했다.
비밀 항일단체와 배달청년회도 결성했다.
1921년 토지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주민들이 사립 소안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1만454원을 모았다.
현 시세로 1억원이 넘는다.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결과다.
주민들은 1923년 소안학교를 세우고 학생 270명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일본이 세운 공립학교엔 일본인 자녀 등 30여명이 다녔다.
소안학교에는 완도·해남은 물론 멀리 제주에서까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
소안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이시완은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그만두고 교사로 일했다.
소안학교는 일제의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한다는 등의 이유로 강제 폐교 조치했다.
‘떠난다 떠나간다 나는 가노라/ 새원의 꽃 동무를 남겨두고서/ 삼추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쇠뿔을 못 이겨서 나는 가노라/ …(중간 생략)…
소안의 뭉게뭉게 피는 꽃송이/ 한 말씀 드리노니 새겨 두시오/ 아무리 악풍폭우 심할지라도/
임 향한 일편단심 변치 마시오.’
이시완이 글을 쓰고 음률을 붙인 ‘이별가’의 일부분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즉시 복교운동에 나섰다. 섬주민 1000가구 가운데 800가구가 참여했다.
일제 경찰로부터 보안감시 대상인 ‘불령선인’으로 불리며 온갖 감시와 고초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
섬에 남은 사람들은 잡혀간 이웃을 생각하며 겨울에 이불을 덮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사람한테는 불씨도 나누지 않았다.
경찰과는 말도 하지 않는 불언동맹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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